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기에 앞서
본 스토리는 미스 오르카 외전 스토리 및 영원한 겨울의 방주 이벤트 시작 전부터 구상했던 스토리입니다.
따라서 정사와는 다른 부분이 일부 있을 수 있으며, 약간의 캐붕이 있을 수 있으니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intro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이 상황의 결과로 철충 무리는 물론 별의 아이까지 한꺼번에 타파할 수 있겠지만...
멸망 전에 이런 속담이 있었다고 들었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라고.
아마 지금만큼 그 속담이 어울리는 상황은 지금까지 없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인류는, 아니 지구는
어느 한 바이오로이드의 실수로 인해 멸망하려고 한다.
* * *
“주인님, 트리아이나 님으로부터 통신이 들어왔어요.”
“찾았나 보네.”
나는 콘솔을 연결하고 그녀의 통신을 받았다.
“사령관! 시설에 진입했어. 지금 엘리베이터로 내려가는 중이야.”
“규모는?”
“일단 입구 쪽은 그렇게 크지 않았는데, 내부는 들어가 봐야 알 것 같아.”
무적의 용이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합류하고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 우리는 도움이 될 정보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괌의 해군기지에 있던 여러 자료들을 회수하여 분석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괌 남쪽 해저에 모종의 시설이 있다는 극비정보를 입수했다. 해당 자료에는 정확히 어떤 시설인지까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이후에 있을 전면전에 도움이 될 것이 있을 경우의 수를 대비하여 해당 시설을 탐색하도록 결정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겠지만, 트리아이나가 이 임무에 자원하였다. 애초에 해저에 위치한 시설이었고, 무엇보다 우리가 북미 쪽을 공략하면서 별도로 단독행동을 하기엔 오랫동안 해저 탐사를 해 왔던 트리아이나만큼 적격인 바이오로이드는 없었기에 그녀의 자원이 없더라도 그녀를 보내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트리아이나는 단독 탐사를 떠나고 우리는 당초의 계획대로 북미 공략을 실시, 감마와의 충돌과 난민 구출 등 여러 사건을 겪고 알래스카로 행선지를 옮겼다. 그리고 오늘 그녀에게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와우, 여기 뭐하던 곳이었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깊은 것 같은데? 엘리베이터가 한참 내려가고 있어!”
“위험하다 싶으면 무리하게 탐사를 계속하지 말고 나와. 여차하면 이쪽에서도 인원을 보충해서 움직일 수 있게.”
“당장엔 걱정할 필요 없어. 지금 쏘우피쉬에 탑승한 상태거든. 이대로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엘리베이터도 크더라고.”
실제로 트리아이나가 통신으로 보여준 엘리베이터 내부만 봐도 상당한 크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떤 시설이기에 저 정도 크기의 엘리베이터가 깊은 곳까지 내려가는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진입할게.”
시설 내부는 어두웠다. 아예 불이 꺼져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야를 확보할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불빛만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스크린 너머로도 알 수 있었다. 멸망 전 시설인 만큼 원래는 저보다 환하게 비추고 있었던 걸지, 아니면 원래 이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전기가 끊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가동중인 시설이라는 점은 한편으로는 놀라웠다.
제법 긴 통로를 지나자 넓은 홀같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복도보다도 불빛이 적어서 정확한 규모는 짐작할 수 없었다.
“트리아이나. 현장에서 직접 보는 입장에서 얼마 정도 규모 되는 것 같아?”
“모르겠어. 천장이 상당히 높은데 저 위로는 불이 없어서 어디까지 높은지 짐작이 안 가. 쏘우피쉬에 내장된 조명으로도 한계가 있어.”
“음... 주변에 뭔가 위협 요소같은 건?”
“지금은 일단 없는 것 같아.”
“그렇다면 내려서 움직일 수 있겠어? 혹시 모르니까 신중을 기하면서.”
“그 말을 기다렸다고, 사령관!”
트리아이나는 쏘우피쉬에서 내리고 손전등을 켰다. 그녀 주변은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올 정도의 시야는 확보되었지만 천장은 여전히 손전등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시야가 들어온 곳도 특별한 것은 없어 보였다.
이곳은 어떤 시설이었을까? 특별히 무언가가 없어 보이는데도 극비 정보로 감춰져 있는 시설이라니... 짐작이 가지 않는다.
“콘스탄챠, 짐작갈 만한 거 있어?”
나는 옆에 있던 콘스탄챠에게 의견을 물어보았지만 그녀도 고개를 저었다.
“당장 보이는 것만으로는 저도 짐작하기 힘들어요. 무언가를 격납하고 있는 시설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큰 규모에 비해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닌가 싶고...”
콘스탄챠의 말대로였다. 스트롱홀드같은 거대한 AGS가 다수 격납되어 있는 시설이라면 무언가 흔적이라도 남아 있기 마련이겠지만 그런 것조차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두 가지로 좁혀볼 수 있겠는데... 아니, 후자의 가능성은 아무리 멸망 전 인류하고 해도 아닐 것이다.
“사령관! 여기 뭔가 버튼이 있는데?”
생각에 빠지던 중 트리아이나가 말했다. 그녀가 보여준 것은... 빨간 버튼이었다.
“이거 누르면 뭐가 나오지 않을까? 눌러볼게!”
“잠깐, 트리아이나! 아직...”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트리아이나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수르트 프로토콜 승인. 앞으로 24시간 뒤 지구 폭파 장치가 기동합니다.》
“.....뭐?”
-24:00
긴급하게 지휘관들이 전원 소집되었다. 마리, 레오나, 메이, 칸, 아스널 등 지휘관급 개체 전원을 포함하여 라비아타, 무적의 용, 레모네이드 알파 등 멸망 전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핵심 개체들은 물론 통신을 통해 에이다까지 한 자리에 모였다.
“수르트 프로토콜... 설마 이게 실재했던 거였다니...”
모여있던 이들 중 유일하게 이걸 알고 있던 바이오로이드는 알파 뿐이었다.
수르트 프로토콜. 알파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들이 지구라는 행성의 유일한 지배자라 여긴 멸망 전 인류의 오만의 극의.
