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편모음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85592?
조금미래는 장편입니다. 전편을 보고 오시는 편이 이해가 쉽습니다.
----------------------------------------------------------------------------------------------------------------
“야.”
“왜.”
“너 나한테 할 말 없냐.”
나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닥터를 놀려보았지만, 닥터는 날 힐끗 흘겨보고는 시치미를 뚝 떼듯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차트로 눈을 돌렸다.
“뭔데.”
그런, 한 대 치고 싶은 여동생님을 째려보며 말을 받았다.
“리리스 한 번 더 보러 가게 해 준다며.”
“그랬지. 그날은 자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왜.”
“왜냐니?”
진짜 몰라서 물어?
달력을 가리키며, 그렇다, 붉은색 x자가 5개나 그인 달력을 손가락질하며 내가 외쳤다.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얼굴을 보질 못했으니 그러지, 이 자식아!”
그렇다. 일주일. 일주일이다. 깨어난 지 벌써 일주일, 깨어난 첫날 리리스를 보러 간 것을 제외하면, 닥터는 여전히 나에게 면회허가를 내어주지 않고 있다.
리리스와 하루빨리 이야길 나누고 싶은 나로서는 짜증 수준이 아니라 초탈의 경지에 올라갈지도 모른다는 체념까지 있을 정도다.
심지어 그것만이 아니라 사건 해결을 위해 여기저기 찾을 곳이 많은 나로서는 외출금지령과 면회금지령이 미칠 노릇이다.
손가락으로 휠체어 손잡이를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난 지금 조급하단 말이야. 대체 왜 못 만나게 하는 건데?”
“일단 상태부터 좀 보고...”
“그 말만 지금 일주일째야. 그리고, 검사는 3일째에 전부 끝났다고 하지 않았어?”
차트를 탁 내려놓으며 한숨을 푸욱 내쉰 닥터는, 내 앞으로 발소릴 내며 걸어오더니, 내 이마를 콕콕 찍으며 말했다.
“이봐요. 생각 없는 최고지도자님, 오빠는 지금 뇌에 강한 부담을 가하는 장치를 사전 적응 기간이나 연습도 없이, 사전 조정도 안 하고, 심지어 한계시간을 초과시키기까지 했어. 그게 오빠의 뇌에, 혹은 신체에 어떤 영향을 줬을지 철저하게 확인해야 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 확인이 3일째에 끝난 거 아니었...”
“신체검사는 끝났지. 하지만 머리 부분과 정신검사는 아직 미완료야. 그게 끝나기 전까진 절대 못 만나.”
“아니, 왜?!”
“둘이 만나는 게 어떤 정서적 요인으로 작용할지도 모르고, 아직 리리스 언니 안에 남아 있는 나노봇이 어떤 반응을 할지도 모르니까 그러지!!”
내가 버럭소리에 움찔하자, 닥터는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한 단어 한 단어 힘주어 끊어말했다.
“내가. 허락하기. 전까진. 절대. 만날 생각. 하지 마!”
“윽...”
이 자식이.
다른 걸 몰라도 내 건강을 들먹이면 할 말이 없는데...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게다가 둘이 얼굴 보기 시작하면 분명히 치료는 뒷전이고 종일 붙어 있기만 할 테고, 분명히 몸도 무리시킬 거잖아!!”
“으...”
부정하고 싶은데... 부정할 수가 없어!
내가 끙끙거리건 말건, 닥터는 아무튼!! 하고 딱 잘라 말했다.
“절 대 안 돼! 리리스 언니에게도 그렇고 오빠에게도 그렇고 뭔 영향이 있을 지 몰라!”
“...”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 하지 마! 하여간! 항상 걱정만 끼치면서 이럴 땐... 어휴.”
날 보면서 이마에 손을 짚고 지긋지긋하다는 양 한숨을 푹 내쉰 닥터는, 입술을 비죽이는 나를 아랑곳않고 말했다.
“혹시라도 몰래 보러 갈 생각이면 절대 안 돼, 언니들이 교대로 붙어 있을 테니까 꿈도 꾸지 마!”
“네가 미호냐.”
헛소리 비슷하게 투덜거린 나는 차마 닥터에게 화를 내진 못하고 끓는 속을 삼켰다.
