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구덩이 속의 세 B급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416)
전편: 구덩이 속의 네 B급(上)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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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와, 에헴, 아쿠아의 정원을 소개합니다”
부서진 벽면 틈으로 아쿠아가 그녀들을 안내한 곳은 아마도 과거에는, 혹은 원래 용도는 일종의 거대한 바이오스피어(biosphere)였을 넓은 공동(空洞)이었다. 정원이라기엔 삭막했지만.
희미하게 켜진 불빛이 깜빡이면서 벽면에 그녀들의 그림자를 만들었다 없앴다를 반복했다.
“여기...전력이 들어옵니까?”
“음...주 발전기는 애저녁에 고장났구, 지금은 지하수의 수력을 쓰는 비상용 간이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어. 그것도 이제 어제오늘 해서 이 모양이지만. 예비 축전지들도 이젠 거의 다 썼어. 그러니까 아껴 써야 해.”
무리도 아니다. 인간님들이 이룩한 그 찬란한 문명도 겨우 백 년이면 허망하게 녹슬고 부서져 스러지고 만다. 레프리콘과 샌드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비록 인간들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많은 물자와 장비를 비축해 두었다곤 하나, 그것도 결국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래도, 봐봐, 나 그동안 여기 진짜 관리 잘 했다?”
그녀들의 근심을 불식시키려 애쓰는 듯 아쿠아가 양팔을 펼치며 눈앞의 광경을 자랑했다.
솔직히 초라했지만, 아쿠아 같은 자그마한 바이오로이드가 백 년이 넘도록 혼자서 이 정도까지 유지 관리했다는 것에는 실제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양빛 하나 들어오지도 않고, 전기도 수시로 끊기며 그 출력도 보잘 것 없는 이곳에서, 작물이 자라는 정원을 혼자서 이만큼이나 가꾸어 놓았다면 누구라도 와서 칭찬해 줘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아쿠아는 오지도 않을 인간을 기다리며, 그들의 명령에 얽매여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어떻게든 관리해 온 것이 분명했다. 이 지하 공동에서 그나마 가장 밝은 조명을 받는 한켠에 자리한 재배시설에서 콩과 감자가 자라고 있었다.
“헤헤, 대단하지? 그나마 생성되는 전력의 대부분은 이쪽으로 돌려지고 있어. 물은 지하수를 쓰고 있고...나 여기서 행복해지려고 나름 노력했다구, 봐봐, 인사해, 언니들, 이 콩에는 다프네 언니 이름을 붙였어. 저 감자는 드리아드 언니라고 불러. 저 고구마는...”
지상에서는 너무도 흔해빠진 식물이지만, 영영 지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이 지하에서 옅게나마 초록빛을 보니 레프리콘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앞으로 피닉스 대령님 머리카락 보면 눈물 날 거 같은데. 아쿠아는 기나긴 시간 동안 이곳을 혼자서 지키며 농사를 짓다 보니 작물에게마저 애착을 느끼고 이름까지 지어 준 듯했다. 어찌 보면 우습지만, 어찌 보면 이해가 가는 일이기도 했다. 멸망 전의 인간님들 영화에서 이 비슷한 걸 본 적도 있거니와, 레프리콘은 LRL을 알았기에 아쿠아가 감자에까지 이름을 붙여주며 애지중지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문득, 그녀는 멸망 전의 기록에서 배운 내용이 생각났다.
고독은, 외로움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빛 한 줄기 없는 밀폐된 지하에서 그 스트레스는 더욱 심했을 것이다. 그러한 극한상황에 빠졌을 때, 사람들은 고독에 익사해 미치지 않기 위해 종종 가상의 대화 상대를 만든다. 미친 것처럼 보이겠지만, 어떻게 보면 마지막 정신줄마저 놓거나 말하는 법을 잊지 않기 위한 정신적 발악인 셈이다. 아쿠아, 아니 사실 모든 바이오로이드도 몸과 마음은 사람과 똑같다.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이 아이가 감자와 고구마에 이름을 붙이고 대화를 한 게 이해 못 할 기행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엄마 아빠가 돌아오길 하염없이 기다리는 어린 여자아이가 곰인형을 끌어안고 마치 그게 살아있는 친구인 것마냥 말을 거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 그나마 이 식물들만이, 이 깊은 지하 속에서 아쿠아와 함께하는 유일한 생명이니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러나 아쿠아는 레프리콘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표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원래 정신연령이 어려서든, 너무 오랫동안 혼자여서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져서든, 아무튼 그녀는 레프리콘의 그 표정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거 같았다.