그것은 어떠한 요인으로 인해 인간이 더 이상 지구의 지배생물이 되지 못했을 때, 지구 자체를 포기하고 우주로 나아가면서 인간을 대신하여 지구의 지배권을 빼앗은 누군가의 위협을 배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버튼을 누르는 순간 지구 내부 곳곳에 내장된 핵폭탄이 일정 시간 후에 일제히 기폭하여 지구 자체를 날려버리는 일종의 자폭 장치.
민간에는 알려지지 않은 이 시설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은 정부나 주요 회사들의 고위 인사 뿐이라는 것이 알파의 설명이었다.
“펙스의 회장들이 한번씩 떠드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전 그저 늙은이들의 망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미 멸망 전 인류는 모든 것을 완성하고, 준비하고만 있었다는 얘기로군.”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유일하게 들리는 것은 화상 통신 너머의, 자신이 저지른 돌이킬 수 없는 실수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며 울고만 있는 트리아이나의 목소리 뿐.
“사... 사령관... 난 그냥...”
...일단 트리아이나에 대한 처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쨌든 이 상황을 어떻게든 타파하는 것이 우선일 테니까.
“메이, 혹시나 해서 묻는 거지만, 둠 브링어같은 기동형 바이오로이드는 우주까지는 갈 수 없지?”
“...진지한 상황이니만큼 농담으로 물어본 것은 아닐테니, 진지하게 답해줄게. 불가능해. 우리가 활동할 수 있는 구역은 아무리 높아봤자 성층권까지고 거기서도 오래 있을 수 없어.”
“그렇다면 에이다, 지금 우리가 네가 있는 화성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은 있어?”
“유감스럽게도 현재 지구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우주 항행 시설은 기동이 어려운 상태입니다. 설령 가능하더라도 아직 화성의 테라포밍 작업은 완전히 종료된 것이 아닌 만큼 여러분들이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이 될 수 없습니다.”
“하아...”
진퇴양난이라는 얘기인가.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 당장에 취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가능할 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뿐이다.
“우선 저 시설로 포츈, 닥터, 아자즈, 스카디를 파견할게. 네 명이 협력해서 시설을 분석한다면 저 장치 자체를 멈출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상공을 비행하는 것보다는 해상으로 움직이는 게 나을 거야. 해저시설이라며?”
메이의 의견에 수긍하며 나는 용에게 시선을 옮겼다.
“용, 여기서 저 시설이 있는 위치까지 최대 속도로 움직인다면 얼마 정도 걸려?”
“대규모 함대로 움직인다면 모를까 제한된 인원만 소규모로 움직인다면 최대한 빠르게 움직일 경우 4시간 전후로 예상되오.”
“좋아. 바로 네 사람을 저쪽으로 보낼 준비를 부탁해.”
“알겠소.”
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아이나 너는 일단 진정하고, 일단 거기서 대기하고 있다가 네 사람이 그 근처로 올 때 즈음 안내역을 부탁해.”
“으... 으응...”
트리아이나는 간신히 울음을 참으며 답했다.
“나머지 인원들은 이 상황을 다른 인원들에게 전달하되, 최대한 혼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각자 유의해서 전달을 부탁할게.”
“혼란을 피하기 위한다면 함구하는 것이 맞지 않겠나?”
아스널의 의문에도 일리는 있었다. 결과가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지구 자체가 멸망할 만한 상황이라면 그저 입을 다물고 있는 쪽이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인원들도 알 권리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가 일을 해결한다면 그게 가장 좋겠지만, 최악의 경우가 된다면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해야 할 테니까. 그건 용납할 수 없어.”
“음, 그것도 일리가 있군. 명령을 따르지.”
회의는 끝나고 모두가 흩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망. 네 예측은 어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번 사태는 저도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는 사태라 예측이 힘들어요.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폐하.”
“아니야, 이해해.”
머리 속이 복잡한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니까.
앞으로 24시간.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23:00
소문은 조용히, 빠르게 퍼졌다.
다행히 지휘관들이 잘 전달해 준 덕분인지 이런저런 얘기들은 나오고 있어도 큰 소동으로 번지고 있지는 않고 있다. 뭐, 이대로라면 다행이겠지만. 일단 잠시 한 숨 돌릴 겸 혹시 뭔가 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게 있나 확인하기 위해 함장실에 들어와 입수했던 자료들을 뒤져보기 위해 콘솔을 켰다.
“사령관, 있어?”
함장실을 찾아온 사람은 다름아닌 이프리트였다. 음? 이프리트? 내가 따로 부르지 않았는데도 이프리트가 사령관실을 찾아올 이유가 없지 않나? 하고 생각한 순간,
“이뱀! 정신 차리시지 말입니다!”
뒤따라 들어온 것은 다름아닌 브라우니, 그리고 레프리콘이었다. 아무래도 이거 뭔가 이상한데...
“왜 그러시죠, 브라우니? 저는 멀쩡합니다만?”
아니, 전혀 멀쩡한 것 같지 않다.
“승리! 병장 이프리트, 임관 신청하러 왔습니다.”
전혀 멀쩡한 것 같지 않다! 임관신청서를 내미는 이프리트의 눈빛이 확실히 죽어 있다.
“죄송합니다, 각하. 이프리트 병장의 추태를 막지 못한 저희의 잘못입니다.”
레프리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니 뭐, 사과할 정도까지는 아니긴 하지만.
“이뱀! 이러시지 않으셨지 말입니다! 제가 아는 이뱀으로 돌아와주십쇼!”
“아, 브라우니. 혹시 브라우니도 저처럼 임관신청을 희망하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원사까지 복무하겠죠? 자네가 브임원사인가, 한 번 해 보고 싶거든요.”
“으아아! 레후 상병님! 어떻게든 해주시지 말입니다!”
“브라우니, 일단 병장님 데리고 나가 계세요.”
브라우니는 이프리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이프리트는 제대로 정신줄을 놓은 것인지 브라우니의 손에 끌려가다시피 하면서 나가면서도 계속 평소의 그녀와는 한참 동떨어진 정신줄 놓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함께 해요! 이 세상의 끝까지!”
그 외침과 함께 함장실 문이 닫혔다. 남아 있던 레프리콘은 한숨을 쉬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각하. 지금같은 비상사태에 감히 각하 앞에서 추태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아니야, 괜찮아. 이해는 하니까.”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세계 멸망이 갑자기 코 앞에 닥쳐왔다고 하면 아무리 지휘관들이 좋게 전달하면서 안심을 시켰더라도 불안한 감정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을 테니. 이프리트의 저 기행도 분명 거기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각하.”
