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용 언니랑 서약하겠단 때까지만 해도, 역시 오빠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구나, 마음속 어디선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닥터는 내가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딘가 서글픈 듯,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개운한 듯.
그런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닥터는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의외야? 내가 이런 생각 가지고 있었다는 게?”
“…조금은. 괜찮다면 이유를 말해줄 수 있니?”
나는 닥터를 마주 보며 말했다. 닥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용 언니는 특별하잖아.”
“…….”
“…….”
“……?”
닥터의 그 한마디에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양쪽으로 나뉘었다.
한쪽은 아, 하는 표정을 짓는 아자즈와 보련.
나머지 한쪽은 아직 이해를 못 한 채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나.
좀 전보다 더 형편없는 얼굴이라도 하고 있었던 걸까, 닥터의 입가에 조금쯤은 엷은 웃음기가 서렸다.
“우리들은 인간이 아냐. 아무리 인간과 비슷하다 해도 우리는 목적에 맞게 제조된 상품이지. 그리고 상품의 특징은, 망가지면 똑같은 제품 따윈 금방 구할 수 있다는 거야.”
그 말에 나는 더 당황했다. 설마 내가 자기들을 소모품이라고 여기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일까. 분명 그런 생각 따윈 절대 없다고, 지금까지 몇 번이나 진심을 담아 얘기했던 거 같은데.
“물론 오빠가 우리를 그런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는 건 알아. 오빠가 우릴 진심으로 아끼고 사람처럼 대해준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
“그거랑 용이 특별하다는 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어, 닥터.”
“용 언니는 단일 개체잖아.”
닥터는 조용히 말했다.
“오리진 더스트를 있는 대로 넣어 만든 최고급 바이오로이드는 많아. 그런 개체는 수도 적고 복원도 어렵지. 들어가야 하는 자원도 많고 말이야. 당장에 나만 봐도 그렇고, 마리 언니, 레오나 언니. 개중엔 평범한 병사였다가 지휘관 개체로 개조 받은 칸 언니 같은 특수 케이스도 그래.
그런 우리도, 우리조차도 모두 유전자 씨앗만 있으면 대체가 가능해. 대체가 어렵다는 것과 대체가 불가능하다는 말은 전혀 다른 문제니까.”
“…….”
그제야 닥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닥터도 내 대답을 기다리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용 언니는 특별해.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바이오로이드고, 복원도 할 수 없어.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용 언니야말로 어쩌면 인간에 가장 가까운 존재라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적어도 우리의 관점에서는 말이지.”
우리.
닥터는 ‘우리’라고 말했다.
…분명, 그 ‘우리’에 나는 들어가 있지 않으리라. 그것이 가슴 아팠다.
나와 그녀들 사이에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벽. 버릇은 고치고, 모르면 연습하면 된다. 그런 것들은 전부 노력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다. 하지만 태생만큼은 도저히 어쩔 수 없다. 그것만큼은 노력으로 고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용을 선택한 건 아니었다.
맹세컨데, 그런 얄팍한 이유 따위로 용을 선택했다면, 그녀에게 내 사랑을 고백했다면, 난 과거의 나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해야. 그런 이유로 용에게 마음을 전한 건 아냐.”
그래서 분명히 말했다. 이것만큼은 닥터의 눈을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용이 단일 개체이건 아니건 중요하지 않아. 설령 용이 여러 명 있었다고 해도, 난 그 용을 사랑했을 거야. 그날 별의 아이에게서 우릴 구해주고, 별이 비치는 밤바다 위에서 내 마음을 받아줬던 그 용을 사랑했을 거라고. 내게 있어 용은 오직 한 명뿐이야.”
나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리고 그건 너희들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야, 닥터.”
“…….”
내 답변을 들은 닥터는 내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닥터는 마치 나와 눈싸움이라도 하듯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도, 잡은 내 손만큼은 놓고 놔주지 않았다. 닥터의 손은 작고 따스했다.
그리고 갑자기, 그녀는 피식 웃었다.
“역시 오빠는 우리한테 너무 진지해. 조금만 생각해봐도 내 말에 허점 따윈 엄청 많다는 거쯤은 알 텐데 말이야.”
“허점?”
“그야 용 언니만 단일 개체인 건 아니잖아.”
닥터는 이제 늘상 나를 놀릴 때 짓는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라비아타 언니도 그렇고 알파 언니도 그렇고. 아, 알파 언니는 다른 기종이 6명이나 있으니 좀 느낌이 다른가? 그래도 알파 언니는 한 명이잖아. 거기다가 티아멧처럼 유전자 씨앗조차도 구할 수 없는 바이오로이드들이 몇 명 있으니까, 내가 말한 주장은 그 전제부터가 틀렸다는 거야. 만약 오빠가 용 언니를 단일 개체라서 사랑한 거라면 다른 언니들에게도 똑같이 반해야 할 테니까.”
“…….”
생각해보니 그건 그렇네. 뭔가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어째 대놓고 속임수를 썼는데도 상대가 못 알아차리니까 한숨 푹 쉬며 트릭을 설명해주는 사기꾼을 보는 기분이랄까. 이가 득득 갈리는 듯한 목소리가 내 입에서 나오는 건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좀 전처럼은 대체 왜 말한 건데? 내가 용을 단일 개체라고 생각해서 특별하다고 여겼다는 게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단 거잖아.”
“그야 예전엔 진짜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거든. 왜 그런 거 있잖아, 이성적으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감정이 안 따라주는 거. 흐흥, 이 초천재 미소녀 기술자 닥터도 감정 앞에 무너질 때가 있다는 거지.”
닥터는 으스대듯 말하더니 손뼉을 짝 쳤다.
“자, 이제 양심고백 끝! 후아, 나 이거 진짜 펴어어엉생 무덤까지 가져가려고 했던 흑역산데 드디어 말했네. 오빠, 내가 왜 이걸 지금 얘기하는 건 줄 알아? 그것도 하필이면 오빠 인생에서 제일 중요할 이 결혼식 직전에?”
“어머, 닥터. 되게 분위기 망치는 주제란 건 알고 있었던 모양이네요.”
“당연하지. 내가 뭐 오빠처럼 분위기 파악 하나 못 하는 숙맥으로 보여? 그것도 다 감안하고 한 거라고.”
