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님. 절 찾으셨다고 들었어요.”
똑똑, 하는 자그만 노크 소리와 함께 베타가 문틈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다.
“아, 딱 좋은 때에 와 줬어. 베타. 마침 업무를 잠시 멈추고 숨을 돌릴까 하던 참이었는데.”
사령관은 업무용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를 맞았다. 환히 웃는 사령관과 눈이 마주친 베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멸망 전의 유적에 갔던 탐사팀이 뭘 좀 구해왔거든. 베타가 좋아할 것 같아서 말야.”
“어… 어떤 거죠…?”
베타의 마음이 기대감으로 들뜬다. 무엇을 주시려는 걸까?
꽃? 장신구? 예쁜 옷?
어떤 것을 받더라도 기쁠 것 같다. 선물 그 자체가 아닌 자신을 생각해 주는 그 마음만으로도 이미 넘치도록 기쁘니까.
“LA 캐노니어즈 경기 미방분.”
“!!”
하지만 사령관의 선물은 베타의 기대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베타는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기쁨에 겨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게다가 상대는 피츠버그 아이언메이든.”
“꺄아아아아악!! 좋아요! 너무 좋아요, 주인님!! 어떤 저장매체에 들어있죠? 빨리 말씀해주세요! 맞는 기기를 구해와야 하니까 당장 말씀해주세요!!”
베타는 순식간에 열정적인 야구광-조금 더 속된 표현으로 야빠가 되어 사령관의 책상을 턱 짚고 적극적으로 선물을 요구했다. 눈에 핏발을 세우고 숨을 몰아쉬는 그녀에게서 조금 전까지의 소심한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앗.”
숨막히는 정적이 약 10초쯤 흐른 후에야, 베타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러버렸는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목덜미와 등줄기를 따라 싸늘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죄, 죄송합니다, 주인님! 한 번도 본 적 없는 캐노니어즈의 경기를 본다고 하니까 너무 기뻐서…!”
수치심과 죄악감으로 베타의 눈동자가 빙글빙글 돈다. 그녀는 머리를 책상에 박을 듯이 숙이며 사령관에게 연신 사죄했다.
“...아냐, 뭐…. 그럴 수 있지. 그냥 조금 놀란 것 뿐이니까 사과 안 해도 돼.”
사령관이 멋쩍게 볼을 긁적인다. 언제나 나긋나긋하고 차분한 베타가 이렇게까지 돌변하다니. 야구라는 스포츠에는 사람을 완전히 뒤바꿔 버리는 요상한 마력이라도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전쟁 전에도 야구광은 섣불리 건드리면 안된다는 말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 그래서… 그….”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베타가 다시 조심조심 입을 연다.
“미방분 파일은 어디있죠?”
이렇게 되어서도 줄기차게 요구하는 걸 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닌듯 싶다. 사령관은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며 책상 서랍에서 USB를 하나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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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캐노니어즈는 1884년 창단되었어요. 하지만 1957년까지 뉴욕의 브루클린을 연고지로 했기 때문에 초창기에는 LA 캐노니어즈가 아니라 브루클린 애틀란틱스라는 이름이었죠. 1889년 첫 리그 우승을 한 뒤에 1899년, 1900년 연속 리그 우승을 거두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자그마치 40여년간 긴 침체기를 겪고, 1938년 래리 맥파일이 사장으로 부임하면서 다시 부활하기 시작했어요. 긴 기다림 끝에 1941년 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린 다음….”
집무실 한 쪽 벽면에 예의 그 미방분 경기가 재생된다. 벽을 프로젝터의 스크린으로 삼은 것이었다. 선수들이 입장하고 이런저런 경기 준비를 하는 동안, 베타는 속사포마냥 LA 캐노니어즈의 역사를 줄줄 읊었다.
‘베타가 말을 이렇게 빠르고 정확하게 할 수 있었다니. 나중에 오르카 랩배틀 같은거 하게 되면 우승도 노려볼 수 있겠는걸.’
처음에는 사령관 역시 흥미롭게 경청했으나, 2032년도에 벌어진 감독-감독 부인-선발투수-선발투수 부인-유격수-유격수 부인이 연루된 육각 불륜 사건을 디테일하게 묘사할 즈음 집중력이 떨어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상태가 되었다. 속으로는 오르카 랩배틀 따위의 잡생각을 하면서 기계적인 호응을 할 뿐인 리액션 로봇 모드. 하지만 잔뜩 흥분한 베타는 야구 이야기를 누군가 들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베타가 야구를 진짜 좋아하긴 하는구나. 하긴 야구 모자에 유니폼, 응원봉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니….’
행복하게 야구 이야기를 늘어놓는 베타를 보며, 사령관은 새삼 그녀의 야구 사랑을 다시 실감했다. 빛바랜 야구 모자, 깔끔하게 관리된 유니폼, 바람을 빵빵하게 불어놓은 응원봉까지. 모두 전쟁 전 물건이라 무엇 하나 구하기 정말 힘들었을텐데. 분명 적잖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손에 넣었으리라.