“이, 이상한 건 알아! 하지만 톰을 정지시킨 후론 말할 친구가 없었단 말야!”
“톰?”
아쿠아는 대답 대신 그녀들이 서 있는 재배시설의 건너편, 그러니까 공동의 반대편의 문간에 웅크리고 있는 큼직한 그림자를 가리켰다. 재배지의 빛이 거기까진 충분히 미치지 못했기에, 어두워서 처음에는 그냥 기지 설비거나 중간 크기 정도의 컨테이너 박스로 보였던 실루엣이 차츰 그 윤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토미....워커?”
“좀 작지. 여기서 쓰기 위해 특별히 커스텀 주문된 녀석이야. 크기는 원본의 절반이지만 출력은 원본 못지않아. 지금은 전력이 부족해서 동면시켰지만...”
아쿠아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보니 아까 전에 부하가 하나 있다고 했었지. 그게 이 토미 워커인가. 아마도 전력 부족으로 동면하기 전에는 이 어둡고 외로운 지하에서 아쿠아의 유일한 말동무였을 터다. 샌드걸은 확신하건데 아쿠아도 이 녀석을 정지시킬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많이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을 만큼 대피소의 자원도 점점 떨어져 갔을 터다.
자원이라.
“아쿠아, 솔직히 말해주십시오. 여기에 남은 식량과 연료는 얼마나 됩니까”
아쿠아가 우물쭈물했다. 말하기 싫어하는 그녀의 기색에서 샌드걸은 감을 잡았다. 백 년여의 시간 동안 아쿠아가 살아온 걸 보아 어딘가 공기가 통하는 데가 있는 건 분명했다. 그건 아마도 그 불안정하다는 - 그리고 그녀들이 떨어져 내려오면서 성대하게 부수어 놓았을 -, 격리되어서 가지 못한다는 위층에서 내려오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바이오로이드는 공기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녀도 그녀들도 언제까지고 이 지하에서 버틸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어떻게 여길 나갈 것인가? 그녀의 모듈은 포기에 익숙했지 도전에 익숙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그녀의 전신을 절망감이 휘감았다. 조금 연명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을 뿐, 바뀌는 것은 없다.
“우와, 저거 그럼 전기 넣으면 움직임까?”
샌드걸의 우울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뒤에서 천연덕스럽게 감탄하는 브라우니를 보자니 레프리콘은 참 내 부하지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418번은, 아니 브라우니라는 종족 자체가, 어디 지옥에 갖다 던져놔도 악마들이랑 즐겁게 헬테이커를 찍으며 허리를 씰룩이고 놀 종자들이긴 하다만.
“맞아. 한창 때는 쟤 혼자서 무거운 화물이나 자재도 막 옮기고 그랬어. 전력만 공급해주면 뭐든 할 수 있는 아이라구, 에헴!”
자기가 토미워커인 것도 아닌데 아쿠아는 괜히 자기가 허세를 부렸다.
“그럼 대따 큰 바윗덩이나 콘크리트 기둥도 옮길 수 있는 거 아님까?”
“헤, 말이라고 해? 실제로 여기 공사할 땐 많이들 그랬어”
“그럼 그걸로 장애물들 치우고 여길 나가면 되는 거 아님까?”
“.....”
“.....”
“.....”
“왜...왜 그러심까?”
셋은 각자 기묘한 표정으로 브라우니를 바라보았고 따라서 그녀는 당황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타박이 돌아올 각이었다.
“바봅니까, 브라우니? 아까 전력이 나갔다고 했잖아요”
“아직도 그 콘크리트 기둥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까? 좀 다른 생각을 해 보시죠.”
“어, 그러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
“.....?”
