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손의 꽃
서방님께선 약하시다.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다. 마음의 문제다. 천부적인 전술적 혜안은 인정하는 바이지만, 연민이라는 마음의 군살이 때때로 그걸 방해한다. 망설임은 곧 죽음. 찰나의 순간이 생을 결정하는 전쟁터에서 군살은 때로 독보다도 더 치명적인 단점이 될 수 있다.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칼날 위를 걷고 있다는 것을.
때로 잠시 옆을 볼 수도 있다.
하물며 그 현실을 이겨내겠다고 노력하는 것이 나쁠 리는 더더욱 없다.
하지만 현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하물며 서방님께서 그러신다면, 그것이야말로 언어도단. 감정에 휩쓸려 앞을 보지 못 하는 일 따윈 없어야 한다.
“…….”
그럴 땐 내가 바로잡아야 한다. 그게 아내로서의 내 의무니까. 세상에 지아비가 천길 낭떠러지로 간다고 하는데 말리지 않을 아녀자가 어디 있겠는가.
서방님이 괴로워하시는 걸 볼 때마다 가슴 한편이 아려온다.
안다, 서방님이 왜 저러시는지.
그저 바이오로이드 하나. 그 말이 서방님께 얼마나 상처가 되는 말인지 안다. 알면서 했다. 할 수밖에 없었다. 서방님께서 현실을 잊으려 하셨으니까.
감정만 앞서는 불확실한 구조 작전과 괴롭지만 집중해야 하는 현실. 한 집단의 우두머리라 한다면 비교할 필요도 없이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서방님께선 전자를 선택하셨다. 그렇다면 내 역할은 무엇일까. 서방님의 길을 다잡아주는 일? 아니면 서방님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옳게 되도록 최선을 다해 돕는 일? 어떤 것이 아녀자로서 내 올바른 길일까. 나는 전자를 택했다. 그리고 서방님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
“…각오를, 했는데.”
서방님의 마음에 상처를 입힐 작정으로 입을 연 순간, 나 역시 상처를 입을 각오를 했다. 하지만 서방님께 받은 상처는…내가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아팠다. 너무나도 아팠다.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음대로 해라.
그렇게 말하고선 뒤도 안 보고 방으로 돌아왔다. 몇몇인가 날 보는 게 느껴졌지만 정말 아무래도 좋았다. 혼자 있고 싶었다. 그저 이 얼굴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한 군을 맡은 대장으로서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똑똑
[…용 님, 저 아르망이에요.]
그렇게 생각한 순간, 서방님 다음으로 가장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분이 내 방 앞에 서 있었다.
***
아르망은, 그 작은 소녀는 과자 조금을 손에 들고 있었다.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미소에서 쓴맛이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살짝 붉게 부은 눈……. 서방님, 참으로 당신은 죄 많은 분이십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아르망 양까지 울리셨네요.
“차 한 잔만 주시겠어요?”
“…들어오시오.”
그게 핑계라는 것 따윈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내 얼굴이 어떨까. 솔직히 엉망이겠지. 뛰쳐나오고 나서 거울 한번 안 들여다봤으니까. 아르망을 간이 식탁으로 안내한 뒤에 되는 대로 차를 끓여서 내왔다. 이미 과자를 가지런히 놓고 날 기다리던 아르망의 표정에 갑자기 피식 미소가 걸렸다.
“왜 그러시오?”
“색다른 맛의 차가 될 것 같아서요.”
그제야 내가 들고 있는 커피잔을 보니 커피에 홍차 티백을 우리고 있었다. 다시 돌아서려는 찰나, 아르망은 나를 붙잡았다.
“그대로도 괜찮아요.”
“평소 안 하던 실수도 하고 쑥스럽구려.”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요.”
“…….”
굳이 말을 돌릴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아르망은 대놓고 방금 전의 일을 언급했다. 잠시 우리 둘은 차를 홀짝였다. 그리고선 아르망 양은 품속 깊이 넣어놨던 목걸이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더니 손에 끼웠다.
“…폐하와 같이 있지 않은데도 반지를 낀 건 처음이네요.”
“…….”
별다른 장식 없는 은빛 반지가 그녀의 약지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내게도 똑같은 반지가 품속에 있었다. 나 개인으로선, 어쩌면 목숨 다음으로 소중한 서방님과의 약속. 그 증표.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녹아내리고, 손가락에 끼우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근 듯 마음이 푸근해지는 보물.