레프리콘이 입을 열었다. 다른 두 사람보다는 의연한 모습이었지만 그녀 역시 불안함은 마찬가지인지 손 끝이 떨리고 눈물이 살짝 고여 있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설령 진짜 세계가 멸망하더라도, 저희는 모두 각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온정을 잊지 않겠습니다. 각하를 믿고 기다리며, 마지막까지 원망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고마워.”
레프리콘은 경례를 하고 함장실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나도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당장 내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믿는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을 위해서.
...그리고... 이 임관신청서는...
...일단 보관하고 있을까.
-21:30
이 정도로 정보가 없을 수가 있다니...
지금까지 우리가 입수했던 여러 시설들의 정보를 하나부터 열까지 빠짐없이 뒤져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르트 프로토콜에 관련된 자료는 처음 발견했던 그 극비자료가 전부였다.
“그것의 목적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걸지도 몰라요.”
업무를 도와주기 위해 찾아왔던 알파가 입을 열었다.
“민간에게 알려지지 않고 정부나 회사의 고위 인사들만 알고 있었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지구를 폭파시키고 그들만 우주로 도망칠 계획이었다는 얘기가 되겠죠.”
“민간인이 얼마나 죽느냐는 생각하지 않고?”
“그들에겐... 민간인들은 저희같은 바이오로이드같은, 아니 바이오로이드보다도 가치 없는 존재로 보였겠죠. 하다못해 바이오로이드는 노동력이나... 그런 용도로의 가치라도 있었을테니.”
나는 멸망 전 인류 사회에 대해서는 그저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들은 것과 리앤을 만나기 전 그 가상세계에서 간접적으로 본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거쳐왔던 여정에서 봐왔던 멸망 전 인류의 흔적을 생각하면 그들이 이런 극악무도한 계획을 준비해왔으리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멸망 전 인류의 오만의 극의...”
알파의 말을 되뇌면서 문득 머리 속에 든 생각이 있었다. 만약 우리가 안전하게 지구를 탈출할 수단을 얻는다면 철충이나 별의 아이의 위협은 이것 하나로 충분하지 않을까?
“저기, 알파.”
“네, 주인님?”
“...아니야. 아무것도.”
역시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아니다. 만약 진짜 그런 수단이 있다고 해도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직 우리가 구하지 못한 바이오로이드들도 세계 곳곳에 있을텐데 그들 모두를 저버리고 오르카 호의 전력들만 탈출한다는 것은 멸망 전 인류의 생각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주인님께서는 올바른 결정을 내리실 거라 믿어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알파가 말을 건넸다.
“만약 그 결정이 저희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이라도, 그것이 주인님께서 옳다고 생각하시고 저희도 옳다고 여기는 거라면 저희는 주인님의 명령을 따를 거에요. 저 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거에요.”
“...고마워.”
알파는 저렇게 말하지만 최선의 방향은 역시 ‘모두를 구할 수 있는 옳은 길’일 것이다. 이번만은 그런 길이 보이지 않지만... 할 수 있는 방법은 최대한 써 봐야지.
-20:30
세 사람이 현장에 도착하기에는 1시간 넘게 남았다. 당장에 이쪽에서도 어떻게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보니 나는 한숨 돌릴 겸 대원들의 상태를 보기 위해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분명 다들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을 테니까 조금이라도 내가 나서서 안심시켜주는 편이 낫겠지.
“아, 주인. 오셨사옵니까?”
식당에 들어서자 주방에서 소완이 나를 맞이했다. 시간상으로는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 그런지 식당은 물론 주방에 있는 사람도 소완 외엔 없는 것 같았다.
“다른 애들은?”
“시간이 늦은지라 소첩이 먼저 수면을 취하도록 했사옵니다. 주인께선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신지요?”
“음, 그러면 커피 한 잔 부탁할 수 있을까?”
내 요청에 소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러고보니 소완은 오늘 내내 주방에 있었던가?
“소완. 오늘 다른 애들은 어땠어?”
“...지난 4시간 동안 찾아온 자매들에 대해 여쭤보시는 것인지요?”
“응.”
다른 대원들에게 상황이 전파된 것은 식당에 사람이 많이 몰리는 저녁 시간 이후였을테니 오가는 인원은 많지 않았겠지만, 그 와중에도 들렀다 가는 소수 인원들은 나름대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주방 근무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자매들에게 동요의 기척은 보지 못했사옵니다.”
“...너는?”
내 질문에 소완은 잠시 침묵하고 커피를 내 앞에 내려 놓았다.
“...솔직히, 두렵지 않다 하면 거짓이겠지요.”
“...그렇겠지.”
“허나, 소첩은 주인을 믿고 따를 뿐이옵니다. 그저 지금 이 자리에서 소첩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주인의 결정을 기다릴 뿐. 그것이 옳은 자세라고 생각하기에 소첩은 그렇게 할 뿐이옵니다.”
“...고마워.”
내 인사에 소완은 빙긋이 웃음을 보였다.
“식기 전에 어서 드시지요. 아우로라 양이 있었다면 함께 좋은 케이크를 대접할 수 있었을텐데 안타깝사옵니다.”
“마음만으로도 고마워. 그럼 잘 마실게.”
그 날 이후로는 다른 대원들과의 교우관계도 원활해졌고 한층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한 때는 오르카 호의 여러 소동에 발을 걸치고 있었던 소완이었기에 다소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본인이 이렇게 의연한 태도로 나를 믿어준다면 내 입장에서도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커피를 한모금 마시려는 순간...
“이 햇츙!”
갑자기 누군가가 내가 마시려 했던 커피잔을 낚아챘다. 시선을 올려보니 리제나 내가 마시려는 커피잔을 손에 잡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안에 든 커피는 고스란히 리제의 손에 전부 쏟아져 있었다.
“리...리제?”
“리제 양. 이게 무슨 무례한 행위인가요?”
갑작스럽게 등장한 리제의 돌발행위, 게다가 정성들여 만들어 왔을 커피를 전부 엎어버린 것에 소완도 화가 났는지 눈빛이 싸늘해졌다.
“주인님! 이 해충이 커피에 뭔가 타는 걸 제 눈으로 봤어요!”
