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롬은 사랑(성숙한 사랑)을 능동적인 힘, 인간과 타인을 결합하는 힘, 고립 분리를 극복시키면서 타인의 개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프롬슨 사랑을 행동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때 행동이란 스피노자가 말하는 '행동'인데, 스피노자는 감정의 방향이 능동적이냐 수동적이냐에 따라 행동과 격정으로 나뉜다고 보았습니다.
행동이란 능동적 감정이며 이는 곧 자기 감정에 있어서 자신이 주인이라고 보았으며,
격정이란 수동적 감정으로 이는 곧 자기도 모르는 동기에 의해 움직인다고 보았습니다.
저런 애가 톱 아이돌이라니 인정 못해! 모두의 관심도 스포트 라이트도 다 내거인데!
강하고.... 듬직하게 되고 싶어! 선배보다도 훨씬!
(검게 변하는 프시케)
(이러한 감정을 부추기는 지코츄 간부들)
(빼앗기는 프시케)
이전 글에서 말씀드렸다시피 프시케는 영혼입니다. 영혼의 사전적 의미는 육체에 깃들어 마음의 작용을 맡고 생명을 부여한다고 여겨지는 비물질적 실체이며, 따라서 프시케는 감정의 본질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검게 변하는 프시케는 수동적 감정 즉 격정은 선망, 야망, 질투 등의 감정 등으로 인해 자신의 감정에 있어서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는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것을 지코츄 간부들로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프롬은 사랑을 격정과 다르게, 능동적 감정인 행동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사랑이란 '참여하는 것'이지 이른바 '빠지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으며 또 사랑이란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프롬은 사람들이 '준다'에 관하여 오해를 하고 있기에 사랑에 있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보았으며 또 프롬은 '주는 것'이란 표현이 포기하는것, 빼앗기는 것 그리고 희생하는 것과 동일한 포현이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프롬은 성격이 비생산적이냐 생산적이냐에 따라 '주는 것'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고 사랑도 이와 같다고 보았습니다.
프롬은 비생산적 성격의 사랑은 '주는 것'이 곧 가난해지는 것이기에 주려하지 않으며, 만약 주더라도 이를 희생의 의미로 받아들여 덕으로 삼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와 반대로 생산적 성격의 사랑은 '주는 것'이 자신의 잠재적 능력의 최고의 표현으로 보았으며, 박탈이 아니라 주는 행위에 나의 '활동성'이 표현되어 있기에 주는것이 받는 것보다 즐겁게 느끼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벨의 계략에 빠진 큐어 하트와 레지나)
(끊어질 것 같은 실)
너희들이 잡고 있는 것은 거미 지코츄의 실이다.
고작해야 한 명의 무게정도만 버틸 수 있게 되어있지.
허나 누군가 마그마에 떨어진다면 한명정도는 살 수 있겠지.
그딴 짓을 할 리가 없잖아!
(고민하는 레지나)
마나... 마나랑 나는 대체 뭘까?
친구야.
마나는 변하지 않는구나...
마나, 정말 좋아해.
(마나를 위해 희생하는 레지나)
(웃는 모습의 레지나)
(두근두근 프리큐어 21화 中)
레지나는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여 마나를 살리기를 택합니다. 그리고 이를 덕으로 삼았기에 레지나는 행복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이러한 사랑은 비생산적 성격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롬은 생산적 성격을 가진 개인이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을 '준다'라는 것은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 즉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표핸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말하는 생명을 주는 것은 생명을 '희생'한다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프롬은 '생명을 주는 것'이란 자신속의 살아있는 것을 주는 것으로, 살아있는 것이란 기쁨, 관심, 이해, 지식, 슬픔 등 자신 속에 살아있는 것의 모든 표현을 주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준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시켜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시키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인식한 레지나)
(레지나의 허리를 다리로 붙잡고 있는 큐어 하트)
포기하면 안돼!
하지만...
'하지만'도 '그래도' 같은 부사따위는 필요 없어!
이런 상황, 전혀 위급하지 않으니까!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거야!
오오가이 중학교 학생회장이란 말이야!
그거 대단한거야?
당연하지! 학생회장은 모두의 미소를 위해서라면
레지나의 아빠보다도 강해질 수 있으니까!
