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래, 터치러브
전편: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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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햇살이 예쁘다.
오르카는 철충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잠수를 하고 다녀야 하고, 또한 1년 내내 한 번도 수면 위로 부상할 필요 없이 잠항할 수 있는 첨단 잠수함이긴 하다(사실 이건 이미 20세기의 핵잠수함 시절에 이미 달성된 기술이다). 하지만, 인간 사령관이 등장하고 상황이 많이 호전된 후, 사령관은 오르카 안에 가득한 대원들에게 신선한 공기와 햇살을 공급하기 위해 가급적, 며칠에 한 번이라도, 안전이 확보되었을 때는 부상해서 운항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사실, 멸망 전의 기록에 따르면 인간이 완전히 밀폐된 공간에서 정신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경험적으로 3개월을 넘길 수 없었다는 연구도 존재했으므로(20세기 냉전기의 기록이긴 했지만 간과하기 어려운 연구결과인 건 사실이었다), 이건 - 안전이 허락하는 한 - 모두를 위한 길이기도 했다. 방식은 간단했다. 오르카가 잠항하는 항로를 따라 정찰용 드론을 띄운 뒤, 안전한 것이 확실하다고 확인되면 부상하는 것. 때로는 그 드론의 역할을 스카이나이츠 대원이 맡기도 했다. 그녀들은 비행능력이라면 오르카 최고고, 눈도 좋으니까.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며칠 정도 하늘에 체공하는 건 피곤한 게 사실이나, 그 대신 그 동안 오르카 선내 인원은 맛볼 수 없는 맑은 공기와 햇살을(밤에는 밤바람도) 마음껏 쐴 수 있는 건 만족스러웠다. 정찰임무 뒤에는 근취(근무취침)도 허용되고 말이다.
“........”
그러니까 사실 정찰비행을 마친 그리폰은 지금쯤 스카이나이츠 숙소에 들어가서 (자기 전투용 바이저랑 닮은) 수면안대 쓰고 쿨쿨 자고 있어야 했다. 지금처럼 부상한 오르카의 난간에 쪼그려 앉아서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석양을 바라보고 있을 이유 따윈 없는 것이다.
“바보 자식들...”
며칠만에 받은 한나절간의 소중한 수상운항이었으므로 오르카의 갑판에는 빨랫줄이 내걸렸고 오르카 각 부대원들의 옷들 - 전투복뿐만 아니라 속옷도 - 이 저녁바람에 나부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한 ‘바보 자식들’이란, 지들 속옷(과 선임들 것)도 제대로 못 고정해놔서 바닷바람에 날려 저 먼 바다 너머로 사라지게 만드는 브라우니들이 아니었다. 그녀의 불만은 바로 그녀의 동료들, 즉, 스카이나이츠 대원들을 향한 것이었다. 그리폰은 고개를 꺾어 얼굴을 무릎팍에 묻었다. 졸립다. 부대 생활관으로 들어가 자고 싶지만, 며칠 전 정찰 나가기 전에 대원들 앞에서 그 성질을 낸 뒤로, 돌아가서 동료들 얼굴 보기가 두려웠다. 며칠이란 시간이 지나고 나니깐 오히려 더더욱. 그 며칠 동안 걔네들은 그 강짜를 부려댄 자신에 대해 무슨 생각들을 했을지 불안했다. 스스로 그 짜증을 부린 주제에 이런 걸 신경쓰는 것도 웃기지만, 그리폰은 그것이 괜히 서먹하고 어색했다.
‘어디 빈 선실이라도 있으면 거기라도 들어가 잘까’
솔직히 그녀가 AL팬텀도 아니고 참 없어보이는, 몹시 처량한 짓이지만, 석양이 예쁘다고 마냥 뱃전에 쪼그려서 황혼만 구경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그녀가 먼저 동료들에게, 그리고 전대장에게 사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피곤한 듯, 아니 실제로 피곤했으므로 눈을 감았다.
