아키에이지 워, 다가올 전쟁에서 나름의 답을 찾길
얼마 전, 엑스엘게임즈 <아키에이지, ArcheAge>’가 10주년을 맞았다. <리니지>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송재경과 인기 소설가 전민희 합작으로 화제를 모은 <아키에이지>는, 당대 BIG3 타이틀 중 필두로 꼽히며 국산 PC 온라인 게임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다. 비록 적잖은 기간 동안 서비스를 이어오며 말도 많고 탈도 많았으나 여러 선구적인 시스템과 심도 깊은 콘텐츠는 지금 봐도 여전히 훌륭하다. 그렇기에 지난해 <아키에이지 2>와 <아키에이지 워>가 공개되었을 때 설렘과 불안이 교차했다. 같은 게임사, IP임에도 두 작품의 무게감이 자못 달랐기 때문이다.
‘War’라는 부제에서 보듯 <아키에이지 워>는 대규모 유저간 경쟁을 핵심 콘텐츠로 내세운 모바일(PC 클라이언트도 지원하지만) MMORPG다. 원작부터 동대륙과 서대륙의 RvR 컨셉이 존재했으니 전쟁 자체가 낯설다는 건 아니다. 다만 작금의 모바일 게임 가운데 소위 ‘쟁’ 게임이란 분류가 주는 인상은 그 시절 <아키에이지>와 전혀 다르다. 앞서 엔씨소프트가 <리니지> 시리즈를 모바일로 옮겨오며 공고히 한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아사리판서 과금이 발생하는 구조를 여러 후발주자가 답습할 뿐이니까. <아키에이지>와 ‘War’라는 부제의 조합이 못내 불안한 이유다.
2010년대 초, 국산 MMO BIG3 가운데 필두로 꼽히며 큰 사랑을 받은 <아키에이지>
'대모험의 시대에서 대전쟁의 시대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신작 <아키에이지 워>
흐릿해진 아키에이지의 정체성
상술한 바와 같이 <아키에이지>는 소설가 전민희가 집필한 연대기에 기반한다. 어머니 신과 그녀의 정원, 그리고 최초의 원정대를 둘러싼 신화적 사건 후 원대륙이 소멸하자 신세계로 이주한 여러 종족은 저마다 새로운 터전을 찾는다. <아키에이지 워>는 바로 이 시기를 배경으로 삼아, 아직 서대륙과 동대륙으로 분열되기 이전 세계를 보여주는 일종의 프리퀄이다. 패권을 좇아 암약하는 이즈나 왕가와 그에 맞선 초승달 왕좌를 중심으로 마리아노플, 안델프 공화국 등 익숙한 세력과 장소가 등장한다. 물론 선지자 루키우스 퀸토처럼 반가운 얼굴과도 재회할 수 있다.
정원의 이방인으로서 어머니 신을 대리하는 사명을 띈 주인공은 퀸토에게 이끌려 이곳저곳서 이즈나 왕가가 벌인 문제를 수습한다. 필자는 모바일 게임을 할 때도 끈덕지게 지문을 읽는 구시대적 인간인데, 본작의 메인 스토리는 그럭저럭 서사 구조가 갖춰진 편이다(어디까지나 경쟁작에 비해서).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누이안, 하리하란, 워본, 엘프, 드워프까지 5종으로 직업의 경우 저마다 명칭은 다르지만 검/방, 대검, 쌍검, 활, 마법으로 요약 가능하다. 플레이 도중 획득한 직업 카드로 언제든 전직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구조상 최초 선택에 그리 큰 의미는 없다.
정원의 이방인을 주인공으로 한 <아키에이지> 프리퀄. 이 와중에 떼껄룩페레는 잘렸다
본작도 고등급 캐릭터를 뽑아서 변신하는 시스템이라, 최초 선택이 딱히 의미는 없는 편
메인 스토리를 따라 어떤 몬스터를 몇 십 마리씩 사냥하라는 퀘스트를 완수하다 보면 40레벨 정도까지 무난히 성장한다. 이때부터 초중반 콘텐츠가 전부 해금되어 필드 사냥 외에도 던전, 제작, 거래소, 길드 그리고 후술할 해전, 무역까지 두루 즐길 수 있다. 레벨업 시 힘, 체력, 민첩, 재주, 지능, 정신 가운데 하나를 올리는데 직업별 주요 스탯이 명확하므로 헤맬 걱정은 없다. 직업 카드 외에 펫에 해당하는 그로아와 탈것을 수집하여 성장을 꾀하고, 여분의 장비 등은 컬렉션에 넣어 부가적인 능력치를 얻는다. 당연히 희귀 장비나 스킬북 등은 인고의 파밍을 요한다.