아무래도 리리스를 보러 가는 것은 조금 뒤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자. 약속해. 절~~대 몰래 빠져나가서 언니 보러 안 간다고.”
“끄응...”
“얼른.”
“...하아. 그래. 그래... 안 갈게. 안 간다고. 약속 어기면 내가 토모다, 토모.”
내가 끝에 덧붙인 말을 듣고서야 닥터는 만족스럽다는 양 고개를 끄덕인다. 짜증 나는군.“
사정없이 인상을 쓰고 입을 비죽인 나를 무시하고, “일하자 일~!” 하고, 닥터는 토도도 방을 나섰다.
-이거야 원. 갈수록 친동생처럼 되어 가는군.
나는 갈수록 짜증-아니, 귀여워지는 닥터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
나는 토모다.
그렇다. 이쯤되면 다들 나에 대해서 잘 알지 않는가.
나 사령관. 일이 없으면 해킹으로 일을 찾는 남자.
평범한 집 지하에 거대 공방을 만들고, 평범한 사립학교 지하에(물론 내 휘하의 재단이 가진 학교다) 비밀기지와 합체로봇 발진 포드를 만들고, 평범한 방에 비밀통로를 두 개씩 만드는,
그야말로 항상 예측을 엇나가는 남자.
그렇다.
탈주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를 감시하던 다프네가 피로를 못 이기고 졸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양심 따위에 붙들려 포기할 줄 알았나 본데, 그건 오산이다. 닥터.
... 진심으로 양심에 찔렸지만.
진짜 도저히 양심을 못 이기겠어서 그만두려고 했지만.
잡생각은 고개를 흔들어 날려버리고 다시 목발을 짚었다.
원래는 휠체어를 써야 하지만, 이미 인간을 벗어난 내 몸은 다리를 제외하면 대부분 회복되어 팔은 쓸 수 있다.
다리도, 아직은 재활이 덜 끝난 것 뿐이지 움직일 수는 있다. 굳이 소리가 크게 나는 휠체어를 썼다간 소리 때문에 들킬 위험이 크다.
‘...그나저나 쓰러진 2주 동안 빠르게 회복됬다곤 해도, 다치고 고작 한 달 만에 이 정도라니.’
과도할 정도의 안전조치, 라고나 할까.
옛날부터 강화된 내 몸은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다는 자각 정도는 가지고 있었지만...
역시 전신의 뼈가 분쇄골절되었는데 한 달만에 이 정도라니 무서울 지경이다.
뭐, 무병장수, 천년만년 살면서 가족들과 함께하는 게 내 최종목표니까. 상관없나.
아무튼.
나를 토모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그렇다. 나는 토모다. 뭐 어떤가. 즐거운 토모도 일단은 토모였다.
리앤이 들었다면 “나하고 왓슨 널 똑같다고 하는 거야?” 하고 어이없어했겠지만-분명 근 한세기 넘는 시간 동안 공부를 많이 했는데도, 난 아직도 닥터와 리앤에게 인정받질 못한다-, 뭐. 그건 그거고.
“후후후. 나 사령관. 포기를 모르는 사나이... 이 정도로는 포기하지 않지.”
의미 없는 혼잣말을 폼내듯 중얼거린 이유는, 솔직히 힘들어서다. 더럽게 힘들다. 상식적으로, 회복이 빠른 속도로 되었다고는 해도 재활이 덜 끝난 몸이다. 움직일 때마다 더럽게 힘들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실 3분쯤 전부터 슬슬 전부 포기하고 닥터를 부를까 고민하고 있다.
“...후우...”
하지만 내가 누군가. 나 사령관. 백수십 년간 수많은 아수라장을 거쳐온 남자, 내 인생으로 게임 하나- 아니, 어쩌면 몇 개씩도 만들 수 있을 남자. 이 정도의 고난은 고난도 아니다.
“어디 보자, 여기서. 응... 왼쪽이고.”
불이라고는 비상구 위치를 알려 주는 희미한 초록색 불 뿐이었지만, 나의 기억력과 시력은 어둠 속에서도 정확했다.
“하여간, 쓸데없이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고.”
이쯤이면 닥터도 다프네도 내 투덜거림을 듣지 못할 것이다.
