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계 기인야사(奇人野史)에는 크로아티아 피아니스트 이보 포고렐리치(사진)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쇼팽 콩쿠르에서 1980년 그가 보여준 파격적 곡 해석과 개성 있는 연주는 심사위원 간 극한 대립을 불러일으켰고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피아노 여제(女帝)’로 군림하는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포고렐리치를 탈락시킨 심사위원단에 속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선언하며 사퇴해버린다.
우리나라에는 2005년 처음 내한했던 포고렐리치가 지난 19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15년 만에 다시 국내 무대에 섰다.
그랜드 피아노만 덩그러니 놓인 큰 무대에 느리나 큰 걸음으로 들어서는 62세 피아니스트에게선 쇼팽 콩쿠르 낙선 소식을 듣고서도 껌을 씹으며 “나는 이 콩쿠르에 상을 타러 참여한 것이 아니다. 다만 쇼팽 해석에 새로운 차원을 들려주고 싶었을 뿐”이라던 젊은 날 오만하던 모습을 찾긴 쉽지 않았다.
바흐의 ‘영국 모음곡’으로 시작된 그의 연주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1번’을 거쳐 쇼팽의 ‘뱃노래’와 전주곡(C# 단조)’를 거쳐 그의 대표 레퍼토리인 모리스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로 이어졌다. 바흐, 베토벤, 쇼팽의 익숙했던 곡들은 이날 그의 손끝에선 새롭게 분해, 조립돼 낯설게까지 다가왔다.
객석의 ‘호불호’를 떠나서 클래식 애호가들은 과거 정통 클래식 문법의 경계선 위에 아슬하게 서 있던 그의 연주가 영역 밖으로 한참 나아갔다는 감상평을 내놨다. 완급을 조절하던 그의 연주는 난곡으로 손꼽히는 라벨 ‘밤의 가스파르’의 마지막 ‘스카르보’에선 마치 건반과 대결하는 듯한 극단적인 악센트 포르테로 정점에 도달했다.
허명현 클래식 평론가는 “극한까지 조절 가능한 아고긱(연주 템포 표현법) 등 그의 손끝에서만 가능했던 기술들은 이제 사라졌지만, 새로운 음악 세계를 향해가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의미 있었던 공연”이라며 “특히 ‘밤의 가스파르’에서 보여준 감수성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고 평했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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