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다. 어둡고 눅눅한 땅굴 속은 인간이건 바이오로이든건 오래 지낼 만한 곳이 아니다. 애초에 땅굴 속에서 지내도록 설계된 더치걸 정도나 예외일까. 아니, 그 더치걸들조차 차갑고 깜깜한 지하 속에 갇혀 있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땅이 푹 꺼진 구덩이 속에 세 바이오로이드가 웅크린 채 나갈 길을 찾았다.
“이것 보십쇼, 상병님! 이거, 잘 하면 치울 수 있을 것 같지 말입니다!”
브라우니가 램파트보다 더 큰 부서진 콘트리트 덩어리 - ‘지하 무슨무슨 층’이라고 희미하게 페인트칠이 남은 - 를 툭툭 치면서 명랑하게 말했다. 그러나 레프리콘은 토모를 보는 눈으로 그녀의 분대원을 바라보았다. 하기야 토모와 브라우니는 동급의 지능 모듈을 쓴댔던가.
“‘잘 하면’? 브라우니, 그걸 어떻게 치울 생각이죠?”
“그걸 지금부터 생각해 보면 될 것 같지 말임다”
레프리콘은 땅이 꺼져라....아니, 여기서 땅이 더 꺼지면 곤란하지. 땅이 솟아라 한숨을 쉬면서 자기가 어쩌다가 이런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곱씹었다.
완전히 계획 밖의 일이었다. 원래 그녀를 포함한 분대 - 스틸라인 정규 보병 편제는 레프리콘 1 브라우니 3이다 - 가 맡은 임무는 마리 사령관이 이끄는 스틸라인 본대가 과거 발전소들이 있던 시설을 임시 주둔지로 개조하는 동안 그 외곽 지역을 정찰하는 것이었다. 영원의 전장으로 진격하기 전의 임시 집결지 말이다. 그러니까 원래 그녀와 그녀의 분대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대충 정해진 정찰 경로만 쭐래쭐래 돌아보고 돌아오면 되는 일이었다. 사실상 나들이나 다름 없는 임무였고, 마리 본인도 원칙이니까 시키는 것이지만 크게 신경쓰지는 않는 눈치였다.
그놈의 빌어먹을 철충놈들만 없었다면 말이다.
그녀와 그녀의 분대는 이 지역에서 적을 조우할 계획이 없었고, 따라서 기본적인 무장 외에는 그럴 대비도 안 되어 있었다. 당초 마리는 이 구역에 철충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고 - 적어도 위성 정보를 보내 온 에이다는 그렇게 알려줬다 - , 딱히 지형적인 위험요소도 없을 것이라고 보아 소규모 분대에게 정찰임무를 맡긴 것이었다.
그 예상은 둘 다 틀렸다.
첫째, 레프리콘과 그녀의 브라우니 분대는 균열로 갈라진 포장도로 밑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온 토터스에 경악해야 했다. 에이다, 이 코어에 써멀 대신 맛다시 바른 AGS같으니, 여긴 철충 없다면서! 그게 연약한 지반에서 튀어나와 그 위에서 쿵쿵 날뛰는 토터스를 보고 레프리콘이 느낀 첫 감정이었다.
둘째, 아까 여기 지반이 연약하다고 했었던가? 레프리콘도 위성사진으로는 여기 지반이 약한지 아닌지 알긴 어려울 거라곤 인정했지만, 그래도 토터스와 그녀의 분대가 서로 한바탕 요란하게 뛰어다니며 교전하는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땅이 갑자기 푹 꺼지는 건 좀 아니지 않은가. 땅이 뭐 속 빈 공갈빵도 아니고.
“이 지역은 옛날에 버려진 지하 시설이었나 보군요. 공장인지, 대피호인지. 아무튼 버려진지 꽤 되어서 기록에 남지 않았나 봅니다”
샌드걸이 무심한, 그러나 맥 빠지는 목소리로 상황을 정리했다. 하긴 그녀도 운 억세게 없긴 마찬가지다. 스틸라인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나온 그녀는 순찰 중 레프리콘의 분대가 거대한 토터스와 교전중인 것을 목격했고, CAS(근접항공지원)을 하기 위해 날아오다가 그만 같이 봉변을 당하고 만 것이다. 지반이 무너져 같이 추락하던 토터스가 발사한 파편탄이 재수없게 그녀의 추진기에만 맞지 않았어도 그녀는 무사히 돌아가 레프리콘의 분대가 당한 일을 마리에게 보고할 수 있었을 텐데.