이만큼이나 멀리 떨어뜨려 두면 힘들어서라도 찾아갈 수 없겠지-라는 계산이었겠지만, 어림도 없다. 지옥 같은 전장을 몇 번이나 헤쳐나온 이 나를 얕보지 말란 말이다.
곧 도착이군.
문득 한 가지, 걱정거리라고 할까, 불안감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에, 분명 우리는 껴안고 울었고, 약간이지만 대화도 나눴지만.
...자세한 이야기, 하나도 하지 않았지.
“...으음.”
오해는 전혀 풀지 않았고 오히려 이쪽에서 마구 쏟아냈지.
아직 리리스가 오해를 가지고 있다면...
“...흐읍!”
나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을 쫒아내듯, 그나마 안 아픈 왼손으로 내 뺨을 짝 때렸다. 그런 걱정은 해서 뭐 하게.
만약 리리스가 여전히 나에게 화가 나 있거나 오해하고 있다면, 그럼 대화를 나누면 된다. 솔직하게 말하면 된다.
늘 그랬듯이.
그야 우리는 가족인걸.
“좋아.”
어느새 눈앞에 다가온 리리스의 병실 문을, 나는 조금 천천히, 소리 죽여 열었다.
“...”
페로처럼 잠귀가 밝은 아이들이 있을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누군가 눈치챈 기색은 없었다. 천천히 문을 열고, 고개를 살짝 들이밀어 안쪽 상황을 살폈다. 다행히 들키지는 않은 모양...
...엥?
뭐지?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불 꺼진 방 안을 좀 더 자세히 살폈다. ...이상하다. 인기척이, 없다.
조용히 문을 열자, 당직이 귀를... 아, 하치코였나.
컴페니언의 귀염둥이, 내 치유제인 하치코는 소파에서 몸을 동글게 말고 고롱고롱 잠들어 있었다.
호위로서는 이러면 안 되겠지만, 하치코니까 봐주기로 하자.
“...우웅... 주인님...?”
내 기척을 눈치챈 걸까.
하치코는 귀를 살짝 쫑긋거리고 코를 조용히 들었지만, 이내 나임을 알아차렸는지 꼬리를 살짝 흔들곤 다시 고갤 숙였다. 평소라면 내게 오종종 달려와 안겼을 텐데, 많이 피곤한 모양이다.
“끄응.”
신음하며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하고, 하치코의 숨소리를 빼면 아무런 기척도 없는 병실은 스산해 보일 정도였다.
“리리스?”
한껏 낮춘 성량으로 속삭였지만, 침묵은 깨지지 않았다. 으스스한 정적을 지키며 대답하지 않는다.
등줄기에 흐르는 서늘한 감각에, 천천히 다가가, 리리스가 누워 있을 이불을 확 젖혔다. 그리고...
“허?”
날 반겨 준 것은, 잠든 리리스가 아닌 고르게 놓은 베게들이었다.
3초 정도가 필요했다.
이윽고 내 머리가 다시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튕겨오르듯 창문을 보았다. 그러나 다행일까 불행일까, 창문은 열려 있지 않았다...
...바람이라도 쐬러 나간 건가.
하지만 그렇다면 왜 이런 속임수까지 써 가며 나간 건가. 그냥 나가도 될 것이다.
“....닥터에게, 말해야 하나? 아니, 하지만...”
이 방에서 기다려 보아야 하나.
하지만, 이미 새벽 2시. 리리스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차분히 기다리겠는가.
“... 찾아봐야, 하나.”
머릿속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발만 동동 구르던 나는,
“...당연하지.”
하고.
조금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걸음을 옮겼다.
------------------------------------------------------------
잠시 현재.
티아멧과의 신혼여행 도중에 시작된 이야기가 예상보다 길어졌다는 생각에,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됬나 쓰게 웃었다.
목이 말라서 이야기를 잠깐 멈춘 내 눈 앞에서, 티아멧이 여러모로... 뭔가... 굉장히 듣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들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그 모든 소동이 전부...”
“...응. 나하고 리리스 사이의 뭐랄까. ...사랑싸움.”
“...뭔가. 허탈한데요.”
티아멧의 표정은 마치 크리스마스의 산타는 사실 없어! 라는 말을 들은 것과 비슷했다.