그리폰은 콘스탄챠와 인간을 찾기 전부터 이 지구를 떠돌며 철충과 싸워왔다. 철충과의 공중전은, 교전시간은 극히 짧지만, 결코 유쾌하다고는 못할 강렬한 악몽들을 선사한다.
때때로, 그녀는 눈을 감으면 비명을 듣는다. 대류권에서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 섞여 들려오는, 인간과 만나기 전 옛 전우들의 비명을. 불덩이가 된 채로 추락하는 친구들, 혹은 그 친구들의 산산이 부서진 ‘조각들’이 불타면서 흩날리는 모습들, 잔인하리만치 푸른 하늘에 안개처럼 흩뿌려지는 피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구름 속에서 풍겨오는, 화약과 철충의 형언할 수 없이 이상한 병기에서 풍기는 냄새 사이로, 단말마처럼 짧게 타오르다 사라지는 비명들, 비처럼 쏟아지는 재들에 섞여드는 살이 타는, 혹은 녹아드는 냄새....그리폰은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치고선 다시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다.
“진짜 바보 자식들....”
전쟁은 애들 장난이 아니다. 스카이나이츠의 동료들도 당연히 알 것이다. 전대장은 더더욱이나 더 잘 알 것이다. 그 처참한 비명들을 듣고서, 그 무서운 냄새를 맡고서, 그 참혹한 광경들을 보고서, 어떻게 아이돌 같은 거나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지?
“그래, 나도 슬레이프니르가 바보라고 생각해.”
“정말이야. 진심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헤벌레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모르겠어. 때가 어느 때인데...”
“그래도 애가 밝고 유쾌한 게 장점이잖아. 항상 어둡고 찌푸린 표정으로 다닐 순 없지 않아?”
“전대장이야 그렇다쳐도 다른 애들은 또 대체 뭔 생각으로 거기에 동참한 거지? 왜? 바보도 전염되나?”
“그러게 말야. 그래도 애들이 하고 싶다는데 한 번 얘기를 들어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아~모르겠어. 인간은 또 왜 전대장 편을 들어가지고서....이, 이, 이이이인간?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그리폰은 화들짝 놀라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와당탕 뒤로 넘어갔다. 그리곤 조금 전까지 자기 옆에 밀착해서는 같이 뱃전 난간에 기대어 앉은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사령관은 그리폰의 그 얼굴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아까 전에 너가 석양 바라보면서 바보 어쩌고 하면서 청승 떨고 있을 때?”
“이이이익...!”
그래, 저 빙글빙글 느긋한 페이스가 그리폰을 짜증나게 하는 거다. 남의 속도 모르는 이 바보 인간 자식. 그렇게 가까이 밀착하면...두근거린단 말이다.
약간 놀림당한다는 기분이 들자 그리폰은 괜시리 더 심술이 났다.
“너 근취 받았잖아. 왜 들어가 안 자?”
“내가 받은 자유시간 내가 어떻게 쓰건 그건 내 맘이잖아!”
“슬레이프니르가 너 찾아다니던데. 초계비행도 끝낸 애가 왜 방에 안 돌아오냐고”
“그 바보 전대장이....!”
“이러니저러니 해도 편대원을 걱정하는 거지, 안 그래?”
“........”
반박할 수가 없었다. 슬레이프니르는 바보긴 해도 편대원까지 저버리는 무책임한 전대장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반대라 해야 맞을 것이다. 다른 대원들조차 압도하는 그 엄청난 속도로 가장 먼저 달려, 아니 날아나가서, 가장 먼저 적들과 마주치고, 적들의 시선을 가장 많이 끌어내어 편대원들을 보호하고 그녀들이 공격할 시간을 벌어준다. 그게 그녀가 하는 일이었다. 늘 생각 없고 멍청해 보이긴 해도 늘 대원들을 책임져주는 믿음직한 존재다. 그건 그리폰만이 아니라 전대의 모든 동료들도 동의할 것이다.
‘그래서 더 이해할 수 없는 거라구...’