그걸 꺼냈다는 건 한 명의 참모로 온 건 아니란 뜻이었다. 서방님의 두 번째 부인의 자격으로 나와 얘기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서방님 몰래 짠 우리들의 첫 번째 규칙. 반지를 낀 상태로는 절대 일 얘기는 하지 말 것. 여기서 내가 그 규칙에 동의하기 싫다면 내가 반지를 끼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현명한 아르망 양은 ‘참모’로서 ‘참모’인 내게 타협안을 제시하겠지.
하지만 그건 싫었다. 그렇게 도망치긴 싫었다. 서방님께서 이 어린 소녀의 사랑을 받아주셨을 때, 도망쳤던 것은 그때 한 번이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래서 나도 품속에서 반지를 꺼내 손에 꼈다.
“…용 언니.”
“마음 쓰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르망.”
“그런 말씀 마세요. 우리 일인걸요.”
“…그렇죠.”
서방님 몰래 짠 우리의 두 번째 규칙. 반지를 꼈을 때만큼은 자매처럼 지낼 것. 비록 만들어진 목적도, 시기도, 이유도 모두 달랐지만 우리는 한 명의 지아비를 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엮인 운명 공동체였다.
나와 서방님의 문제는 곧 아르망과 서방님의 문제였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폐하께선 이미 나갈 채비를 마치셨어요. 선발대인 AGS 부대는 이미 출격한 상태고요.”
“하지만 방사능 문제는요?”
“닥터 양이 보호복 준비만 마치면 끝나요. 기지를 세울 것도 없이 폐하와 호위 부대만 나간다면 굳이 간이 정화 시설 같은 걸 준비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렇군요.”
손도 대지 않은 찻잔은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다. 마치 내 마음처럼. 그렇게나 말렸는데……. 서방님, 어째서 제 마음을 이토록 몰라 주시는 겁니까.
“폐하께선 절대로 양보 안 하실 거예요. 이번 일은…너무 잔인해요. 마치 폐하의 상처를 노려서 쑤시는 것만 같아요.”
“서방님의? 물론 지금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전부 구하셨죠. 한순간도 물러서지 않으시고요.”
아르망이 잘라 말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유난히도 쓸쓸해 보였다.
“테마 파크 이후로, 폐하께선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시고 계세요.”
“하지만…하지만 그건 서방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맞아요. 결단코 폐하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렇다, 그것은 구 인류의 잘못. 서방님께서 그 짐을 짊어지실 이유는 전혀 없다. 하물며 그것으로 죄책감을 느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서방님께서 겪은 수많은 일들 중에서 좋게 끝나지 않은 일들도 있단 건 알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성역, 그 이전에는 테마 파크에서도……. 하지만 서방님께선 신이 아닙니다. 모두를 구할 순 없습니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폐하께서도 아실 거예요. 그저 폐하께선, 그 자리에서 용 언니가 폐하께 동조해주길 바랐던 것 같으셨어요.”
“그랬으면 마음은 편했겠지요. 하지만 전 아내이면서도 동시에 군인입니다. 대대적인 결전을 앞두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한순간의 감정으로 장차 지아비를 위험에 빠뜨리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르망의 말은 나도 안다. 그저 동조해드렸으면 마음은 편했겠지.
하지만 당장 대륙을 건너 오메가의 세력지로 들어가야 하는 이 시점에서 고작 내 마음 편하자고 그럴 순 없었다. 우리가 마주해야 할 적은 만전에 만전을 기해도 승산을 가늠할 수 없는 상대. 심지어 그 뒤엔 ‘별의 아이’라는 공포스러운 존재가 도사리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삼파전의 형태로 진흙탕 싸움이 될 수도 있었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약간의 준비 부족으로 서방님을 잃기라도 한다면……. 나는, 정말 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거다.
“폐하께선 약하세요. 언니도 아시다시피요.”
“…….”
“마음이 여리고 우유부단하시고, 때로는 감당하지도 못할 일만 벌여놓으신 채 쩔쩔매시고. 그런데도 위기의 상황에선 저희들 앞에서 있는 힘껏 허세를 부리시는 거죠. 저는 그것이야말로 폐하의 ‘인간다움’이라고 생각해요.”
그래, 그 인간다움에 반했다.
자신의 한계에 굴하지 않고 그저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멋져 보였다. 그래서 서약을 맺었다. 내가 평생 모실 지아비가 있다면 바로 이 분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저희도 폐하를 이해해야 해요. 조금 더요.”
“서방님이 우리를 이해하는 건 필요 없고 말입니까?”
“그런 건 나중에 혼내면서 해도 돼요.”
“…….”