하긴 그때 벌어진 소동은 “아무튼 이번에도 누군가의 암살시도였음”으로 넘어갔으니...
피식 웃은 리리스가, 목을 매만지는 내게 건네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렇다고 리리스가 내 선의를 오해하고 삐져서 가출했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잖아.”
“...”
“아얏!”
리리스가 은근슬쩍 내 팔을 꼬집었다. 아프다.
“... 그리고요?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됬는데요?”
“아~ 그게 말이지. 한 30분쯤? 계속 찾아다녔는데 안 보여서.”
“...언니, 혹시 도망쳤던 거예요?”
“아니예요...”
아까 전에,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부터 리리스는 조금씩 놀림받고 있다.
솔직히 나도 고생꽤나 했으니 말릴 생각은 없다.
“어디 보자, 그러니까 그 다음에...”
------------------------------
거의 1시간 가량이 지난 뒤에야,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둘 중 하나다. 리리스와 내 길이 계속 엇갈리고 있거나-혹은 아예 리리스가 도망쳤거나.
이제는 어쩔 수 없다. 내 방으로 돌아가서 곱게 누워 잠들던지, 닥터에게 리리스가 없는 것 같다고 말하던지 해야 한다.
“... 하아...”
재활도 덜 끝난 다리로 움직이려 한 반동인지 욱신거리는 몸을 끙끙거리며 일으키고, 목발을 짚은 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긴 시간 동안 짧은 수면에 적응한 나는 새벽 시간이라고 피로가 극심하게 느껴지는 일이 잘 없지만, 역시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는지 많이 피곤했다.
“어디로 간 거냐고.”
리리스가 가출했을 때에도 중얼거렸던 말을 다시 중얼거리고 다리를 바쁘게 움직였다. 만약 리리스가 탈출한 거라면 어서 닥터에게 말해야...
“?”
순간 내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몸을 숨기려던 나였지만, ...어?
이 새벽에 돌아다닐 만한 사람은 경비가 아니면 없을 텐데?
그리고 경비는- 이 층에 내가 입원했기 때문에, 내 가족들로 모두 대체되었고.
그리고 내 가족들은 지금 모두 자고 있을 텐데?
“.......”
설마, 침입자라도 있는 건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등줄기에 식은땀이 스륵 흘러내렸다. 위험하다. 이건. 목발을 짚고서야 움직일 수 있는 나는 침입자를 상대할 만한 여유가 없는데-
라고 생각했는데.
“....신 거예요, 어디...”
“...응?”
목소리가. 낮익다?
아니, 그보다,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저 칼날빛 머리카락은, 혹시.
“...리리스?”
새어나온 황당하는 듯한 중얼거림은 작디작았으나, 저만치 떨어진 리리스는 그 성량만으로도 충분했던 모양이다.
시야 끝에서 순식간에 휘릭 올라가는 고개와 흩날리는 머리카락,
다음 순간, 놀라는 나는 아랑곳않고 달려온 그녀는,
“~~!”
“윽?!”
나에게 육탄돌격을 감행해, 넘어뜨리다시피하며 안겼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재활이 덜 끝난 육체에 가해진 충격에 내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건 말건, 리리스는 나를 안은 팔을 풀지 않고 오히려 더 꽉 조여온다. 잠, 잠깐만..?! 내 허리! 허리가!!
“리... 리리...스...! 말로, 말로 해...!”
화난 건 알겠는데! 말로 해! 말로! 네가 전력으로 안으면 아무리 나라도오오오?!
“...안, 계셔서.”
“끄으으으....응?”
“정신을 차리셨다고 들어서, 찾아, 갔는데, 안 계셔서, 계속 찾아다녔는데, 어디에도 없으셔서...!”
나에게 안긴 리리스의 어깨가 애처롭게 떨리고 있는 걸 그제서야 알아챘다.
육탄돌격에 넘어진 자세 그대로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인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무사하셨던 거구나, 다행이예요...”
“...”
...이것참.
아무래도, 리리스도.
내가 그녀를 보기 위해 몰래 탈출했듯이, 나를 보기 위해 몰래 방을 나온 모양이다.
보기 좋게 엇갈렸구나.
나를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맺힌 눈물방울을 쓸어내리며, 나는 쓰게 웃었다.