“음...통신이 되질 않는군요. 떨어지면서 무전기가 고장났든지, 상당히 깊은 지하로 떨어진 모양입니다. 상병, 당신 무전기는 어떻죠?”
샌드걸의 무미건조한, 그러나 여전히 생기없는 보고에 레프리콘은 오늘의 연속된 불운에 다시 땅이 솟아져라 - 실제로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 한숨을 쉬었다. 불운은 언제나 겹쳐서 온다더니.
“무전기가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 그건 무슨 소리죠?”
“그건 저기 있는 저 418번 브가년에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레프리콘은 여전히 콘크리트 기둥을 발로 툭툭 치며 - 마치 그러면 마술같이 그게 사라져 줄 것처럼 - 뭔가 중얼대는 브라우니를 가리켰다.
토터스와 교전을 시작한 직후, 레프리콘은 그녀의 분대를 전투지휘하기 위해 무전기를 저기 있는 418번에게 맡기고, 예상치 못한 적과 조우했음을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상황보고와 전투지휘를 동시에 하기란 어려우니까, 분명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이 ‘합리적 판단’의 유일한 문제는 그녀가 브라우니의 지능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이다.
균열투성이 땅이 갑자기 푸딩처럼 요동치더니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한 무중력 상태를 경험한 뒤, 어두컴컴한 지하로 떨어진 레프리콘은 그 어둠 속에서 가장 먼저 무전기를 줬던 418번 브라우니를 찾았다. 다행히 브라우니들이 쓰는 바이저의 붉은 불빛 때문에 그녀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무전기를 잃어버렸다고요?”
정확히 30분 전 자기가 브라우니에게 한 반문을 반복하는 샌드걸 앞에서 레프리콘은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이걸로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가 스틸라인의 군기며 훈련도가 개판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건 그저 겹치고 겹친 악운이요 그 결과일 뿐이다. 예측하지 못한 나쁜 일들이 연이어서 발생하는 것. 이걸 인간님들은 머피의 법칙이라고 했던가.
.....물론 마리가 레오나나 아르망 같은 정교한 예측기계는 아니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그렇군요. 그러면 우린 조난신호도 보내지 못하고 여기 갇힌 거군요.”
“네, 그런 셈이죠.”
“알았습니다.”
의외로 샌드걸은 30분 전 레프리콘이 브라우니에게 그랬던 것에 비해서는 그렇게 격앙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걸터앉은 무너진 철근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기대어 눈을 감았을 뿐이다.
그러고서 한참동안 아무런 움직임이 없어 레프리콘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걸까. 혹시 나갈 방도를 계획하고 있나?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대장은 고도의 연산능력을 갖고 있다는데, 혹시 같은 부대원인 그녀도 뭔가 비슷한 능력을 가진 게 아닐까. 그러면, 어쩌면 이 암흑천지에 온 사방이 부서지고 무너진 폐허로 막힌 땅구덩이 속을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레프리콘은 막연한 기대를 품으며 샌드걸을 바라보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벽에 기대어 앉은 자세 그대로 아무 말 없이 주머니에서 꺼낸 라이터나 만지작거렸다.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각인이 선명하게 새겨진 좋은 지포식 라이터였지만 아무튼 현 시점에서 그게 특별히 의미가 있는 행위 같진 않아보였다.
“저....중위님? 뭐 하심까?”
이번만은 레프리콘도 브라우니의 저 뻔뻔할 정도의 대범함에 몰래 감사했다. 솔직히 그녀도 궁금했으니까. 그래도 타부대의 위관급 장교 - 샌드걸 기종은 중위 취급이다 -를 귀찮게 하기엔 레프리콘에 내장된 군대 눈칫밥 모듈이 너무 강했다.
그러나 거기서 나온 샌드걸의 대답은 레프리콘의 기대를 산산이 부수는 것이었다.
“뭘 하냐뇨...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습니다만.”
“......?”
“딱히 할 게 없잖습니까. 자는 것도 좋지만 아직 졸립진 않아서요. 담배가 없는 게 아쉽군요.”