“.....?”
다시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번의 시선들은 브라우니가 아니라 아쿠아를 향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는 무언의 눈빛을 담고.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살아 있는 자의 시선을 느껴볼 일이 없던 아쿠아는 이런 게 익숙하지 않은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에음, 하고 우물쭈물하며 망설였다.
“어...말로만 하면 잘 모를 테니까 따라와봐”
그리고 그녀는 대피소의 다른 한 구석에 자리한, 재배시설과 달리 사용하지 않은지 족히 수십년은 되어 보이는 허물어진 구조물 더미들로 뛰어 달려갔다.
“여긴 옛날에 인간님들이랑 더치걸들이 여길 공사할 때 임시로 만든 사무실들이었어. 대부분 낡아서 허물어졌지만...”
지하 공동의 다른 구역과 달리 여기는 거의 관리하지 않았는지 - 하긴 아쿠아 같은 유아 체형의 바이오로이드 혼자서 이 거대한 공간을 전부 다 관리하기란 무리였을 것이다 - 주변에 오래된 쓰레기가 굴러다녔다. 바닥에 널려진, 오래되어 거의 삭아버린 담배꽁초 - 아마도 백여년도 더 전에 이곳에 들어왔던 인간 인부나 더치걸들이 피웠을 - 들을 보자 샌드걸은 불현 듯 조금 전까지 잊고 있었던 흡연 욕구가 피어올랐다. 음, 비축물자에 담배는 없었으려나. 주머니에 라이터는 있는데.
“원래는 지휘통제실에 멋들어진 모니터랑 여기 볼트를 다 띄위서 보여주는 3차원 영상지도가 있었어. 하지만 거긴 격리되어서 갈 수도 없고...어차피 이젠 다 망가졌을 테고 전력도 나갔으니까...이거라도 봐야지”
백년 넘은 담배꽁초라도 주워서 피우면 그래도 니코틴 향기라도 맡을 수 있지 않을까고 샌드걸이 부질없는 망상에까지 다다를 무렵, 아쿠아는 자신도 이곳은 익숙지 않은지 헤매다가 겨우 원하는 것을 찾았다.
“아, 여깄다”
그리고 아쿠아는 사무실 벽면의 한켠을 가리켰다. 다 해지고 낡아서 벗겨지고 습기에 차 곰팡이가 피고 눋고 찢어져서 알아보기에 대단히 힘들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이 대피소와 주변의 지형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여기야. 이걸 좀 봐봐”
비록 해지긴 했어도, 인류가 서기 2세기부터 써 온 기록매체 - 종이는 첨단 전자장비나 영상장치보다 더 고집스럽게 이 곳의 공간정보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마저도 이제 세월과 지하의 습기 속에서 다 흐려져 가고 있었지만.
“여기가 우리가 있던 곳이야. 아까 다프네 언니랑 드리아드 언니가 자라던 곳”
아쿠아는 거의 완전 칠흑이나 다름없는 어둠 - 거의 관리하지 않은 구역이라 그런지 여긴 불빛도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 속에서 거의 다 뭉그러진 낡은 약도의 한켠을 가리켰다. 조명도 없고 글씨도 거의 다 지워져 있는데다 종이도 해져서 정말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세 바이오로이드들은 그것이 대충 바이오스피어나 어떤 창고 겸 생산시설 정도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대피소가 폐쇄되고 모든 구역이 격리되었을 때, 마침 나는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어. 여기가 대피소의 식량이랑 에너지 생산을 담당하는 동시에 창고 역할도 했거든. 동시에 이곳에 갇혀버린 거기도 하지만...”
홀로 지내다 버릇이 된 것인지 아쿠아는 괜히 길게 중얼거리며 그 옆의 흔적을 따라 눈을 돌렸다. ‘어디 보자, 어디 보자’며 뇌까리며 그녀는 거의 지워지고 찢어지고 해져서 이젠 알아보기도 힘든 선들을 따라 손가락을 짚었다.
