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도 애니도 아닌 어중간함,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 VR’ 체험기
작년 9월, 일본에 “당신도 니시카타가 될 수 있다.”라는 제목의 특이한 크라우드 펀딩이 등장했다. 일본 유명 출판사 쇼가쿠칸이 진행하는 프로젝트로, 인기 만화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 VR 콘텐츠 제작을 위한 모금을 진행한 것이다.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 VR’은 가상현실에서 남주인공 ‘니시카타’의 시점으로 직접 여주인공 ‘타카기’와 함께 일상을 보낼 수 있는 VR 애니메이션이다. 분류상 애니메이션이지만, VR HMD와 컨트롤러로 직접 손과 머리를 움직이며 상호작용이 가능한 체감형 콘텐츠라는 점에서 사실상 게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 VR 공식 영상
▲ 250만엔(한화 약 2860만 원)을 제일 먼저 펀딩한 이에게 세계 유일 타카기 양 등신대가 증정된다.
펀딩에서 애니메이션보다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면 바로 참여자 보상이다. 캔 배지, 클리어 파일, 스티커, T 셔츠, 특별 동영상, 액자, 원작자 친필 사인, 그리고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타카기 양 등신대 피규어까지, 다양한 타카기 양 굿즈를 증정한다는 소문에 많은 마니아가 모금에 참여했고, 펀딩은 최종 모금액은 1,214만 9,000엔(한화 1억 4,000만 원)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지난 22일, 그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 VR’이 스팀으로 출시됐다. 비록 펀딩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원작자가 인정한 공식 VR 애니메이션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졌다. 요망한 그녀, 타카기 양은 VR에서 어떤 장난을 칠까? 직접 구매해 체험해 봤다.
※ 콘텐츠는 파이맥스 5K+ '왼쪽 렌즈' 기준으로 촬영됐으며, 시점 변화에 따른 화질 저하나 왜곡이 있을 수 있습니다.
▲ 에피소드는 네 가지, 완결을 보기까지 약 20분 정도 걸렸다.
이번에 출시된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 VR 1학기’는 플레이어가 직접 남주인공 '니시카타'가 되어 여주인공 '타카기' 양과 함께하는 일상 에피소드를 즐길 수 있는 VR 콘텐츠다. 에피소드는 총 네 개로, 각 플레이 시간은 약 5분, 모두 합쳐 약 20분 정도다. 편하게 애니메이션 한 편 분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내용은 애니메이션 측면으로 따진다면 굉장히 실망스럽다고 할 수 있다. 제공되는 네 가지 에피소드는 전개가 조금 다를 뿐, 기본적으로 원작에서 나왔던 내용을 VR로 재구성한 수준이다. 방과 후 청소 당번, 쓰레기통에 빈 캔 던져 넣기, 비치 발리볼, 우산 함께 쓰고 귀가 등 원작 팬이라면 익숙한 상황과 장난이 등장한다. 달라진 것은 타카기 양의 대사 일부와 주변 풍경 정도다. 등장인물 또한 니시카타(플레이어)와 타카기 양 단 둘, 자동으로 대화가 진행되고 그것을 지켜보는 식이다.
▲ 눈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타카기 양
▲ 타카기 양은 틈만 나면 속삭이려든다.
또 정해진 스토리대로 따라가야 하는 전개가 굉장히 거슬렸다. 보통 VR 콘텐츠는 다양한 상호작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색다른 전개를 시선에 담는 편이다. 하지만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 VR’은 변주가 없다. 주변 사물은커녕 타카기 양과의 상호작용도 없다시피 하며, 주인공이 낼 수 있는 별도 선택지도 없다. 그저 물 흐르듯 대화하며 진행되는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전부다. 여기에 타카기 양은 성우인 타카하시 리에가 대사를 모두 읽어주지만, 니시카타(플레이어) 대사는 화면 구석에 텍스트로 표시되고, 빠르게 사라져서 일본어 숙련자가 아니면 읽어 내기 힘들다는 불편함도 있다.
