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L 연구소의 여명기와 패미컴의 발매
아르바이트였던 저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그대로 HAL 연구소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이 제게 잘 맞았다고 할까요, 하고 있는 게 재밌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HAL 연구소는 작은 회사였기 때문에, 저는 젊은데 여러 가지 판단을 내리는 당사자가 되었습니다. 특히, ’개발‘에 관해서는 선배가 단 한 명도 없었기에, 저는 개발부의 사원 제1호였습니다.
때문에, 개발에 관한 것들은 제가 전부 판단해야만 했습니다. 상담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한 가지, 얄궂은 운명의 장난으로, 제가 정사원이 되고 다음 해에 닌텐도에서 패미컴 (패밀리 컴퓨터)가 발매되었습니다.
저는 아르바이트였을 때부터 PC에서 작동되는 게임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게임을 만드는 데 있어서, 패미컴이라는 하드웨어에는 확실히 ’기존의 것과 이질적인 좋음‘이 있었습니다.
당시, 수십만 엔이나 했던 PC보다도 1만 5천 엔의 패미컴 쪽이 게임을 하는 데 있어서 압도적으로 알맞았습니다. 저는, 이 하드웨어로 세상이 바뀐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관여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HAL 연구소에 투자했던 회사 중에 한 군데가 우연히 닌텐도와 거래를 하고 있어서, 그 회사의 사람에게 닌텐도를 소개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 패미컴의 일을 하고 싶다‘라는 한가지 마음으로, 저는 교토의 닌텐도로 갔습니다.
당시, 저는 이십 대 전반의 나이였습니다. 양복은 입고 있지만, 확실히 익숙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런 애송이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일을 시켜주세요‘라고 하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일을 받으러 가는 쪽도 가는 쪽이지만 일을 주는 쪽도 참 힘들었을 것 같네요(웃음).
제가 맡은 일은 게임 소프트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것이 닌텐도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패미컴 초기에 나왔던 ’핀볼‘이나 ’골프‘는 제가 HAL 연구소 사람들과 같이 만들었던 것입니다.
패미컴 소프트는 어쨌든 만드는 게 즐거웠기도 했고, 무엇보다 제가 만든 것이 전 세계에 엄청나게 많이 팔려나갔습니다. 의뢰를 받고 하던 일이었기에 팔렸다고 해서 돈을 버는 건 아니었지만, 스스로 만든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습니다.
옆자리의 친구 외에는 몰랐던 것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것이니 저는 재미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패미컴의 발매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관여한 것으로, 결과적으로 패미컴이라는 게임기가 크게 성장하는 과정에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무척이나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HAL 연구소도 겨우 다섯 명이었던 사원이 10년 만에 90명 정도가 되었을까요.
제 직급도 개발 책임자 같은 것이 되어, 명찰에는 과장이라고 적히게 되었습니다만, 끝내는 개발부장이 되어있었죠.
지금 회상해보면, 당시 저희가 개발했던 게임은 ‘기획은 있지만 아무도 못 만들어서 곤란했던’ 게임뿐이었습니다. 거기서 어느 정도의 평판을 얻는 것이 가능했기에, 기술적으로 평가를 받고, 그것을 다음 일로 연계할 수 있었던 것이겠죠.
사장취임과 15억엔의 빚
제가 32살이었을 무렵, HAL 연구소는 경영위험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33살에는 제가 사장으로 취임했습니다만, 회사가 그러한 상황이었기에 정말로 경사스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사장이 되었던 이유는, 굉장히 단순히 말하자면 다른 누구도 없었기에 일 겁니다. 저는 항상 그렇지만, 좋아하냐 싫어하냐가 아닌 ‘이건 내가 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면 바로 각오가 생깁니다.
넓은 의미에서 회사가 도산해, 일단은 마이너스 15억 엔이라는 게, 사장으로서의 첫 시작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15억 엔을, 1년에 2억 5천만 엔씩, 6년간 갚아가는 것으로 되어있었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도 회사의 유지비가 들어갔으니, 사원의 급료를 주고 회사를 돌려가면서 다른 빚으로 갚아나갔습니다.
