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 얀데레 주의 ※
* 상세한 폭력 묘사나 유혈 묘사는 등장하지 않으나, 후반부에 한 번 정도 폭력적인 행위가 등장합니다 (노골적이고 선정적인 묘사 없음)
* 정말 정말 정말 정말 많이 사랑해서 마음이 망가진 이야기입니다. 캐릭터 붕괴 주의
* 일단 이 정도면 세이프라고 생각하지만 혹시나 아웃이라면 빠른 삭제 데스와!
기침을 컥컥 내뱉으며 힘겹게 눈을 떴다.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오는 극심한 어지러움을 억지로 버텨내며 고개를 들어 올린 내가 제일 처음으로 본 것은 이상할 정도로 커다랗고 밝게 떠있는 보름달이었다. 아름다움과 섬뜩함을 같이 지니고 있는 그것을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목이 조여오는 것만 같았던지라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다시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고양이?"
이번에 보인 건 분홍색 아기 고양이 한 마리였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 고양이인 건지 내 한 주먹 크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고양이를 손으로 잡고서 검지로 살살 등을 쓰다듬어주자, 가르릉 소리를 내며 눈을 뜨더니 나와 두 눈을 맞추었다.
"리나"
만면에 미소를 띠며 작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러나 말할 수 있는 건 그것뿐. 기억나는 건 더 이상 없다. 정말로, 아무것도.
고양이가 만족스러웠는지 내 손바닥에 제 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일그러진 나라의 앨리스와 매달리는 흰토끼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단 두 가지뿐.
'미야시타 아이' 라는 내 이름과, '리나' 라는 저 고양이의 이름.
이것들 말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내가 어디에서 살았었는지, 왜 여기에 왔는지, 여기가 어떤 곳인지 등등. 그야말로 모르는 것 투성이다. 그런 내가 어딘지도 모르는 이곳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무작정 앞으로 걸어나가는 것뿐일 테지.
"이렇게 가다 보면 뭔가 알 수 있게 되겠지?"
"글쎄에-?"
어깨 위에 올라타 있는 리나는 따분한지 꼬리를 빙빙 휘둘렀다.
"그건 아무도 몰라, 아이 씨"
"으음... 리나라면 알 줄 알았는데"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봐봐, 지금 이 상황은 꼭 앨리스 같잖아. 그렇다면 답을 알고 있는 건 흰토끼겠지?"
내 말을 듣고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가, 곧 다시 꼬리를 흔들흔들 움직이기 시작한 리나의 시선이 향한 곳은 새까만 하늘이었다.
"나는 흰토끼가 아닌걸"
"아하하, 그렇긴 하지!"
"아이 씨는 앨리스가 아니고"
"그러게... 어라, 그나저나 앨리스가 뭐였더라"
"그러게?"
뭐, 됐어. 더 깊게 생각하지 말자. 밀려오는 두통을 억지로 무시하며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리나도 같이 흥얼거렸다.
-
잎이 하나도 없는 커다란 나무 밑에서 얼마나 잠들었을까. 리나가 뺨에 몸을 비비며 나를 깨웠다.
"아이 씨, 저기 좀 봐"
"으응?"
하암 크게 하품을 내쉬면서 리나가 꼬리로 가리키는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더니 보인 것은 나뭇가지에 앉아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고양이 두 마리였다. 한 마리는 털 색깔이 리나와 비슷한 분홍색이었고, 나머지 한 마리는 주황색이었다.
"헤에, 많이 혼란스러워 보이네"
"그러게 말야"
수다를 떨면서 이쪽을 대놓고 노려보던 두 마리 중 분홍 고양이가 방긋 미소 지었다.
"사랑은 맹목이지"
"응?"
"맞아요, 맞아. 그래서 사람은 불행해지는 거라고"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옆에서 지켜보던 주황 고양이가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는 말을 하나 더 덧붙였다. 영문을 몰라하는 나에게 흥미가 떨어졌는지, 두 고양이들이 다음 말을 건넨 상대는 내 어깨 위의 작은 고양이었다.
"행복해?"
"행복하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이 대화가 거북했는지 리나가 살짝 가시 돋친 말투를 내보였다. 하지만 두 고양이의 미소는 오히려 더 진해지기만 했다.
"손안에 영원히 가둘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이지"
"너무 매력적이라서 숨이 막힐 정도지만"
마지막 말은 짜기라도 한 듯이 둘이서 동시에 내뱉었다.
"후회할지도 몰라?"
"상냥한 조언, 정말 고마워요"
칼 같이 날카로운 리나의 반응에 둘은 뜻을 알 수 없는 코웃음을 한 번 치고는 나뭇가지에서 폴짝 뛰어 내려와 저 먼 곳으로 뛰어가버렸다. 둘만 남게 되자 리나는 엉금엉금 내 정수리를 향해 기어올랐다.
"알고 있어?"
자그마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나는 어깨만 한 번 으쓱거렸다.
-
이곳에는 해가 뜨지 않는다. 오직 사람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드는 보름달만 떠있을 뿐, 해는 절대로 뜨지 않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니, 사실 시간이 흐르는지 안 흐르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시간이 흐르는 게 정답이라면 이곳에는 애초부터 해라는 존재는 없는 게 아닐까?