리제의 말에 소완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제가 아직도 그런 낡은 수법에 매달린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주인께 드릴 커피에 넣은 건 단지 소첩이 아우로라 양의 도움을 받아 직접 만든 바닐라 시럽과 계피가루 뿐이옵니다.”
“닥쳐, 해충! 내가 그런 수법에 넘어갈 줄 알아?”
리제는 금방이라도 자신의 가위를 꺼내들 기세로 으르렁댔다. 자기 손에 쏟아진 커피가 뜨겁다는 생각은 이미 뒷전인가.
“두 사람 다, 적당히 해.”
“아무리 주인의 명이라 해도 이번엔 소첩도 가만히 넘어가긴 어렵사옵니다. 감히 신성한 주방에서 행패를 부린 죄는 가벼이 넘어갈 수 없사옵니다.”
이런. 확실히 식당과 주방은 소완이 총괄하는 영역. 본인의 자부심이 담긴 곳인데다 본인이 직접 만든 음식을 엎어버린 소완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힐 수 있는 게 아닐테지. 금방이라도 두 사람이 서로 무기를 들고 싸우기 직전의 순간,
“둘 다 그쯤 해두지.”
내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그 자리에는 리리스가 서 있었다.
“소완 양, 아무리 주방이 당신이 자부심을 두는 영역이라 해도 주인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경호대장인 제가 용납할 수 없어요.”
“...”
“그리고 스토커, 너도 마찬가지야.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생각도 못할 정도로 멍청한 건 아니겠지?”
그래.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제3자가 개입해서 싸움을 말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지. 그런데, 리리스라면 두 사람과는 악연으로 얽힌 관계 아닌가? 상황이 더 골치 아프게 흘러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히히히. 그런 거였구나.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해충 너 혼자만 주인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생각이었어?”
“뭐?”
“하아.”
리제의 반응에 소완과 리리스 둘 다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 리제야...
“리리스 양. 혹시나 해서 묻는 것이옵니다만, 설마 그대도 이런 상황에서 흔들리는 건 아니시겠지요?”
“당연한 걸 묻지 말라고요. 주인님, 착한 리리스는 그저 주인님을 믿고 따를 뿐이에요.”
안심이 되었다. 오르카 호 최고 전투력 중 하나인만큼 리리스라면 동요하는 모습을 보일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은 있었는데 다행히 리리스는 내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주인께선 이만 돌아가셔서 휴식을 취하시는 게 좋다고 생각하옵니다. 여기는... 리리스 양, 함께 부탁해도 되겠사옵니까?”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주인님, 여기는 저희한테 맡겨주세요.”
“...너무 심하게 하진 마. 그리고 리제 손, 괜찮은지도 좀 봐 주고.”
나는 두 사람에게 리제를 맡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완이 타 준 커피를 맛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저래가지고서야 다시 만들어달라 하기에도 힘들겠지. 날이 밝으면 레아에게 한번 더 얘기를 해둬야겠다고 생각하며, 세 사람이 다투는 소리를 뒤로한 채 나는 식당을 빠져나왔다.
“주인님! 여기 계셨군요.”
식당을 나오자마자 마주친 사람은 다름아닌 이터니티였다. 이런 늦은 시간에 얘가 왠일이지? 그리고 뒤이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야! 너 자꾸 말도 없이 멋대로 돌아다닐래?!”
복도 저편에서 드라큐리나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뭐야. 인간, 너 여기 있었어? 마침 잘 됐네. 걔 좀 말려봐.”
말려 보라니, 이터니티를 말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드라큐리나를 향해 의문의 눈빛을 보냈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얻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지만.
“주인님. 드디어 시간이 되었어요. 주인님과 함께 이 관에 들어갈 시간이...”
아.. 잊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찾아온다면 여러 가지 의미에서 가장 위험하게 돌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터니티는 내 팔을 강하게 잡고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가려 하기 시작했다.
“자, 주인님. 저와 단둘이 함께 멸망을 맞이할 곳으로 떠나요. 아, 드라큐리나 양. 부디 이 관을 옮기는 것을 도와주시겠어요?”
“...미치겠네.”
드라큐리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았다.
“야, 음침이. 자는데 뜬금없이 인간 찾겠다고 깨운 것도 모자라서 이젠 관 옮기는 것까지 도와 달라고? 너랑 나랑 무슨 특별한 사이라도 되는 줄 알고 이러는 거야?”
저번에 가고시마에서 소동이 일어났을 때 드라큐리나는 이터니티랑 아자즈와 함께 다녔다고 들었다. 그 때 일로 우정같은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건가? 그런 드라큐리나의 질책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이터니티는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린, 깐부잖아요.”
드라큐리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비틀댔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두 사람 사이는 그리 가까운 건 아닌 것 같다. 아니, 그보다 이런 만담 하고 있을 시간이면...
“저기, 드라큐리나? 얘 도와줄 생각이 없으면 나 좀 도와줄 수 있을까?”
-19:00
한바탕 소동을 겪고 나는 함장실로 돌아왔다. 그나마 드라큐리나가 눈치껏 잘 도와줬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문 너머 3명까지 그 난장판에 가세할 뻔했다. 이터니티에게는 미안하게 되었지만 프리가와 블랙 웜에게 요청하여 잠시 그녀를 연금하도록 지시했다. 아무리 상황이 암울하더라도 나는 아직 포기할 생각은 없으니까.
“여기는 닥터. 지금 막 시설 중심부에 진입했어, 오빠.”
자리에 앉자마자 통신이 들어왔다. 세 명 모두 무사히 진입한 듯 하다.
“어때? 상황은 살펴볼 수 있겠어?”
“우리도 막 들어온지라 아직 확실히 파악이 안 되고 있거든? 일단 조사를 좀 해 봐야 할 것 같아.”
“정확히 언제부터 있었던 시설인지도 아직 불확실하고, 그만큼 시스템도 얼마나 오래된 건지도 알 수 없어요. 분석하고 파악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거에요.”
예상은 했지만 역시 그렇게 되는 건가.
“예상 시간은?”
“짧으면 1시간. 아무리 오래 걸려도 2시간 안에는 얼추 끝나겠죠.”
“무리한 부탁인 건 알겠지만, 가능한 한 빨리 끝내줘. 너희한테 모든 게 달렸어.”
