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내미가 학교에서 현장학습을 가는 날.
아예 전날부터 진지한 얼굴로 "토토로 도시락을 싸주세요. 토토로 도시락."이라고 강력하게 요청을 합니다.
예전에 한 번 만들어 줬더니 잊지 않고 또다시 가져가고 싶은 모양입니다.
평소에 학교 급식만 먹는지라 이 때 아니면 또 언제 도시락을 싸줄까 싶어서 새벽부터 스팸을 자르고 굽기 시작합니다.
스팸을 얇게 잘라 굽다보면 언제나 떠오르는 기억이 있습니다.
초등학생 무렵, YMCA에서 주최하는 캠프에 참여하며 이곳저곳 여행다닐 때의 이야기입니다.
외딴섬에 들어가서 텐트 치고 직접 밥을 해 먹으며 일주일을 보내는 수련회가 있었는데, 출발하면서 조별로 쌀과 반찬거리를 다 거둬갈 때 왠지 아까운 마음에 스팸 통조림 하나를 몰래 숨겼습니다.
그 후 일주일 동안 아이들끼리 만든 어설픈 반찬에 설익은 밥, 탄 밥을 번갈아 먹다 보니 무럭무럭 샘솟는 것은 캠프에서 강조하는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아니라 가방 한구석에 숨겨둔 스팸 통조림에 대한 갈망 뿐이었지요.
하지만 빡빡하게 짜인 시간표 탓에 몰래 스팸을 까먹을 엄두도 못 내고 있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날, 마지막 식사를 하러 들린 식당에서 겨우 기회를 잡았습니다.
용기를 내서 주방 아주머니에게 스팸을 건네며 구워달라고 부탁한 거죠.
같은 조에 속했던 아이들 다섯 명 역시 입에서 침을 흘리며 눈빛을 번뜩였습니다.
그 아이들 역시 이 스팸의 존재를 알았기 때문에 나를 대장 내지는 물주 대접하며 “우리 스팸 언제 먹을 거야?”를 되묻느라 지친 상태였거든요.
다른 조의 아이들은 열심히 밥을 먹기 시작했지만, 우리에겐 앞에 놓인 풀떼기 반찬보다도 스팸이 중요했기에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앞에 놓인 구운 스팸 접시!
그러나 접시 위에는 종잇장처럼 얇게 썰어 구운 스팸이 사람 수에 맞춰 달랑 여섯 조각 뿐.
아무리 봐도 한 캔은커녕 반의반 캔도 안되어 보이는 분량에 모두가 분노하며 주방 아줌마에게 따지기 위해 달려갔지만...
가는 길에 마주친 조교 선생님들의 식탁 위에 나머지 스팸이 두툼하게 썰려 올라간 것을 보고 울분을 삼키며 포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일본 속담에 "먹을 것의 원한은 무섭다"는 말이 있는데 그 원한을 이 때 처음으로 실감했지요.
꼭 그때의 아쉬운 기억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 후로도 스팸은 기회만 되면 구워 먹는 최고의 친구였습니다.
다른 반찬이 없을 때도 스팸 한 캔에 달걀 하나 곁들여 구워내면 진수성찬을 앞에 둔 듯했으니까요.
한국인의 밥상에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오죽하면 명절 선물 세트로 스팸만 가득 담은 상자도 나올 정도입니다.
그래서 스팸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싸구려 음식으로 천대받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맛있는 것도 지나치게 먹으면 질리기 마련이다. 하물며 진짜 햄도 아니고 햄 통조림이다. 전쟁 기간 내내 햄 통조림을 먹었으니 물릴 만도 한데, 1945년 전쟁이 끝난 후에도 햄 통조림이 계속 공급됐다. 이는 방송에도 반영되어 영국의 코미디 프로그램, 몬티 파이슨에는 모든 음식 재료가 스팸인 식당이 등장하기도 했다. 메뉴에 적힌 음식들은 모두 달걀과 스팸, 베이컨과 스팸, 달걀과 베이컨 소시지와 스팸, 스팸 베이컨 소시지와 스팸 등 스팸 요리 뿐이다. (중략) 그러니 당시 영국 사람들이 얼마나 물려 있었는지 짐작할 만도 하다. 이를 계기로 스팸은 ‘쓸모없이 넘쳐나는 물건’을 가리키는 속어로 쓰이기 시작했다.”
- 윤덕노 <전쟁사에서 건진 별미들> 중에서
그 맛있는 스팸이 질린다니 배부른 투정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 유학생활 당시, 마트에서 돼지 뒷다리를 통으로 절이고 훈연한 다음 얇게 썰어 낸 진짜 햄을 사서 먹어 보니 조금은 공감이 가기도 했습니다.
육즙 많고 씹는 맛이 살아있는 햄에 비하면 맛없는 어깨살에 뒷다리 조금 섞어서 (SPAM이라는 이름부터가 Shoulder of Pork and Ham, 즉 돼지 어깨살과 뒷다릿살이라는 뜻) 기름과 전분을 넣고 갈아버린 고기 통조림으로는 ‘진짜’를 따라잡기란 어려웠으니까요.
오죽하면 2차대전 당시의 병사들은 짜고 기름진 스팸에 질린 나머지 발이 젖지 않도록 통조림을 참호 바닥에 깔아놓거나 햄을 태워서 연료로 썼다는 말도 있을 정도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라면 스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인 쌀밥 문화권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고소하고 찰진 밥은 그 식감에 익숙하지 않은 서양인에게는 낯선 존재지만, 일단 흰쌀밥에 익숙해지면 스팸의 진가를 재발견하게 되거든요.