“그래, 아마 여기가 언니들 떨어진 데일 거야”
그건 자재창고, 그러니까 아쿠아가 있던 공동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그보다는 좀 더 작은 공간이었다. 거기 쓰여 있는 글씨들 역시 어둡고 거의 지워져 있어서 알아보기 쉽지 않았지만...
“지하 주차장....?”
“그래. 인간님들이 탈것들을 세워두기 위한 곳. 원래 대피소를 지으면서 필요한 건설차량들을 세워놓거나 돈 많은 인간님들의 비싼 차를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어. 지금은 아무 것도 없지만.”
그리고 아쿠아는 말을 이었다.
“돈 많은 인간님들은 비싼 차들을 타고 여기 와서 숨은 다음에, 소중한 자동차들이 부서지지 않게 여기다 보관해 놓으려고 했었어. 전쟁이 끝나면 바로 대피소에서 나와서 타고 나갈 수 있게 말이지. 정작 볼트가 닫힐 때는 아무도 안 왔지만...어, 대신 가끔 우락부락한 군용 로봇들이 들어왔었어. 그로부터 얼마 안 있고 여기가 폐쇄되었지.”
샌드걸은 부자들이 애지중지하는 고급 스포츠카들을 보존해두기 위한 대피소 주차장마저 군용 기갑병기들을 위해 써야 했을 정도면 이미 전쟁의 참화가 그 근처까지 몰려왔었을 거란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 그 동안 주차장에 가 보신 적이 없었던 겁니까?”
“응. 애초에 모든 구역이 격리되어서 내가 갈 수도 없는 곳이었어.”
“그러면 아까 우리를 어떻게 만날 수 있었던 거죠?”
“내가 아까 말했지? 언니들이 떨어질 때 위쪽이 다 무너져 내리면서 지반이 기울어진 모양이야. 뭐 엄청 무거운 거라도 같이 떨어졌나 보지? 죄다 뭉개고 내려올 정도였던 거 보면”
당연히 알고 있던 사실이긴 했지만, 자신들이 수없이 많은 돌과 흙과 바윗덩이들과 함께 - 암흑 천지여서 코앞에 뭐가 있었는지도 모를 상황이었지만 - 굴러떨어졌다는 것을 새삼 다시 깨닫자 생각 없는 브라우니만 빼고 나머지 두 바이오로이드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러니까 사실 그녀들은 아까 그 땅구덩이 속에서 나갈 길을 찾느니 어쩌니를 할 ‘필요가 없었을 뻔’했다. 추락하는 바위에 깔려 잘 다져진 고기가 되거나 흙더미에 깔려 생매장되었으면 뭐 바깥으로 나가고 자시고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비록 여기저기 까지고 찢어지긴 했지만, 어디 한 군데 부러지거나 으스러진 데 없이 - 염세적인 샌드걸조차 그런 상황을 바라지는 않았다 - 사지 멀쩡히 그 구덩이로 굴러떨어진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사실을 그녀들은 다시 한 번 재확인했다. 오, 전능하신 아자젤이시여.
“아까 우리가 들어온 틈새 봤지? 여기가 온통 다 흔들리면서 창고 벽이 갈라져서 생긴 거야. 난 그 틈새로 무슨 일이 난건지 보러 갔다가 언니들을 만난 거야“
아쿠아는 그게 정말 기쁜 듯했다. 아마 오늘만큼 말을 많이 해 본 적도 백여 년 만이리라. 그러니 이처럼 괜히 더 수다스러워진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머지 바이오로이드들은 여길 나가고 싶어했고, 어쨌든 아쿠아도 백 년만에 만난 손님들이 뭘 원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거기가 주차장이란 말은...그럼...”
“맞아. 멀지않은 곳에 탈것들이 드나들 통로가 있단 얘기지. 그리고 백년쯤 된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 통로는 층수를 표시해 놓은 커다란 콘크리트 기둥 옆에 있었어”
“......”
“......”
레프리콘은 브라우니를 돌아보았다. 인간님 맙소사. 이걸 브라우니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분대장의 눈빛을 본 브라우니는 왜 그런 눈으로 돌아보시냔 표정으로 마주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아쿠아의 말뜻을 이해했다.
