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추억 속에서 화방녀가 속삭였다.
‘태초의 불이 사그라들고 있습니다.’
‘이제 곧 암흑이 찾아오겠지요.’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암흑 속에 작은 불꽃들이 나타날 겁니다.’
‘왕들이 계승해온 잔불이...’
선택받은 불사자가 태초의 불꽃을 계승한지 천 년의 세월이 흐르고, 불이 꺼진 세계에서 천년의 세월이 또 흘렀다.
이제, 이 땅의 존재들은 아무도 불의 시대를 기억하지 못한다.
태초의 화로도.
그윈도.
아르토리우스도.
선택받은 불사자도.
저주를 짊어진 자도.
재의 귀인도.
신과도 같은 힘을 휘두르던 왕들의 화신마저 기억하지 못한다.
그 흔적과 추억만이 남아 이 땅을 간간히 떠돌아다닐 뿐이었다.
불쏘씨개 나선검이 그러했다.
과거, 수많은 화톳불에 꽃혀있던 불쏘씨개 나선검은 긴 세월 동안 파쇄되고, 소실되어 이 땅에서 사라졌다.
태초의 화톳불에 꽃혀있던 단 한 자루의 불쏘씨개 나선검만이 부러지지 않고, 살아남아 이름 모를 귀부기사의 손아귀에서 이 땅을 떠돌아다녔다.
이름 모를 귀부기사가 배치된 에브레펠의 군세는 미켈라의 검 말레니아의 지휘 아래 이 땅을 남하했다.
자신들의 본거지인, 틈새의 땅 최북단에 자리잡은 미켈라의 성수에서부터 남하를 시작해.
눈 덮인 구별된 설원을 지나.
케일리드의 적사자군을 멸망시킨다는 명분 아래, 적사자군과 적대관계를 유지하는.
영웅 모르고트가 호령하는 황금의 도읍 로데일을 시민들에게 축복 받으며 당당하게 지나갔다.
온 산이 노랗게 단풍으로 물든 알터 고원을 지나.
리에니에 호수를 빠르게 거쳐.
스톰빌 성이 자리잡은 림그레이브에 도착했다.
스톰빌 성을 지배하는 접목의 고드릭이 자신을 우습게 보며 싸움을 걸자 말레니아는 의수검으로 압도, 발가락을 핥게하여 굴욕을 선사했다.
그야말로 무패의 행진이었다.
케일리드에 도착하여.
적사자군과 장군 라단을 상대하기 전까지는.
파쇄전쟁에서 가장 강했던 둘로 꼽히는 데미갓.
별 부수는 영웅, 장군 라단과.
미켈라의 칼날, 결여된 몸의 말레니아가.
군단을 이끌고, 케일리드 남부들판에서 격돌했다.
.
.
.
.
춥고, 어둡지만 굉장히 상냥한 추억 속에서.
나를 품 안에 꼭 껴안은 프리실라가 속삭였다.
“······불의 소리가 들려요.”
“그래.”
"당신은 어서 당신의 세계로 돌아가세요. 더 이상 늦기 전에.”
“싫어.”
“당신의 세계는 평화롭고, 주민들도 친절하지만, 이 세계는 아니잖아요? 부디 돌아가세요."
친절한 주민들이라······.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말이었다.
떠올리지 마라.
망자가 되어 정처 없이 길거리를 헤매는 방랑자들을.
떠올리지 마라.
망자가 된 사람들을 나무에 목 메달아 불태우는 생존자들을.
떠올리지 마라.
생존자들에게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어 피를 탐하는 망자들을.
떠올리지 마라.
밤의 심연에 잠식되어 서로를 죽고 죽이는 기사들을.
떠올리지 마라.
망자가 된 아들이 어머니를 찢어버리고, 아버지가 아들의 목을 베어버리는 비극을.
다크소울이 주는 시련과 마주보며 살기보다, 마음이 꺾여 죽어버리기만을 바라는 망자들이 그득한 세상에서······.
불이 꺼진 세계의 참혹함을 그녀만이 몰랐다.
