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이 ‘토탈워: 쓰리 킹덤즈’ 한국어화, 이렇게 이루어진다
바야흐로 대한국어화 시대를 맞아 우리말과 글로 다시 태어난 명작들이 속속 발매되는 가운데, 뭇 게이머를 설레게 할 신작 소식이 또 하나 들려왔다. 크리에이티브 어셈블리가 만들고 세가 코리아가 국내 유통하는 ‘토탈 워: 쓰리 킹덤즈(Total War: Three Kingdoms)’가 그 주인공. 영국 게임사가 동양의 고전인 삼국지를 게임화하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특히나 이번 작은 음성까지 완전 한국어화를 선언하여 국내 게이머들의 뜨거운 성원과 기대를 받고 있다.
오는 3월, 음성까지 완전 한국어화 정식 발매되는 '토탈 워: 쓰리 킹덤즈'
그리고 국내에서 ‘토탈 워: 쓰리 킹덤즈’ 현지화를 책임지는 곳이 바로 이인욱 감독이 이끄는 무사이 스튜디오. ‘맥 워리어’부터 ‘헤일로 5: 가디언즈’까지 근 20여 년간 400편이 넘는 게임을 작업해온 명실상부한 한국어화의 첨병이자 산증인이다. 무사이 스튜디오에 대한 보다 자세한 소개는 과거 인터뷰로 갈음하고, 이번에는 ‘토탈 워: 쓰리 킹덤즈’ 현지화에 관하여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다시금 이인욱 감독을 찾았다.
● 오랜만이다. 오늘은 기대작 ‘토탈 워: 쓰리 킹덤즈’ 현지화로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 ‘토탈 워: 쓰리 킹덤즈’를 준비하며 깜짝 놀란 점이 유저들의 기대감이 굉장히 크다는 것이다. 유럽 게임사가 동양 문화를 소재로 만드는 게임이라 더욱 화제가 되는 듯하다.
무사이 스튜디오를 이끄는 이인욱 감독 겸 대표
● 한국 남성에게 삼국지는 단순한 역사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본래 좋아하는 편인지
: 물론이다. 삼국 영웅들의 이야기가 재미있고 배울 점도 많다. 어려서는 자주 봤는데 이제는 기억이 다소 희미하기는 하다. 다행히 ‘토탈 워’는 스토리 라인을 쫓아가는 게임이 아니다 보니 그 순간의 캐릭터성과 상황에 어울리는 멘트에 집중하며 작업하고 있다.
● 지난 20여 년간 400편 가까운 게임 현지화를 담당했다. 그 가운데 삼국지 관련도 있었나
: 2001년작 ‘결전 2’가 있다. 같은 코에이 작품인 ‘삼국 무쌍’과 닮은 점이 있지만 약간의 전략성이 가미된 것이 특징이었다. 그 작품도 우여곡절이 많았는데(웃음)… 보통 스크립트 번역은 일본말을 아는 한국인이 해야 맞지 않나. 그런데 한국말을 아는 일본인이 해왔더라. 막 “꼬레 와따시가”를 “이 내 몸이” 이런 식이다. 도저히 녹음을 들어갈 수가 없어서, 기한을 일주일 더 연장시키고 스크립트부터 전부 검수했다.
● ‘토탈 워: 쓰리 킹덤즈’는 음성까지 완전 한국어화 된다. 어떠한 방식으로 작업이 이루어지나
: 처음 의뢰를 받으며 우선 내부에서 스타일 미팅을 갖는다. 우리끼리 모여서 이 게임을 어떤 식으로 번역할지, 시대적 배경을 살릴지, 가령 말투를 어느정도 현대화할지 등을 고민한다. 그래서 고유 명사의 통일성을 위해 용어 사전을 만들고, 캐릭터에 대한 심도 깊은 분석도 한다. 얘는 어떤 말투를 쓰고 성우는 누가 할 건데, 걔는 어떤 표현을 잘하니까 스크립트는 어떻게 짜라 뭐 그런 것들. 그렇게 대본이 올라오면 내가 다시금 검수를 본다. 직접 읽어보며 맞춰 봐야 하고 영상에 들어가는 멘트는 길이와 싱크도 살펴보고. 그런 과정을 모두 거친 후에야 최종적으로 녹음에 들어간다.