스토리 진행 간 간단한 VR 미니게임이 등장하지만 이마저도 결과가 정해져 있다. 플레이어는 타카기 양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 모종의 이유로 반드시 패배하게 되는, 말 그대로 정해진 스토리를 보기만 할 뿐인 ‘VR 애니메이션’인 것이다. 게임에서 “이기면 첫 키스를 주겠다.”는 타카기 양의 속삭임에 죽을 힘을 다해봐도… 던진 빈 캔이 쓰레기통 입구에서 부자연스럽게 튕겨 나가는 모습을 봤을 때 그 박탈감이란 말로 이룰 수 없다.
그래도 타카기 양이 VR로 살아 숨쉬는(?) 느낌만큼은 제대로 살렸다. 2D로만 보고 들을 수 있었던 그녀의 장난끼 어린 표정과 속삭임이 VR HMD를 통해 실감나게 다가와 높은 만족감을 준다. 쳐다보는 각종 시선 처리나 몸짓에 타카기 양이 녹아들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중간에 타카기 양이 갑자기 다가와 귀에 대고 속삭이는 장면이 있는데, 니시카타의 두근두근한 마음을 확 느끼게 될 것이다.
▲ 부자연스럽게 튕겨 나가는 빈 캔, 사기야!
게임적인 측면으로 봤을 때도 여러모로 마감이 어설픈 부분이 느껴진다. VR 사용자 신장 크기를 고려하지 않고 콘텐츠를 만들어 키가 큰 사람은 타카기 양을 내려 다 봐야한다. 눈 높이가 맞지 않아 감상이 불편하고, 가끔은 시선이 빗나간 채로 이야기가 진행되기도 한다. 조금만 정해진 영역에서 벗어나도 이탈 처리돼 시야가 까맣게 물드는 문제도 있다. 또 컨트롤러 호환이 썩 좋지 못하다. 인덱스 컨트롤러는 호환 자체가 되지 않고, 바이브 컨트롤러는 물건을 쥔 채로 트랙패드로 이동해야할 때 굉장히 불편하다. 이는 기본적으로 썸스틱을 사용하는 오큘러스 제품을 기준으로 개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 VR’은 공식에서 만든 콘텐츠답게 원작 재현은 확실했으나, VR을 활용한 만큼 여러 상호작용이 포함됐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플레이어의 힘을 빌어 니시카타 답지 않게 타카기 양과의 내기에서 승리하거나, 하다 못해 선택지라도 몇 가지 제시돼서 스토리에 자그만 변화를 보여주길 원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이라는 표현 그대로 VR을 통해 애니메이션을 시청하게 되는 느낌을 주는 장면이 대부분이며, 내용은 원작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고, 분량 자체도 약 20분 정도로 짧다는 사실이 큰 실망감을 안겨줬다. 결과적으로 'VR 애니메이션'이라는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어중간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 빈 캔 던지기, 비치발리볼 등 다양한 승부를 경험할 수 있지만, 결과는 다 똑같다.
▲ 에피소드마다 사기를 당해 졌다. 이겨서 이마에 딱밤 한 번 때려보고 싶다.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 VR’은 올해 내로 후속작인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 VR 2학기’를 선보일 예정이다. 개발사는 펀딩 모금 당시 “원작의 인기 에피소드뿐만 아니라 오리지널 스토리도 싣겠다.”라며 “지금까지의 VR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경험을 선보이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1학기 편에서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부분이다. 부디 2학기가 출시될 때에는 그런 부분을 확실하게 챙겨 주길 바란다.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 VR 1학기’는 5월 22일 스팀으로 출시됐으며, 가격은 1만 4,500원이다. 플레이를 위해서는 윈도우 MR, 오큘러스, HTC 바이브 등 VR HMD가 필요하다.
안민균 기자 ahnmg@ruliweb.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