나는 통신을 종료하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앞으로 길어도 2시간... 그 시간 안에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는 지금 내 머리로는 뭔가 이후를 대처해야 할 플랜B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
일단 다시 한 번 지휘관들을 소집해서 의견을 물어봐야겠다. 우리가 머리를 맞댄다면 어떻게든 답은 나올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똑똑.
“주인님, 계십니까?”
노크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어보니 바닐라가 서 있었다.
“아, 바닐라. 무슨 일이야?”
“큰언니의 지시로 찾아왔습니다. 슬슬 시설 쪽에 파견된 인원이 도착할 시간이라고 들었는데, 벌써부터 졸다가 연락을 못 받으신 건 아니겠죠?”
“그건 이미 받았어. 분석에 1~2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하는데...”
“그렇군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바닐라는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잠깐만.
“저기, 바닐라? 나 아직 안 잘건데?”
“설마 이 시간에 지휘관 분들을 소집하실 생각이셨나요?”
“어? 어어,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나는 살짝 당황했다. 그런 내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바닐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망 양의 예지는 틀린 적이 없군요. 지휘관 분들은 알파 양이나 아르망 양, 라비아타 큰언니와 함께 자율적으로 논의를 할테니 주인님은 얌전히 주무시라고 합니다.”
“그럼 닥터 쪽에서 오는 연락은...”
“안심하세요. 그건 저쪽에서 미리 얘기를 해서 결과가 나오면 그쪽으로 통보가 갈 예정이니까요. 한 3시간 정도 후에 깨우러 오는 사람이 알려드릴 예정입니다.”
바닐라의 태도도 그렇고 아무래도 대원들은 이대로 밤을 새가면서까지 내가 골몰하게 둘 생각은 없어 보인다. 어쩔 수 없지만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얌전히 잠드는 것 뿐인가보다. 나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 함장실 문을 다시 닫았다. 침대에 눕고 불을 끄자 문 너머에서 바닐라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혹시 모르니 미리 인사드리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부디, 내가 일어났을 때는 좋은 소식이 들려 오기를.
-16:00
“주인님.”
얼마나 잤을까. 나를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직 흐린 시야에 보이는 건 페로의 모습이었다.
“아, 페로구나. 연락은 왔어?”
나는 눈을 비비며 페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돌아오는 것은 대답 대신 그녀의 어두운 표정이었다.
......설마......
-15:50
“미안해, 오빠.”
시스템과 시설의 분석 결과, 수르트 프로토콜은 한 번 발동하면 정지가 불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강제적인 셧다운 조치도 불가능하고 핵폭탄을 기폭하는 장치를 직접 해체하기에는 그 위치보다 한참 아래에 위치한데다 하나의 기폭 장치라도 작동이 가능하다면 연쇄 폭발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도록 만들어져 있는 탓에 해체 작업이 가능하더라도 제 시간 안에 가능할지부터가 의문이라고 한다. 지휘관들도 몇 시간동안 계속 회의를 했지만 해결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한다.
“저희도 처음에 결과를 얻고 몇 번을 재검토해봤지만, 마찬가지였어요. 이건...”
“...막을 수 없는 건가...”
설마 했던 최악의 경우의 수가 걸려 버렸다. 결국 이대로 우리는 멸망을 맞이해야 하는 것일까?
-15:30
똑똑.
한참을 좌절한 상태에서 멍하니 있던 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열려 있어.”
나는 다소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다름아닌 메이... 아니, 메이 외에도 2명이 더 있었다. 나이트 앤젤과 스트라토 엔젤까지 함께 들어왔다. 이 세 사람이 무슨 일로...?
“잡아.”
메이의 명령과 함께 그녀 뒤에 있던 둘이 감자기 내 양팔을 잡더니 침대에 눕혔다. 아니 잠깐만 이게 무슨... 눕혀진 상태에서 나는 메이가 함장실의 문을 닫고 잠그는 것을 보았다.
“야, 잠깐만. 너희들, 갑자기 이게 무슨...”
내가 가진 이 의문을, 메이는 냅다 내 바지와 팬티를 한번에 벗겨내는 것으로 답해 주었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당황해서 몸부림쳤다. 평소의 메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그녀는 곧이어 자신의 옷도 벗기 시작했다.
“저기, 너네 둘! 너희 지휘관 좀 말려볼 수 없어?”
“죄송하지만 사령관님. 지금 메이 대장님의 이 행위는 대장님 스스로의 의지이기도 하면서 저희의 의지이기도 합니다.”
나이트 앤젤이 답했다.
“네 뭐, 저희가 바람을 조금 넣은 것도 있습니다. 지구 멸망이 코 앞으로 다가온 이 순간까지도 관계 한 번 못 할 것이냐고 말이죠. 그래서 대장님도 지금 살짝 폭주하셔서...”
“물론 저희도 대장님의 뜻을 존중하는 만큼 말릴 생각은 없어요. 오히려...”
갑자기 양 옆의 두 사람도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맨살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나도 점점 사고회로가 마비되기 시작했다.
“저희도 대장님과 함께 지금부터 사령관님의 유전자를 갈취할 예정이거든요.”
어느새 나를 습격한 세 유전자 도둑은 알몸이 되어 상기된 얼굴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상기된 얼굴의 메이는 짧고 굵은 한 마디를 내뱉고 본 게임에 들어갔다.
“네 유전자 내놔!”
...에라이, 될 대로 되라지.
-13:30
“......아아......”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나도 모르게 분위기에 너무 휩쓸려 버렸다.
이 정도로 세 사람과 함께 광란의 시간을 보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족히 2시간은 가까이 땀을 흘린 것 같다. 세 명은 이미 나를 배게 삼아 곤히 잠들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음냐... 멍청이 사령관... 죠아해...”
설마하니 그 메이가 전투가 아닌 상황에서 이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돌파해올 줄이야. 의외하면 의외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색다른 모습을 본 것 같아 좋았다.
...잠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거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왼편에서 자던 나이트 앤젤이 잠에서 깨어나며 말했다. 나는 거기에는 답하지 않고 옷을 다시 주워 입었다.
“어디 나가시려고요? 두 분을 깨울까요?”
“아니. 너희는 여기서 계속 자고 있어도 돼. 이건 내가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돼.”
함장실 문을 열고 사령실을 향한다. 아직 알파는 잠들지 않고 깨어 있겠지. 아 참.
