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국들이 뭉치면 국제사회에서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소프트파워’로 하는 공공외교로는 가능합니다.” 다르위시 아흐메드 알 시바니 글로벌공공외교네트워크(GPDNet) 사무총장의 연설에 참석자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지난달 21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중견국 공공외교협의체인 GPDNet 총회에서다. GPDNet 회원국 중 G7(주요 7개국)에 드는 강대국은 없다. 하지만 각자 탄탄한 문화자산과 중견국 지위를 갖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도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는 비전은 울림이 컸다. 올해 GPDNet 의장국인 카타르의 다르위시 총장은 GPDNet의 창설 주역으로 한국을 지목했다. 새로 가입을 희망하는 나라의 대표단은 총회장에서 만난 한국 기자에게 자국이 왜 회원자격을 가져야 하는지 설명하려 애썼다. 이곳에서 한국의 영향력은 작지 않아 보였다.
◆‘중견국’ 한국의 공공외교
공공외교(public diplomacy)는 ‘비국가행위자와의 소통을 통해 한 국가의 가치·문화·비전 등에 대한 공감과 신뢰를 얻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행태가 변하며 외교는 정부 간 전유물이라는 오랜 통념에 변화가 생기고 대중과 여론이 외교정책에 갖는 영향력에 대한 인식이 제고됐다. 공공외교는 경제·군사력을 주무기로 하는 ‘하드파워’에 대비되는 소프트파워를 자산으로 한다.
한국이 정책적 목표를 갖고 공공외교에 뛰어든 것은 1990년대 초반이다. 소프트파워를 무기로 하는 공공외교 분야에서도 여전히 선발주자들의 벽은 견고했다. 한류 등에 힘입어 최근 한국 공공외교의 위상이 제고됐지만, 자원이나 네트워크 면에서 미국, 영국, 일본 등 선진국 수준을 따라잡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2014년 10월 서울에서 결성된 중견국 공공외교협의체는 변화의 시도 중 하나다. 2013년 중견국 협의체인 믹타(MIKTA)가 결성되며 한국 외교에 ‘중견국 외교’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 이것이 공공외교 분야에 구현된 것이 GPDNet이다.
GPDNet은 국제기구가 아니지만 국가별로 공공외교나 문화교류를 담당하는 하나의 기관이 국가대표 자격으로 참여해 국제기구와 흡사한 운영체계를 갖는다. 한국에서는 한국국제교류재단(KF)이 창설에 중심 역할을 하고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김태환 국립외교원 교수는 10일 “한국은 냉전과 분단 등 구조적 한계에 부딪혀 강대국 중심 국제질서에서 가장 피해를 본 나라 중 하나”라며 “한국이야말로 이 질서에 맞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데 중심 역할을 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분석했다.
◆넓어지는 공공외교 영역
공공외교는 어떤 수단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응용된다. 한류·K팝 등 문화자산을 활용하면 문화외교가 되고, 과학기술·의료지식 등을 공유할 수도 있다. 냉전시대에 동서 간에 오간 선전전, 즉 ‘프로파간다’는 오늘날 사실관계에 기반한 ‘미디어 외교’로 변모했다. 시민단체가 직접 유엔 등 국제사회에 목소리를 내는 사례도 있다. 군사·경제력 외에도 다양한 자산을 활용할 수 있으니 중견국의 진출 범위가 다양하고 넓다. 중견국 뿐 아니라 일부 개발도상국까지 자신만의 공공외교에 눈을 돌리는 이유다.
