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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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불타는 금요일 저녁 8시.
평소대로라면 씻고나서 저녁을 대충 먹으면서 TV로 넷플릭스를 보는 시간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식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금란’의 이름을 가진 한 여린 숙녀와 마주보고 앉아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조차 게대로 인식을 못하고 패닉에 빠져 허우적대던 그녀는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고는 이제 나를 마주보며 진실의 대화를 시작하려 했다.
그런데 막상 대화를 시작하려니 무슨 말을 꺼내야 하지...???
아, 가장 보편적인 말부터 시작해보자.
나: 저기... 혹시 밥은 먹었어? 시리얼 타줄까?
금란: 생각 없습니다. 쉽게 얻어먹을 거란 생각은 안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음... 역시 아직은 경계심을 풀지 않았구나... 하긴... 덥석 얻어먹는게 더 이상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내꺼나 마저 먹으려고 하는 순간 금란쪽으로부터 인체의 신비로운 소리를 듣게 되었다.
[꼬르르르륵]
동시에 마치 보이지 말아야 할 수치를 들킨 듯 얼굴이 붉그락거리며 자기 배를 감싸는 금란.
나는 잠깐 그녀를 바라보다 말없이 그릇을 한 개 더 꺼내 우유에 시리얼을 타고 그녀에게 건냈다.
나: 사양말고 먹어. 소리 들어보니까 적어도 두끼는 거른거 같은데.
금란: 쓰...쓸데없는 소리 마십쇼! 아무리 그래도 모르는 인간의 음식을 어찌 함부로 받아먹을 수....
[꼬르르르르르륵]
나: .......................
금란은 이제 배를 손으로 가리는 것을 넘어 고개를 푹 숙이고는 내 눈치만 보기 급급한 모습이다.
그리고 난 그 모습이 솔직히 조금 귀여웠다.
나: 네 말대로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 인지는 이따가 차차 알아보고. 여튼 난 굶주리는 사람 앞에 두고 먹을거 안주는 그런 인간은 아니라서 말이지. 아, 소완처럼 음식에 약같은건 안탔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애초에 현실에서 그런 약이 있을리도 없거니와 행여나 보통인간이 그런 약을 갖고 있다간 감옥가거든. 그러니까 사양말고 먹어.
금란: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꼬르르르륵]
나: 그 소리 안듣고 싶으니까 부디 먹어줬으면 좋겠어. 검은건 초코시리얼이고 흰건 마쉬멜로야.
그렇게 시리얼은 그녀의 동의하에 드디어 그녀 입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막상 음식이 들어가자 여지껏 억눌렀던 식욕이 해방된건지 숟가락 속도가 은근히 빨라보였다.
나: 어때?
금란: 적당히 딱딱하고 적당히 달콤하군요.
나: 시리얼 처음먹어봐?
금란: 멸망한 인류가 남겨놓은 것들 중 식품류는 가장 빨리 부패해서 수급하기 거의 불가능한 품목입니다.
나: 아.... 게임 세계관 설정이 그정도였나...
금란: 게임......
나: 뭐???
금란: ......정말 게임이었습니까? 저와, 자매들과, 저항군과, 주인님과, 저의 세계 모두가...
금란은 숟가락을 들다 이내 다시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눈빛은 필사적으로 게임이 아니라고 말해달라는 간절함이 언뜻 보였다.
나: 믿기 힘들겠지만, 금란 너는 우리 인간이 만든 게임에서 나오는 캐릭터 중 하나야. 너의 세계, 그러니까 라스트오리진 이라는 게임은 이제 서비스를 시작한지 3년된 게임이야.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그 게임세계에서 현실세계로 넘어온거고.
허나 내 대답은 그녀의 일말의 희망을 꺾어버렸고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금란: 인간님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는 어찌 되는겁니까? 돌아갈 수는 있는건가요?
나: 그건 나도 모르겠어. 가상의 인물이 실체화되어 나타난 일종의 초자연현상이라...
금란: 저를 어딘가에 신고하실껀가요?
나: 아니. 그러다간 나까지 끌려갈걸?
금란: 그럼 저는 어떻게...
나: 일단은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할 때 까지는 여기서 지내야겠지.
금란: 모르던 사람에게 신세를 지다니요.
나: 그렇다고 지금당장 홀로 나가서 살려고? 그건 불가능해. 너는 일단 무적자(無籍者)야. 국가에 주민으로 등록되어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너는 지금 살아있지만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란 말이지. 그런 상태로 뭘 어떻게 하겠단거야? 취업도 못하고 집도 못구하고 카드, 휴대폰 아무것도 못해.
금란: 그럼 당장 가서 주민등록을...