“에, 에헴, 보...보셨슴까? 전 이미 그걸 다 알고 했다 이검다!”
샌드걸은 브라우니의 승리감에 도취된 표정을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브라우니의 허세 쩌는 자화자찬을 무시하고 그냥 아쿠아의 말을 계속 듣기로 했다. 아쿠아는, 이상하게도, 어쩐지 헛헛한 웃음을 지으며 설명을 계속했다.
“아까 말했듯이, 볼트의 출입구는 폐쇄되었고, 모든 구역은 격리되었어. 아무 데로도 갈 수 없어. 하지만,”
아쿠아는 그러면서 주차장으로부터 손가락을 따라 지도의 가장 바깥쪽 구석을 가리켰다. 낡고 해져서 아예 다 지워진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거기엔 적혀 있는 것이 없었는지 그 지점은 공백이었다.
“지하 주차장은 원래 대피소에 소속된 시설이 아니야. 애초에 공사를 위해, 그리고 차량 보관을 위해 대피소 바깥에 지어졌던 장소고, 당연히 지하 볼트 안에서 차를 탈 일은 없잖아? 내가 언니들 처음 봤을 때 언니들 보고 가까이 오라고 했던 거 기억 나? 거긴 대피소의 관할구역이 아니라서 내가 더 가까이 갈 수 없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샌드걸과 레프리콘은 그제서야 왜 아쿠아가 그녀들을 바라보기만 했는지, 다가가지 못하고 자신들을 부른 건지 꺠달았다. 아마 바이오로이드에게 입력된 대피소의 공간적 경계가 거기까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의미하는 바는....
“지금 대피소의 남은 전력을 모두 톰에게 갖다 주면 반나절? 음, 갇혀 있으니까 시간을 모르겠네. 아무튼 수 시간을 움직일 수 있어. 그리고 그 동안 쟤는 뭐든지 치워버릴 수 있지”
“그건...즉....”
“응. 톰은, 나와 달리, 원래대로라면 공사가 끝나면 여길 나갔어야 할 애였어. 대피소가 아니라, 건축회사 소유물이거든. 그러니까, 주차장까지 이동이 가능해.”
아쿠아의 말이 갑자기 뚝뚝 끊어졌다. 거기에는 그 작은 체구가 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허탈감, 주저함, 초연함, 아쉬움과 같은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어찌 보면 억지로 울음을 참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샌드걸은 그제야 왜 아쿠아가 조금 전 조금 헛헛하게 웃었는지 이해했다. 조금 전에 왜 망설였는지도. 그러나 그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아쿠아는 말을 이었다.
“톰을, 주차장으로 데려가서, 무너진 바위와 잔해를 치우게 해. 그러면, 통로를 찾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하지만 그러면....그러면 당신은....”
샌드걸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레프리콘은 약간 시간이 지난 뒤에야 샌드걸의 말뜻을 이해했다. 대피소의 모든 전력과 예비 축전지마저 저 AGS에게 몰아 주면, 당장 작물 재배에 필요한 조명조차 밝힐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여기서 살아가는 아쿠아는....
인간으로부터 ‘이곳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바이오로이드는 그 곳을 떠날 수 없다.
인간으로부터 마지막에 받은 명령에 의해 이 무저갱에 속박된 아쿠아는 영영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크흥, 하고 아쿠아는 코를 쓱 닦았다.
“됐어. 어차피 물자들도 떨어져 가고 있던 참이었어. 언니들까지 데리고 여기서 천년만년 지낼 순 없다구.”
여기서 얼마나 오래 버티든 그녀에게 예정된 운명은 결국 어둠 속에 잠겨 영원히 잊혀지는 것이다. 하지만 백 년 만에 찾아온 반가운 세 손님들은 다르다. 오늘 몇 시간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그녀는 가슴이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톰이 정지한 지 몇십년 만에 처음으로 제대로 나눠 본 대화다. 감자와 오이 외에 처음으로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났다. 이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아까 말했지? 언니들이 여기로 떨어지면서 지반이 뒤틀린 거 같아. 창고 외벽 갈라진 거 봤잖아? 상층부도 불안정해져서 언제 무너질지 몰라. 여긴 이제 오래 못 갈 거야.“
그리고 그녀는 씩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손님들과 더 오래 얘기하고 싶다. 아니, 천년이고 만년이고 붙들어 놓고 함께 지내고 싶다. 손수 재배한 드리아드 감자와 다프네 콩을 대접하면서 이 온기를 더 느끼고 싶다. 너무 오랫동안 홀로 있었다. 외로움은 이제 사절이다. 하지만...