열띤 녹음 현장 "조금 더 여유있는 톤으로~" "그건 조조가 아니라 유비인데!?"
● 좋은 현지화를 위해서는 녹음이 끝나고도 해야 할 작업이 있을 것 같다
: 실제 게임 플레이 시에는 굉장히 다양한 상황에서 사운드가 출력된다. 그때 어떤 소리와 섞이더라도 멘트가 선명하게 들릴 수 있도록 마스터링을 한다. 흩어진 것은 잡아주고 튀는 부분은 정리하며 사운드를 보다 딴딴하게 만든다. 게임을 하다 보면 더빙은 돼있는데 다른 소리에 뭍여 멘트가 제대로 안 들릴 때가 있지 않나. 볼륨도 들락날락하고. 그게 후작업을 제대로 안 해서 그런 거다.
● 보통 음성까지 한국어화하면 기간이 얼마나 걸리며, ‘토탈 워: 쓰리 킹덤즈’는 어느정도인지
: 작품마다 다르다. 주로 일반적인 대사가 많은지 소리를 엄청 지르는지에 따라서도 다르고, 영상 길이에 의해서도 작업 기간이 변동된다. 이제껏 가장 길었던 작업은 ‘로스트 오디세이’인데 6개월 정도 걸렸다. ‘토탈 워: 쓰리 킹덤즈’ 분량이면 두 달에서 두 달 반이 걸릴 분량인데, 솔직히 기한이 조금 촉박한 상태다. 그나마 장수들의 상황별 멘트가 비슷하여 조금 더 빠르게 작업하고 있다.
● ‘토탈 워: 쓰리 킹덤즈’는 경영 전략 게임이라 RPG나 FPS 더빙과는 많이 다를 것 같다
: 사실 작업 자체는 이쪽이 수월하다. RPG처럼 스토리를 따라가며 수많은 대사를 주고받는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삼국지가 배경이긴 하지만 언제든 역사가 뒤바뀔 수 있는 장르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고증에서도 비교적 자유롭다.
장르 특성상 굵은 서사의 줄기가 없어 수월한 점도, 아쉬운 점도 있다고
● 크리에이티브 어셈블리는 영국 게임사인데, 우리에게 익숙한 삼국지 묘사와 다른 점이 있나
: 게임사가 바라본 동양 문화가 일본 고전에 너무 치우쳐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유비는 부처 같고 여포는 사무라이처럼 묘사되어 우리가 익히 하는 삼국지와는 다소 괴리가 있더라. 이런 부분을 세가 코리아와 협의하며 한국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스타일로 전부 재해석했다.
또 한가지 아쉬운 점은 조운이나 태사자처럼 인기가 많음에도 고유 성우를 배정받지 못한 유니크 무장들의 묘사다. 이들을 위해 남녀 각각 세 가지 타입의 음성을 녹음했는데 아무래도 이질감이 들 수밖에 없다. 게임 상황에 맞춰 특정 대사가 출력되는 방식이므로 본래 역사대로라면 말도 안되는 대화가 나올 수도 있고.
● 워낙 등장인물이 많고 저마다 개성도 뚜렷한 만큼 성우 캐스팅이 쉽지 않았을 듯하다
: 샘플을 보내 게임사에서 선택하도록 하고 라이브 오디션도 봤다. 가장 고민이 깊었던 인물은 역시 조조. 게임사가 너무 ‘어벤져스’ 캡틴 아메리카 같은 묘사를 원해서 약간 협의가 필요했다.
인물 해석과 성우 캐스팅에 가장 애를 먹은 캐릭터는 바로 조조 맹덕
● 아무래도 역사물인지라 대사나 발성부터 현대물과는 차이가 있을 텐데
: 물론이다. 다만 아무리 역사물이라도 고어와 현대적인 표현의 균형이 중요하다. 내가 내년이면 쉰인데, 처음 받아본 스크립트에는 나도 모르는 옛날식 표현이 너무 많았다. 시대적인 고증도 어느 정도껏이지 게임이 아니라 공부를 하면 안되지 않나. 그래서 약간 현대적인 느낌을 섞어 작업 중이다.