샌드걸은 오히려 왜 그런 걸 물어보냐는 표정으로 브라우니를 바라보았다. 마치 ‘왜 가시에 찔리면 아픈가요?’ 라는 물음을 들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레프리콘은 자기처럼 브라우니 역시 샌드걸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하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이번에도 틀렸다. 이번에는 그녀의 분대원을 너무도 과소평가했다.
“오, 아무것도 하시는 거 없으시면 저랑 이거 옮기는 거 같이 도와주심 안 됨까?”
이번엔 레프리콘의 고개가 뜨악한 표정과 함께 브라우니 쪽으로 홱 돌아갔다. 저 무식한 콘크리트 기둥을 옮기는 게 바이오로이드 둘 가지고 될 일도 아니지만 - 혹시라도 해서 덧붙이자면 레프리콘이 거기 가세해서 셋이 된다고 해도 별로 변하는 건 없을 것이다 - 뭣보다 타부대 장교 - 샌드걸은 같은 스틸라인이 아닌 타부대, 곧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소속이고, 더구나 장교 계급이다 - 에게 사병이 너무 뻔뻔하게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요구하는 게, 군대 눈칫밥 모듈이 꽤나 공고하게 자리잡은 그녀로서는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스틸라인은 위아래도 없는 가라부대다’라는 소문이 퍼질까 봐 레프리콘은 입을 뻐끔거리며 샌드걸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샌드걸은 휴가 짤린 이프리트 병장마냥 미쳤냐는 둥, 군기 빠졌냐는 둥의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한 번, 이해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을 뿐이다.
“그걸 왜 해야 하죠?”
동감이다. 분명히 저 우악스러운 시멘트 덩어리는 위쪽 방향으로 올라가는 경사로를 막고 있었고, 그래서 그걸 치울 수만 있다면야 그 뒤편에 보이는 틈새를 통해 위로 올라갈 통로를 찾아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치울 수만 있다면 말이다. 문제는 저걸 움직이려면 여기 있는 군용 바이오로이드 셋은커녕 최소한 포트리스 AGS쯤은 되는 장비가 있어야 뭘 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샌드걸의 지적은 정확했다. 아무 소용도 없는 일에 왜 힘을 빼야 하는가.
“그, 여기 옆에 땅을 파서 기둥 기울이면 사람이 지나갈 틈새 정도는 만들어질 거 같지 않슴까?”
브라우니치고는 놀랍도록 머리를 쓴 계획이다. 레프리콘이 슬쩍 곁눈질해 본 결과 ‘이론적으로는’ 실제로 가능하기까지 한 계획이었다. 아무튼 이 깊은 지하에 떨어졌으면서도 아직까지 그녀들이 산소부족으로 질식하지 않은 걸 보면, 분명 어딘가에는 바깥과 통하는 곳이 있다는 의미다. 어딘가 공기가 들어오는 구멍은 있다는 거니까. 이렇게 좋은 머리를 가졌으면서 무전기는 왜 잃어버린 걸까. 아무튼, 부러진 기둥, 혹은 부러진 기둥 형상을 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박힌 지반은 단단한 바위가 아닌 흙바닭이었다. 요령껏 파내어서 기둥을 밀어낼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면, 셋이 힘을 합쳐 기둥을 살짝 기울이는 것 정도는 잘만 하면 - 그리고 운이 좋다면 - 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바이오로이드 하나 정도 드나들 틈 정도는 만들어진다. 멋진 계획이다.
그걸 팔 도구가 있다면 말이다.
“도구 말씀이심까? 헤헤, 여기 미리 준비해뒀지 말임다”
“......”
레프리콘은 허탈한 표정으로 브라우니가 자랑스럽게 쥐어 내보인 군용 숟가락 - 그 어둠 속에서도 예쁘게 반짝일 정도로 대단히 관리가 잘 된 - 을 바라봤다. 이 빌어먹을 418번 브라우니는 저걸 삽으로 쓰겠답시고 주머니에서 일곱 개나 꺼냈다. 무전기 하나를 제대로 간수 못 해서 잃어버리는 녀석이 대체 왜 숟가락은 예비까지 챙겨서 꿍쳐놓는 건진 알 도리가 없었다. 다른 물자 냅두고 작전 때에조차 그런 걸 챙기는 정신머리는 더더욱. 아, 그래, 그냥 맨손으로 파는 것보다야 낫겠지만...그럴 바에야 그냥 무전기를 잘 갖고 있는 게 백 배 천 배는 나았을 거다.