그런 전대장이, 아무리 사령관에게 푹 빠졌다곤 하지만, 뭔 바람이 들어서 갑자기 뜬금없이 - 정확히는, 버려진 도시에서 구출될 때부터 - 슈퍼스타니 아이돌이니를 하겠다고 저 지ㄹ...아니, 저 난리를 피워대는 걸까. 사령관에게 어필할 생각이면 차라리 다른 바이오로이드처럼 아이돌이고 뭐고 그냥 홀딱 벗고 사령관에게 들이대는 게 더 빠르고, 더 효과적일 텐데. 그랬다면야 그리폰도 전대장과 - 여전히 그녀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기야 했겠지만 - 지금처럼 서먹해지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잠깐, 아이돌 하니까 말인데, 이 인간 프로듀서잖아?
“호...혹시 나한테 아이돌 하라고 명령할 생각인 거야? 그러려고 온 거야?”
그리폰이 아무리 사령관에게 퉁명스러워도 일단 인간이자 정당한 명령권자인 그가 명령을 내리면 거부할 수 없다. 그녀는 놀라서, 그리고 손놓고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각오로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아 몰라, 몰라! 안 들려! 난 안 들어, 난 못 들은 거야!”
그러나 사령관에게는 오히려 그러는 그리폰의 모습이 귀여워 보였던 모양이다. 그는 다가와서, 귀를 막은 채 그 금발을 흩날리며 도리질을 치는 그리폰의 양 팔을 가만히 붙잡았다.
“흐익!?”
그리폰은 자신이 막았던 귀까지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청년의 몸을 가진 인간 남성의 튼튼하고 따뜻한 손이 자신의 팔을 감싸오자 서늘한 저녁바람에 차갑게 식은 팔이 인간의 온기를 느꼈다. 그녀는 자기 얼굴에 쏟아지는 황혼의 햇살이 하늘을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물들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러면 자기 코앞으로 가까이 다가온 인간이 그녀의 얼굴이 귀까지 붉게 물들어드는 것을 알아차렸을 테니까. 사령관의 냄새가 바닷바람에 훅 밀려왔다.
‘아, 좋은 냄새...아, 씨, 이게 아니라! 내가 변태도 아니고!’
그리폰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사령관은 가만히 그녀의 팔을 그녀의 귀에서 떼어냈다.
“명령 안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
“나는 그냥 설득만 하러 온 거야. 정말로 강요할 생각 없어. 너한테는 거부권이 있어.”
“......”
“그냥 듣기만 해.”
자신의 시선을 회피하며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그러나 얌전해진 그리폰을 보자 사령관은 얘가 갑자기 고분고분해졌네하며 마음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뭐 좋다. 어쨌든 그리폰이 자기 말을 들어줄 의사는 있다는 이야기니까. 그리고 강요할 생각이 없는 건 사실이기도 했고,
“그리폰, 이건 내가 멸망 전의 기록에서 읽은 건데 말야....”
“?”
“살아가면서 밧줄 하나만 잡고 있으면 안 된대”
밧줄이라니. 이건 또 무슨 종류의 헛소리인가.
“?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인간?”
“너무 한 가지만 붙잡고 끙끙대면 삶이 고달프단 말이지”
바이오로이드든, 인간이든, 모든 인생 가진 자들은 뭔가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자기가 선택한 것이든 아니든. 그것이 부든, 권력이든, 명예든, 아니면 뭐 인류의 부흥과 번영이든.
그러나 자기 인생의 전부를 그 ‘뭔가’ 하나에 모두 바쳐 버리면, 그것 하나만 붙잡고 살아가면, 삶이 고통스러워지기 십상이다. “인생은 언제나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니까. 삶이란 건 쉽지 않다. 바이오로이드에게, 그리고 이 멸망 후의 세계에 그것은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 위험과 고생에 비해 미래는 불확실하다.