모를 수 밖에.
그녀는 이미······.
“······태초의 불은 꺼졌어.”
“시치미 때지 마세요. 소리가 이젠 여기까지 들리지 않나요?”
종이가 잔불에 타 듯, 눈으로 온통 뒤덮여 새하얗던 설원의 풍광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주홍색으로 물들어간다.
잔불은 온 세상을 불태우며 몸집을 키워가고, 이내 불꽃이 되어 온 회화세계를 집어삼키려 한다.
“당신이 지금껏 계승해온 잔불의 소리.”
겨우 내가 뭐라, 몇 마디 말대꾸하려 하자.
프리실라는 내 입가에 손가락을 올리며 쉿쉿거린다. 그리고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속삭였다.
“그러니 거부권은 없어요.”
“이젠 이름조차 없는 우리 모두의 왕이시여.”
“또또또, 재의 빌런 같은 이상한 표정하지 말아주세요.”
“왕들의 화신도, 그윈도 아닌. 선택받은 불사자로서 제 말을 들어주세요.”
“저는 언제나 당신의 추억과 함께 왕들의 소울 속에 머물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아가세요.”
“자신의 사명을 어두운 세상에 밝게 그려주세요.”
“춥고, 어둡지만 굉장히 상낭한. 분명 언젠가 누군가의 있을 곳이 되어줄 수 있을만한 세상을.”
“그러니 마지막으로······.”
“선택받은 불사자가 아닌, 당신의 이름을 불러봐도 될까요?”
프리실라는 처음으로 수줍어하는 표정으로 용언하며 내 두 손을 꽈악 붙잡았다.
“□□□.”
그리고 온 세상이 불꽃으로 뒤덥히며 프리실라는 사라졌다.
불꽃을 모르는 자는, 세계를 그릴 수 없으며.
불꽃에 이끌리지 않는 자, 세계를 그릴 자격이 없다지만······.
소중한 이를 아무도 지키지 못한 불꽃이 이젠 너무나도 밉다.
불의 소리가 점점 선명해지니.
분명, 이제 곧 보이겠지.
소중한 이를 아무도 지키지 못한, 내가 그린 세상이······.
.
.
.
.
축복의 인도가 내린다.
틈새의 땅에서 피어난 세계수, 황금나무에서 흩뿌려진 축복의 인도로 온 밤이 황금빛으로 물든 몽환적인 밤.
케일리드 남부들판에서 쓰러진 귀부기사의 앞에 불쏘씨개 나선검이 땅에 꽃혀있다.
전장의 한복판에 꽃혀있는 불쏘씨개 나선검의 위로 축복의 인도가 떨어졌다. 그리고 자그마한 불꽃이 화르륵 피어오르며 빛 바랜 열기를 토해냈다.
불쏘씨개 나선검이 천천히 가열되며 불의 계승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죽은 무수한 전사들의 시체와 피. 그리고 추억을 장작 삼아 불 꺼진 장작의 왕들이 천천히 재탄한다.
「Let him grant death...」
(...그리고 그는 죽이리라)
왕들의 추억이 격으로서 폐허가 된 들판에 조용히 연주된다.
「To the old gods of □□□, deliverers of the First Flame」
(태초의 불을 계승한 □□□의 오랜 신들을)
태초의 화로에서 불을 계승하며 세상을 지켰지만, 최후에는 아무도 지키지 못한.
불의 계승식의 끝에서 안식과 평화. 그리고 자신의 세상마저 잃어버리고만.
이 땅에서 살아숨쉬는 그 누구도 이름 모를 왕이 불사의 사명을 마침내 끝내고, 사라지기 위해 불쏘씨개 나선검을 쥐고 일어섰다.
그리고 온 세상을 불사르던 불의 시대가 잊혀진.
다크소울이 사토 속에 묻혀버린.
그리고 그런 것들에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황금률의 시대에.
한 남자의 등 뒤로 일식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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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기준으로 나중에 진짜로 찾아갑니다 ㅎㅎ. | 22.08.18 13: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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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앙되....! | 22.08.18 13:2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