“방에 있어야지. 많이, 아플 텐데.”
“그러는 주인님도. 지금은 방에 있으셔야죠! 이렇게 목발까지 짚고 어딜...”
눈물방울을 한 방울씩 떨어뜨리면서도, 잔소리하듯 말하던 리리스는 거기까지 말하고서야 멈칫했다.
쓴웃음을 짓는 나를 올려다보며, 혹시, 하며 말한다.
“...저를, 찾으시려고?”
“...응. 그, 뭣이냐. 사과도 제대로 못 한 것 같고, 오해랄까 그런 것도 제대로 못 풀어서, 걱정도 되고 그러니까 얼른 찾아보고 싶어서...”
조금 횡설수설했다.
약간 죄책감이 든 탓일까.
“...”
“...”
잠시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던 우리는,
“...풋.”
“... 하하.”
조금, 우스워서.
이게 무슨 일이람.
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흘렸다.
“...하여간, 왜 이런 부분만 닮았는지. 부부는 닮는다지만.”
“그러게요. 정말이지.”
리리스도 나도, 잔소리하려던 생각이 쏙 들어갔다.
눈앞의 상대가 나와 똑같이 생각했다는 게, 그것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하여간 못 말린다고- 아마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몸은, 좀 괜찮아?”
“주인님께서 마지막에 주신 그 나노봇 덕분인지 빨리 회복됬어요. ... 그래도 아직은 입원치료를 받아야 한데요. ...주인님은 어떠세요?”
“... 닥터가. 눈을 시뻘겋게 빛내면서 화를 내서 말이지... 아마 족히 한 달은 더 붙들려 있을 것 같아.”
“어린 동생에게 꼼짝도 못 하는 건 오빠들의 본성이려나요.”
“혹시라도 닥터 앞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마...”
심술에 당하는 건 내 쪽이다.
어떤 골탕을 먹을지 쉽사리 상상이 가지 않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서 자세를 추스른 리리스와 나는, 평소처럼 웃고는,
“... 무사하셔서, 다행이예요.”
“... 응. 너도. 무사해서 다행이야.”
하고. 마주 본 채 웃음을 나눴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눈앞에서 따스하게 웃는 표정에는, 고통을 참는 기색도 없고,
싸우기 전에 보았던 체념도 억하심정도 없고,
평소처럼, 늘 보았던 애정 어린 시선만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걱정했던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까지 들어서.
평소와 전혀 다를 게 없는 사이라는 게, 너무나도 다행스러웠다.
아- 그래.
“저기 말이야.”
“?”
“그, 내가 쇼핑센터를 간 건 말이지?”
리리스의 얼굴이 살짝, 굳는다.
나는 그걸 정확하게 눈치채고서, 아니아니아니, 하며, 조금 변명조가 되어버린 말을 속사포로 내뱉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말이지, 어?! 나는 그, 네가 휴가도 없이 일하기도 했고! 나 때문에 다친 것도 있고, 걱정하고 있을 테니까 선물이라도 해 주고 싶어서, 그, 그리고 유리가, 자기 동생한테 줄 선물 고르는 걸 도와달라고 하기도 했고, 그래서, 가는 겸... 진짜로 맹세컨데 불륜이라거나 외도라거나 바람이라거나 그런 건 저어어얼대 아니거든? 진짜거든? 진짜야! 물론 내가 생각 없이 행동한 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니, 잘못이지만! 그치만 너 주고 싶어서 옷도 사 오고, 목걸이도, 그리고 반지도- 아차.”
반지는. 깜짝선물용인데.
순간 멈칫했으나, 다행히도 리리스는 마지막 말이 나오기도 전에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 내어 웃으며, 다시 포옥 하고 내게 안겼다.
“... 알아요. 그 정도는.”
“... 알면서 그랬어?”
“그야 그때는, 뭐랄까, 저도 정신이 없어서... 아, 그, 그렇지, 저도 말이예요? 마지막은, 뭐랄까, 좀, 생각이 짧았다고 할까,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고 해야 할까, 좀 비이성적이 되어버려서. 죄송해요. 정말로 생각이 짧았어요. 그런 일 생각도 하면 안 돼는 건데-”
“맞아! 암만 화났대도 돌덩어리까지 집어넣고 투신이라니 제정신이냐고.”