자, 일단 신작이라 풀어서 소개하긴 했지만 사실 <아키에이지 워>는 전혀 새롭지 않은 게임이다. 절찬리 서비스 중인 모바일 <리니지> 시리즈나 그와 유사한, 이른바 ‘리니지-라이크(Lineage-like)’를 하나라도 즐겼다면 곧장 <아키에이지 워>에 적응할 수 있다. 직업 카드, 그로아, 탈것, 컬렉션, 던전, 제작, 거래소, 길드 등등 주요 콘텐츠부터 스킬을 익히고 물약을 마시는 사소한 부분까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 투성이다. 아인하사드의 축복으로 대표되는 몇몇 고강도 BM이 빠지고 성장 구간의 난이도가 완화된 형태지만 그조차 앞선 아류작들이 이미 시행한 바다.
모바일 MMORPG치고 나름 서사 구조를 잘 갖췄고 전체적인 그래픽도 충분히 볼만하다
그런데 UI/UX가 어디서 본 듯한 건 기분 탓일까, 정작 기존 엑스엘게임즈의 느낌은 옅다
무역도 해전도, 아직은 허울뿐
게임 UI/UX에 있어서 장르적 유사성과 표절의 경계는 다소 흐릿하다. 요즘 모바일 MMORPG치고 <리니지>를 곁눈질하지 않는 작품이 드물 지경이니, 거기에 엑스엘게임즈가 한 술 얹었다고 놀랄 일도 못된다. 다만 그 IP가 하필 <아키에이지>인지라 실망과 괴리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 그만큼 <아키에이지>는 당대 PC 온라인 게임과 차별화된 확고한 정체성이 자랑했으니까. 무엇보다 송재경 대표 본인이 <리니지>식 약육강식 구조를 비판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관련 기사). <아키에이지 2> 개발에 전력 중인 건 알지만 어쨌든 <아키에이지 워>도 같은 소생 아닌가.
그나마 <아키에이지 워>서 원작 계승이라며 내세운 콘텐츠가 해양 콘텐츠, 즉 무역과 해상전이다. 비교적 이른 시점에 함선 관련 UI가 열리는데, 이때는 무역선만 선택 가능하고 전투선은 40레벨부터 몰아볼 수 있다. 무역선은 적재량과 상업술, 행운 등이 중요하고 전투선은 생명력, 활력, 공격력 등 캐릭터와 취급이 별반 다르지 않다. 양쪽 다 충각, 타륜 같은 장비를 채워 스탯을 올려준다. 선박 역시 일반/고급/희귀/영웅/전설의 5등급으로 구분되며 크고 좋은 배를 건조하려면 그만큼 많은 재화와 수고가 든다. 아쉽게도 돛이나 선채 커스터마이징 기능은 찾지 못했다.
아예 신규 IP면 모를까, 현재로선 "이게 왜 아키에이지야!?"라는 말이 안 나올 수가 없다
단순한 파견 콘텐츠에 가까운 무역, <아키에이지>라면 좀 더 기능을 보강할 필요가 있겠다
하우징을 중심으로 하는 <아키에이지> 특유의 생활 콘텐츠를 무역 하나로 대체할 수도 없거니와, 그보다 당황스럽기까지 한 건 이 기능 자체의 조악함이다. 말이 무역이지 그냥 노동력이란 특정 재화를 소모하여 허용 적재량만큼 선적하고 거리에 따라 항해 시간, 비용, 수익이 올라가는 아주 기초적인 파견 콘텐츠다. 무역품이래봐야 몇 종 되지도 않고 시세나 신선도, 해류와 날씨 등 뭔가 신경 쓰고 관여할 여지가 일절 없다. 물론 <대항해시대>가 아니니 서브 콘텐츠가 너무 과할 필요는 없겠으나, 이럴 거면 뭐하러 원작 계승을 위한 콘텐츠라 홍보했는지 모를 일이다.