“…….”
아자즈의 핀잔이 옆에서 치고 들어왔지만 닥터는 주눅이 들지도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아니 근데 가만히 있던 나는 왜 걸고넘어지는 건데. 하지만 전과가 워낙에 화려해서 차마 반박도 못할 사실이란 게 서글픈 점이었다.
“하아, 그래. 왜 무덤까지 가져갈 흑역사를 굳이 지금 꺼내놓은 건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또 이렇게 끄집어 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오빠의 두려움에 대한 내 대답이니까.”
닥터의 얼굴은 어느새 아이의 것이라곤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대체 어디까지가 장난이고, 어디까지가 본심인 걸까.
아니, 어쩌면 그 모든 면이 진심일지도 모른다. 닥터는 그런 애였다. 초월적인 지능과 어린이의 순수함을 동시에 갖춘 아이였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나와 오르카의 모두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는 기특한 동료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한테 오빠는 엄청 소중해. 이건 오르카에 있는 그 누구라도,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런데 봐봐. 오빠를 위해 뭐든 다 바칠 수 있다고 입으로는 잔뜩 말해놓고선, 뒤에선 이런 말도 안 되는 망상으로 흑역사를 만드는 날 보라구. 오빠, 도구는 절대 실수를 하지 않아. 하지만 사람은 실수를 해. 그게 도구와 사람의 차이야.”
그리고 닥터는 말했다.
“오빠. 오빠가 나를, 우리를 인간으로 봐줬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긍정해줬기 때문에 난 이렇게 시덥잖은 생각도 할 수 있었던 거야. 오빠, 내 소개한 적 있지? 나는 ‘독립 기술 개발용 바이오로이드’인 닥터야. 날 만든 인간 과학자들조차 닥터 모델들을 통제 불가능할까봐 극소수의 개체만 생산을 했대. 오빤 내가 두려워? 나를 통제하고 싶어?”
“…아니.”
그럴 리가 있을까.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 일어날 리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 닥터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독립 기술이 어쩌고인지, 기술적 특이점이 저쩌고인지. 그러나 내 눈에 비치는 닥터의 모습은 그런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라, 조금 장난기 많고 똑똑한 꼬마 아가씨였다.
닥터는 장난치는 걸 좋아한다. 으레 깜짝 놀라는 장난이면 뭐든 좋아한다. 그 중에서 특히나 좋아하는 건 내게 장난치는 거다. 본인 왈, 가장 반응이 재밌다나 뭐라나. 그러면서도 쉴 때와 일할 때는 또 분명하게 구분한다. 절대로 일하는 도중에 건드리지 않는다. 그건 본인도 그렇고. 한번은 뭐 한참 가공하고 있을 때 옆에서 빈둥대다가 연구실 밖으로 문자 그대로 걷어차여 쫓겨난 적도 있었다.
닥터는 내게 소중하다.
도구 따위가 아니라, 든든한 기술팀의 일원이자 장난꾸러기 여동생으로.
“…우리 초천재 미소녀에 귀염둥이 여동생 닥터에게 그런 생각 가졌다간 천벌 받지.”
“거 봐.”
닥터는, 아주 밝게 웃으며 말했다.
“오빠는 우릴 인간으로 긍정해줘. 우리를 살아 있다고, 단 한 사람도 버리지 않겠다고 진심으로 말해줘. 그게 우리에겐 구원이야. 오빠는, 그 말로 우리 모두를 구원해준 거야. 그러니까 난 오빠를 위해 희생하지 않을 거야. 그러면 오빠가 너무너무 슬퍼할 테니까.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꼭 오빠가 씩 웃는 걸 보고 말 거야. 오빠가 곤란해하는 표정도 즐거워하는 표정도 모두 여동생의 특권이니까.
응, 요즘 이 포지션이 많이 는 거 같아서 좀 걱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오빠의 첫 여동생 자리는 넘겨주지 않을 거야!”
“…….”
그 여동생의 순서를 정하는 기준이 뭔지, 과연 순서를 정해야 할 문제인지 의문이 들긴 했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아주 자신만만해하는 닥터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그 타이틀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옆에 있는 보련도, 아자즈도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곤란한 미소로 닥터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아, 그래. 정말이지.
“…난 도저히 너희들을 도구로는 못 보겠다. 이 험한 세상 나만 믿고 따라와 주는 고마운 사람들한테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가져.”
“오빠의 그런 무른 점이야말로 우릴 그 누구보다도 ‘인간’답게 만들어줘.”
닥터는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가 정해진 목적과 정해진 행동대로만 움직이는 제품이 아니라, 한 명의 살아있는 인격체이자 ‘사람’이라고 오빠는 인정해줬어. 이제는 그 차이에 대해 우리 모두가 전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어.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야.
나조차도, 아니 나 같은 게 열 명이 있건 백 명이 있건 과연 해낼까 의문이 드는 그 대단한 일을, 오빠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 인간과 바이오로이드라는, 그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을 오빠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들어.
그 모습이, 그 노력이, 절대 포기하려 하지 않는 그 끈기가……. 우리는 오빠에게 몇 차례나 구원받았어. 오빠는 우리를,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줘. 언제나 그랬어.”
닥터의 목소리엔 어느샌가부터 습기가 섞이고 있었다. 나도, 뭔가 속에서 울컥 치달아 오르는 듯했다. 날 바라보는 닥터의 눈빛은 정말로, 정말로 부드러워서……. 평소의 닥터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른스럽고, 또 의젓해 보였다.
“그러니까 행복을 두려워하지 마, 오빠.”
속삭이듯 말하며, 닥터는 다시 내 손을 가만히 그러쥐었다.
“우리 모두 오빠의 행복을 간절히 바라고 있어. 그리고 나를 포함해 우리 모두가 오빠를 가장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바로 오빠의 옆자리 말이야. 하지만, 응. 그것만큼은 오빠가 선택하는 거야. 오빠를 가장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을 고르는 건 오직 오빠 자신밖에 없으니까. 그러니까 난 오빠의 선택을 존중할 거야.”
손에서부터 전해져오는 따스한 온기.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나릉 향한 애정. 그리고 아쉬움.
