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정록 - 조선군 사령관 신류의 흑룡강원정 참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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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흑룡강원정(나선정벌)의 실상과 야전의 생생한 현장감을 담다
조선시대에는 ‘북정록北征錄’이라는 제목을 단 자료가 여럿 존재했다. 이 책에서 다룬 《북정록》은 1658년 제2차 ‘흑룡강원정(나선정벌)’의 조선군 사령관 신류가 남긴 진중일기를 이른다.
《북정록》은 당시 원정의 추이를 상세하게 전할 뿐만 아니라, 17세기 무렵 조선의 해외 원정 방식, 무기 체계와 화력의 성능, 청나라와의 관계, 대외 인식 등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1차 자료다.
흑룡강원정(나선정벌)이란 17세기 중반 북만주로 남하하는 러시아(나선)를 저지하려던 청나라의 출병 요구에 따라 조선군이 송화강松花江(쑹화강)과 흑룡강黑龍江(아무르강·헤이룽강) 유역으로 1654년과 1658년에 걸쳐 두 차례 출정한 사건을 이른다.
1차 원정(1654)에 대해서는 사령관 변급邊?이 개선 후에 올린 보고 내용이 《효종실록》에 잘 남아 있고, 2차 원정에 대해서는 사령관 신류가 작성한 《북정록》이 원정의 실상을 매우 상세하게 전한다.
머릿말 - 4
< 북정록>에 대하여 - 8
북정록 - 21
신류 연보 - 102
북쪽 바닷가에 오랑캐 도적 떼가 있는데, 그 소굴이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른다. 그들은 배를 집으로 삼아 흑룡강黑龍江 상?하류를 오르내리면서 왈가曰可 지방을 노략질하고 있었다. 청나라 사람들이 여러 차례 싸웠으나 모조리 패했다. 갑오년甲午年(1654, 효종 5)에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구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최근에 다시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 본문 23쪽
이른 아침에 열벌 마을을 떠나 흑룡강 어귀를 지나 20여 리쯤 내려가니, 적선 열한 척이 닻을 내리고 강 가운데에 주둔하고 있었다. 모든 배가 노 젓기를 재촉해 적선을 향해 곧장 다가가자, 적선은 돛을 올리고 하류로 10여 리를 달아나 강가 언덕에 의지해 배들을 연결시켜 놓았다. 적의 병사들은 판옥 위에 올라 관망하면서 정찰하고 있었다. 모든 배가 번갈아 들락날락하면서 적선과의 거리가 한 마장쯤 떨어졌을 때 일제히 대포를 쏘면서 교전에 들어갔다.
- 본문 54쪽
야전 사령관의 개인 일기이자, 당시 조선과 청나라의 상황을 보여 주는 역사서
신류의 《북정록》은 야전의 현장감을 매우 생생하게 전해 줄 뿐만 아니라, 17세기 중반 효종孝宗 재위(1649~1659) 당시 조선의 여러 상황까지 다양하게 제공하는 소중한 자료다.
《북정록》의 내용을 통해 손쉽게 파악할 수 있는 ‘직접’ 정보 외에도, 내용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통해 추출해 낼 수 있는 ‘간접’ 정보도 무궁무진하다. 《북정록》이 갖는 자료 가치를 몇 가지로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투에 참여한 지휘관이 일지 형식으로 기록한 일종의 진중일기다. 조선의 흑룡강원정(나선정벌)은 1650년대에 4년 터울로 두 차례 있었는데, 1차 원정(1654) 때 사령관 변급이 별도의 진중일기를 남기지 않은 데 비해, 2차 원정(1658) 사령관 신류가 일지 형식의 기록을 남긴 점은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조선시대에 나온 진중일기 가운데 으뜸이 이순신李舜臣(1545~1598)의 《난중일기》임은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내용의 규모 면에서 신류의 《북정록》이 《난중일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 꼼꼼함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 특히 해외 출정에 임하는 야전 사령관의 감정과 심리 상태를 솔직하게 표출한 면에서는 오히려 《난중일기》보다 더 세밀한 부분이 적지 않다. 전쟁사 관련 1차 자료가 대개 전황 판단이나 전투 결과 보고서 내지는 지휘부의 전략과 전술 관련 내용을 주로 담는 데 비해, 야전 사령관 본인의 주관적 감상을 세밀하면서도 담담하게 기록한 점에서, 《북정록》에는 이순신의 《난중일기》보다 뛰어난 면도 있다.