좀 더 나중에 해금되는 해상전도 실망스럽긴 마찬가지다. 그래도 이건 직접 배를 몰아 바다에 나서긴 하는데,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꿈꾸던 항해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던전일 이다. 바다에 구획이 나뉘어 권장 레벨이 붙고 필드마냥 몬스터가 활보한다. 거기서 하는 일이라곤 캐릭터 대신 전투선으로 자동사냥을 돌리는 게 전부다. 실제로도 해상전 관련 기능이 던전 UI에 포함되어 있다. 투사체로 계산되어 지능적인 플레이가 가능한 포격과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축소된)랜드마크가 유일한 재미요소로, 바다 사나이의 로망은 찾아볼 수 없는 앙상한 콘텐츠다.
그래도 해상전은 다르겠지 싶어 열심히 40레벨을 찍었는데, 그냥 배 타고 자동사냥이라니
애당초 던전 UI에 포함된 거라, 탐험의 설렘이나 발견의 즐거움 같은 걸 기대하면 안 된다
결국 쟁게임은 쟁으로 말해야
누구나 게임을 즐기다 보면 ‘나라면 이건 다르게 만들 텐데’ 혹은 ‘저걸 이렇게 바꾼다면 어떨까’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아류(亞流)가 탄생한다. 그렇기에 아류는 어느정도 원류와 같거나 비슷한 모습을 보이기 마련이다. 애당초 모든 면에서 다른 게임을 만들자는 게 아니라 특정 부분만 바꾸고 싶은 거니까. 그 특정 부분은 초반일 수도, 중반일 수도, 후반부 콘텐츠일 수도 있다. <아키에이지 워>는 이 장르의 고갱이라 할 만한 ‘쟁’을 <리니지>보다 더 쉽게, 더 빨리, 더 자주 열어보자는 기획의 산물이다(관련 기사).
참 노골적이면서도 어찌 보면 소박한 기획이다. 손대고 싶은 부분은 어디까지나 엔드 콘텐츠인 ‘쟁’이니, 거기까지 가는 과정은 성장 난이도 완화 외에는 거진 그대로 가져왔다. 영락한 엑스엘게임즈와 3N의 체급차도 적잖이 영향을 끼쳤을 텐데, 결과적으로 <아키에이지 워>는 ‘리니지-라이크’ 기준으로 따지더라도 뻔뻔하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울 듯하다. 차라리 해양 콘텐츠에 좀 더 신경을 썼다면 좋았겠으나 현재로선 허울 뿐인 수준이다. 해상전의 경우, 개인이 탐험을 즐기는 용도가 아니라 향후 대규모 전투의 한 축으로 활용된다니 그쪽을 기대하도록 하자.
현 시점에서 첫인상을 소개할 순 있어도, 전쟁을 빼놓고 본작 전체를 평하는 건 시기상조다
전쟁이 재미있게 돌아가든 말든 우리가 추억하는 <아키에이지>가 되지는 없겠지만서도
<아키에이지 워> 첫 매출이 반영된 구글플레이 순위는 15위다. 카카오와 엑스엘게임즈가 만족할 만한 성적표인지 미묘한데, 어찌됐든 본작은 아직 회심의 한 발을 장전해둔 채다. 명색이 부제가 ‘War’면서 정작 그 ‘쟁’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장르적 유사성을 감안하더라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UI/UX, 원작과 너무 동떨어진 시스템과 콘텐츠는 당장이라도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 <아키에이지 워>가 재미있는 게임인가 어떤가 속단하긴 여전히 이르다. 결국 ‘쟁’ 게임은 ‘쟁’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그때가 되어서야 체험기가 아닌 제대로 된 평가가 가능하리라.
이제 며칠 내로 서버마다 하나둘씩 강자가 두각을 드러내 몇 주 후면 상위권 길드들이 완전히 자리를 잡을 터이다. 빠른 전개를 강점으로 내세운 작품이니 아마도 그 즈음에 공성전이 열리지 않을까. 다만 아무리 성장 난이도를 완화하더라도 모두가 엔드 콘텐츠까지 도달하긴 힘들다는 점에서, ‘쟁’으로 승부수를 띄운 엑스엘게임즈와 <아키에이지 워>의 전략이 먹혀들지 여전히 미지수다. 그럼에도 <아키에이지>로도 ‘리니지-라이크’로도 실망스러운 첫인상을 만회하려면 다른 수가 없다. 모쪼록 <아키에이지 2>를 위해서도 다가올 전쟁에서 나름의 답을 찾기 바란다.
첫 공성전이 아무리 빨라도 다음 달일 텐데, 그 때가 되면 진짜 성적표가 나오지 않을까
양대 마켓 1위 달성은 축하합니다만 감사 패키지 판매는 좀… (염가라는 건 인정하지만)
김영훈 기자 grazzy@ruliweb.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