“나이트 앤젤. 만약 메이가 중간에 일어난다면 고맙다고 전해줄 수 있어?”
“...?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령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나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 사령실로 향했다. 잠시 후 도착한 사령실에는 알파를 비롯하여 칸, 용, 그리고 라비아타가 남아 있었다. 마침 용과 라비아타가 이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잘 되었다.
“어머, 주인님. 자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
“알파. 그리고 모두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듣고 부디 협력해줬으면 해.”
그래, 지금에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든 해 봐야한다. 설령...
“레모네이드들과 통신을 할 수 있도록 해줘.”
적과 손을 잡게 되더라도.
-12:40
“어머나. 배신자께서 무슨 염치로 우리 앞에 나타나셨을까?”
아주 잠시, 암호화된 통신 서버를 열어 전세계의 레모네이드 개체들에게 신호를 발신했다. 이거라면 우리의 위치를 알리지 않고도 통신은 가능하니까. 그리고 예상대로 오메가의 독기 서린 비아냥이 우리를 먼저 맞이했다.
“거두절미하고 당신들에게 묻죠. 수르트 프로토콜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알파가 펙스의 회장들을 통해 수르트 프로토콜에 대해 들었다면 다른 레모네이드 개체들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회선 너머로도 알 수 있는 동요의 기척이 느껴졌다.
“수르트 프로토콜... 이라고?”
“회장님께서 한번씩 언급하셨던 그...?”
“...그게 어쨌다는 거죠?”
“가동되었어요. 벌써 12시간은 지났죠.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겠죠?”
순간 침묵이 돌았다. 이러한 상황은 저쪽도 예상 못했던 것일까.
“우리 쪽에서 관련 시설을 조사하기 위해 인원을 파견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이미 프로토콜이 가동되었고, 분석과 조사를 거쳤는데도 시스템 자체를 해킹해서 정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어요.”
“...그래서? 지금 우리랑 함께 자폭하겠다고 통첩이라도 하려고 회선을 연 거야?”
“아니.”
내가 끼어들자 또 다시 저쪽에서 동요의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이미 나와 조우한 개체도 있을 테고, 내 모습을 실제로 본 적 없는 개체도 있겠지. 정식으로 소개하겠다. 나는 오르카 호의 사령관. 인간이다.”
“...설마 지금 이 회선을 열라 결정한 건 알파가 아니라 당신인 건가요?”
제타가 질문했다.
“그래. 본래대로라면 적으로 만나 총칼을 겨눠야 할 상황이지만, 사태가 사태인만큼 다른 대원들의 반대에도 내가 통신 회선 개방을 강행했어.”
“하, 설마 적에게 동정심이라도 보이는 건가요?”
“그럴 리가. 내가 진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면 이대로 프로토콜이 발동되었다는 것을 그 쪽에 알려주지 않았을 거야. 그렇다면 너희들은 영문도 모른 채 우리와 함께 멸망을 맞이했겠지. 너희들이 그토록 희망하는 회장의 부활도 이루지 못한 채.”
이 정도의 도발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지나치게 무른 판단이라 여길테니까.
“내가 굳이 그러지 않고 협력을 요구하는 이유는 이런 식으로 결판을 짓고 싶진 않기 때문이야. 손에 피를 묻혀야 한다면 그래야겠지만, 나는 가능한 한 정당한 방법으로 싸우고 자비를 베풀 수 있다면 베풀고 싶거든. 너희도 죽을 땐 죽더라도 어떻게, 왜 죽는지는 알고 죽고 싶지 않아?”
침묵이 흘렀다. 통신이 연결되기 전 조언받은 대로 살짝 비정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걸로는 아무래도 부족한 건가? 그런 생각이 들려는 순간,
“훗,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호탕한 웃음을 터트린 것은 감마였다.
“고리타분한 인간인 줄 알았는데, 예상 외로 호탕한 면모가 있었을 줄이야. 마음에 들었어. 이대로 앉아서 멸망을 기다리는 것도 내 성향이 아니니,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도와주겠다.”
“뭐?!”
“제정신이에요, 감마?”
감마의 협력 선언은 다른 레모네이드 개체들에게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아니, 감마의 의견도 일리는 있어요.”
“제타?!”
“솔직히 우리만으로 프로토콜을 막을 방법은 없고, 이대로 세계가 멸망을 하면 우리의 숙원 달성은 불가능하겠죠. 차라리 적이라도 지금은 협력해서 큰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았을 땐 훨씬 합리적이에요.”
“그 말은 우리와 협력해주겠다는 걸로 받아들이면 될까?”
“한 가지 착각만 하지 말아주시죠. 당신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아닌,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는 거라고요.”
“어, 그래.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제타까지 우리에게 협력을 선언했다.
“어... 저도 제타의 의견에 동의해요. 이럴 땐 우선 힘을 합쳐야 앞으로 뭔가를 도모할 수 있을 테니까요.”
베타까지 의견은 피력, 이걸로 저쪽의 6명 중 반이 우리와 협력을 선언했다. 문제는 나머지 반인데, 둘은 둘째치고 나머지 하나는...
“엡실론. 설마 당신까지 저 머저리의 감언이설의 넘어가는 건 아니겠죠?”
레모네이드 엡실론. 알파의 말에 의하면 자신도 직접 본 적 없고 오비탈 와쳐를 관리하고 있다는 것과 잠이 많다는 것 외엔 알고 있는 게 없다고 했던만큼 가장 협력 여지가 미지수인 대상이다. 확실히 협력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델타와 오메가와는 달리 엡실론은 전혀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성향 때문에 예측하기 힘든 건 아마 저쪽도 마찬가지 얘기겠지만. 그리고 오메가의 질문에 한참동안 답이 없던 엡실론은...
“난 협력. 우주에만 있다보니... 지구가 터지는 건 좀...”
“엡실론... 너까지...!”
뭐, 이걸로 협력자가 한 명 추가된 걸로 보면 될까? 나머지 둘은 본인들 입장에서 어이가 없는 이 상황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서, 둘은?”
“설마 아직까지 우리가 당신과 협력할 거라고 생각해?”
델타가 가시돋힌 말로 대꾸했다. 뭐, 처음부터 예상은 하고 있었으니.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면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그만두고 싶군요.”