”그러니까 손님들은 빨리 떠나야 하지 않겠어?“
레프리콘과 샌드걸은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여기가 이 지경이 된 데에 자신들이 완전히 무관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정말, 정말로 미안합니다”
“미안할 거 없다니까. 언니들 여기선 행복하지 않을 거 알아. 내 명찰을 보라구, 난 여기 관리인이라구, 엣헴. 손님 관리도 내가 해야지.”
레프리콘은 말없이 아쿠아를 껴안았다. 그녀는 의연하게 명찰을 내보이는 아쿠아의 작은 몸이 작게 떨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백 년만에 느끼는 따뜻한 온기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며 기뻐하는 것도. 아쿠아가 짐짓 밝게, 그러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여길 떠날 수 없지만, 언니들은 떠날 수 있어. 살 수 있는 바이오로이드는 살아야지, 안 그래?”
“아쿠아, 전....”
“언니들, 살고 싶잖아?”
그 한마디가 갑자기 샌드걸의 가슴을 푹 찔렀다.
물론 살고 싶다. 그녀는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긴 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자1살을 도모하는 자1살성애자는 아니다. 염세주의는 헛된 희망을 부여잡는 바보짓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살아갈 수 있는 분명한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그걸 제 발로 차버리는 얼간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살고 싶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가?’
그녀는 자기 자신이 조금 전 저 어두운 땅구덩이 속에서 너무 간단하게 삶을 포기할 준비를 했던 것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무엇이라도 해보려는 브라우니를 비웃으며 말이다. 염세주의자는 세상에 미련이 별로 없기에, 적극적으로 죽음을 찾아다니지 않을진 몰라도 죽임이 임박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굳이 그걸 피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조금 전 자신의 모습과 지금 아쿠아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고 느꼈다.
겹쳐 보인다고?
답없는 길1빵1충 년 같으니, 헛소리하지 마라. 샌드걸은 스스로를 욕했다. 이 아쿠아가 자기 기종처럼 염세주의자인가? 그랬으면 오래 전에 스스로 굶어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라. 이 아이는 혼자서 온 힘을 다해 이 무저갱의 지하에서 꽤 번듯한 정원을 꾸렸다. 감자와 오이에 이름까지 붙여서 말을 걸어 가며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인간들이 내린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며 여기까지 왔다. 그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내가, 아쿠아와 브라우니 앞에서, 감히 살고 싶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가?’
인간님들의 저주스러운 속박만 아니라면, 아마 아쿠아도 살고 싶을 것이다, 그녀 자신이 던진 질문 그대로, 그녀도 살고 싶으리라. 자기 자신의 생명을 포함해, 자신이 가꾸어온 모든 것들을 헛되이 어둠 속에 스러지게 두고 싶지 않을 터다, 틀림없이.
그에 비하면 자신은?
그렇게 쉽게 삶을 포기한 내가, 백여 년도 넘게 홀로 꿋꿋이 살아온 자의 생명을 대가로 살아나가도 되는 것인가?
샌드걸은 말없이 아쿠아와 그녀를 껴안고 토닥이는 레프리콘을 보며, 아쿠아의 물음에 차마 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저....중위님? 뭐 하심까?”
얼마 전에도 이 브라우니에게 똑같은 질문 받았던 거 같은데. 샌드걸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브라우니를 돌아보았다.
“뭐, 뭘 하냐뇨...나갈...준비를 해야죠....”
“어, 중위님, 지금 우심까? 네?”
“안...웁니다. 비가 와서, 일병이, 윽, 착각한 겁니다”
“네? 여긴 지하지 말임다?”
