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이 ‘떡’ 벌어지는 크기(254x254㎝)로 관객을 일단 압도하고 보는 김환기의 ‘우주(1971)’가 그렇듯 거대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지닌다. 문학이라고 다르지 않다. 하지만 박경리의 ‘토지(1969∼94)’나 이병주의 ‘지리산(1972∼78)’, 조정래의 ‘태백산맥(1983∼89)’처럼 압도적인 부피감을 가진 소설은 요즘 찾기 힘들다. 원고지 1000매쯤은 거뜬히 넘겨야 장편 대접을 받는 것도 다 옛날 일이 됐고, 500∼600매만 돼도 ‘(경)장편’이라 불린다. 물론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대하소설’이란 단어는 프랑스 작가 앙드레 모로가 만든 ‘로망 플뢰브’에서 나온 것이다. ‘줄거리 전개가 완만하고 등장인물이 수없이 많으며 사건이 연속으로 쌓여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큰 강 같은 느낌을 주는 소설’을 뜻한다. 기성작가와 작가 지망생, 출판업계 관계자들에게 대하소설의 ‘실종’, 짧아지는 장편에 대한 생각을 물어봤다.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사실과 이를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의문은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의외로 “시대 변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흐름”이란 시각이 대체적이었으나 미시서사와 구분되는, 거대서사가 주는 비일상적인 경험이 사라졌다는 데에 대한 아쉬움은 공통적이었다.
◆“수요와 공급 모두 없어져”
거대서사가 사라진 이유는 즉시 튀어나왔다. 일단 “독자들 호흡이 짧아진 점”이 크다. 스마트폰을 매개로 광범위하게 퍼진 ‘스낵 컬처’로 인해 긴 텍스트를 읽는 일 자체가 드물어졌다. 독자가 소화하는 능력도 자연스레 감퇴했다. 이는 문학계만의 일은 아니나, 문학계는 아무래도 이런 변화에 가장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1991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표중식 작가의 말이다. “종이의 접근성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시대가 달라졌어요. 인쇄매체 자체를 보는 일이 드물죠. 긴박해진 시대, 그러니까 느긋하게 독서를 할 여유가 사라진 것도 큽니다. 그러니 한질, 두질 하는 대하, 장편이 사라질 수밖에요.”
즉 ‘수요’가 없다는 얘기다. 이런 공기는 가까운 서점만 가도 확연해진다. 연도별 소설 분야 베스트셀러(30위) 목록을 보면 최소 두 권 이상인, 호흡이 긴 장편소설이 순위에 오르는 경우는 한 해 통틀어 많아야 3∼4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마저도 몇몇 작가에 국한된다.
진영균 교보문고 브랜드관리팀 과장은 “10년 전과 비교했을 때 국내든 해외든 (장르소설을 제외한다면) 장편 자체가 많이 줄어든 상황”이라며 “최근 5년으로 좁히면 국내는 조정래와 김진명, 외국은 무라카미 하루키와 베르나르 베르베르 정도밖에 없었다”고 귀띔했다.
그렇다고 ‘공급’이 순탄한 것도 아니다. 문예창작과 졸업 후 등단을 준비 중인 20대 A씨는 학부 시절부터 오로지 단편소설에만 집중했다. 구조가 그랬다. “문학 전공자인데도 장편을 제대로 써본 적이 한번도 없어요. 배운 적도 없고요. 장편을 받는 곳 자체가 드물어요. 일단 빨리 등단하는 게 우선이니까 아무래도 관심이 안 가죠. 등단을 못했다면 대학원을 가더라도 사정은 같아요.”
황석영 같은 작가가 더는 나올 수 없는 환경인 셈이다. 무명의 신인에 가까웠던 황석영은 서른두 살이던 1974년부터 10년 동안 한국일보에 소설 ‘장길산’을 연재해 작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인 김호운 작가는 “장편을 싣는 문예지가 줄어들고 신문연재도 사라져 장편에 대한 시도 자체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며 “출판사 입장에서도 장편은 일종의 모험이라 신인작가는 물론 기성작가 역시 기회를 얻기 쉽지 않은 형편”이라고 설명했다.
◆“시대가 다시 요구할 것”
기성작가들도 장편엔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경제적인 이유에서다. 2017년 심훈문학상 소설부문으로 등단한 최성문 작가도 같은 이유를 들었다. 얼마 전 새 장편소설 퇴고를 마쳤다는 그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했다.
“전업작가로 살기가 쉽지 않아요. 저도 그렇고 글을 쓰며 다른 일을 병행하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장편은 적어도 1년 이상은 그거에만 매달려 있어야 해요. 별다른 수입이 없다면 현실적으로 어려운 측면이 많죠. 하물며 대하소설은….”
어쩌면 장편의 실종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수요공급의 질서에서 벗어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한켠에서는 이러다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문학이 가진 본래적 가치마저 잃어버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꾸준하다. 거기에는 대중의 입맛에 맞추는 것만이 옳으냐는 시류에 대한 의구심도 담겨 있다. 경제적으로만 접근할 일이 아니란 것이다.
경제적으로 보았을 때 더 문제란 목소리도 나온다. 최성문 작가는 “외국에서는 문학이 시즌제 드라마나 영화 등 다양한 상업적 영역으로 뻗어나가 흥행을 거두는 사례가 적잖이 나온다”며 “우리는 그렇게 가져다 쓸 긴 호흡의 작품들이 나오기 어려운 구조”라며 아쉬워했다.
바로 그 지점에서 희망이 있다는 시각도 있다. ‘서사적 창의력’이 요구되는 시대에 접어들면서 장편소설에 대한 요구가 고조될 것이란 기대감에서다. 김호운 작가의 설명이다. “가만 살펴보면 연극이나 음악, 더 나아가 냉장고 같은 유형의 재화에까지 서사구조, 즉 스토리가 담기고 있어요. 기술이 전부가 아닌 시대가 된 거죠. 장편소설만큼 서사적 창의력을 기를 수 있는 게 또 있을까요?”
그러면서 그는 기성작가의 분발을 기대했다. 사라져선 안 될 것이라면 누군가는 계속 도전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강물처럼 흘러가는 수많은 사건의 명멸과 다양한 인간군상의 부침과 영욕을 수개월에 걸쳐 읽어내는 경험은 결국 대하소설, 혹은 장편소설에 기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는 문학이 어디까지나 잃지 말아야 할 본질적인 가치와도 맞닿아 있다.
“예를 들어 한강 같은 작가가 대하소설을 쓴다고 하면 출판사도 움직이고 독자도 찾아보지 않을까요? 대중의 서사적 창의력 혹은 호흡을 늘릴 소설을 필요로 하는 시간이 오고 있습니다. 시대는 언제나 변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이것만큼은 잃지 말자’고 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죠. 문학도 예외가 아닙니다. 물론 작가들이 자기만의 독자층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이 우선이겠지만요.”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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