이런저런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면서 마냥 걷던 중, 마주친 것은 어두컴컴한 숲속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묘한 파티 현장이었다. 이런 곳에서 웬 파티? 일단 살펴보자 싶어 그쪽으로 다가가려던 순간, 파티 참석자로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이 비정상적인 상황이 주는 압박감에 나는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추고는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미안해"
나를 바라보는 이들은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꼴이었다. 제 일을 다 마치고 저를 꾸미던 것을 몽땅 빼앗겨버린 마네킹처럼 머리카락 한 올조차 가지지 못한 존재들은 얼굴을 백지로 덮고 있었다. 흰 종이 아래 숨어 있는 눈 코 입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미안해" 라고 말하고 있으니, 표정도 미안한 표정이려나.
그렇지만 본능적으로 정답을 알 수 있었다.
저들이 숨기고 있는 표정은 단 두 가지 종류. 수치심으로 일그러진 표정과, 만족스러워서 행복으로 가득 찬 표정.
끊임없이 주어 없는 사과를 내뱉으면서 그들은 서서히 녹아들어 갔다.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아이스크림이 힘없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그들의 모습이 사라질수록 땅 위에 생긴 분홍색과 주황색이 섞인 애매한 색깔의 물웅덩이는 점점 더 넓어졌다. 지켜보고 있자니 속이 메슥거려서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추하네"
리나가 한마디로 이 난리통을 요약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닌지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리나가 왠지 모르게 슬프게 느껴지는 울음소리를 내며 내 목에 자신의 몸을 비볐다.
그리 시간이 많이 흐른 것도 아닌데, 그 많던 사람들은 다 녹아 없어지고 어느새 눈앞에 보이는 것은 무어라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색으로 이루어진 웅덩이 하나뿐이었다. 웅덩이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진하디 진한 단내를 풍겼다.
-
나는 어디까지 걸어가야 되는 걸까. 언제까지 걸어야 되는 걸까. 목적지는 전혀 없는데.
"어디까지 도망칠 거야?"
리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 눈을 살짝 감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해?
이번에는 약간의 다급함이 섞인 목소리로 물어왔지만, 나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이렇게 가다 보면 뭔가 알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해?"
이젠 완전히 불안에 젖어버린 그 목소리.
"글쎄?"
드디어 말을 꺼낸 나는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리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맞춰 볼래? 맞출 수 있어?
두통을 똑똑히 느끼며 바위보다도 더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올렸다. 눈이 뻑뻑해서 두어 번 깜빡거리는 동안에도 계속 누군가가 뇌를 휘젓는 같은 느낌이 들어 속이 울렁거렸다. 가쁜 숨을 들이시고 내쉬며 고개를 푹 숙이고 흰 타일 바닥만 가만히 쳐다봤다.
"아이 씨, 있잖아. 나는-"
위쪽에서 익숙하고 달콤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저 사람이 누구인지 정말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저 사람이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뒀다는 사실도 너무 잘 알고 있다. 이제 나는 그녀에게서 달아날 수 없다는 것도, 남아 있는 미래가 하나밖에 없다는 것도 정말이지 뼈에 박힐 정도로 잘 알고 있다고.
"[평범하게] 아이 씨를 사랑할 수 없어"
따뜻하고 작은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이 씨는 내 모든 것을 다 이해해 주고 사랑해 줬으니까, 이런 나도 사랑해 줄 수 있지?"
나는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반응 또한 해주지 않았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쇠의 냉기를 느끼면서 그저 바닥만 멍하니 응시했다. 그러자 내 머리를 쓰다듬던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저기, 리나.
네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할 때 너도 모르게 나에게 달아날 구멍을 줬다는 걸 알고 있니? 나는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몇 번씩이나 모르는 척, 우연의 일치인 척 연기하면서 네가 만들어 놓은 구멍으로 도망쳤었거든.
하나씩 하나씩 실행할 때마다 너는 무감정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은 불안과 죄책감을 숨기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니? 나한테 그것들로 인해 괴로워하는 너의 모습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사랑스러웠거든.
모든 것이 끝나고,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 그날.
내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히 다 알면서도 왜 아무것도 안 했는지 알고 있어?
검지를 내 턱 밑에 갖다 대고는 강제로 머리를 들어 올린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애정과 불안과 죄책감.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위에 존재하는 절박함.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입술을 깨물며 필사적으로 괴로운 얼굴을 꾸며냈다.
그 사이, 그녀는 두 손으로 내 목을 움켜쥔 뒤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작은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센 힘이었다. 나중에 분명히 손자국이 남게 되겠지. 온몸으로 퍼지는 통증과 어지러움을 음미하면서 잔뜩 뒤집어진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발음했다. 정, 말, 싫, 어.
짧은 한 마디가 고요한 이 공간에 울리자, 배터리가 바닥난 로봇처럼 목을 옥죄던 두 손에서 힘이 빠졌다. 동시에 벌게진 두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녀가 피를 토할 기세로 고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문장이 단 하나도 없는 그 발악에서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지나친 달콤함이 느껴졌다.
그래, 그렇게 날 계속 사랑해 줘.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오직 나만을.
이제야 나는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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