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도서명: 박정아 지음, 『로네펠트‘s 홍차 다이어리』, 혜지원, 2018
흔히들 죽기 전에 주마등이 보이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미래를 보게 되는 일도 있는데, 특히 아이가 태어날 때가 그렇다.
갓 태어난 딸아이를 품에 안아보는 순간 결혼식에 손잡고 들어가는 장면까지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니까.
미국 유학 중에 얻은 딸이라 그런지 출생에서 결혼식까지의 과정 역시 아메리칸 스타일로 펼쳐졌는데,
걸스카우트 복장으로 동네를 돌아다니며 쿠키를 팔거나 친구들을 초대해서 잠옷 차림으로 밤새워 노는 파자마 파티를 하는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 것은 티파티를 벌이는 장면이었다.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아이가 드레스를 입고 숙녀 흉내를 내며 우아한 척 찻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상상하면 저절로 ‘아빠 미소’가 지어졌다고나 할까.
지금은 태권도복 입고 개다리춤 추며 돌아다니는 딸내미를 보며 세상사 생각대로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사실만 실감하고 있지만.
<책에서는 홍차를 즐기는 여러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차가운 음료에 우려내는 냉침법이다. 개인적으로는 처음 홍차에 푹 빠진 계기가 바로 이 냉침이었는데, 달달한 체리향 나는 루피시아의 홍차를 사이다에 우려내서 마시면 마치 샴페인 마시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색과 향이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사이다 홍차 들고 샴페인인 척하는 그 마음이 티파티하는 소녀들이 찻잔 들고 어른인 척하는 심정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무의식중에 티파티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된 이유라면 역시 고급스럽고 귀족적인 그 분위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역사적으로 차는 동서를 막론하고 사치품이었다. 비록 소설 속의 허구이긴 하지만 ‘삼국지’의 유비가 몇 년간 번 돈을 탈탈 털어 어머니에게 드릴 차를 구하러 가는가 하면
펄 벅의 ‘대지’에서는 왕룽이 결혼하는 날 아침에야 손을 벌벌 떨어가며 끓는 물에 찻잎 약간을 넣는다.
차의 산지인 중국에서조차 이런 지경이었으니 이역만리 유럽에서는 차의 위상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찻잎은 귀족이나 대부호가 아니고서는 손에 넣을 수 없는 보물이었고, 당시에는 또 하나의 사치품이었던 설탕을 산더미처럼 곁들여야 인심 좋다는 평가를 들었으며,
차를 우려내는 도구 역시 중국에서 수입한 도자기를 이용해야 했으니 은으로 만든 티스푼 정도는 오히려 저렴한 축에 속했다.
하지만 이러한 고급스러운 이미지는 시대가 변하며 오히려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카페에서 30초면 재빨리 뽑아낼 수 있는 커피에 비하면 홍차는 아무리 서둘러도 우려내는 데 몇 분씩 걸린다.
제대로 즐기자면 찻주전자 두 개에 슬롭볼, 슈가볼, 스트레이너, 슈거 니퍼 등 생소한 도구들까지 준비해야 하니 “빨리빨리”를 외치는 현대인에게 좋은 대우를 받기는 힘들다.
기껏해야 미리 포장해놓은 티백이 카페의 한쪽 구석에서 생과일주스와 함께 간신히 연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도 아니면 편의점의 밀크티 캔 음료로만 만날 수 있거나.
<홍차 문화는 유럽의 귀족 사회에서 만들어졌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화려한 모습만을 뽐낸 것은 아니다. 산업혁명 당시에는 대충 우려낸 저급 홍차에 설탕을 듬뿍 탄 것이 가난한 노동자들의 주된 에너지원이기도 했으니까. 티백이나 여러 형태의 인퓨저(차를 담아 뜨거운 물에 넣어 우려내는 도구)는 홍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바쁜 일터에서도 간단히 티타임을 즐길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다만 커피보다는 여전히 번거롭고, 제대로 홍차를 즐기기엔 부족한 점이 있기에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은 편은 아니다.>
이렇게 푸대접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홍차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특히 우아한 티타임을 즐기려는 여성들에게 압도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전통의 산물이니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당시의 커피하우스는 남자들이 점령한 사교의 장이었고, 여성들이 사교활동을 벌일 수 있는 곳은 숨도 못 쉴 정도로 코르셋을 졸라매야 하는 만찬회나 무도회가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베드퍼드 공작 부인이 점심과 저녁 식사 중간에 허기를 달래려고 홍차와 간단한 다과를 즐기기 시작했고,
이런 다과회에 친구들을 초대하면서 애프터눈 티는 상류 계층의 여성들이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사교 모임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관습은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일본과 한국에 이르기까지 소녀들의 마음에 하나의 환상으로 자리 잡았다.