나: 무슨 사유로 등록할건데? “게임세계에서 빠져나와서 여기에 왔으니 등록좀 할께요” 라고 할려고? 등록되기 이전에 정신병동에 끌려가겠지. 기다려봐. 아는 사람 중에 행정사가 있으니까 내가 적당히 알리바이 만들어서 해볼게. 대충 기억도 안나는 부모로부터 출생신고도 안하고 버려진채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하면 되겠네.
금란: 버려졌다라... 정말로 버려진 걸지도 모르겠군요. 저의 세계로부터...
나: 웬만하면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게 심신에 좋을꺼같은데... 모르지. 네가 여기 온 이유가 있을 지도.
금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나: 그나저나, 아까 칼 들었을 때 말이야.
금란: 아... 인간님께 칼을 들이댄 건 송구합니다....
나: 아니... 그게 아니고... 아까 칼 들 때 왜이리 힘들어한거야? 원래 칼 잘 다뤘잖아.
금란: 잘 모르겠습니다. 이 곳에 온 이후부터 칼이 굉장히 무겁게 느껴집니다. 몸도 평소와 다르게 무겁고 둔해졌구요.
나: ......전에 나한테서 인간의 뇌파가 안느껴진다고 했지?
금란: 네, 전혀 느껴지는게 없습니다.
나: 그러고보니 여기서는 눈을 잘 뜨고 있네?
금란: 어... 확실히 지금 깨달았습니다. 예민했던 감각도 전부 사라졌습니다.
나: 혹시... 그냥 내 추측인데, 현실세계로 넘어오면서 게임상의 설정이 죄다 사라진거 아닐까? 바이오로이드라는 설정 자체가 현실에서는 말도 안되는 거니까.
금란: 말이 안되는 설정입니까?
나: 당연하지. 그냥 게임제작자들의 상상이니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설정이야. 아마 금란 너가 현실세계로 오면서 너의 몸에 관련된 각종 설정들이 전부 사라지고 그냥 평범한 20대 여성이 된거같아.
금란: 제가... 인간이 되었단 말인가요?
나: 지금까지 내용을 조합해보면... 맞아. 특출난거 없는 그냥 인간. 아마 사고방식도 자유로워졌겠지. 명령을 받아도 아무렇지도 않을거고.
금란: 내가...인간...??
금란은 눈이 크게 동그래지면서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당혹스럽겠지. 인간을 동경했을지언정 자신이 인간이 될거란 생각은 평생 안해봤을테니..
나: 혹시 모르니까 내일 병원가서 신체검사를 받아보자. 엑스레이, CT촬영, 혈액검사, DNA검사 다 해보지 뭐. 아직 주민등록이 안되서 의료보험 없이 하려니 돈이 꽤나 나가겠구만... 아... 주민등록도 해야하고... 금란이 칼도 소지허가 받아야겠네... 할게 산더미구만...
금란: 그렇게 하셔도 괜찮으십니까...?
나: 괜찮아. 다 너 정상적으로 살게 하려고 그러는거니까. 어차피 내가 감당해야 할 것이고. 금란은 부담말고 그냥 받으면 돼.
금란: 감사...합니다...
나: 아, 그리고 금란 너... 이름은 그냥 금란으로 할 거야?
금란: 이름이요? 제게 이름을 왜...
금란은 내가 이름을 지어주려 하는 걸 눈치채고 조금 당황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 사람은 모름지기 이름이 있어야 세상에 유일한 존재가 되는 법이야. 금란은 모델명이잖아.
금란: 그래도 바이오로이드가 이름을 갖는다는게...
나: 너 바이오로이드 아니야. 여기서 너는 진짜 인간이야. 인간취급 해준다는게 아니라 진짜 인간. 그러니 이름을 가져야지.
금란: 그래도 금란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기 힘들어서...
나: 그럼... 금란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쓰고... 최금란 어때?
금란: 최금란 말입니까? 성치 최씨인 건가요?
나: 응. 이씨 김씨는 너무 흔하니까 최씨로 하자. 근데 최씨도 흔하긴하네. 발음하기는 편하지만. 훗훗.
금란: 최금란... 최...금...란... 아..... 나에게 이름이...
그리고 나는 보았다. 나와 금란이 만난 이후 처음으로 그녀가 내게 보인 희미한 미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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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돈 좀 있는 직업이라고 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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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이쪽으로 오면서 인게임 내 설정은 없는 이야기가 됐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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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보험 없이...ㄷㄷ 저 비용 다 대주는거 보면 좋은 사람인가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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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현실이죠 ㅎㅎ | 22.10.02 00: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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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보험 없이...ㄷㄷ 저 비용 다 대주는거 보면 좋은 사람인가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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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돈 좀 있는 직업이라고 합니다 ㅎㅎ | 22.10.02 00: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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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짜..? | 22.10.02 18: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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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화들을 정독하시면 직업은 이미 나와있습니다 ㅎㅎ | 22.10.02 21:5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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