“사태가 끝날 때까지 이 회선은 열어둘테니,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말하라고.”
내 말을 마지막으로 델타와 오메가는 회신을 종료했다.
“좋아. 혹시 가까운 위치라면 나와는 밴쿠버 섬에서 만나지. 이렇게 통신으로 대화하는 것보다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쪽이 내 성미에 맞거든.”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 이쪽도 생각해 둔 작전을 한 차례 정리하고 갈게.”
처음부터 방법이 아예 떠오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것을 실현시킬 정도의 전력이 없었을 뿐. 하지만 이들의 협력이라면, 불가능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협력을 얻어낸다는 발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메이와, 그리고...
“미안해. 내 독단적인 결정에 따라줘서. 그리고, 고마워.”
대원들이 나를 믿고 따라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신경쓰지 말도록. 사령관이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라면 우리도 따라줘야지. 그래야 지도자의 위엄이 서지 않겠나?”
칸이 나를 향해 웃어주었다. 덕분에 다시 한 번 자신감이 생긴다. 좋아.
-11:50
밴쿠버 섬. 감마는 이미 자기 휘하의 함대를 이끌고 임시 지휘소를 만들어 대기하고 있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료가 된다. 이 또한 유쾌한 상황 아닌가? 최후의 인간. 그리고 용, 함께 전장에 서는 건 오랜만이군!”
“그대가 가장 먼저 협력 의사를 밝혀준 것은 감사하오.”
용은 스스럼 없이 감마와 악수를 했다. 멸망 전 두 사람이 함께 같은 전선에서 싸웠다는데 그 때 이런 모습으로 조우했을까. 감마가 준비한 지휘소에는 이미 다른 협력을 선언한 레모네이드 개체가 회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럼, 계획이 뭔지 먼저 들려주실 수 있나요?”
베타의 질문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 계획을 설명했다.
앞서 닥터 쪽의 조사를 통해 수르트 프로토콜을 작동하는 핵폭탄 기폭장치는 전세계 24개 포인트 깊은 곳에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한 번 프로토콜이 작동하면 되돌릴 수 없게 되어 있고 거기에 더해 기폭장치가 하나라도 멀쩡하다면 그 하나로 나머지가 연쇄 폭발이 이루어지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이유였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 기폭장치 전부를 제 시간 안에 파괴할 수만 있다면 프로토콜을 중지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 우리 쪽 대원들만으로는 불가능했겠지만, 다른 세력이 힘을 빌려준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비효율적이지만, 그것밖에 방법이 없다면 어쩔 수 없군요.”
제타의 말대로, 이 방법은 비효율적이다. 하지만 이 비효율적인 방법에 우리는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다.
“각 포인트의 위치는 다음과 같아. 각자 활동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 기폭장치를 파괴해줘. 몇몇 포인트는 프로토콜 작동 시설과 인접해 있으니 그 쪽으로 들어가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거야. 위치를 같이 표시해둘게.”
우리는 한참 동안 스크린에 띄워진 띄워진 기폭장치의 좌표를 보고 있었다. 일단 괌 주변은 이쪽에서 대원들을 보내 처리하면 되겠고...
“북아메리카 쪽은 제가 맡죠. 마침 캐나다 북부에 시설 입구도 있으니 그쪽을 이용하면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겠군요.”
“어.. 그럼 전 아프리카랑 유럽 쪽으로 갈게요. 시간은 조금 걸려도 거기가 가까운 편이니...”
“남아메리카나 오스트레일리아는 내가 맡지. 함대를 빠르게 움직인다면 충분히 가능해.”
“그러면 난... 아시아.”
제타가 북아메리카, 베타가 아프리카 및 유럽, 감마가 남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엡실론이 아시아. 이 정도로 분배한다면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우리는 우리가 최초로 확인한 괌 남부 시설을 중심으로 그 일대, 동남아시아나 오세아니아 군도 부근을 담당할게. 지금부터 작전명, '발두르 프로젝트'를 시작하자.”
이제, 결전의 순간만이 남았다.
-11:30
작전 회의를 마친 나는 오르카 사령실로 돌아와 시설로 파견할 대원들을 선별하기 시작했다. 지하를 파내려가기 위해서는 역시 토미 워커같은 공업용 AGS가 필요하겠지. 여차하면 폭발물의 보조가 필요할테니 하이에나도 동행을 시킬까.
“저, 사령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그곳에는 더치 걸이 있었다. 내가 선물해줬던 드레스가 아닌, 이전까지 입던 작업복과 안전모를 걸친 채로.
"더치 걸? 그 모습은..."
"나, 갈게. 기폭장치를 파괴하려면 지하로 들어가야 한다며? 그 일에는 내가 적격이잖아."
"하지만... 더치 걸. 넌..."
그녀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애초에 채광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인만큼 지하를 파고 내려가야 하는 이번 임무에서 더치 걸만큼 적격인 바이오로이드는 없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과거의 일 때문에 그녀가 작업, 특히 지하로 내려가는 작업을 싫어한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일부러 더치 걸의 파견은 고려하지도 않았다.
"어. 솔직히 다시 지하로 내려가는 건 싫어. 무서워. 하지만... 그보다 사령관과 함께 살아갈 수 없을 거라는 게 더 싫어. 그래서 가고 싶어."
이미 그녀는 결심을 굳힌 것 같다. 아마 내가 말려도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지 않겠지.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단지 이 작은 체구를 안아주는 것 뿐이었다.
"약속해줘.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만약 돌아오지 못한다면, 반드시 우리가 구하러 갈게."
"...응. 걱정 마, 사령관. 꼭 돌아올게."
-11:10
작전이 시작되었다.
선별된 대원들이 실린 출격포드가 발사되었고, 이제 내가 할 일은 그저 대원들을 믿고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폐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사령실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내게 아르망이 다가왔다.
"뭔데?"
"파견된 대원들 외에도 다른 분들도 각자 포인트 지점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뭐?"
아르망은 대답 대신 나에게 콘솔을 보여주었다. 스틸라인, 캐노니어, 둠 브링어, 스카이나이츠,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앵거 오브 호드. 그 외의 수많은 대원들이 각자 나에게 선보고 없이 단독행동으로 거점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건..."