올해 GPDNet에 회원 신청을 한 케냐 공무원 크리스틴 마시요이 레메인씨는 총회장에 화려한 전통 문양 직물로 만든 드레스를 입고 등장했다. 케냐에 전통 직조 기술이 발달했다는 점을 알리면서 자연스럽게 케냐의 문화 수준을 홍보한 것이다. 카말 하미두 카타르국립대 미디어학 교수는 서구 중심 미디어 관행에서 벗어나려는 메나(MENA·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의 미디어 외교 사례를 알렸다. 도하에는 9·11 테러 이후 CNN으로 대표되는 서구 미디어 질서에 대항하기 위해 설립된 아랍어권 국제방송사 ‘알자지라’의 본부가 있다. 올해 GPDNet 청년워크숍 주제는 ‘디지털 공공외교’였다. 각국에서 초대된 청년들이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디지털 영역의 급성장이 국경을 넘는 소통에 미치는 영향을 토론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주미대사 등을 지낸 비세라 투르코비치 박사는 ‘스레브레니차의 어머니들’ 사례를 소개했다. 투르코비치 박사는 “끔찍한 스레브레니차 학살의 현장에서 평범한 엄마들의 끈질긴 노력이 국제 여론까지 바꿔놓은 사례”라고 설명했다. 학살 당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주부가 시작한 이 단체는 희생자와 유족들의 지지를 얻어 유엔에 끊임없이 학살의 잔혹상을 알렸고, 국제사회의 여론을 환기시켰다.
◆‘모호성’ 해결 과제… ‘공동의 어젠다’ 필요
공공외교가 다양한 영역을 포섭한다는 것은 유연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명확한 경계를 세우기도 어렵다는 뜻이다. 공공외교를 다루는 GPDNet도 같은 어려움을 겪는다. 민간과 정부 중간에 위치한 ‘1.5 트랙’ 단체로서의 성격이 모호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총회에 참석한 아델리나 수에미스 필리핀 국가문화예술위원회 평가국장은 GPDNet의 역할을 평가하면서도 “공동의 어젠다 부재를 해결하고 대중이 알기 쉽게 다가가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설명했다.
이 ‘공동의 어젠다’를 만드는 데 다시 한국의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조언이다. 김태환 교수는 “중견국 간 연대를 도모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데 한국의 리더십이 역할을 할 수 있다”며 “환경, 이주, 젠더 등 공통의 과제를 어젠다 삼아 회원 간 프로젝트를 만드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20일부터 22일까지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제4회 글로벌공공외교네트워크(GPDNet) 총회의 또 다른 관전포인트는 ‘멤버십 경쟁’이었다. GPDNet 회원이 되면 20개국이 넘는 중견국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다.
올해 회원 자격을 신청한 국가는 총 8개국이다. 말레이시아에선 두 기관이 회원자격을 신청해 경쟁하는 보기 드문 광경을 연출했다. 각 기관들은 총회에서 공식 홍보 시간을 가졌지만, 진짜 ‘작전’은 그 외의 곳에서 벌어진다. 쿠바 국제정책연구센터(CIPI) 관계자는 식사시간마다 테이블을 바꿔가며 열띤 홍보전에 나섰다. GPDNet 창설에 큰 지분을 갖고 있는 한국에서 온 기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말레이시아 관계자는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국가 중 싱가포르와 필리핀만이 회원국으로 참여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했다.
이들에게 왜 GPDNet 회원국이 되려하느냐 물으면 십중팔구 ‘뭉쳐야 산다’는 중소국가의 생존논리가 돌아온다. 세르비아 대표로 회원기관 신청을 한 베오그라드 소재 ‘포럼4444’의 조르제 루키치 대표는 “세르비아는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더 많은 국제사회의 그룹에 속해 배제되지 않으려 한다”고 소개했다. 그는 “발칸국가 간 지역협의체가 있으며, 유럽연합(EU) 가입은 세르비아의 오랜 숙원”이라고 설명했는데, 지난주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정 후 EU가 세불리기에 나서면서 세르비아는 가입 신청 10여년 만에 EU 회원국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GPDNet은 지역적 제약이 없기 때문에 회원이 되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중견국들과도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게 루키치 대표의 기대다. 세르비아는 주카타르 대사관 소속 외교관까지 합세해 뜨거운 ‘선거운동’을 펼쳤다.
결국 이들 중 4개국 기관이 회원으로 받아들여졌고 나머지는 준회원이 됐다. 국제기구가 아닌 만큼 장벽을 높게 설정하기보다 다양한 회원국이 참여해야 한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진 결과지만, 한 회원국 관계자는 “‘중견국’ 네트워크라는 취지에 맞아야 할 것”이라며 명분을 강조하기도 했다.
도하=글·사진 홍주형 기자 jh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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