“그걸로 저길 파려면 최소한 한 달은 내내 파야겠는데요”
브라우니는 그게 뭔 문제냐는 표정으로 자신의 분대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한 달 동안 파면 되잖슴까?”
레프리콘은 또 실수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분대원에 대한 평가치가 과도했다는 걸 깨달았다.
“브라우니...한 달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면서 땅만 팔 겁니까? 그 사이에 우리가 굶어죽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요?”
“같이 떨어진 군장에 전투식량 남은 게 있으니 아껴 먹으면 되지 않겠슴까?”
“얼마 남아있는데요?”
“엿새치임다”
여기서 레프리콘은 벙찐 표정을 지어야 했다. ‘고작 엿새치’ 갖고 저리 낙천적인 분대원의 처참한 지능수준도 그렇지만, ‘무려 엿새치’ 전투식량이 그녀의 군장에 들어 있었단 것에도 당황해서다.
“저기, 브라우니, 규정상 군장에 지참하는 전투식량은 사흘치입니다만?”
“에헤헤...보급관님께는 비밀로 해주십쇼. 하지만 덕분에 우리가 먹을 게 늘었잖습니까”
즉 바꿔 말하면 군장에 들어가야 할 다른 걸 빼고 전투식량을 처넣었단 얘기다. 좀 더 간단하게 말하면 소위 ‘가라군장’이란 거다. 레프리콘은 철충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 그리고 실제로 나타나서 전투를 치러야 했던 - 작전에 나가는데 전투식량이나 처넣고 앉았냐고 빽 소리치고 싶었으나, 혹시라도 소음을 냈다가 지반에 영향을 줄까봐 그만두었다. 그 대신, 돌아가면 반드시 브라우니에게 레드후드를 대면시켜 주마고 다짐했다. 물론 그러자면 먼저 살아서 여길 나간 다음에 행정보급관 임펫 원사(진)을 만나야겠지만. 그녀가 이런 흉악한 생각을 하는 것도 모른 채 브라우니는 활기차게 말을 이었다.
“두 분이서 도와주시면 기간이 더 단축될 검다! 셋이 하니까 한 달을 나누면 열흘로 줄게 되겠슴다!”
“잠깐만, 전 참여할 생각이 없는데요.”
마지막 답변은 레프리콘이 한 것이 아니었다.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은 동시에 샌드걸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샌드걸은 그 둘의 시선에 오히려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왜 구태여 그런 헛수고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 말에 브라우니가 명랑하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뭔가 하는 게 낫지 않겠슴까?”
그러나 샌드걸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해도 소용 없는 일을 하느니 안 하는 게 좀 더 편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바뀌는 게 없슴다. 뭐라도 행동하면 분명 길이 보일 검다!”
그리고 브라우는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분명히, 바깥에서도 우릴 찾고 있을 검다! 우리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서로 닿을 검다!”
순간, 비록 어둠 속이었지만 레프리콘은 샌드걸의 눈매에 비릿한 비웃음이 어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싸한 느낌이 그녀의 등골을 적셨다.
“‘그들이 우리를 찾을 것’이라고요? 흠, 일병, 당신 등급이 뭡니까?”
뜬금없이 돌아온 질문에, 브라우니 지능으로도 어렵지 않은 질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잠시 어버버 하다가 답변했다.
“어, 어어, B급이지 말임다.”
“상병, 그쪽은?”
레프리콘 역시 갑자기 질문이 자기에게 돌아오자 당황했다. 하지만 역시 어려운 질문은 아닌지라 그녀는 계급상 상관의 명령에 정중하게 답했다.
“저도 B급입니다, 중위님.”
“그렇군요. 저도 B급입니다.”
“.....?”
“그러니까 우리 중 누구도 승급한 대원은 없군요.”
“저, 중위님,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검까?”
브라우니의 조금 기분이 가라앉은 듯한 목소리에 레프리콘은 갑자기 엄습해오는 불편함을 느꼈다. 어디 다른 곳으로 도망가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여긴 어디 빠져나갈 데 없는 칠흑의 좁디좁은 구덩이였다. 제발 여기서 분위기가 더 나빠지지 않길 바라는 레프리콘의 간절한 바람을, 그러나 샌드걸은 무시하고 시선을, 그녀들이 떨어진 저 위로, 무너져서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무저갱의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우린 최소한 수십 미터 밑으로 떨어졌을 겁니다. 아니, 수백 미터일지도?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는 것에도, 그리고 우릴 꺼내주기 위해 여기까지 파고 들어오는 데에도, 뭘 하든 막대한 노력과 시간이 들 겁니다. 아, 비용소모는 말할 것도 없겠지요.”