옷자락 틈새로 슬쩍 삐져나온 투실투실한 뱃살 때문에 유니폼의 단추는 끝끝내 채우지 못했지만, 사령관은 못 본 척 넘어가 주기로 했다.
“어, 투수 올라간다. 시작하나봐.”
“캐노니어즈가 먼저 공격하네요. 이 시기의 캐노니어즈는 후반부로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져서 초반에 점수를 최대한 벌어둬야 할텐데….”
기나긴 설명이 드디어 끝나고, 경기가 시작된다. 베타는 화면이 비치는 벽 안으로 빠져들 듯이 온 정신을 집중한 채 경기에 몰입했다.
“안타 쳐라, 안타…. 쳤다! 아악! 파울이잖아!”
“번트! 좋아! 달려! 달려! 달려어어!! 세이프으으으으!!!”
“득점찬스! 홈런! 제발 홈런! 시원하게 한방 날려줘어어엇!”
“가운데 직구! 삼지이이이인!!”
“악, 맞았다! 오케이! 나이스 수비!”
“무사만루에서 2점이면 잘 막았다! 다음 공격에서 만회하면 돼!”
3회 말까지, 베타는 조금 과하게 열정적이기는 해도 싱글벙글 웃으며 캐노니어즈를 응원했다. 캐노니어즈가 꽤나 선방하며 리드하고 있었던 덕이었다.
“타자가 신중하네요. 공을 끝까지 보고 있어요. 결국 투스트라이크까지 카운트가 차도 한 번 제대로 맞추면 되느… 이런 멍청한 새끼! 미련하게 기다리기만 하다가 삼진이냐!”
“번트 친다고 아주 광고를 해라! 머저리야! 그렇게 대놓고 번트 친다고 티내면 투수가 번트 잘 치라고 공 쉽게쉽게 잘도 던져주겠다”
“이! 새끼! 들아! 무사만루에서 안타만 한번 치면 득점인데 왜 정확하게 수비수 있는 쪽으로 공 치고 지랄이냐고! 누구 속터져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이 타이밍에 무슨 포일이야 포수 새끼야! 정직하게 가운데 직구로 던진걸 왜 못 받냐고! 너 때문에 3루 주자 득점했잖아! 이 밥벌레 새끼야!”
“아니! 저게 왜 볼인데! 어떻게 봐도 스트라이크잖아! 심판 이 새끼 뒷돈 먹었냐! 아니면 눈깔 삐었냐! 그딴식으로 할거면 심판 때려쳐!”
“3루타를 쳐 맞고 지랄이야! 전 회에서도 한대 얻어맞고 배운게 없냐! 삼진 못 잡을 것 같으면 볼넷 밀어내기라도 하던가! 몸이 딸리면 머리라도 좀 돌아가야 될 거 아니야!”
하지만 역전을 허용한 4회부터 6회 말까지는 딴 사람이 된 듯 거품을 물며 온갖 욕지거리를 걸쭉하게 쏟아냈다. 손에 든 응원봉을 힘껏 쥐어 터뜨린 다음 입으로 물어뜯거나, 가슴을 쿵쿵 치며 드러누워 발버둥을 치는 등 온갖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 사령관은 베타의 분노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그녀와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았다.
“하아… 새끼. 드디어 연봉값하네. 처음부터 저렇게 잘 치면 얼마나 좋아.”
“그래 새끼야! 꼬랑지에 불 붙은 것처럼 달리란 말이야! 세이프! 좋아! 잘했다 새꺄!”
“이야아아아아! 이 기특한 새끼!! 쓰리런 최고다 이 새끼야! 내가 너 존나 사랑하는거 알지!!”
“안 되지 안 돼! 그런 조루같은 번트로 어딜 진루하려고 그래! 떽!”
“병살-!!!! 이 타이밍에 병살!! 숨이 턱 막히죠? 막 눈물나고 몸 덜덜떨리죠? 꼴 좋다 병~신.”
“안돼 안보내줘! 진루시켜줄 생각 없어! 벤치로 돌아가!”
다시 캐노니어즈가 재역전하며 주도권을 잡은 7-8회. 언제 그랬냐는 듯 신이 나서 즐겁게 팝콘을 씹는 베타. 입은 여전히 거칠지만 그래도 즐거워 보였다.
“아이 씨… 1점만 내지. 꼭 만루 채워놓고 득점을 못해.”
그리고 대망의 9회 초. 캐노니어즈의 공격은 득점을 올리지 못하고 종료된다.
“뭐, 그래도 이 정도 점수차면 무난하게 이기겠…”
베타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첫번째 타자가 담장을 넘겼다.
“1점 줄 수 있지! 1점 줄 수 있어! 너무 압도적으로 이겨도 인간미 없으니까! 쿨하게 줘!”