“그치만, 주인님이 오해 살 만한 일들을 하셔서.”
“젠장! 그렇지! 할 말이 없어! 리리스, 미안해! 진짜로! 그건 진짜 내 잘못이야!”
조금 소란스러워서, 닥터라거나 다프네라거나, 들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후후후... 아아, 정말이지. 한세기 반 넘게 싸운적이 없는데, 결국에는 싸워버렸네요. 나름 자랑거리였는데.”
“...뭐, 나중에 더 크게 싸우는 것보다는 나았을지도.”
“사지가 분쇄골절당한데다 사이좋게 뇌 이상이 생겼는데도요?”
“게다가 살해당할 뻔 하기도 했지만 말이지, 다행으로 치자고.”
이렇게 다시 소란스럽게, 평소와 다름없는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게.
“...”
“...”
“... 죄송해요. 주인님.”
“응... 나도, 미안해. 리리스.”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고, 사과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나는 안다.
“앞으로는, 절대, 싸우지 말아요. 정말이지 지긋지긋해요.”
“동감이야. 하아... 진짜, 아무리 서로 화났대지만 이게 무슨 꼴이람.”
당연하다는 듯이 다음에는, 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우리는 안다.
정말로- 정말로, 다행이야.
“주인님.”
“리리스.”
말이, 겹쳤다.
키득 하는 소녀 같은 웃음소리와, 큭큭 하는 장난기 어린 웃음이 동시에 새어나왔다.
겹쳐져 버린 말은, 입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뭘 말하려고 했는지 알고 있다.
그 말 대신, 우리는,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한동안 상대의 체온을 자각하다가-
조용히, 몸을 겹치고 한순간의 영원을 즐겼다.
-----------------------------------------------------------
그리고- 아침.
“이 망할 오빠가아아아아아아!!!! 나가지!!! 말랬지!!!!”
“끄...끄아아아아악!!! 허리! 허리가아아아?!! 잠깐, 잠깐, 잠깐만! 항복! 항보오오오옥!!!!”
“항복!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대로 부러져 버리라지, 이런 허리! 오빠가 무슨 종마야?! 어떻게 재활도 안 끝난 몸으로, 그런, 그런...!”
“끄아아아아아, 다, 다, 다프네!! 살려줘! 살려줘!!”
“...주인님께서는 좀 반성하셔야 해요.”
“으아아아악!!”
울려퍼지는 절규는 탈론페더가 급조한 방음벽에 막혀 허무하게 흩어졌다.
아침에 일어난 닥터가, 리리스와 나 둘 모두가 방에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수라의 표정으로 온 병실들을 뒤집고 다닌 결과,
... 리리스와 한침대에서 서로 껴안고 잠든 채인 나를, 분명 비어 있어야 할 병실에서 발견했다.
... 아무리 재활중이라지만 역시 넘쳐나버린 애정을 가만히 누르고 있을 수 없었던 만큼, ‘좋아, 한 달 가까이 말하지 못한 만큼 사랑한다고 해야지!’ 하면서. 조금, 힘을 썼는데.
“우와아아아아악?!! 진짜로 부러져! 부러진다고!!”
“괜찮아! 3달 정도 입원하면 나아!”
“우와, 이거 진심이야!! 레오나! 발키리!! 아무나 좋으니까 살려줘!! 이 자식 진심으로 내 허리를 박살 낼 작정이야!!”
“... 달링, 아무리 당신이라지만 이번에는 좀, 놀랍다고 해야 할지. 어이없다고 해야 할지... 얌전히 3달 누워 있는 편이 좋지 않을까.”
“저도 이번만큼은 대장님 말씀에 찬성합니다.”
“으허허헝, 마음은 이해하지만 제발 살려달라고~!”
축축한 이불, 상의를 벗어던진 채 아직도 곯아떨어져 있는 나와, 발견되자마자 얼굴을 붉히는 리리스-
그 모든 걸 보고 총명한 닥터는 어젯밤 나와 그녀가 벌인 행각을 모두 깨달은 듯 했고. 그 결과,
나는 닥터에게 관절기를 당하는 꼴이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닥터가 만든 기계에 묶여서 말이다.