“그래서 도와주실 검까, 안 도와주실 검까?”
샌드걸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냐는 듯한 표정으로 시선을 브라우니에게로 되돌렸다.
“아까 제가 뭘 하냐고 물었죠? 정말로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었습니다만. 굳이 따진다면 언제쯤 어떻게 죽는 게 제일 좋을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담배가 없는 게 아쉽군요. 마지막 가는 길에 한개피 정도는 피우고 싶었는데.”
“네?”
브라우니의 당황스런 반문이 너무 멍청해 보였던 모양이다. 브라우니가 멍청한 건 그녀의 직속상사인 레프리콘도 백 번 인정하는 바였지만 솔직히 샌드걸의 답변이 레프리콘 기준으로도 황망한 건 사실이라 그녀도 아연한 표정으로 샌드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어둠 속에 고립된 셋 중 둘의 시선이 나머지 하나에게로 모이자 그 하나는 좀 더 확실하게 결론을 말해야겠다고 느꼈다.
“일병, 현실을 인정하십시오. 구조대는 오지 않을 겁니다.”
“그럴 리가 없슴다. 늦어도 저녁 점호 때면 저희가 빠진 게 드러날 검다. 그러면 분명히 마리 대장님이 저희를 찾으러 수색을 하실 검다”
“아직도 헛된 믿음을 갖는군요. 일병, 그럴 거 같진 않지만 혹시 모르니 물어보죠, 당신 혹시 불굴의 마리 지휘관님과 잘 아는 사이입니까?”
“네? 아님다. 얼굴도 직접 마주한 적 없슴다. 지휘관기과 같이 붙어 다니는 애들은 승급한 애들임다”
물론 그녀들도 열병식이나 출정식 할 때 혹은 큰 훈련이 있을 때 연설하러 나오는 마리를 대열의 한구석에 서서 먼발치에서나마 본 적은 있다. 하지만 인간 사령관과 직접 대면하는 육군 총책임자와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병이라? 승급할대로 승급한 S급 인력이 아닌 한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녀들의 태도에 샌드걸은 다시 헛헛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군요. 사실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중위라지만 발에 채이는 B급이라서 레오나 대장님이랑 실제로 말 붙여 본 적은 한 번도 없죠. 아마 대장님도 저란 샌드걸이 있는 줄도 모를 겁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다시 한 번 예의 그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우릴 구하러 올 거라는 그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군요. 아, 혹시 더 높으신 분이랑 아는 사입니까? 설마.....”
샌드걸의 표정이 묘해졌다.
“....혹시 둘 중에 사령관님과 개인적으로 친하신 분이...? 어...밤시중을 든다든지...”
“네? 아이고, 아니, 아닙니다!”
레프리콘은 격렬하게 머리를 흔들며 손을 휘저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흩날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역시 똑같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는 브라우니의 입에 들어갔다.
“에퉤퉤퉤, 상병님, 머리카락 얼굴 쳤지 말임다”
그 때아닌 콩트에 샌드걸은 쿡쿡 웃었지만, 그것이 그녀의 몸에서 풀풀 풍겨나오는 절망적인 오오라를 걷어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우리 중 누구도 오르카에 소중한 이는 없습니다. 우린 B급입니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그저 소모품이라고요.”
웃던 표정 그대로, 샌드걸은 힘없이 절망적인 선고를 내렸다. 레프리콘도 내심 설마 그럴까고 마음 속에 담아 두고 있었지만, 차마 입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던 그 불안을.
“그들은 우릴 찾지 않을 것이고, 우린 구조되지 못할 겁니다.”
“......”