변제는 했지만, 빚이라는 의미에선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쳤으니 그리 가슴 쭉 펴고 있을 일은 아니죠.
하지만, 얻기 힘든 경험을 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만큼의 빚을 진다는 것은 모종의 극한상태입니다. 그런 때에는, 정말로 여러 가지가 보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대할까’ 라던지요.
예를 들면, 제가 새롭게 사장으로 은행이 인사를 드리러 가겠죠? 30대의 애송이가 ‘제가 사장이 되었으니, 열심히 빚을 갚겠습니다’라고 말하러 가는 겁니다. 그러면, ‘열심히 해주세요’라고 말해주시는 은행과, ‘제대로 안 갚으면 곤란하다고!’라며 엄청나게 고압적인 태도로 나오시는 은행이 있었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그때 태도가 고압적이었던 은행일수록 그 후 빠르게 이름이 바뀌었다는 겁니다. 그만큼, 저쪽도 힘들었다는 것이겠죠.
대하기가 어려웠던 것은 회사 밖의 사람들만이 아니었습니다.
회사가 경영위기가 된 후, 제가 사장이 되어 회사를 다시 세워가고 있었을 무렵, 저는 개발부문 중에서 가장 종합력(綜合力)이 높은 사람이라는 정도의 신뢰는 있었기에 일단 모두가 말을 들어주긴 했습니다. 다만, 기본적으로 회사에는 사원으로부터의 신용이 없었습니다.
뭐랄까, 경영위기에 빠진 회사라는 건 사원들의 눈에는 불신 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겠죠. 그야, ‘회사의 지시에 따라 일을 한 결과가 이건가?’ 하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니까요.
때문에, 저는 사장에 취임했을 때, 1개월에 걸쳐서 오로지 사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만 했습니다. 그때, 수많은 발견이 있었습니다.
저는 상대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려고 했는데, 직접 한 사람 한 사람 이야기를 나눠보니 이렇게나 많은 발견을 할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무엇이 우리들의 강점인지, 무엇이 약점인지 알아보려고 했었던 겁니다.
그것을 알 수 없으면, 저는 사장으로서의 결정을 내릴 수 없으니까요.
예를 들면, 프로그램에 있어서 판단기준은 (코드가) 짧다거나, 깔끔하다거나, 빠르다는 것이 기준이자 척도이죠. 회사의 최종결정자로서, 그러한 것들을 판단하는 기준을 만들고 싶어서, 사원 한명 한명과 면담을 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생각 이상으로 다양한 의견이 나왔던 겁니다.
역시, 경영이라는 것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거겠죠. 그렇다고 해서 단기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항상 옳다고는 할 수 없으니,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회사가 모종의 극한상태에 처했을 순간부터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아마, 면담을 했을 그때, 저는 ‘판단이라는 것은 정보를 모아 분류하고, 우선도를 매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나온 우선도에 따라 여러 가지 일들을 결정해서 해나가면 된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판단을 거듭하다 보면 여러 가지 일들이 잘 돌아가기에, 분명 여러 일에 적용할 수 있는 진실이라고 느껴서 그게 사장으로서의 자신감으로 이어져 가는 겁니다.
지금의 저는 그 당시보다도 많은 것들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33살의 저 자신의 도전이 얼마나 어려웠었는지, 지금의 제가 더욱 잘 알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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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책 다 읽었는데 사장으로서의 경영 철학, 개발자로서의 개발 철학 등 좋은 이야기로 많았습니다. 다만 기대했던 것보단 게임 이야기가 적어서 그쪽 방면으로 생각하시는 분은 좀 실망하실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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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감사합니다. 내용이 궁금했는데 번역이 진짜 매끄럽고 문맥이 술술읽히네요~ 능력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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