● 장비나 하후돈 같은 거친 무장은 대사에 욕지기가 나올 법도 한데, 이를 어떻게 처리했나
: 아쉽게도 받아본 스크립트에 따로 욕은 없었다. 우리에게 장비는 막 술 퍼먹고 욕이라도 내뱉을 것 같은 인상인데, 게임사에서는 그냥 터프한 덩치 정도로 이해한 듯하다.
● 그럼 이 자리에서 주요 캐스팅을 몇 명 공개할 순 없을까, 유비와 조조라도
: 유비는 최한(MBC 성우극회 15기, ‘네모바지 스펀지밥’ 집게사장, ‘드래곤볼 Z: 부활의 F’ 베지터, ‘원피스’ 돈키호테 도플라밍고, ‘파파독’ 파파독 등)이고 조조는 이규창(KBS 성우극회 40기, ‘킹 오브 프리즘’ 노리즈키 진, ‘프리파라’ 제로 등)이 맡았다. 이규창 성우 같은 신인을 주연급으로 쓰는 것은 상당히 파격적인 캐스팅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조조의 느낌을 가장 잘 살려낸다고 판단하여 밀어붙였다.
신인임에도 조조를 연기하게 된 이규창 성우, 루리웹 게시판 관리자 출신이라는 후문
● 이인욱 감독 본인이 단역으로 출연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번에도 혹시
: 실제로 작업 과정에서 누락된 짧은 멘트 등을 대신 녹음한 적이 몇 번 있다(웃음). 하지만 ‘토탈 워: 쓰리 킹덤즈’는 단역이 많은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나설 기회가 없었다.
● 최근 국내 콘솔 시장은 대한국어화 시대라 할만하다. 음성 현지화 의뢰도 많이 늘었는지
: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더빙 사례가 굉장히 많았는데 2006, 7년을 기점으로 확 죽은 걸로 기억한다. 최근에 자막 한국어화가 주를 이루는 데는 엄청난 대사량 탓도 있다. 예전에는 워드로 10만 자쯤 되면 ‘와, 미쳤구나’했는데 요즘은 그 몇 배가 넘는다. 당장 ‘토탈 워: 쓰리 킹덤즈’도 23만 자다. 이러니 견적을 내보면 그쪽으로 고사하기 십상이다. 그래도 VR(가상현실) 관련한 음성 현지화 의뢰가 늘어나긴 했다.
● 지난해에도 음성 한국어화된 대작이 꽤 있었다. 무사이의 손길을 거친 작품도 있을 법하다
: ‘궨트: 더 위쳐 카드 게임’과 ‘쓰론브레이커’,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4’, ‘쥬라기 월드: 에볼루션’을 작업했다. 특히 ‘쓰론브레이커’는 내가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한 작품이라 정말 애착이 간다. 한번은 유튜브 게임 방송을 봤는데, 진행자가 ‘쓰론브레이커’ 더빙을 하나도 안 넘기도 다 듣더라. 거기다 ‘갓더빙!’ 이런 댓글을 보면 정말 보람차다.
고생한 만큼 애착이 많이 가는 대표작이라는 '쓰론브레이커: 더 위쳐 테일즈'
● ‘궨트: 더 위쳐 카드 게임’과 ‘쓰론브레이커’ 현지화 작업이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 일반적으로 현지화는 원본 음성을 참고하며 작업한다. 그런데 ‘궨트’는 자료를 넘겨받을 당시 스크립트와 개발자들이 직접 녹음한 가이드라인 정도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분으로 일일이 캐릭터와 대사를 분석하고 재해석했는데, 결과적으로 신의 한수가 된 것 같다.
● 원본을 못 들어본 상태에서 음성 현지화를 하다니 대단하다. CDPR이 정말 고마워했겠다
: 서로 좋았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에는 ‘사이버펑크 2077’ 현지화 관련으로 폴란드 본사에 초청받기도 했다.