그 주절대기 좋아하는 브라우니가 꾹 입을 다물고 어디 한번 계속 말해보란 듯 - 타부대라곤 해도 장교 앞에서 - 팔짱을 끼자 레프리콘은 여기서 땅이 더 꺼져서 자기만 한 십수미터 밑으로 떨어지면 좋겠다고 충심으로 기원했다. 그녀가 ‘418번, 제발, 상급자에게 하극상만은’ 하는 표정으로 브라우니를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다행히 샌드걸은 브라우니의 그런 무례한 태도에는 아랑곳없이 - 어차피 이제 와서 그런 것은 의미없다는 말투로 - 냉정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 괜한 일에 힘 빼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어차피 결말은 정해졌으니까요.”
“.....”
브라우니가 숟가락을 든 채 아무 말 없이 샌드걸을 노려보자 레프리콘은 심각하게 브라우니의 뒷목을 쳐서 기절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 란 고민까지 하기 시작했다. 이 심연의 무저갱 속에 말이 통하는 상대라곤 서로, 그러니까 서로에게 고작 둘씩뿐인데 그들 사이에서도 불화가 생기는 건 사절이었다. 스틸라인이 남의 부대 장교한테나 하극상을 저지르는 부대라는 소문이 도는 건 더더욱. 아, 물론 그 소문이 퍼지려면 여기서 살아 나가야 하겠지만...
브라우니가 계속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샌드걸은 좀 미안하단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힘빠지는 소릴 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이게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우리 기종이 원래 상황을 좀 보수적으로 평가하는 성미로 설계되어서 말이죠,”
“......”
“일병, 받아들이십시오. 우리 기종이 비관적이고 염세적이란 소릴 듣지만, 전 그만큼 저희가 엄격한 분석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
“우리가 뭘 하든 안 하든, 바뀌는 건 없을 겁니다. B급은 안 됩니다.”
“그래서요?”
“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갑자기 되쏘아져 돌아온 반문에 이번엔 오히려 샌드걸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의미는 달랐지만 - ‘아이고, 이 화상이 드디어 하극상을 저지르는구나’란 의미로 - 역시 얼빠진 표정을 지어버린 그녀의 상관 레프리콘을 무시하고 브라우니는 말을 이었다. 조금 전과는 다른, 그리고 도저히 브라우니답지 않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임까?”
팔짱 낀 브라우니가 냉랭하게 반문하자 오히려 당황한 샌드걸이 어물거렸다.
“어쨌다라뇨...이 정도로 설명했는데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합니까?”
“네, 이해 못 하겠슴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해 보고 가만히 앉아서 포기하겠단 말임까?”
“그러면 뭘 어쩌란 말입니까? 우리는 B급입니다. 우릴 구하는 데 드는 비용보다 우릴 새로 만드는 비용이 더 쌀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어쨌단 말임까? 그건 사령관님 사정 아님까?”
이번엔 샌드걸 쪽이 입을 다물고 브라우니를 노려보았다. 서로를 노려보는 어둠 속을 꿰뚫는 듯한 그 둘의 시선에 레프리콘은 진심으로 이런 분위기 속에 있느니 그냥 이프리트나 레드후드에게 하루종일 갈굼당하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
“우리 가치가 어쨌든 마리 대장님이나 사령관님이 우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무슨 상관임까? B급은 발버둥도 못 침까?”
“계속 그 입 놀려 보시죠, 일병”
“네, 그럴 검다. 중위님 말씀대로 어차피 여기서 다 죽을 거면 좀 무례해도 이해해주시지 말임다”
브라우니가 ‘무례’라는 나름대로 고급 용어까지 써 가면서 샌드걸에게 대들자 레프리콘은 두 가지 의미 - ‘우리 브라우니가 이렇게 똑똑할 리 없어’와 ‘잠깐 이거 하극상...’ - 에서 뜨악한 표정으로 그녀의 부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 잡동사니와 폐허투성이인 어두운 무저갱 속에서 오늘 참 고개 왔다갔다 많이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며.
“샌드걸 기종이 원래 그렇게 만들어지셨다 하셨슴까? 그게 샌드걸들의 답임까? 그럼 그렇게 하십쇼.”
그리고 브라우니는 숟가락을 고쳐 잡았다. 조그마한 숟가락임에도 어쩐지 레프리콘의 눈에 갑자기 크게 느껴졌다. 브라우니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희들은, 브라우니는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슴다. 브라우니들의 답은 다름다.”
샌드걸의 눈에는 비웃음이, 입에는 분노가 어렸다.