내가 자초한 일이기에 뭐라고 항변하지도 못하고 가족들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기만 하는 가운데,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인 리리스가 작은 목소리로 날 감쌌다.
“저, 저기, 닥터, 어제는, 제가 부탁한 거니까, 주인님은 용서를.”
“언니는 거기 가만히 있어. 언니 차례는 나중이야.”
“아니아니아니 리리스는 건드리지 마아아아아아아아악!!!!!! 허리!! 허리이이익!!!!”
“...”
전혀 소용없었지만.
내가 고통에 가득 찬 절규를-역시 재활도 덜 끝난 몸으로는 무리였는지 온몸이 욱신거리기까지 하는데 관절기까지 당하니 죽을 맛이다-내지르는 와중에도, 닥터는 수라의 표정을 하고서 씩씩거렸다.
“...닥터, 역시 슬슬 그만하는 게... 이러다 주인님 정말로 죽겠어.”
“날 못 믿는 거야, 라비아타 언니? 괜찮아. 뇌만 살아있으면 어떻게든 살릴 수 있어.”
“아니, 그러면 안 돼지.”
라비아타가 나를 살려주려는 것 같다.
나는 고통 가득한 신음을 흘리면서도,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인 나의 애인에게 고마워, 사랑해. 라고 말하려 했지만.
“허리는 잘못하면 불구가 되니까 팔이나 다리로 해.”
“아아, 그게 났겠네. 재활중이기도 하니까 더럽게 아플 거야.”
“응응. 아, 주인님? 죄송해요. 역시 이번 일은 저도 많이 화가 나서.”
“라, 라비아타 너까지...”
이렇게 된 이상 마지막 희망은 착하디착한 라미엘뿐인데- 아, 맞다, 라미엘은 아침미사 하러 갔지.
얌전히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양, 이제는 얼굴이 도깨비처럼 보이는 닥터가 깊디깊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부러질 것 같으면 말해.”
“잠까----으아아아아악!!!!”
내 절규는 탈론페더가 급조한 방음벽을 뚫고 병원 전체를 뒤흔들었다.
-----------------------------------------------------------
저러다 부러지면 어쩌지- 하다가도, 리리스는 생각을 접었다.
아무리 그래도 닥터다. 주인님을- 자신의 소중한 오빠를 진짜로 불구로 만들지는 않겠지.
단순히 겁주는 것일 것이다... 아마도.
‘...... 그나저나.’
리리스는 끄아아악 절규하는 주인님을 보며, 조금 이상하다는 듯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 꿈이. 좀...’
신비한 회색 털결을 빛내는 늑대가, 자신을 한 번 바라보더니,
그 자리에 털썩 앉고는, 리리스에게 쓰다듬어 달라는 듯 코를 비비거나, 쓰다듬어 주었더니 얼굴을 핥아댄다거나.
리리스가 몸을 파묻어도 될 정도로 커다란 늑대였다. 털결은 폭신하고 부드러워서, 쓰다듬고 있으면 무심코 계속 쓰다듬게 되고, 차갑고 냉정해 보이는 외모하고는 다르게 쓰다듬어 주면 애교를 부리곤 해서, 꿈을 꾸는 내내 웃음기가 입가에 맴돌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늑대도 개니까 그냥 개꿈인가- 싶다가도, 기묘할 정도로 생생한데다 뇌리에 박힌 듯 지워지지 않는 꿈의 내용이,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 어, 혹시...“
...아, 아니겠지. 그야 내 몸상태는 여전히 이 모양이고. 여태껏 소식이 없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아닐 거야. 그냥 기분 탓이겠지.
...기분 탓이겠지. 응.
리리스는, 기분 탓인지 평소와 무언가 감각이 달라진 몸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꿈에 대한 생각을 한구석으로 밀어넣었다.
그것이 정확히 10달 뒤 태어날 사랑스런 딸의 태몽이라는 걸, 아직은 알지 못하고.
(05, 경호실장님의 우울 끝)
--------------------------------------------------------
-작가후기-
살려주십쇼.
(IP보기클릭)175.215.***.***
(IP보기클릭)58.227.***.***
(IP보기클릭)210.105.***.***
고생하셨습니다!!
(IP보기클릭)21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