그 모든 것을 담고 닥터는 내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에는 진심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나오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오빠 자신이 행복해지려고 그런 거잖아. 그런 선택에 어떻게 우리가 나쁜 생각을 가지겠어? 어떻게 우리가, 행복해지려고 하는 오빠를 뒤에서 질투할 수 있겠어?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 응, 절대로. 오빠를 사랑하는 마음에 걸고 맹세코 그런 생각을 가질 사람은 한 명도 없어.
그러니 오빠도 죄책감 따위 가지지 마. 차라리 그런 생각이 들 거 같으면, 도저히 지울 수 없다면 드는 만큼 행복해지려고 노력해. 우리 모두 오빠의 행복을 바라니까. 정말, 마음속 깊숙이서부터 바라고 있으니까.”
“…고마워, 닥터.”
“오빠, 하나만 내게 약속해줘.”
닥터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꼭, 꼭 행복하게 살아줘.”
“…….”
모두 날 바라보고 있었다. 닥터는 계속 말했다.
“꼭 행복해져야 해. 그게 우리 모두의 소원이니까.”
“…그럴게.”
그러니 어찌 대답을 안 해줄 수 있겠는가.
“반드시 행복해질게. 용이랑 아르망이랑, 꼭 행복해질게. 내가 너희에게 받은 만큼 용과 아르망도 행복하게 해줄게.”
나를 믿고 용서해준 그녀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용, 그리고 아르망.
나를 이끌어주는 불빛, 나의 희망.
내가 가장 힘들 때 나를 다그칠 수 있는 그녀들. 그러면서도 내가 무사히 시련을 통과하면 그 누구보다도 기뻐해 주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그녀들.
이제 곧이다.
이제 곧 만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다른 의미로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것 같으면서도 등허리가 바싹 땡겨지는 듯한 이 긴장감.
“히히, 오빠. 바짝 얼었네? 미안하지만 이제 체크메이트 당할 시간이야. 퀸 자리엔 용 언니고, 비숍 자리엔 아르망 언니니까 오도 가도 못한다구. 가엾은 오빠에게 미리 조언하자면, 밖에 나갈 때 어깨랑 엉덩이에 힘 꽉 주고 나가는 게 좋을 거야.”
“너, 너는? 같이 안 나가?”
“내가 왜? 들러리도 아닌데.” 닥터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씩 웃었다. “설마 내가 옆에서 꽃이라도 뿌려주면서 걸을 거라고 상상했어? 아쉽네요. 난 그냥 반지 보여주러 왔을 뿐이야.”
“저는 사령관이 어떤 표정 짓나 궁금해서 와본 것뿐이고요.”
닥터의 가벼운 이죽거림에 옆에서 아자즈도 거들었다. 평소라면 뭔가 욱하는 심정이라도 들었을 법한데 긴장 탓에 그러지도 않았다. 이런 젠장. 좋아, 어디 심해봤자 죽기밖에 더 하겠어? 나는 일어섰다.
“후우, 좋아. 언제 나가면 돼?”
“우리 나가고 조금 있다 나오면 돼. 오빠 나올 길은 뭐, 음……. 굳이 설명 안 해줘도 될 정도로 아주 뻔하니까, 길 잃을 걱정은 하지 말고.”
“우린 맨 앞자리에 가 있을 테니까, 멋진 모습 보여줘야 해요?”
일어서는 닥터를 따라 아자즈는 손으로 입맞춤을 보내며 따라 나갔고, 조금 전부터 어디론가 사라졌던 보련이 반쯤 비명을 지르며 그 둘을 따라 나서고 있었다.
“잠깐만! 2분만요, 아니 1분만요! 으아아, 손님 코디하느라 깜빡하고 옷도 안 갈아입었단 말이에요! 어떡해, 머리 손질도 마무리 못 했는데!”
“예쁘기만 한데 뭘 그래?”
“이건 헤어 아티스트로서의 자존심이…….”
소란스러운 셋의 모습은, 닫히는 문과 함께 금방 사라졌다. 작업실 안은 방금 전의 소란과 감동이 마치 봄날의 꿈이었다는 것처럼 순식간에 정적 속에 잠겨 들어가고 있었다.
“후우.”
어째 나오는 게 한숨밖에 없었다. 전신 거울 앞에서 몇 번이나 몸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혹시라도 있을 삐친 머리라도 찾으려 용을 썼지만, 시간을 끌려는 핑계가 무색하게 내 모습에선 흠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긴 오드리에 보련까지 정성을 문자 그대로 쏟아 부었을 텐데 감히 내 눈에 흠이 보일 리가.
“후우.”
더 이상 끌 핑곗거리도 찾을 수 없겠다, 나는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문 앞에 가서 섰다.
이제 마주할 시간이었다.
나는 문을 열었다.
***
과연 닥터의 말대로 길을 잃을 염려 따윈 없었다. 문 앞에서부터 붉은 카펫이 오르카 밖으로까지 죽 이어져 있었으니까. 그리고 입구 부근에선, 황금을 녹인 듯한 진한 햇살이 아스라한 바닷바람과 함께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고, 긴장으로 움츠러드는 어깨를 있는 힘껏 펴고, 마침내 바깥으로 나왔다.
거기엔 모두가 있었다.
[모두들! 오늘의 주인공인 사령관을 큰 박수와 함성으로 맞이해주세요!]
저 멀리서 들려오는 오드리의 커다란 목소리. 아, 사회자 포지션이라 이건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천둥 같은 함성이 내 귀를, 아니 온몸을 파고들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각하아아! 사령관님! 아니 오빠! 최고로 멋지지 말임다!”
“브, 브브브라우닛! 각하께 뭐라고 하는 거예요?!”
“냅둬라. 오늘 같은 날이면 마리 대장님도 용서해주시겠지.”
여느 때처럼 있는 대로 급발진하는 브라우니와 사색이 되는 레프리콘의 모습. 그러나 보통이면 그쯤에서 제지를 하는 이프리트도 오늘만큼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사령관니이이임! 이쪽! 이쪽 좀 봐주세요!”
“하하…….”