그럴 때,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단 하나뿐이고, 그 하나에만, 오직 그것에만 인생 전체를 바친다면, 그 추구하는 바가 실패했을 때, 달리다가 지쳤을 때, 삶이 너무나 힘들고 피폐해진다. 그리하여 그 붙잡은 단 하나의 밧줄을 놓치게 되면,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된다.
“이걸 심리학에서는 소진이라고 한댄다”
“그런 건 또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닥터랑 같이 멸망 전 기록을 읽다 보니 유식해지는 기분이 드는군. 사령관은 쓴웃음을 지었다. 풍요 속에 살던 멸망 전의 인간들이라고 모두 마냥 행복한 건 아니었더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지속해야 한다면, 혹은 그럴 수밖에 없다면, 살아가기 위해서는, 붙잡은 밧줄 하나가 위태로울 때를 위한 다른 밧줄이 필요하다. 그것이 꼭 거창한 것일 필요는 없다. 퇴근하고 돌아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소설 한 줄 쓰는 것도 괜찮고, 캣카페에서 고양이를 쓰다듬는 것이라도 괜찮다. 하다못해 가슴이나 나오는 유치한 모바일게임 갖고 낙서를 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본업 외에 자신을 지탱해 줄 것’을 찾는 것이다. 특히 그 ‘본업’이란 게 힘들고 괴롭다면 더더욱.
“철충과 싸우고 인류를 재건한다는 게 쉬운 ‘본업’은 아니지, 안 그래?”
“.......”
“너희들의 노고에는 늘 감사하고 있어. 하지만 너희를 위해서라도 그것 하나만 바라보면 안 돼”
‘다른 밧줄’을 붙잡는 것은, 요동치는 세상에서 삶이 마주치는 그 모든 공포와 불안 - 철충부터 레모네이드까지, 혹은 별의 아이부터 참치 훔쳐가는 LRL까지 - 에 맞서는 나름대로의 방법이다. 뭔가를 추구하는 것은 좋지만. ‘오직 그것 하나만이 곧 삶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그 ‘다른 밧줄’을 어디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그건 아무도 답해줄 수 없다. 자기가 스스로 찾을 수밖에. 그리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사령관은 슬레이프니르를 어쨌든 전대장감이라고 평가했다. 바보긴 해도, 마이페이스긴 해도, 그녀는 어떻게든 나아가려 한다. 뭔가 해보려고 한다. 다른 밧줄을 찾아보려 한다. 어찌 도와주고 싶지 않겠는가?
“.......”
그리폰이 말이 없자 사령관은 읏차, 하고 일어나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슬레이프니르는 자기 나름의 다른 밧줄을 찾은 거야. 그리고 이왕이면 그걸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녀석들이랑 같이 하고 싶은 것뿐이고.”
“.......”
“뭐,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야. 다시 말하지만 난 강요할 생각 없어. 하지만 만약 마음이 좀 바뀌었다면....”
사령관은 품에서 명함을 꺼냈다.
“내일 점심 때 창단식 하고 첫 번째 연습 시작하거든. 이리로 찾아오도록 해”
꽤나 공들여 만들어진, ‘오르카 프로덕션 프로듀서 겸 오르카 사령관’이라고 씌어진 멋들어진 명함을 받아들곤 그리폰은 어이가 없어졌다.
“인간, 그새 명함까지 만든 거야?”
“기왕 할 거면 본격적으로 해야지, 안 그래?”
“......”
“으으음, 그 얼굴이야. 에가오데스”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는 그리폰을 보고 피식 웃고선 사령관은 몸을 돌렸다.
“가봐야겠구만. 해 지면 추워지니까 너도 어서 들어가.”
“....그래서 이거 말하려고 날 찾아온 거야? 나 이거 진짜 안 해도 되는 거지? 그치? 응!? 어!?”
사령관이 어느 정도 멀어진 뒤에야 그리폰은 멀어져가는 그의 등 뒤에다 외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령관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저 한쪽 팔을 슥 들어보였을 뿐이었다. 곧바로 저녁바람에 날아온 빨래 - 아마도 노움의 팬티인 듯했다 - 에 얼굴을 직격당해서, 석양을 등진 간만의 멋있는 모습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지만. 그래도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그리폰은 한동안 멀거니 바라보았다.