베타는 순간 굳었다가, 애써 웃음지으며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이런 씹- 아니, 괜찮아. 2점 더 줄 수 있어! 여기서 더 안 잃으면 돼! 아직도 여유 있어!”
2번 타자와 3번 타자가 각각 1루타를 치고, 4번 타자가 3루타를 쳐서 2점을 더 뺏긴다. 콜라를 든 베타의 손이 점점 떨리기 시작한다.
“....”
하지만 그로부터 안타가 몇 번 더 이어지자, 베타는 아무런 말도 없이 초조하게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핏발 선 눈으로 화면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캐노니어즈가 벌어놓은 어드밴티지를 차근차근 까먹다가 2사 만루에서 아이언메이든의 끝내기 역전 만루홈런이 터졌을 때.
“이런 씨이이이이이이이이발 새끼들아아아아아아!!!!!!!!!!!!!!!!!”
베타는 목이 찢어져라 소리지르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야구 그딴 식으로 할거면 때려쳐 이 밥벌레 놈들아!!!
그게 야구냐? 그게 야구냐? 그게 야구냐고오오오!!!!!!!
싹다 은퇴하고 캐치볼이나 해 씹새들아!! 니새끼들은 캐치볼 할 때도 절반 넘게 놓치겠지만 이 개! 새끼들아!!
질거면 그냥 한결같이 못해서 희망이라도 품지 말게 만들던가!! 한 번 역전당했을 때 그냥 재역전하지 말고 졌어야지 ㅆㅍ 희망고문이냐?! 재재역전이 말이나 되냐고 이 좇븅신새끼들아-!!
길가는 웰시코기들 데려다가 야구시켜도 너네보다는 잘하겠다 씨바알! 니들은 개집 들어가서 개밥그릇에 주둥이 쳐박고 개밥이나 쳐먹어 이 개애애새끼들아! 그따위로 경기해놓고 사람밥이 넘어가냐? 내가 아주 최고급 개사료 사다가 먹여줄 테니까 제발 때려쳐 제발!
복귀할때 버스 타지 말고 뛰어서 가! 너네들은 버스 탈 자격도 없어 이 씨이발 새끼들아! 너네같은 폐급새끼들 실어나르는데 쓰는 기름이 아까워! 공룡들이 씨이발 니새끼들 날라주려고 석유될 줄 알았으면 이 악물고 운석충돌도 견뎠을 거라고 개! 씨!발! 새끼들아!!!!”
눈물을 줄줄 흘리며, 길길이 날뛰며, 화면 속의 선수들에게 온갖 창의적인 방식으로 저주를 퍼붓는 베타. 분노를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까지 한다.
“내가… 진짜 씨이발… 어쩌다가 이딴 새끼들을 좋아하게 돼가지고 씨바알….”
베타는 한참 분노를 쏟아내고서는 털썩 주저앉아 팝콘과 치킨을 우걱우걱 흡입했다. 그러면서도 신세한탄과 욕을 잠시도 쉬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끄윽~.”
잠시 후, 베타가 명확하게 한 사이즈 커진 배를 어루만지며 우렁찬 소리로 트름하는 것으로 광란의 폭식타임은 끝이 났다.
“좀… 진정했니?”
“...앗.”
베타의 진노가 자신에게 향할까 두려워 숨을 죽이고 있던 사령관이 조심스레 묻는다. 베타는 까맣게 잊고 있던 사령관의 존재를 그제서야 다시금 인식했다.
“아, 저기, 그, 주인님? 이건,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뭐가 아니냐면….”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채 얼굴이 새빨개진 베타는 손을 휘적휘적 저으며 상황을 수습해보려 시도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보였던 추태는 도저히 한두마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캐… 캐노니어즈가 잘못한 거에요오….”
주위에 널브러진 분노의 증거-흩뿌려진 팝콘과 치킨 부스러기, 찢어발겨진 응원봉의 잔해, 처참하게 우그러진 콜라 캔 등-을 허둥지둥 치우는 베타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었다.
‘미방분은 못 찾은걸로 해야겠다….’
이 미방분을 엘븐이나 켈베로스가 봤다간 지난번처럼 서버가 터져버리고 말 것이다. 어쩌면 서버를 넘어 오르카가 터질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판단이 미친 사령관은 녹화가 담긴 USB를 자신의 서랍에 넣고 열쇠로 엄중하게 잠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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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타 미스오르카 우승기념 괴문서입니다.
2편은 나올까요?
알려드리지 않스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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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타가 외치는 대사는 분명 작성자 경험담일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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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타한테 오메가가 캐노니어즈를 욕했다고 하면 단신으로 쳐들어가서 찢고 돌아올지도 모릅니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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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놀라운 디테일은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뒷받침된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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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가 이렇게 해롭습니다? 그러고보니 한화는 불교야구 이런식의 농담있긴한데 메이저리그에도 신을 찾는 의미로 응원가를 고스펠 쓴다든가, 종교소재 떡밥 쓰는 팀이 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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