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오고 몇 달 지났을 무렵. 2016년 10월인가 11월인가 그랬을 겁니다.
심심해서 산책 삼아 아키하바라에 갔던 저는, 한 간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판화 전시를 하고 있다는 간판이었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아키바스트립1에 나오는 에우리안(……)이었습니다만,
간판에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인 팅클, 칸토쿠의 판화가 전시 중이라고 적혀 있었기에
귀여운 일러를 좋아하는 저는 호기심을 떨치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가서 문을 나선 그곳은 태피스트리 전문점인 축중심파(軸中心派)였습니다.
태피스트리에 엄청난 집착을 가지고 있는 저에겐 천국이나 다름없었죠.
그렇게 한참을 구경하다가, 판화를 보러 왔다는 원래의 목적을 떠올리고 더 안쪽으로 들어갔습니다.
판화 전시를 하는 곳의 점포명은 아르주네스(artjeuness)라고 하더군요.
전시관 입구에 직원 한 분이 계셨는데, 다가가자 몇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처음 오셨나요?" "무엇을 보고 오셨나요?" "연령대가 어떻게 되시죠?" "여기에서 좋아하는 작가님들을 전부 체크해 주세요."
설문지에 전부 기입을 하자, 입장자 표시로 쓰이는 듯한 스티커 하나를 어깨 부근에 붙여 주셨습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서니, 그곳은 천국보다 더한 신세계였습니다.
(사진 출처 : https://twitter.com/ejx_zaki)
※축중심파와 아르주네스는 내부 촬영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직접 찍은 사진은 없습니다.
꽤 자주, 이렇게 작가님을 모시고 이벤트를 열기도 합니다.
저 사진 안에 제가 있습니다.
정말 귀여운, 예쁜, 아름다운 일러스트들이 단순한 일러스트를 넘어선 그 무언가의 느낌을 팍팍 풍기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전시된 작품의 작가님들도 덕질 좀 했다 싶은 사람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그런 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직원분께 부탁을 하면 걸려 있는 그림을 떼어서 가져다 놓고 조명도 비춰 보며 감상할 수 있게 해주는데요, 이게 정말 좋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황홀감을 느끼며, 아키하바라에 갈 때마다 이곳을 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돈을 모아서 반드시 판화를 사고 말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돈 모으기 힘들었습니다. 일본에 오니까 덕질이 엄청 편해졌거든요.
아키하바라도 자주 들락거리고, 통판으로 파는 물건도 이것저것 따질 필요 없이 그냥 주문하면 집으로 오고…….
거기에 코미케, 선크리, 코미1 같은 이벤트도 열심히 참가를 해대니 정말 모이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1년이 넘게 걸렸지만, 어떻게든 제일 싼 판화를 하나 살 만큼의 돈을 모으긴 했습니다.
제 담당자분께 라인으로 언제 가겠다 연락을 넣고, 당일 가서 카탈로그를 보면서 고민을 참 많이 했습니다.
이리저리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결국 팅클 선생님의 일러가 마음에 들어서 그쪽으로 가닥을 잡고, 다시 카탈로그를 보며 고민에 빠졌습니다.
제 담당자인 I 씨와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얘기를 하다가, 제가 정말 마음에 들었던 그림을 짚으며 얘기를 꺼냈습니다.
"이거 정말 마음에 드는데, 가격대가 높아서 살 엄두가 나지 않네요."
했더니 I 씨 왈.
"그거 조금 작은 사이즈로 싸게 나온 것도 있어요."
잠깐 경직 후 "정말요?" "얼마죠?" 라고 묻고 다시 고민 페이즈.
원래 쓰려고 했던 금액보다 10만 엔쯤 컸기에, 정말 깊게 고민을 했습니다.
종이와 펜을 얻어서 열심히 여유자금 계산도 하며 고민하길 한 시간, 결국 사기로 결정했습니다.
구입 의사를 전하자, I 씨는 제작소 겸 물류창고 측에 전화를 해보더니, 수량이 적은 물건이라 찾는 것에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며
계약서 작성은 그 다음 주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그날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물건을 찾았다는 연락이 왔고, 월요일에 보기로 약속을 잡았습니다.
11월 26일은 보드게임&TRPG 모임이 있어서 참가하고, 도쿄에 사는 친구 집에 하룻밤 신세를 진 다음, 11월 27일 월요일.
드디어 매매계약서를 작성하는 날.
돈이 한꺼번에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다음 달 신용카드 포인트가 엄청 들어왔습니다 개꿀
이 돈이면 데탑도 새로 맞추고, 콘솔도 살 수 있고, 다른 굿즈도 엄청 많이 살 수 있는데…….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꿈꾸던 판화를 구입한다는 생각에 기분은 정말 좋았습니다.
그리고 배송 예정일인 2월 7일. 드디어 판화가 도착했습니다.
※촬영 도구가 폰카(갤럭시 노트5)와 소형 라이트밖에 없고, 촬영 실력도 없어서 사진도 동영상도 정말 못 찍었습니다.
육안으로 봤을 때의 느낌을 담을 수 없어서 아쉬워 미치겠습니다.
사가와를 통해서 배송이 되었습니다.
박스에도 판화 정보가 적혀 있습니다.
추후 옮길 때 번거롭지 않도록 측면만 개봉해서 꺼냈습니다.
보증서도 같이 왔습니다.
천 주머니에 싸여 있는 판화.
뒷면에는 작품과 액자에 대한 정보가 붙어 있습니다.
형광등 아래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방을 어둡게 하고 소형 라이트로 조명을 넣고 찍은 사진입니다.
그림 좌측 하단에 팅클 선생님(아마도 하루카제)의 사인이 들어가 있습니다.
조명의 각도, 그리고 보는 각도에 따라 느낌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동영상을 찍어 보긴 했는데, 정말 못 찍었으니 그냥 참고로만 봐 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7f1VgbVn_80
개인적으로, 축중심파는 덕질하러 아키하바라 간다는 사람이 있으면 꼭 가 보라고 추천하는 곳입니다.
그만큼 정말 좋은 곳이에요. 굳이 구입은 하지 않아도, 눈이 즐겁고 멘탈이 정화되는 기분이거든요.
이제 하나를 질렀으니, 다음에는 또 어떤 판화를 지르게 될지 벌써부터 걱정이 됩니다.
이런 게 하나로 끝날 리가 없잖아요. 하하하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