“뭐야 대체...밧줄이니 어쩌고 하는 얘기나 하고....”
사령관이 건네준 명함을 바라보며 그리폰은 생각에 잠겼다.
밧줄이라.
그녀가 경험한 그 모든 끔찍함들,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건지도 알 수 없는 인류부흥이라는,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뜬구름 같은 추상적인 이야기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
“.......”
그 모든 것을 슬레이프니르도 똑같이 경험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리폰 이상이었을 터다. 그녀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빠른 제비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누구보다도 먼저 편대원들이 죽어가는 비명을 들었으리라. 누구보다도 먼저 편대원들이 불길에 휩싸여 추락하는 모습을 보았으리라. 누구보다도 먼저 화약과 죽음의 냄새를 맡았으리라. 그리폰은 인간을 만나기 이전, 자기만큼이나, 어쩌면 자기 이상으로 전대장도 힘들었으리란 걸 깨달았다. 슬레이프니르는 전대장이다. 그녀는 보호기다. 편대원 하나가 추락할 때마다 그녀는 자책했으리라. 내가 좀 더 빨랐더라면, 내가 좀 더 잘했더라면. 내가...좀 더 유능했더라면.
그러나 그 절망의 늪에 너무 빠져들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되리라. 그녀에게는 그 늪에서 빠져나올 밧줄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진짜, 진짜 바보 자식 같으니....”
다른 편대원들은 그런 전대장을 이해해 줬던 걸까. 그러면 정작 바보는 그걸 이해 못해준 자신이었던 걸까. 그리폰이 마지막으로 뇌까린 ‘바보 자식’이 누굴 가리키는지는 그녀 본인만이 알 것이었다.
...
“진짜 올 거 같아?”
빈 선실을 급히 개조해서 만든지라 조촐했지만, 어쨌든 아이돌 연습실의 구색을 갖춘 - 그 와중에 숨어서 밥 먹던 AL팬텀은 오늘도 눈물을 흘리며 쫒겨났다. 더 슬픈 건 아무도 그녀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는 것이다 - 방에서 슬레이프니르가 약간 불안하다는 투로 물었다.
“난 그럴 거라고 생각해.”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꽤 자신있는 표정을 지었다. 슬레이프니르는 도대체 사령관이 어제 그리폰이랑 뭘 했길래 이리 자신만만한지 궁금했지만, 어쨌든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뭔가 믿는 게 있으니까 방금 스카이나이츠란 이름 그대로 - 그녀가 바라던 대로 - 창단식을 한 거겠지.
원래는 잡동사니들이 굴러다니고 팬텀이 가끔 혼밥이나 하러 오는 안 쓰는 선실이었다. 여기를 며칠만에 급하게 청소하고 연습실로 개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고, 실제로 여전히 초라했지만, 사령관이 - 마리 앞에서 스틸라인 병사들에게 ‘저 산이 마음에 들지 않는군’을 시전한 -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이런 장소를 갖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폰을 제외한 모든 스카이나이츠 멤버(+모모)가 거기에 모였다. 언제나 매사에 성실한 하르페이아는 기초부터 공부하겠답시고 오르카 서고에서 ‘엔터테인먼트 경영’, ‘가창법 입문’ 같은 책들을 바리바리 빌려서 싸들고 왔고, 린트불름은 벌써부터 이 아이돌이란 게 마음에 들었는지 잔뜩 허세에 찌든 표정으로 거울을 보며 ‘자뻑’에 취해 있었다. “역시 오늘도 전 귀엽네요, 이 귀여움을 오르카에 널리 알리지 않으면 인류의 손해에요” 따위의, 모 다른 게임의 아이돌이 빙의한 것 같은 태도로 말이다. 애초에 다른 데 흑심이 있던 흐레스벨그는 프로듀서를 보조하는 매니저를 자처한 모모 - 지금 사령관 옆에서 안무 연습 일정을 논의하고 있었다 - 에게서 눈을 떼질 못하고 있었다. 입에서 침 떨어질 것 같은 표정으로. 배려심 좋은 블랙 하운드는, 잔뜩 들뜬 기분과 그리폰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고 불안불안해하는 기분이 뒤섞여서 붕 뜬 기분이 된, 그녀의 전대장을 다독여주고 있었고.