그냥 넘어간단 뜻은 아니구나. 생글생글 웃으면서 잘도 저런 말을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테마 파크 이후로 폐하께선 밤에 잠을 잘 못 주무시기 시작했어요. 불현듯 느낌이 와서 몰래 집무실이나 함교로 가 보면, 폐하께서 야간 근무자들과 놀거나 혼자서 잡일을 하시는 걸 몇 차례나 봤어요. 겉으로는 웃고 계셨지만, 그건…불안을 감추려는 미소였어요.”
“잘 아시는군요.”
“폐하께선 연기를 되게 못 하시잖아요.”
“그게 서방님의 매력이잖습니까.”
“연기를 못하는 게 매력이에요?”
“…적어도 제겐 그렇습니다.”
“저도 그런 걸 보면 참 저희 둘 다 폐하께 푹 빠져 있긴 한 가봐요. 그렇죠?”
“훗.”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우리 처지가 그랬다. 서로 한심스럽게도 한 남성에게 마음을 다 줘버린 여자들이었다.
“하지만 용 언니가 오신 뒤부터는 꽤 빈도가 줄으셨어요. 그게 언니와 서약하게 된 것 때문에 그랬다는 걸 안 건 조금 뒤였지만요.”
“…뭐가 그렇게 서방님을 힘들게 하는 건가요?”
“그때의 풍경이요.”
아르망은 그저 쓰게 웃을 뿐이었다.
“그때, 그 테마 파크, C구역. 그 참상과 참혹함을 폐하께선 직접 목도하셨어요. 그 죄악의 구렁텅이 가장 깊숙한 곳에까지 들어갔다 나오셨어요.”
“…….”
서방님께 간략하게나마 전해들었던 테마파크의 일. 멸망 전 인류에겐 그런 테마파크 따윈 길가에 널린 쓰레기들보다도 지천에 널려 있었다. 그런 과거를 마주하고도 서방님은 꺾이지 않으셨다. 눈물을 흘릴지언정 쓰러지지 않았다.
“구할 수 없었던 바이오로이드들을, 인간을 원망하며 자신이 대체 왜 죽어갔는지도 모를 그녀들의 흔적을……. 폐하는 모두의 앞에서 울지 않으셨어요. 대신 혼자 방에서 상처 입은 늑대처럼 우셨어요.”
“…혼자서.”
“네, 혼자서요. 폐하께서도 우리들에게 보이기 싫은 모습, 하나나 두 개쯤은 있으시니까요.”
아르망은 그러면서 다시 한번 내 손을 가만히 감쌌다.
“폐하께서 이번에 구하시려고 하는 게 과연 저 공장지대 안에 있을지도 모르는 바이오로이드일지, 아니면 그저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집착 때문인지 저는 몰라요.”
“…….”
“그렇게 폐하께서 불안해하실 때, 적어도 저는 옆에 꼭 있고 싶어요. 용 언니도 같이 있으면 더더욱 좋고요.”
“서방님의 행동을 반대해놓고 이제 동조하란 말씀입니까?”
“네, 그래야 폐하께서 홧김에라도 이런 위험한 일에 두 번 다시 머리를 들이미시지 않을 테니까요.”
내 손을 잡은 아르망의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얼굴엔 더더욱 미소가 짙어졌고 말이다. 아, 이런 기분이구나. 내가 언짢게 웃을 때 서방님이 느꼈던 기분이…….
“폐하의 상처도 보듬고, 폐하의 안전도 지키고, 더불어서 폐하께서 홧김에 심한 소리 못하게 주의도 주고. 후훗, 제가 괜히 악당 전문 바이오로이드였겠어요? 약점을 쥐락펴락하는 건 제 전문이랍니다. 폐하를 돌봐드리기도 할 거지만, 다시 이런 일로 언니를 울리지 못하게 할 거예요.”
“…….”
서방님과 싸웠을 때의 분노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대신 그 자릴 차지하고 있는 건 눈앞의 소녀가 보기보다 훨씬 더 무서운 점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잘 부탁해요, 동생.”
“맡겨두세요, 언니.”
두 손을 꼭 쥐는 아르망의 눈빛은 유난히도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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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제 소설 설정은 용과 아르망과만 서약했단 설정입니다
중간에 용과 아르망 합동 결혼식 하는 장면은 빠졌는데요
그거 쓰려니 40장 정도 될 거 같아서 깔끔하게 GG 했습니다
콘티는 있으니 언젠간 쓸 수도 있겠죠
아마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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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희미한 옛 사랑의 노래-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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