“그래서 아무런 소용없는 짓을 계속하겠다는 겁니까? 무가치한 짓을? 이걸 레오나 대장님께 못 보여드리는 게 한이군요. 당신네들이 이 정도로 바보일 줄은 몰랐습니다, 일병”
“네, 이게 브라우니임다.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졌슴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슴다. 우리는 뭐라도 할 검다.”
부하가 장교 계급인 샌드걸에게 너무 막나가는 것 같아 레프리콘은 슬펐다. 내, 내가 나서지 않으면....
“브라우니...지, 지금 항명하는 거거든....요?”
“상병님은 어쩌실 검까?”
“히끅”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화살이 자기에게 돌아오자 레프리콘은 자기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서로 노려보던 두 시선이 갑자기 동시에 그녀를 향했다. 마치 ‘너는 어느 편에 설지 지금 정해라!’ 라는 것 같은 압박이 느껴지자 그녀는 그냥 울고 싶어졌다.
“그래요. 상병 의견도 들어봐야겠지요. 궁금하군요. 같은 부대원 따라서 아무 소용없는 멍청한 짓에 땀흘리다가 죽는 것에 동의하고 싶은지...”
“중위님도 상병님도 포기하시든 말든 맘대로 하십쇼. 하지만 저는 발버둥치겠슴다.”
“저...전 말이죠....”
울상이 된 레프리콘이 어물거렸다. 이 셋밖에 없는 어둠 속에서조차 다수결의 원칙이 작용하는 건지, 둘은 레프리콘의 의향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이 무저갱의 어둠 속에서 무지막지한 언어의 포탄을 쏟아대는 속사포처럼 논쟁해 가면서.
“상병님, 아무것도 안 해보고 여기서 그저 죽음만 기다리며 말라죽을 검까? 그게 스틸라인임까?”
“그 숟가락으로 모래 몇 숟갈 파 봐야 아무것도 바뀌는 건 없습니다, 상병. 등급이 B급이라고 지능까지 B급이 되지는 마십시오.”
“B급은 그저 가만히 죽음만 기다려야 한단 말임까? 우리의 가치가 고작 그것 뿐임까? 뭐라도 해 봐야 함다”
“우리가 구출될 방법은 오르카에서 우리가 사라진 걸 알고 구출대를 보내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오르카에서 그 정도로 우릴 신경써 줄까요? 오르카에서 우리 가치가 발에 채이는 담배꽁초 이상이나 될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냥 B급을 더 뽑고 잊어버리겠죠. 우리가 여기서 논쟁하는 것조차 의미 없는 짓입니다. 우린, 이미 끝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동의할 수 없슴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여도 거기에 아무 가능성도 없단 얘긴 아님다.”
“하, ‘동의’라니, 말싸움을 하더니 언어능력이 갑자기 높아졌군요? 그 가능성이란 것도 정도껏 되어야 시도해볼만한 것이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는 해 봐야 아는 검다. 왜 맘대로 그걸 결정하고 벌써 포기하심까?”
“나이트 칙인지 빅 칙인지 총 맞아 봐야 압니까? 정말 지능까지 B급인가요, 일병?”
“우리가 B급이래도 살아있을 자격까지 B급임까? 살고 싶단 의지까지 B급임까?”
“하지만 멍청하면 그 의지조차 바보짓에 쓰게 되죠. 상병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네, 상병님, 말씀해주시지 말임다.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시도도 안 해보고 포기하실 검까?”
“저..저는 그냥...서로 싸우지 않는 게...”
“킥킥”
마지막 웃음소리는 셋 중 누구의 입에서도 나온 것이 아니었다. 셋은 황급히 이 제 3, 아니 제 4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려 머나먼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계속: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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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로이드의 등급이 실제로 공식화 되어 있는 세상이라는 설정으로 써 본 소설입니다.
원래 이미 완결까지 다 써놨는데, 써놓고 보니 챕터가 10개로 나누어 지더군요. 10개를 한꺼번에 다 올리면 게시판 도배가 될 거 같아서 하루 단위로 조금씩 올리려고 합니다.
한 편 올릴 때마다 링크를 달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등장인물들마다 대사에 색깔을 입혀 봤는데 이게 더 읽기 편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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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다음 편도 올렸습니다~ | 20.10.16 11:4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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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20.10.16 11:4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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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10.16 11:4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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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추종자
몇 주 전 글인데 이걸 읽어주시는 분이 계실 줄 몰랐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11.02 12:2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