'사이버펑크 2077' 현지화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 그런데 콘솔 커뮤니티를 보면, 음성까지 한국어화에 대해서는 여전히 호불호가 갈린다
: 간혹 ‘헤일로 5’나 ‘라이즈 오브 더 툼레이더’처럼 지난 작업물에 대한 지적을 보면 내가 직접 댓글을 다는 편이다. 아예 피드백을 달라고 메일 주소까지 남긴 적도 있다. 그런데 무슨 ‘너희 때문에 본래 연기 톤과 느낌을 알지 못한다’거나 ‘네놈들이 게임 산업에 암적 존재’라는 폭언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현지화 작업은 그렇게 원음을 잘 알아듣는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어를 원하는 게이머에게 보다 높은 몰임감을 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해외 조사에 따르면 영어를 모르는 사람이 외화를 봤을 때 장면을 기억하는 정도가 원어민 대비 50% 밖에 안된다고 한다. 3개월이 지나면 20%, 6개월 후에는 겨우 10%까지 떨어진다. 그만큼 눈이 화면에 집중하지 못하고 순간순간 자막으로 간다는 거다. 그래서 국내보다 문맹률이 높은 해외의 경우 현지화가 법으로 강제되는 지역도 적잖다. 원본을 좋아하는 것까진 이해하지만, 그렇다면 그냥 일본판을 사고 한국판은 욕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 국내 게임 업계는 모바일이 주류인데, 그쪽에서는 의뢰가 오지 않는 건가
: 가끔 연락이 오긴 하는데 견적을 보내면 답이 없더라(웃음). 국내 음성은 아니지만 ‘크리스탈 하츠’ 일본 진출을 도와준 적은 있다. 다른 스튜디오에 의뢰하면 뭐 국내에서 다 할 수 있다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진짜 전문 연기자가 아니라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사람들로 녹음하는데 우리가 못 알아들으니 괜찮은 줄 오해하는 거다. 그러니 막상 해외에 나가면 발번역, 발더빙했다고 욕을 엄청 먹는다. ‘크리스탈 하츠’ 일본어화는 내가 직접 일본에 건너가서 현지 연기자들과 일주일간 작업을 했다.
해외 -> 국내뿐 아니라 국내 -> 해외 현지화도 무사이 스튜디오의 전문이다
● 게임 사운드 작업을 20년간 해왔는데, 영화나 애니메이션 등 타 매체와 어떤 점이 다른가
: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과 비교해 게임 사운드 작업이 열 배는 어렵다. 영상은 백 번 틀어도 백 번이 똑같이 나오니까 사운드를 한 트랙을 쭉 뽑으면 된다. 그런데 게임은 매 상황마다 맞물리는 사운드가 다 다르기 때문에 고려해야 할 경우의 수가 굉장히 많다. 그래서 처음부터 톤&매너를 정확히 잡아 놓지 않으면 사운드가 난리가 난다. 나도 한 15년쯤 했을 때야 조금 알겠더라.
● 게임 사운드 분야에 종사하고픈 지망생이 많은 것으로 안다. 무언가 조언해줄 수 있을까
: 유나이트 2017에서 게임 사운드를 주제로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실제로 그런 사람이 상당히 많더라. 그런데 사실 나도 정확히 뭘 공부하라거나 무슨 책을 일독하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그저 좋은 사운드를 구분하는 귀를 기르려면 영화를 많이 보길 추천한다. 같은 영화를 열 번 정도 보면 어느정도 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거다. 그 소리를 왜 거기에 넣었는지 사운드 디렉터의 의중이 조금씩 느껴보라. 존재 이유가 없는 사운드는 노이즈나 다름없다.
● 좋은 이야기다. 끝으로 앞으로의 비전이나 개인적인 욕심이 있다면 듣고 싶다
: 욕심 아닌 욕심이 있다면, 엔씨소프트나 넥슨 같은 국내 대형 게임사에서 정말 훌륭한 콘솔 작품을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런 규모 있는 곳에서 흥행 여부를 떠나 작품성 있는 게임에 투자를 많이 할 때 대한민국 게임 산업이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으리라 본다.
국내 게임사가 만든 훌륭한 콘솔 작품이 늘어나길 바란다는 이인욱 감독
김영훈 기자 grazzy@ruliweb.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