“안 오면...어떡하지?”
“너무 걱정마요 전대장. 그리폰이 안 끼면 다른 멤버 찾아볼 테니까요.”
“그래도...그러면 스카이나이츠가 아니잖아”
“음, 기다려보죠.”
그게 문제였다. 제비는 아이돌 스카이나이츠를 원했다. 마침 부대 이름도 딱 아이돌스럽기도 하고. 다른 부대에서 멤버를 영입한다고 해서 아이돌을 못 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스카이나이츠(부대)랑 다같이 스카이나이츠(아이돌) 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흘렀다. 창단식은 이미 했고 이제 조금 있으면 첫 번째 연습을 할 시간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스카이나이츠의 마지막 멤버는 연습실에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오는 것 같은데...”
블랙 하운드는 한숨을 쉬고 사령관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사령관님이 틀리신 거 같은데요. 역시 그리폰은 이런 거 안 좋아한다니까요.”
제비의 어깨가 축 처졌다. 역시 그리폰, 삐진 게 다 안 플어졌던 걸까. 오늘 창단했는데 다른 멤버가 영입되면 이거 하루만에 그룹명 바꾸고 창단식 새로 해야 하는 걸까. 그래도 스카이나이츠 아이돌 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는데...연습실의 분위기가 가라앉자 오히려 외부인 입장인 모모가 더 뻘쭘해졌다. 여기서 더 기다렸다간 진짜 분위기가 더 어두워질 것을 직감한 - 과연 예능으로 단련된 눈치다 - 모모가 손뼉을 탁 쳤다.
“저, 그, 그러면 일단 연습을 시작할까요?”
“전대장, 상심하지 말고 일어나요. 전대장이 모은 건데 전대장이 힘빠지면 어떡해요”
“응...”
약간 의기소침해진 제비가 자리에서 일어난 그 때였다.
“잠깐만, 누가 왔는데”
저편에서 선실의 문이 살짝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거기를 향했다. 거기서 뺴꼼 하고, 약간 부끄럽다는 표정의 키 작은 금발머리가 그 얼굴을 내밀었다. 그 얼굴은, 도저히 입 밖으로 꺼내기 싫다는 듯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오물오물하다가 겨우 작게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저기...음...생각해봤는데 말야....”
아직도 약간 창피하고 부끄러운지 작게 줄어든 목소리였지만 스카이나이츠 대원들의 귀에는, 그리고 사령관의 귀에는 충분히 크게 들렸다. 여전히 부끄러운지 그리폰은 뺨을 붉게 물들이며 우물거렸다.
“사실, 요새, 저, 정말 심심하긴 했으니까....”
모두의 이목이 자기에게로 모이자 그게 더 부끄러웠는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움츠리면서, 얼굴을 붉힌 채로 뒷말을 이었다.
“그...나도...한번쯤은...전대장 바보짓에...어울려 줄게”
그리고 그리폰은 슬쩍 대원들의 눈치를 보았다. 좀 더 부드럽게 말했어야 했을까. 필요없으니 꺼지라고 하는 게 아닐까. 며칠 전에 그 짜증을 내놓고서 이제 와서 무슨 염치냐고 화내는 게 아닐까. 내가 너무 성질을 부리긴 했었으니...쫒겨나도 무리는 아니겠지.
그리폰의 생각은 틀렸다.
스카이나이츠 대원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특히 제비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렁그렁한 눈을 해가지고선, 그녀는 자기 편대원에게 격한 포옹을 하러 달려갔다. 오히려 그리폰이 급격히 당황해 할 만큼 격한 포옹을.