게다가 아예 페더는 공중에서 드론까지 띄우며 나를 향해 카메라를 끝도 없이 들이밀고 있었다. 한번 손을 흔들어주니 거짓말 안 치고 함성이 두 배는 커지는 기분이었다. 페더는 몰아치는 바람에 제 치마가 들춰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대신 다른 호드 대원들이 어떻게든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오직 내게로만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푸른 하늘과 사방에서 흩날리는 꽃잎. 아마 레아를 비롯한 페어리들이 정성스레 기른 꽃들을 아낌없이 제공해 준 덕이리라. 대원들은 꽃을 뿌려대며, 하늘에 닿을 듯 함성을 지르며, 서로를 껴안거나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들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많은, 정말 수많은 대원들.
“우아…….”
붉은 카펫 양옆으로, 오르카의 모든 대원들이 문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내게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일반 대원들, 심지어 AGS들까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글라시아스의 거대한 동체엔 꽃이며 장식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고, 하하……. 알바트로스는 가슴팍에 제 주먹만한 꽃 한 송이를 장식하고 있었다. 저 쓸데없이 퀄리티 높은 솜씨. 분명 아자즈의 것이었다. 알바트로스뿐만 아니라 다른 AGS들도 모두 나름대로 꾸며져 있었다.
“주인님, 주인님.”
“어? 아……. 아쿠아구나.”
어느새 내 앞엔 아쿠아가 있었다. 아니 원래부터 있었는데 내가 눈치를 못 챘던 거겠지. 귀여운 드레스 차림으로, 아쿠아는 평소에 지니고 다니던 물뿌리개 대신 꽃잎이 가득 든 바구니를 팔에 걸고 있었다. 귀여웠다. 약간 심술 난 듯 삐죽이고 있는 입마저도 사랑스럽게 보일 정도로.
“아이 참, 아까부터 불렀는데. 주인님은 다른 언니들만 보고.”
“하하, 미안미안. 아쿠아가 꽃 뿌려줄 거야?”
“응! 아쿠아가 가장 소중하게 기른 꽃들만 골라서 따왔어! 이걸로 주인님의 앞길을 축복해줄 거야!”
“고마워. 잘 부탁할게?”
“응! 아쿠아 열심히 할게!”
아쿠아는 내 걸음에 맞춰 천천히 꽃을 뿌리며 걸어갔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솔직히 주위를 향해 웃거나 손은 흔들어주고 있는데, 이게 내 정신으로 하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길도 끝나고, 붉은 카펫은 단상 앞에서 끝나 있었다.
단상 위에는 정갈하게 차려입은 아자젤이 나를 보고 미소 짓고 있었다.
“구원자의 영광스러운 주례를 제가 맡게 되었어요.”
“…으, 응.”
“자아, 구원자님. 신랑 분은 이쪽으로 서 주시면 돼요.”
들러리로 나온 듯한 엔젤이 내게 가만히 속삭였다. 거의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시덥잖은 농담 한마디 떠오르지 않았고, 머릿속이 마치 드럼 치듯 쿵쿵 울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붉은 카펫의 저 끝에 시선을 두며 힘주어 서 있었다.
이제 곧이다.
이제 곧, 그녀들이 온다.
[자아, 언제까지 신랑 기다리게 할 거예요! 신부들, 입장이에요!]
“와아아아아아!”
대포 소리 같은 함성과 함께 저 끝에서 다시 한번 오르카의 입구가 열리고, 그리고 그녀들이 나왔다. 멀어서 잘 안 보였지만, 그녀들이 내 시선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긴장됐던 마음 어딘가가 따스하게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아르망, 그리고 용.
햇살을 녹인 듯한 금발의 소녀와 밤바다처럼 검은 머리를 가진 여인.
내가 사랑하는 이들.
그녀들이, 백합처럼 흰 드레스로 몸을 감싼 채, 엷은 베일로 살며시 얼굴을 가리고 내게로 오고 있었다.
기다란 드레스의 자락은 마치 백조의 날개 같아서, 자칫 바닥에 질질 끌릴 수도 있는 것을 들러리들이 솜씨 좋게 들어주고 있었다. 용의 뒤에선 세이렌이 수줍게 드레스의 자락을 들고 따라오고 있었고, 아르망의 뒤에선 샬럿이 부드럽게 웃으며 드레스의 자락을 들어주고 있었다.
[자아, 사령관님! 신부들 모습이 어때요? 감상 한 말씀 안 해주시나요?]
“……진짜 예쁘다.”
[어머나, 우리 사령관님 긴장한 모양인데요? 꺄아, 귀여워라!]
농담도, 여유로운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오드리의 그런 놀림에도 겨우겨우 한마디 대꾸한 채, 내 시선은 내게로 걸어오는 그녀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누가 옆에서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게 꽉 잡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답답할 텐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그녀들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마음 한쪽이 꽉 눌리는 것처럼 긴장되면서도 입에선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백합, 두 송이 꽃, 하얀 드레스의 그녀들.
대체 어떤 수식어를 붙여야 할까, 모르겠다.
아르망과 용이, 금발과 흑발의 그녀들이 두 손 가득 부케를 들고 단상을 올랐다.
내게로 온다.
내게 와서 선다.
내 옆에, 내 곁에, 나를 껴안듯, 내 양옆에 그녀들은 나란히 섰다.
“…서방님.”
“…용.”
단아한 한 송이의 꽃. 평소와는 다르게 희고 고운 쇄골을 그대로 드러낸 드레스가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엷은 베일 너머에서 그녀가 가만히 시선을 내리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붉어진 그 얼굴은 무적이란 이름의 지휘관의 것도 군인의 모습도 아니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로서의 얼굴이었다.
“…폐하.”
“아르망.”
속삭이는 듯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마치 푸른 하늘 아래 크로커스 꽃으로 가득한 초원을 연상케 하는 맑고 고운 음색. 아르망은 그렇게, 수줍은 듯 피어난 꽃처럼 내 곁에 있었다. 햇살 같은 금발은 연분홍빛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그 아래로 엷은 물안개처럼 아름다운 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섬세한 레이스가 달린 베일 너머로, 아르망 역시 가만히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나는 뭐라도 말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 음. 둘 다 정말 예쁘다.”
“…….”
“…….”
기껏 나온 말이 내가 들어도 굉장히 멋대가리 없는 말이라는 게 문제긴 했지만. 차라리 용기를 내지 말걸, 하고 후회하는 찰나 용이 내 소매를 살짝 잡았다.