둘째, 내용의 사실성과 정확성이 사료적 가치를 더욱 높인다. 1차 자료라고 해서 모두 정확성이 뛰어나지는 않다. 어떤 역사 현장을 직접 경험하거나 목도한 사람이 기록을 남긴다고 해도, 자기 입장에 따라 사실의 취사선택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정록》은 피아간의 전투 병력과 전투 상황을 매우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기록한 점에서 사료로서 가치가 더욱 두드러진다. 《북정록》에 보이는 이런 특징은 당시 전투에서 패해 퇴각한 러시아군 병사들이 상급 지휘 본부에서 심문을 받을 때 진술한 전투 상황 내용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점에서 더욱 돋보인다.
셋째, 전투 상황뿐만 아니라 조선군이 청군靑軍에 어떻게 편제되었는지에 대해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2차 원정(1658) 당시 영고탑寧古塔(닝구타)에서 청나라 군대에 합류한 조선군은 청나라의 8기제八旗制에 따라 편성돼 있던 청군의 여덟 부대에 분산, 배치되었다. 이는 ‘연합군’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조선군이 신류 휘하의 독립부대로 작전에 임하지 못했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차라리 용병이라면 그 대가로 돈이라도 받았겠지만, 당시 조선군 출병은 청나라의 청병淸兵이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징병徵兵에 따른 결과였다. 1차 원정(1654) 때의 부대 편성 기록이 전하지 않는 탓에 진실을 알 수는 없으나, 8기제가 공고하던 청나라 부대 편제를 감안할 때, 그때도 마찬가지로 분산·배속됐을 것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는 명-조선 관계보다, 청-조선 관계가 훨씬 더 수직적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이렇듯 《북정록》은 청-조선 관계의 상하 질서가 얼마나 엄혹하고 현실적이었는지 가감 없이 보여 주는 자료다.
넷째, 저자 신류가 청군 지휘관들에게 어떤 호칭을 사용했는지 살핌으로써 당시 청나라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출정 중에 작성한 일기에서는 청나라 군인들을 대개 청장淸將, 대장大將, 부수副帥, 부장副將, 성주자城主者, 청인淸人, 피배彼輩, 청차淸差, 차인差人 등으로 칭했다. 이는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서 어떤 상하 관계도 느낄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직함이나 호칭을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청나라 군속 중에서도 만주족이 아닌 사람들을 한인漢人이나 서촉인西蜀人처럼 그 종족을 분명히 기록한 점이 흥미롭다. 그런데 작전 임무를 마치고 조선으로 귀국한 후에 작성한 부기附記에서는 청군 지휘관에 대한 호칭이 모두 괴호魁胡나 부호副胡라는 비칭으로 확연히 바뀌었다. 영고탑 주둔 청나라 병사들도 더 이상 청인이라 부르지 않고, 영고지호寧古之胡라 낮춰 불렀다. 이는 신류의 의식 체계 속에서 만주족의 청나라는 곧 ‘오랑캐 나라’라는 의식이 얼마나 뿌리 깊었는지 잘 보여 준다. 청나라에 대한 이런 의식은 신류만이 아니라 당시 조선 조야에도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이렇듯,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북정록》은 전쟁사의 범주를 넘어 다양한 정보를 발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다섯째, 17세기 무렵 만주 일대의 인문지리 연구에도 큰 도움을 준다. 조선 원정군은 함경도 일대 포수들을 군현별로 차출해 구성했는데, 모두 회령會寧에 모여서 점호를 받고 두만강을 건너 영고탑의 청군 사령부로 이동했다. 병사들의 행군 속도로 약 7~8일 걸리는 이 노정에 대해 신류는 비교적 상세하게 지리·지형 관련 기록을 남겼다. 각종 지명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소중하다. 또한 현재의 목단강牡丹江(무단강)과 송화강을 가리키는 옛 지명들을 비롯해, 영고탑에서 목단강과 송화강을 거쳐 흑룡강에 이르는 지세와 각종 지명 및 부락 이름도 매우 풍부하다. 따라서 《북정록》은 역사지리 자료로도 손색이 없다.
이 밖에도, 17세기 당시 조선군·청군·러시아군의 개인 화력(조총) 비교, 함경도 일대의 병사 차출 방법, 강상전江上戰의 일반 유형, 휘하 병사들에 대한 사령관 신류의 섬세한 인간적 관심 등등. 《북정록》을 통해 알 수 있는 정보는 거의 무한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