“구리구리이이이--!”
“켁, 저리가! 그리고 그 이상한 호칭은 뭐야!?”
“이제 아이돌이니까 예명이 하나쯤 필요하잖아! 그리폰이니까 구리구리 어때?”
“....졸라 구려. 미친 듯이 구려. 말도 못하게 구려. 아이돌 한다는 거 취소해도 돼?”
“엑”
한바탕 만담을 벌이는 둘을 보고서, 사령관 역시 스카이나이츠의 대원들과 함께 미소지었다.
그녀도 동료들과 같이, 다른 밧줄을 잡기로 한 것이다.
<계속: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80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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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입된 곡은 윤미래의 "터치 러브 (Touch love)" 입니다. 드라마 OST라죠. "용자추종자"님이 추천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석양 이미지 출처는...제 컴퓨터 배경화면입니다(...)
음악 추천은 계속 받고 있습니다. 제가...사실 아이돌도 잘 모르고...음악 취향도 약간 달라서...추천이 없으면 제 취향대로 넣게 될지도 모릅니다. 즐거운 곡이건 활기찬 곡이건 슬픈 곡이건, 뭐든지 추천해주시면 일단 들어보고 쓰겠으니 좋은 곡 있으면 추천해주셔요.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덧글과 추천이 창작자들에게는 언제나 큰 도움이 됩니다!!
급하지만 쓰게 된 "스카이나이츠 아이돌 하는 이야기.txt"는 그리폰 장인님의 허락을 받아 연재됩니다. 다만 이것이 Yong2님의 그리폰 유니버스(?)와 동일한 세계관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가급적 라오진의 공식 설정을 준수하며 쓰고자 하며, 혹시라도 Yong2님의 고유한 세계관이나 설정에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독립적인 세계라 보아주시는 편이 맞겠습니다. 또한, 만일을 위해 본 소설은 기본적으로 라오게에서만 연재됩니다.
제 글을 (감사하게도) 읽어오신 분들은 제가 대체로 미리 분량을 정해놓고 작업한다는 걸 아실 겁니다. 그래서 소설의 총 회수를 어림잡아 놓고 글을 쓰죠. 예를 들어 총 10회 분량으로 잡아 놓았으면 [1/10], [2/10] 뭐 이렇게요.
그런데 이번 이야기는....시작과 결말만 정해놨고 아직 중간은 생각 안 해놨기 때문에...분량이 얼마나 나올지 알 수 없습니다. 몇 편이나 진행될지도 아직 모르구요. 그래서 총 회수가 제목에 표시되지 않습니다. 몇 번째냐만이 표시될 것입니다.
이번 주말은....지난 주에 그리폰 장인님 허락 받은 거에 너무 흥분해서 무리하는(지금 요 1화를 줫-나게 길게 써놓은 거 보시면 아시겠지만...흥분해서 분량조절 실패했습니다;;;)바람에....두 편을 연속으로 올립니다....하...아....다음주 세미나때 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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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합니다-! 걸그룹 스카이걸즈의 멤버-! 귀여운 츤데레 구리구ㄹ..." (대충 매버릭 박히는 소리) 애들 예명 정해주고 싶은데 쉽진않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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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텀....ㅠ | 20.12.05 13:3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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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중간과정은 구체적으로 생각 안 해두고, 만씀하신대로 팀원별, 주제별 짧은 에피소드들을 넣어야지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린티 대 실피드는 생각 안해봤는데 좋은 아이디어네요 | 20.12.05 17:4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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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tal_Rider
"소개합니다-! 걸그룹 스카이걸즈의 멤버-! 귀여운 츤데레 구리구ㄹ..." (대충 매버릭 박히는 소리) 애들 예명 정해주고 싶은데 쉽진않네요 ㅎㅎ | 20.12.05 19:4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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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추종자
결정적으로 필요한 순간에 일해야 사령관이지 않겠읍니까 ㅎㅎㅎ | 20.12.05 20:0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