“…서방님도, 늠름십니다.”
“기사님처럼 멋져요, 폐하.”
뒤이어 아르망이 내게 살짝 어깨를 기대며 속삭였다. 목소리마저 예쁘게 들린다고 하면 너무 과장하는 걸까? 하지만 정말 목소리마저 예뻤다. 이대로 둘의 손을 잡고 당장 방으로 가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서방님, 앞입니다.”
“엉?”
“앞이요. 아자젤 님 보셔야죠, 폐하.”
[어머, 우리 새신랑 사령관님! 아무리 신부들이 예뻐도 그렇지 결혼식 도중에 혼을 빼면 안 돼요! 설마 셋이서 어디 으슥한 곳이라도 갈 생각이나 하는 건 아니죠?]
“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그야말로 엉거주춤. 둘의 손을 잡은 것도 아니고 안 잡은 것도 아닌, 등을 돌린 것도 아니고 똑바로 선 것도 아닌 자세로 멍청하게 서 있었다. 오드리가 쾌활하게 놀리는 목소리에 하객들은 그야말로 웃음바다 천지였다. 아자젤은 아자젤대로 곤란한 듯 쓴웃음을 짓고 날 보고 있었고 말이다.
“구원자, 마음은 알지만 형식이란 것도 나름대로 중요하답니다.”
“아, 아니. 그, 저, 미안.”
“사과는 저한테가 아니라 나중에 신부 분들에게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
아니나 다를까, 설마 하는 눈빛으로 슬쩍 옆을 보니 아르망이 입술을 앙다물고 있는 게 베일 너머로도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용은 용대로 담담하게 시선을 내리고 있었지만 작게나마 들려오는 낮은 한숨 소리는 내 귀엔 그야말로 천둥소리보다도 더 크게 들려왔다.
“그럼 주례 시작해도 될까요, 구원자?”
“부탁드립니다…….”
어째 아자젤까지 날 놀리는 거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곧 웃음기가 가시고, 이윽고 크고 낭랑한 목소리로 여기 모인 모두를 향해 말했다.
“여러분. 우리는 가장 영광스러운 날에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환호성은 잦아들고, 하객들이 모인 광장은 은은한 바닷바람 소리만 들릴 정도로 고요해졌다. 그런 하객들을 향해, 아자젤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마치 그 한마디 한마디에 모든 정성을 쏟는 것처럼.
그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 앞길을 내내 축복해줄 것처럼.
“여기 우리를 이끌어주는 구원자와,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두 명의 여인이 뜻깊은 언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구원자는 그녀들의 반려로서, 그리고 그녀들은 구원자의 반려로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보듬어주며, 앞으로의 여정을 같이 걸어갈 것입니다.”
아자젤의 목소리가 분명 귓전을 울렸지만, 이상하게도 그 내용은 드문드문 들려오는 듯했다. 마치 귀가 듣고 싶은 소리만 골라 듣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살짝 시선을 돌려 보면,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들이 있었다.
용. 무적이라 칭송받는 호라이즌의 지휘관.
아르망. 시대극의 배우이자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소녀.
서로 태어나게 된 경위도, 만들어진 목적과 이유도 달랐지만, 정말 접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들은 여기에 섰다.
그녀들은 나를 선택해줬다.
만들어진 대로의, 정해진 대로의 운명을 수용할 뿐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과 결심으로 이 자리에 서 줬다. 사령관으로서의 내가 아닌, 나로서의 나를 믿고 이 자리에 서 줬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또 그런 나를 용서하며 이 자리에 서 줬다.
…그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서로 달랐던 운명의 실이, 이윽고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한데 얽히고설켜 이렇게 만났다.
서로 웃기도 하고, 때로는 장난을 치기도 했다.
울기도 했다. 슬퍼하는 서로를 달래준 적도 있다.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것도 아주 큰 잘못을.
그리고 그걸로 서로 감정이 상하고, 화내고 울고, 그리고…용서해주기도 했다.
그 모든 걸 넘어 여기에 선 우리.
지금 이 순간이, 우리 셋이 서 있는 이 순간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구원자. 그대는 두 여인의 반려로서, 평생 둘을 똑같이 사랑하고 아껴줄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순식간에 지나간 주례는 어느새 막바지에 다다라 있어, 마지막 맹세의 말만 남기고 있었다. 아자젤은 이번엔 내게서 시선을 돌려 둘을 바라봤다.
“용, 그리고 아르망. 그대들은 지휘관이기 이전에, 부관이기 이전에, 바이오로이드이기 이전에, 한 명의 여자로서, 구원자의 반려로서 평생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네, 맹세합니다.”
바이오로이드이기 이전에. 그 말이 내 가슴을 울렸다.
‘오빠는 우리를 도구가 아닌 인격체로 봐줬어. 그것만으로도, 우린 오빠에게 구원받은 거야.’
아냐, 닥터.
나야말로 너희들에게 구원받았어.
폐허에서 구출됐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여러 일들을 겪었어.
웃을 때도, 울 때도, 우는 것조차 사치일 정도로 급박할 때도 있었지. 절망할 때도 있었어. 어찌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몸부림칠 때도 있었고.
그 모든 때에 너희가 있었어.
너희가 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고, 아르망을 만나고, 용을 만날 수 있었어. 너희야말로 날 구원해준 거야.
그런 감사의 마음을 담아 결심했다.
반드시 이들에게 평화로운 미래를 주겠노라고.
이 기적과도 같은 행복을 느끼는 만큼, 날 믿고 따라주는 그녀들에게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나는 기도했다.
“구원자, 신부의 베일을 걷고 마주 봐주세요.”
아자젤의 말이 떨어지자 용과 아르망은 내 옆에서 내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들의 베일을 걷었고……. 우리 셋의 시선은 마침내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아…….”
누구 입에서 먼저 튀어나온 것인지도 모를 탄성. 와, 위험해. 그냥도 미인인 둘이 꾸미기까지 하니 그야말로 눈이 홀릴 지경이었다.
용과 아르망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나는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밤물결 같은 용의 머리카락과 황금의 밀밭 같은 아르망의 머리카락.