괜찮아. 실이 끊어지면 벽을 넘으면 되는거야!
벽이 박살나도 분명 방법이 있을테니까.
마나...
둘이서 힘내자!
응!
(무언가를 느끼게 된 레지나)
뭘까...
내 가슴이...
뜨겁게 고동치고 있어!
(자신의 힘으로 마나를 구하게 된 레지나)
(두근두근 프리큐어 21화 中)
이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마나를 구하려던, 즉 비생산적 성격의 사랑을 실현하려던 레지나가 자신의 힘으로 마나를 구하게 되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 장면은 마나의 생산적 성격의 사랑, 즉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시켰고 이는 곧 레지나의 생동감을 고양시키는 결과가 되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프롬은 생산적 성격의 사랑을 가진 자는 받으려고 주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 자체가 목적이며 또 '주는 것'에서 기쁨을 얻는다고 주장합니다.
단 참으로 줄 때 이는 필연적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준다는 것은 타인을 또한 주는 자로 만들기 때문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곧 멸망한다. 네놈들도 이미 알고 있지 않나?
트럼프 왕국이 멸망했던 그 날의 일을.
그 전까지는 다정하게 지냈던 국민들이 공포에 휩싸였을 때는 극변하여
비켜! 내가 먼저야!
시끄러 네놈이야 말로 꺼져버려!
자기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추악한 행동이
스스로를 지코츄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지금! 그날과 똑같은 일이 이 세계에서도 일어나려 하고 있다.
트럼프 왕국과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을 잃게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
사랑의 힘은 그 무엇에도 지지않는다고 난 믿고 있어.
지금도 분명히 사랑의 힘으로 서로를 지탱해주고 있어!
그딴 녀석 대체 어디 있다는 거냐!
있어. 분명히 느껴지고 있어.
모두의... 두근거리고 있는
사랑의 고동을!
비켜! 내가 먼저야!
(검게 변하는 프시케)
아무라도 좋으니 제발 도와주세요!
상처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다친 사람이 누구지!
선배! 감사드려요!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나도..
(본연의 분홍색 프시케로 돌아가는 모습)
정말 감사드립니다!
자 봐, 들려오고 있잖아. 사랑의 고동이...
(지금까지 마나가 접해온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위 장면은 트럼프 왕국과 달리, 마나가 사랑을 '주었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하게 되는 즉 사랑을 '주는 자'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프롬은 이와 더불어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여 '사랑은 사랑을 일으키는 힘'이라고 얘기합니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랑은 사랑으로만, 신뢰는 신뢰로만 교환하게 될 것이다.
예술을 감상하려 한다면 당신은 예술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을 갖고 싶다면, 당신은 실제로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발전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당신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모든 관계는 당신의 의지의 대상에 대응하는,
당신의 '현실적이고 개별적인' 생명의 분명한 표현이 되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사랑을 일깨우지 못하는 사랑을 한다면,
곧 당신의 사랑이 사랑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만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생명의 표현'에 의해서 당신 자신을 '사랑받는 자'로 만들지 못한다면
당신의 사랑은 무능한 사랑이고 불행이 아닐 수 없다."
- 마르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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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 쓰인 이론은 철학이라기보단 정신분석학인데 (그래서 이런 비평을 문학계에선 정신분석비평이라고 하죠.) 현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정신분석적인 사고를 많이 하죠. 두근두근 프리큐어에 '사랑의 기술'이 딱 들어맞는 원인 역시 여기 있을 겁니다. 다만 주류 학계에선 정신분석학의 내용 중 상당부분은 과학적 혹은 철학적 이유로 폐기되었던 것처럼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알아두시면 좋습니다. 에리히 프롬에 대한 비판은 히피문화, 사회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심리학적 이기주의 등에 대한 비판과 접점이 많지요. 저 역시도 '사랑의 기술'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많고요. (프롬이 말하는 이상적 사랑이 실제 일어나는 현상과 대단히 다를 수 있다는 거. 즉 학문이라기 보다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점이 큽니다. '자존감'이란 단어처럼요.)
(IP보기클릭).***.***
두근두근이 흥행은 제쳐두고라도 뭔가 깊게 생각해볼만한 요소가 많았던 작품인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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