머릴러 아주머니에게 친구를 불러 차를 마셔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빨강머리 앤의 반응이 이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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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은 두 손을 꼭 마주 잡았다.
“멋있어요! 머릴러는 역시 배려심이 있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그런 차모임을 동경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겠어요.
누군가를 티파티에 초대하면 즐겁고 어른이 된 기분이 들 거예요. (중략) 내가 식탁 윗자리에 앉아 차를 따르는 모습이 눈에 선해요.
그리고 다이애너에게 설탕을 넣겠느냐고 다정하게 물을 거예요! 다이애너가 설탕을 넣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하고 물어봐야 해요.
아,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려요.”
-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그린게이블즈 빨강머리 앤” 동서문화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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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른이 될 때까지 그 꿈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면 본격적으로 홍차에 빠져드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어떤 홍차를 드시겠어요?”라는 질문에 “어, 그냥 아무 거나요”라고 대답하는 귀부인은 없을 테니까.
다즐링이나 얼그레이와 같은 홍차 품종에 대한 지식은 기본이고, 여러 홍차 도구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단계를 넘어서 홍차나 찻잔의 브랜드까지 알아맞히는 모습을 그리게 된다.
이런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홍차를 다룬 책이 많이 출판되고, 그중에는 전문가나 차 관련 협회에서 펴낸 전문 서적도 부지기수다.
그 사이에서 인터넷 블로거가 쓴 이 책, ‘홍차 다이어리’가 초판 3쇄까지 발행되며 나름 인기를 끈 이유는 단순히 유용한 정보를 모아놓았을 뿐 아니라 바로 소녀 감성에 걸맞게 책을 꾸며놓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행 중에 베노아 티룸에서 마셨던 홍차. 애프터눈 티에 비하면 굉장히 간소화된 “크림티(홍차에 스콘만 간단히 곁들인 메뉴)”를 주문했는데도 각종 다과와 도구들이 한 상 가득 차려진다. 차 우려내는 주전자와 서빙하는 주전자가 따로 있고, 정확한 시간을 재는 모래시계와 스트레이너, 여러 종류의 설탕이 기본적으로 제공된다. 이런 번거로운 화려함은 신속 간편을 추구하는 요즘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여러 사람이 그 매력에 푹 빠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정보를 차곡차곡 정리해서 보기 좋게 진열해놓은 것이 아니라 티파티를 꿈꾸는 소녀의 일기장처럼 홍차에 대한 감상, 홍차 우려내는 법, 유명한 홍차 브랜드와 시음기 등이 중구난방으로 펼쳐진다.
여기에 손으로 그린 그림이나 예쁜 찻잔의 사진, 마치 보물지도처럼 그려놓은 홍차 전문점의 위치 등이 스티커로 붙인 것 마냥 삐뚤빼뚤 붙어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가독성은 염두에 두지 않은 글자 배치에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바뀌는 배경 무늬와 색상은 ‘정신 사납다’라는 감상이 절로 튀어나온다.
하지만 이런 무질서함 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꿈과 낭만도 있는 법이다.
“소나무 잎을 태운 훈향이 비 냄새와 어느 정도 닮아 있어서일까요. 비가 오는 날에 주저없이 고르는 차는 바로 랍상 소우총이랍니다. 정로환을 녹여 음료로 만든다면 바로 그 맛은 랍상 소우총과 흡사할 것 같아요. (중략) 일본 브랜드인 노리다케의 큐티 로즈는 잔잔한 연분홍 장미가 아름다운 찻잔이에요. 남대문 수입 상가가 가장 저렴. (중략) 홍차를 우릴 때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시간입니다. 처음에는 운치 있게 모래시계를 사용했다가 망각하는 사태가 발생해서 요즘에는 타이머를 사용합니다. 알람 소리가 큰 타이머를 구입하세요.”
드라마 “ㅅㅅ 앤 더 시티”의 멋진 직장 여성들이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뉴욕 시내를 종횡무진 휩쓴다면,
홍차는 햇빛 가득한 온실에서 드레스 입은 여인들이 한가롭게 찻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런 풍경이라면 어느 대학의 교수님이 홍차의 품종을 진지하게 설명하는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다.
수다스러운 소녀가 친구에게 홍차에 대해 속닥거리며 설명해주듯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내용이 연달아 나오는 것이 더 그럴듯하다.
이렇듯 치밀한 분석을 거쳐 딸아이의 책장에 책을 슬쩍 꽂아놓는다.
아빠의 로망을 실현하기 위한 십년대계(十年大計)의 첫걸음이라고나 할까.
ps. 다른 칼럼들은 도서관 홈페이지(https://www.nslib.or.kr/info/dataroom2.asp?mode=view&number=69&gubun=)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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