평소와는 다르게 한껏 멋을 내고 작은 관으로 고정시킨 둘의 머리는, 면사포의 신비한 분위기까지 더해져서 그런지 마치 흑진주와 황금으로 세공한 보석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두 시선.
바다를 연상케 하는 깊고 푸른 눈동자와 아침 하늘처럼 투명한 눈동자.
차마 바라보는 게 부끄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두 시선이, 황송하게도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것뿐인데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셀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마주한 얼굴인데……. 이상하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용은 내 탄성을 반대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서, 서방님?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아니, 예뻐서 그런 건데.”
“그런…….” 용은 다시 얼굴을 붉혔다. “부, 부끄럽습니다.”
“…….”
잠깐 시선이 마주쳤나 했더니 용은 다시 시선을 내렸다. 자세히 보니 부케를 든 손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렇구나, 떨리는 건 나만이 아니었구나. 그런 용의 어깨를 껴안고 싶은 충동이 하늘을 찌를 듯했지만, 그 전에 아르망의 베일을 걷어줘야 했다.
“폐하.”
“아르망.”
베일을 걷고 마주 본 아르망의 눈가엔 습기가 어려 있었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엔 한없는 애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울었어?”
“안 울 거예요. 오늘은 기쁜 날이니까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르망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단순히 기쁨의 눈물만은 아니리라. 물론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긴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만으로 아르망이 눈물을 보일 리는 없었다.
아르망은 한 떨기 장미 같은 소녀였다. 겉보기에는 꽃 한 송이만큼이나 연약해 보이는 소녀.
그러나 장미에게 가시가 있듯 아르망 역시 연약하기만 한 소녀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내면은 올곧고 의연해서, 아이 같은 천진함을 보이면서도 동시에 현자와도 같은 깊은 눈동자로 먼 곳을 바라볼 때도 있었다.
그녀는 약하지 않았다, 결코.
두 명의 베일 걷고 나는 아자젤을 바라봤다. 아자젤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구원자.”
“…네.”
“두 반려 분들과 맹세의 의미로 반지를 교환해주세요.”
아까 봤던 세이렌과 샬럿이 비단 방석에 반지를 받쳐 들고 걸어 나왔다. 세이렌은 용의 편에, 샬럿은 아르망 편에 서서 우리들 사이에 방석을 내밀었다.
마치 시간이 한없이 느려진 것 같았다.
아르망과 용은 내게로 손을 내밀었다. 그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마치 감각이 너무나도 예민해져서 공기의 진동까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반지를 집어 용의 손에 끼워줬고……. 용 역시 반지를 집어 내 손에 끼워줬다. 아르망도 똑같은 순서로 반지를 교환하니, 내 양손 약지에서 반지가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서로의 손을 잡은 채 서로의 반지만을 바라봤다. 별다른 장식도 없는 소박한 반지 하나. 겨우 그것뿐인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두근거렸다.
“평생 너희만 바라볼게.”
불쑥, 그런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앞으로 수많은 일들이 있을 거고,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너희를 사랑하겠다는 마음만큼은 절대로 잊지 않을게.”
“서방님…….”
“폐하…….”
나를 바라보는 용과 아르망의 눈에는 맑은 이슬이 걸려 있었다. 그렁그렁한 눈빛은 맑아서, 그녀들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언제 봐도 두근거렸다.
지금 역시, 두근거리고 있었다.
“난 많이 부족해. 지금도 솔직히 엄청 떨리는 걸 간신히 참고 있어. 항상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너희들이 의지할 수 있을 강인한 사람으로 남고 싶은데……. 그게 생각만큼 잘 안 될 때가 많아.”
“서방님, 전 강인한 서방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랍니다.”
약한 소리를 하는 나를 달래듯, 용이 가만히 내 손에 자기 손을 포갰다.
“강한 서방님도, 약한 서방님도, 때로는 철부지 못난이 서방님이라도……. 모두 제가 사랑하는 분의 모습인 걸요.”
“폐하께선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세요.”
내 손 위에 용의 손이, 그 위에 아르망의 손이 포개졌다. 아르망 역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약한 사람은 자기가 약하다고 말하지 않아요, 폐하. 폐하께선 강인한 분이세요. 저는, 그런 폐하께……. 그런 강인한 폐하께 제 사랑을 바칠 수 있어 행복해요.”
“…고마워.”
아까부터 몇 번이고 말했던 그 한마디를 겨우 다시 내뱉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목이 꽉 막힐 것 같았다. 용은 그런 나를 바라보더니, 아르망과 시선을 살짝 교환하고선 다시 나나를 바라봤다.
“약속하겠습니다.”
용은 잔잔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이 삶이 다하는 날까지 서방님 이외의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이번엔 아르망이 그 말을 받아 입을 열었다.
“이 삶이 다하는 날까지 폐하가 아닌 다른 이를 그리워하지 않을 거라고.”
“우리의 모든 것,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모두 폐하의 것입니다.”
서로 번갈아 입을 여는 그녀들의 눈은, 계속해서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남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부끄러움 따위 저 멀리 던져 버리고, 오로지 진심만을 담아 그녀들은 말을 하고 있었다.
“서방님과 함께 보냈던 나날들이 반드시 행복으로 물들어 있던 건 아니지만, 이게 그것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거야말로 폐하께서 우리 둘 모두를 아껴주셨다는 소중한 추억이니까요.”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소리 없이 쌓인다.
슬펐던 기억도 시간이 흐르면 세월이라는 눈에 덮여 점차 사그라지고, 이윽고 다시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된다.
지금 용과 아르망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그러나 눈물을 흘리지 않는 눈으로, 기쁨에 가득 찬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사랑의 형태가 무엇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감히 사랑이라 칭할 수 있는 이 맹세가, 삶의 마지막까지 깨어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용과 아르망은 동시에 말했다.
“약속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한,”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언제나 당신만을 사랑하고, 당신이 아닌 다른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가장 사랑하는 당신의 이름에 대고, 당신이 사랑해 준 우리들…….”
거기까지 말한 용은 내 머리를 끌어당기더니 짧게 입을 맞췄다. 뒤에서 환호성이 들렸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 내 입술은 그 옆에 있던 아르망에게 넘어간 뒤였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마치 꿈과도 같아서, 아르망은 여운을 즐기려는 듯 요염하게 입술을 핥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 아르망의 이름을 걸고.”