"다들 폐하를 위해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한 겁니다. 지휘관 분들께서 모든 책임은 자신들이 지겠다고 전해달라는군요."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설마 이 정도로 많은 대원들이 나를 위해 자율행동을 감행할 줄은...
부디 모두 무사히 돌아와주기를.
-10:00
남아메리카쪽 포인트의 기폭 장치 파괴 소식이 전해졌다.
-8:30
파괴된 기폭장치 3개.
괌 남쪽 시설에 파견된 대원들은 그 근처 기폭장치를 파괴하고 지하를 통해 움직이겠다고 연락했다.
-7:00
파괴된 기폭장치 6개.
하나는 단독으로 움직인 캐노니어와 아머드 메이든 팀이 화력을 있는대로 쏟아부터 지면을 파고들어 파괴했다고 한다.
좋아, 순조롭다!
-5:00
10개.
앞으로 남은 것은 14개...
제 시간 안에 끝낼 수 있을까...?
-3:00
남은 기폭장치 9개.
모두가 분투해 주는 가운데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2:00
남은 기폭장치 5개.
제발... 시간 안에 끝날 수 있기를...!
-1:00
3개.
설마... 늦는 것은 아니겠지...?
-00:30
2개...
-00:10
앞으로... 1개...!
-00:05
왜? 파괴 소식이 없는 거지?
-00:04
안돼... 이대로 가면...
-00:03
3분...
이대로 우리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걸까?
-00:02
2분.
아... 이젠 진짜 끝인가...
-00:01
1분.
아무래도 이젠 정말 끝인가보다.
다들... 고마웠고 미안했다.
못난 사령관을 보좌하겠다고 고생한 건 저 세상에서도 잊지 못할 거야.
-00:00:30
-00:00:20
-00:00:10
그래도... 나쁘지 않은 인생이었다.
-00:00:05
-00:00:04
-00:00:03
-00:00:02
-00:00:01
00:00:00
00:00:01
00:00:02
00:00:03
00:01
* * *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살아남았다.
정말 간발의 차로, 마지막 기폭장치를 감마가 직접 파괴했다고 연락을 주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놀랐던 것은, 유럽과 아메리카 쪽의 기폭 장치를 파괴하면서 델타와 오메가 세력의 바이오로이드와 AGS들이 일부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말은 하지 않았어도 결국 그들도 세계가 멸망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나보다.
트리아이나와 더치 걸을 포함한 파견된 대원들은 오르카 호로 무사히 귀환했다.
뭐, 트리아이나같은 경우는 귀환이라기보다는 거의 그쪽으로 파견되었던 대원들 손에 압송당해 왔다고 해야겠지만.
대부분 지휘관들이 중징계를 요청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둠 브링어만이 그녀를 강하게 변호하였고 결국 영구근신을 받을 뻔한 트리아이나는 1달 근신에 이후 탐험에 있어서 반드시 동행자를 붙이는 조건으로 완화되었다.
처벌이 결정되고 나서 나이트 앤젤에게 매달려 우는 트리아이나의 모습은 평소 쾌활한 그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처절했지.
다른 자율행동으로 움직였던 대원들도 모두 안전하게 귀환했다.
지휘관들은 돌아오자마자 징계를 요구했지만 대원들의 뜻이 뜻인만큼 이번 일은 눈 감아주기로 했다.
뭐, 아스널이 포상으로 동침을 강력하게 요구하긴 했지만 그건 일단 나중에 생각할 일이겠지.
예상대로 이프리트는 사태가 끝나자마자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나에게 와서 애원했다.
상황을 들었던 임펫은 신성한 임관을 철회할 수는 없다고 강경주장했으나, 애초에 제정신에 벌인 짓이 아니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보니 후에 내 요청을 들어주는 것을 조건으로 임관을 취소해주었다.
뭐, 그 대신 임펫이 그녀에게 내리는 완전군장 행군 징계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지만 임관을 막은 것만으로도 이프리트 입장에서는 다행인 건지 기쁘게 군장을 짊어지고 나갔다.
레모네이드 세력과는 이번 일을 끝으로 임시 협력 체제를 끝내고 다시 적으로 돌아섰다.
사태가 사태였다보니 일정 기간동안은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우리는 밴쿠버를 떠나 원래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떠나기 전 감마와 용이 따로 무언가 얘기를 나누는 듯 했지만 자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고, 지금 물어볼 내용이 아닌 것 같아 언젠가 기회가 되면 묻기로 했다.
"기타는 언제 배운 거야?"
"예전부터 틈틈이."
그리고 지금 나는 휴식 차원에서 들른 어느 섬 해변에서 메이의 기타 연주와 노래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 때 그게 마지막이 아니라 다행이었지."
"그러게. 난 사령관한테 노래도 못 들려주고 끝나나 싶었다니까."
문득 머리 속에 든 의문. 한참 우리를 뒤집어놓은 이 사태가 터지고 난 뒤로부터 계속 머리 속에 맴돌던 생각이 하나 있었다.
"저기, 메이."
"응?"
"만약에... 진짜 만약에, 내가 구할 수 있는 바이오로이드는 모두 구하고 남은 철충과 별의 아이는 지구 자체를 폭파시켜 처리하는 걸로 결정한다면, 넌 어떻게 생각해?"
메이는 잠시 침묵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난 반대는 안 해."
"그래?"
"그야,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건 사령관도 나름 숙고한 거고, 구할 수 있는 인원들을 최대한 구했다면 노력했다는 거니까. 우주로 나가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되겠지."
"그렇구나."
"뭐, 아무리 멍청이 사령관이라도 그런 결정을 가볍게 내리진 않을 거잖아?"
"그건 그렇지."
나는 석양을 바라보며 음료수를 한 잔 마셨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역시 나는 지구를 통째로 폭파시킨다거나 할 생각은 못 하겠다. 지구가 없으면 지금같은 풍경도 더는 볼 수 없을 테니까.
"앞으로 두 번 다시, 지금같은 멸망의 위기가 없길 바랄 뿐이지."
내 혼잣말을 들은 건지, 메이는 내게 고개를 돌리고 씨익 웃었다.
"걱정 마. 내가 늘 말했잖아. 멸망은 언제나 사령관 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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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스 오르카 스킨과 외전 때문에 방향성이 한번 흔들리긴 했습니다. 그걸 결말부에 어떻게든 녹여들게 하긴 했지만... | 21.12.28 01: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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