담백하고 고소한 밥에 짭짤하고 기름진 스팸은 최고의 궁합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는 하와이에 오늘날까지도 남아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전후로 하와이 역시 신선한 고기의 공급이 제한됐고, 전쟁 중이었기에 바다로 나가서 마음 놓고 생선을 잡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하와이의 일본계 미국인들은 생선 대신 구운 햄을 하얀 쌀밥에 얹어 떨어지지 않도록 김으로 감싸 먹었다. 생선 초밥이 아닌 햄 초밥을 만든 것이다. 더구나 일본계가 아닌 주민들이나 하와이에 주둔 중인 장병들에게는 거북한 날생선보다는 햄을 얹은 무스비가 훨씬 맛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하와이에서는 값싸고 맛있는 통조림 햄을 얹은 무스비가 사라지지 않고 김밥처럼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널리 퍼졌다.”
- 윤덕노 <전쟁사에서 건진 별미들> 중에서
초밥 장인들이야 손으로 슬쩍 쥐어도 밥알 갯수까지 동일한 초밥을 만들 수 있다지만, 제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리고 스팸 무스비에 어울리는 방식도 아니구요. 그저 갓 지은 흰 쌀밥을 비닐 랩 깔아놓은 스팸통에 꾹꾹 눌러담아 만드는 게 제격입니다.
마지막에는 비닐을 잡아서 끌어올리기만 하면 하와이 어부들이 그물로 고기 잡듯 밥이 낚여 올라옵니다.
평소였다면 그냥 이렇게 모양 잡은 밥에 스팸 올리고, 떨어지지 않도록 길쭉하게 자른 김밥 김 한 줄 두르면 완성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캐릭터 도시락을 만들어야 하니 좀 더 손이 바빠집니다.
슬라이스 치즈를 4등분하고, 끝을 가위로 둥글게 잘라서 햄 위에 얹습니다.
그리고 김으로 만든 줄을 둘러서 떨어지지 않도록 잘 고정시킵니다.
원형틀로 동그랗게 찍어낸 치즈 눈과 더 조그만 김 눈을 마요네즈로 접착제 삼아 붙여줍니다.
김으로 얼굴 표정 만들때는 요리학교에서 사용하던 플레이팅용 핀셋이 큰 도움이 됩니다.
일본의 유명 사립 유치원에서는 엄마들이 예쁜 캐릭터 도시락 만드는게 기본 소양이고, 그도 여의치 않으면 캐러벤(캐릭터-벤또의 약자)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가게에서 사서 보내기까지 한다던데
토토로같은 덩치의 아빠가 새벽부터 핀셋 들고 토토로 도시락 만드는 모습은 딸내미의 기억에 어떻게 남을지 궁금하네요.
얇게 자른 김으로 코와 이빨을 붙여주면 완성. 원래는 수염도 붙이면 더 좋은데 시간이 촉박해서 잊어버렸습니다.
스팸 굽고 밥 모양 잡는 것은 소풍 당일날 하더라도 치즈나 김을 잘라서 부품(?)만드는 것은 전날 미리 해두는 게 좋습니다.
이렇게 만든 스팸 초밥, 무스비는 예전에 오바마 전 대통령이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며 맛깔나게 먹는 모습으로 뉴스에 오르내리기도 했지요.
전쟁통에 병사들과 배고픈 국민을 먹여 살리던 스팸은, 한편으로는 가짜 고기나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스팸메일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식 초밥과 퓨전을 하며 대통령도 즐겨 먹는 새로운 요리로 재탄생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미군 전투식량 요리책에 적힌 말을 단순한 허풍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을 겁니다.
“격렬한 전투는 유명한 장군들 뿐 아니라 훌륭한 요리들 또한 만들어 냈다. Great battles have not only produced famous generals, but gourmet dishes as well.”
무스비만 덜렁 넣어두기는 좀 그러니까 도시락통 한 쪽에는 게맛살 샐러드, 다른 한쪽에는 달걀 소보로를 깔아줍니다.
그 위에 토토로 무스비 두 마리를 얹으면 준비 완료.
이렇게 도시락 임무를 완수하고 직장으로 후퇴를 합니다. 이제 아이들에게 옷 입히고 아침 먹이고 책가방 싸서 보내는 격렬한 전투는 아내가 바통을 이어받아 진행하지요.
그러고보면 아이들 역시 훌륭한 요리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계기가 아닐까 싶네요.
220.92.***.***
선생들 인성 수준 ㄷㄷ 먹을게 없어서 애들 반찬을 뺏어가네
180.69.***.***
이것도 무스비...(앗! 이게 아닌가!?)
211.234.***.***
그렇다기보단 식당 아지매가 잘보이려고 자기맘대로 대접했을거란 킹리적 갓심이 들더군요.
114.129.***.***
?? 아빠 소주 1병각
121.133.***.***
와 퀄리티 미쳤네요
180.69.***.***
이것도 무스비...(앗! 이게 아닌가!?)
220.92.***.***
선생들 인성 수준 ㄷㄷ 먹을게 없어서 애들 반찬을 뺏어가네
211.234.***.***
로지온 '로쟈'로마노비치
그렇다기보단 식당 아지매가 잘보이려고 자기맘대로 대접했을거란 킹리적 갓심이 들더군요. | 23.05.09 18:12 | |
39.7.***.***
그건 그거대로 절도 아닌가요... | 23.05.25 21:47 | |
121.133.***.***
와 퀄리티 미쳤네요
114.129.***.***
?? 아빠 소주 1병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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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님께서 오오토로 도시락을 요청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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