“용이라는 이름에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
길다면 긴 맹세의 말.
부끄럽지만, 그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담은 듯한 간절한 한마디 한마디.
아아.
“…….”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정말.
눈물이 흘렀다.
“우, 우우…….”
아아, 나는 정말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구나.
“차암, 폐하도. 이런 기쁜 날에 우시면 어떡해요?”
“그런 너도 우는 주제에…….”
빙긋 웃으며 내 눈가를 닦아주는 아르망의 눈에도, 마찬가지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걸 닦아주는 용의 눈에도 이슬이 맺혀 있었다. 둘의 눈은 울고 있었지만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건 나 역시 그랬다.
“흠, 신부 분들? 맹세의 키스는 조금 더 뒤지 않나요?”
아자젤이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표정은 이런 돌발 상황이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에 더 가까웠다.
“미안하오, 아자젤. 하지만 오늘만큼은 마음을 참기 싫었소.”
세상에 그 용이 저런 말을 하는 날이 오다니. 거기다 아르망은 한술 더 뜨는 듯 찡긋 눈을 깜빡였다.
“문제 될 건 전혀 없어요, 폐하. 맹세의 키스도 하면 되죠.”
과연, 하고 납득하는 아자젤. 아니 그걸 납득하면 어떡…아니, 그러면 되는 건가?
“풉! 폐하 얼굴이 너무 바보 같아요.”
“그렇습니다. 어찌 지아비 되실 분께서 이리도 정신이 없으신지.”
둘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내 양옆으로 와 팔짱을 끼었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아자젤은 눈을 반짝였다.
“서로의 서약을 받았습니까?”
“네.”
우리는 동시에 대답했다.
“구원자.”
아자젤은 미소지었다.
“반려들에게 입을 맞춰도 좋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나는 용의 허리를 힘껏 끌어안고 얼굴을 끌어당겼다.
“와아아아아아!”
“꺄아, 사령관니이임! 남자다워요!”
그야말로 식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을 배경음 삼아 나는 용의 입술을 맛봤다. 용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부케를 한 손에 늘어뜨린 채 내 목에 팔을 두르고 열렬히 입맞춤에 응해줬다.
“으응…!”
짧지만 강렬한 입맞춤. 그 여운이 식기도 전에 난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잔뜩 기대하고 있는 아르망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꺅, 폐하, 응…!”
난 허리를 숙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르망이 있는 힘껏 발돋움을 해서 내 목에 매달렸으니까. 입맞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떨어졌고, 자연스럽게 용이 내 입술을 찾았다. 난 물론 거절하지 않았다. 남들의 시선? 뭐, 실컷 보라지. 오늘 나는 최고로 행복하니까.
[우리 오르카의 첫 부부 탄생에 다들 열렬한 박수와 환호 부탁드려요!]
오드리의 열띤 사회에 안 그래도 열정적이던 식장은 거의 용광로를 방불케 할 정도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우리 역시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웃는 그녀들의 모습은, 정말로 사랑스러웠다.
“용, 아르망.”
“네, 서방님.”
“네, 폐하.”
“사랑해. 아주 많이.”
“저도 그렇습니다.”
“저도요, 폐하!”
우리는 웃으며 다시 입을 맞췄다. 아르망도 용도 내 팔에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팔짱을 단단히 끼고 있었다. 입맞춤을 달콤했고, 함성과 박수 소리는 뜨거웠고, 하늘은 눈부실 정도로 푸르렀다.
많이 울고, 많이 아프고, 많이 상처를 줬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모여 결국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 희디 흰 드레스에 감싸여 환히 미소 짓고 있는 그녀들과, 나를.
그렇게 우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을 얻게 됐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겠지. 앞으로 언제까지라도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얘기는 다를 것이다. 이제는 용과 아르망이 내 곁에 언제나 있을 테니까.
내 곁에는 용과 아르망이 있다.
우리는 나란히 걸어간다.
그리고 우리들은 행복해졌다.
#. 후일담
“와, 폐하. 이것 좀 보세요. 그때 부케를 마리 대장님이 잡았던 모양이에요.”
“아 그거 마리가 잡았어? 그나마 다행이네. 리제나 리리스가 잡았다면 끔찍했을 거야…….”
“…그 말 본인들 앞에서 하면 안 되는 거 아시죠?”
“경호실장은 삐지니 쉬우니 말입니다.”
“아니 왜 내가 말실수한다는 게 전제야?!”
아르망의 핀잔과 용의 가벼운 이죽거림. 구석에서 반지를 찾은 게 계기라면 계기라고나 할까. 우리는 내친김에 결혼식 때 찍었던 사진첩들을 죽 늘어놓고 하나하나 펼쳐 보며 추억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아날로그 사진도 나쁘지 않은 거 같네.”
“정말입니다. 페더 양이 고집을 부린 이유가 있었군요.”
우리 앞에 어지러이 펼쳐져 있는 건 몇 권이나 되는 두꺼운 사진첩. 물론 원본이야 오르카 데이터베이스에 모두 저장돼 있었지만, 페더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아날로그식 인화를 통해 이렇게 사진첩도 가지게 되었다.
응, 확실히 좋다. 특히 이렇게 죽 늘어놓고 셋이서 오순도순 볼 수 있다는 게. 사진 하나하나를 집었다 놓는 용과 아르망의 손에서 반지가 유난히도 반짝이는 느낌이었다.
“하아, 그때는 적어도 앞으로는 폐하께서 철없는 행동은 조금쯤은 덜 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여전히 똑같았죠. 새삼 남자는 언제까지고 애란 말이 떠오릅니다. 그렇지 않으십니까, 서방님?”
“아니 그……. 죄송합니다.”
하도 저지른 잘못이 많아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인정해야 하는 게, 그 뒤로 좋은 티를 있는 대로 내고 다녔다가 결국 용과 아르망에게 쌍으로 혼났다. 반지도 업무 시간엔 목에 거는 걸로 통제당했고.
“저 그때 이후로 폐하를 조금은 더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요, 전혀 아니었어요. 폐하에 대해선 예지가 여전히 안 맞아요. 최대한 모든 케이스를 고려해봐도 예측률이 80퍼센트를 넘어간 적이 없단 말이에요.”