“아쿠아를....아, 젠장. 미안합니다 아쿠아, 정말 미안합니다”
“왜 미안해 하심까? 어, 혹시 아까 재배시설에서 감자라도 서리하셨슴까?”
“브라우니, 브라우니, 브라우니!!!!”
부하의 한심한 작태를 보다 못한 레프리콘은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제발! 눈치 좀! 챙겨요! 그리고 생각이 있으면 아쿠아에게 고맙단 말이라도 좀 해요!”
그러나 그런 레프리콘의 속을 뒤집어 놓게도 브라우니는 활짝 웃으며 밝게 경례했다.
“아! 맞슴다! 토미 워커 빌려 주신 거 진짜 감사함다! 오르카의 페어리 친구들도 새 아쿠아가 생기면 분명히 반가워 할 검다!”
“제발 좀 생각을 하고 말해요, 브라우니! 여기 홀로 남겨질 아쿠아가 불쌍하지도 않나요! 당신 그렇게 이루어지지도 못할 얘기 하면서 남 괴롭히는 악취미였어요? 당신 앨리스에요?”
브라우니는 도저히 이해 못하겠단 표정을 지었다.
“?? 왜 그러심까? 다같이 나갈 거 아님까? 어, 아까 여기 곧 무너질꺼라 말씀하시지 않았슴까? 여기 머물면 죽을 검다!”
“누가 그걸 몰라요! 아쿠아는 여길 못 떠난다구요!”
“왜 못 나감까?”
“꺄아악!! 아아아, 브라우니, 진짜 바보에요? 아쿠아는 인간님들에게 여길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으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대체 왜 문제가 됨까?”
그리고 브라우니는 아쿠아에게 뚜벅뚜벅 다가가서, 그녀의 뒤도 돌아가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턱 짚었다.
“우린, 지금부터 납치범임다”
샌드걸은 뒤통수에 기간테스 주먹을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벙찐 표정을 지으며 입을 떡 벌린 걸로 봐서는 레프리콘도 같은 기분을 느낀 듯했다.
<계속: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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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읽기 편하시라고 글꼴들을 바꿔보고 있는데 가독성이 괜찮으신가요?
대화랑 서술문의 글꼴을 다르게 하고(모바일에서는 구분되지 않음), 등장인물별로 대사의 색깔을 다르게 입혀봤는데 어떠신가요? 더 읽기 편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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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브라우니인지부터 의심해야 하는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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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 아쿠아이야기 들으니 눈물이 살짝 도네요 아직 7정도 남았는데 어떻게 진행될지 기대되네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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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쪼렙도 구하려는 참된 빛간이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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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덧글과 추천이 이 관심병자를 흥분시킵니다 앗 하으응 다음편은 내일 올리겠습니다. 전편에 썼다시피 내용은 다써놨는데 한꺼번에 다올리면 도배일 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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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가 아니지만 눈치가 없다든지...엉뚱한 데서 머리가 돌아간다든지...그냥 운좋은 바보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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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쪼렙도 구하려는 참된 빛간이시군요 | 20.10.16 19: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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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삐풀린 증기생명체
애초에 브라우니인지부터 의심해야 하는거 아닐까요? | 20.10.16 13: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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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젤 스킨이라든가 네오딤 스킨을 보면 브라우니는 바보가 아닙니다. 열혈이라 생각을 덜하는게 문제지. | 20.10.16 13: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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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가 아니지만 눈치가 없다든지...엉뚱한 데서 머리가 돌아간다든지...그냥 운좋은 바보든지... | 20.10.16 19: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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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켰군요. 사실은 브라우니가 아니라 초코케잌입니다(?) | 20.10.16 19: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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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아서 준위까지 단 브라우니일지도... | 20.10.17 18: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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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 아쿠아이야기 들으니 눈물이 살짝 도네요 아직 7정도 남았는데 어떻게 진행될지 기대되네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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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덧글과 추천이 이 관심병자를 흥분시킵니다 앗 하으응 다음편은 내일 올리겠습니다. 전편에 썼다시피 내용은 다써놨는데 한꺼번에 다올리면 도배일 거 같아서... | 20.10.16 19: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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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10.26 07:3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