“아니 그, 미래를 80프로 확률로 맞춘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거 아냐?”
“그 말은 20퍼센트 확률로 폐하께서 제 눈을 요리조리 피해 다닌다는 뜻이니까 그렇죠! 오늘 청소도 보세요. 그렇게 하라고 하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 안 하고 버티고 있다가 결국 이렇게 쌓인 거잖아요!”
빽 볼멘소리로 소리치는 아르망의 뒤로는 셋이서 팔 걷어붙이고 청소한 흔적이 골판지 상자 몇 개가 되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니 세상에 나도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지.
“그, 그래도 오늘 청소했으니까 용의 예전 반지도 찾은 거잖아.”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변명이랍시고 했지만, 하필 기어들어 간 곳이 지뢰밭이었던 모양인지 용과 아르망의 눈매가 금세 가늘어졌다.
“그걸 지금 합당한 이유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임기응변과 갖다 붙이는 잔재주만 느셨습니다. 대체 이 결혼식 때의 그 멋진 서방님은 어디로 가버리신 건지…….”
“가긴 어딜 가. 네 앞에 있잖아, 나라고.”
“하아, 서방님……. 용은 외롭습니다. 아녀자를 두고 어디서 바깥 나들이를 그리 하고 계신 건지요…….”
“…….”
용의 돌려 까는 솜씨는 정말 일취월장이라 해도 좋을 만큼 쑥쑥 늘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돌려 까는 건 상상도 못했을 텐데. 난 바로 옆에 있는 원인인 우리 예쁘장한 추기경님을 슬쩍 째려봤지만, 사랑스러운 추기경님은 그런 내 눈짓 따윈 받아칠 가치도 없다는 듯 화사한 미소로 넘길 뿐이었다.
“왜요, 폐하? 그렇게 정열적인 눈빛으로 바라봐주시고.”
“…아닙니다요.”
“아이, 삐지셨어요?”
“그럴 리가요.”
“이걸 보면 조금은 기분이 풀리실 거예요.”
갑자기 아르망의 목소리가 깜짝 놀랄 정도로 야하게 들렸다면 기분 탓일까.
안 봐, 하고 밀어내려는 찰나 아르망이 들이민 것은 우리 결혼식 때의 사진 중 하나였다. 어, 어어, 근데 이게 뭐야.
“…아니, 어, 어? 이거 뭐야? 왜 찍혔어? 어, 아니?”
“언니, 폐하의 언어 모듈이 고장나셨나봐요.”
“내가 무슨 AGS냐?! 아니 그, 이건 언제 찍은 거야?! 왜 내가 이걸 몰랐어?”
아르망이 내민 사진. 거기엔 우리들이 찍혀 있었다.
어, 음. 우리들의 첫날밤이.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포즈로, 아니 무슨 연속 사진 찍은 것마냥 찍힌 사진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본 결혼식 사진보다도 더 많이 있었다. 세상에 어쩐지 사진첩이 두껍더라니. 대체 무슨 조화로 찍은 건지 어떤 사진들은 거의 내 시선에서 내려다보는 각도로 찍혀 있었다.
“아니 이거 뭐야? 언제 찍었대?”
“페더 양이 꼭 한번 찍어보고 싶다고 했거든요.”
“페더어어어어!”
“아이, 폐하. 저희 결혼식 때 사진들을 얼마나 예쁘게 찍어줬는데 이 정도는, 네? 게다가 안 된다고 해봤자 높은 확률로 도촬했을 거란 말이에요.”
아르망은 아주 느긋했다. 사진을 들어 하나하나 감상하는 태도가 무슨 예술품 감상하는 듯했다.
“아, 이때 조금 격렬했었습니다. 훗, 설마 신혼 초야를 삼일 밤낮으로 치를 줄은…….”
“…….”
용은 용대로 얼굴을 붉히며 그때의 추억을 회상하고 있었고 말이다. 그제야 용도 진즉에 눈치 채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예상 못 했던 거라면 나 이상으로 당황했을 테니 말이다.
“하아……. 진짜 다각도로 찍기도 찍었네. 재주 하나는 끝내 줘.”
“이때 폐하께서 란제리에 가터벨트 조합을 굉장히 좋아하신다는 걸 알았죠.”
“덕분에 서방님 취향에 맞춰 속옷 종류만 배로 늘어났습니다.”
음란하신 분, 용은 살며시 내 옆구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속삭였다. 뭔가 용의 목소리에서도 서서히 열기가 느껴졌다.
“저, 폐하. 실은 용 언니랑 제가 하나 더 내기한 게 있거든요.”
“…뭔데?”
아르망은 주저앉아 있는 내 앞에 일어서더니, 깜짝 놀랄 정도의 음란한 얼굴을 하고선 치맛자락을 슬쩍 들어 보였다.
“오늘 아침 예지에서 오늘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느낌이 있었답니다.”
그리고는 딱 아슬아슬한 높이에서 손을 멈추고선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그 좋은 일이 뭔지는 전적으로 폐하의 손에 달려 있어요.”
앞은 요염하게 치맛자락을 들어올린 아르망.
“내키지 않으시다면 뒤로 빼셔도 된답니다, 서방님.”
뒤에서는 꾸욱, 하고 몸을 밀착하며 귓가에 속삭이는 용.
“…문 잠갔지?”
“들어올 때부터 잠가 놨답니다.”
정말, 이러니 어떻게 당해낼 수 있냐고.
결국 그날 청소는 뒷전으로 미뤄둔 채, 우리는 결혼식의 그날 밤을 재현하고야 만 것이다.
그래서 앞과 뒤 중에서 어느 걸 선택했냐고?
사람을 열받게 만드는 말투가 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말을 하다 마는 거고…….
-------------------------
총 페이지 수 132장
공백 포함 13만 6천자
개인 단편 최장 기록 최고 달성
후기로 찾아뵙겠습니다.
(IP보기클릭)58.227.***.***
(IP보기클릭)223.38.***.***
(IP보기클릭)211.201.***.***
(IP보기클릭)175.192.***.***
마리는 그냥 아무 의미도 없이 그냥 넣었습니다 ㅋㅋ | 22.06.17 00:1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