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만화를 그리신 '불닭마요'님이 써도 좋다고 허락해 주셔서 올립니다.
원설정: "불닭마요" 님의 다음 만화들: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08355
전편: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1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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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비가 내리는 작은 숲길은 미끄러웠고, 아쿠아 생각보다 더 날아다니기 힘들고, 그리고 미끄러웠다.
“아아아 진짜!”
그녀는 짜증내며 테스투도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있는 힘껏 비행장치의 부스터를 올렸다. 자기가 왜 이런 죽을 고생을 해야 하는지 의문을 토해가며.
‘다, 저 울보 꼬마 주인님 떄문이야’
모든 건 주니어 책임이다. 뭐 틀린 건 아니잖은가. 새 주인님이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산책나올 일도 없었을 테니. 그리고,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아쿠아는 재확인했다.
‘내가 그래서 맨날 말했지. 아이는 귀찮다고’
아이들은 귀찮다. 따로 재워 줘야 하고, 먹여 줘야 하고, 응석도 받아줘야 하고, 그녀 자신은 아무런 문제 없이 멀쩡하게 먹는 것도 못 먹는다고 하고, ‘왜 못먹어?”’하고 쳐다보면 또 무서워하고, 맨날 울보에,
그리고….너무 약하고, 너무 쉽게 죽는다.
아쿠아는 잘 알고 있었다. 멸망 후, 그러니까 마음씨 좋던 멸망 전 주인이 죽은 후, 같이 키워진 친구들과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돌 때, 뼈저리게 두 눈으로 보아 왔으니까. 멸망 후의 세상 속에서, 가장 약하고 어린 친구부터 차례차례로 죽어갔으니까.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모습으로. 다시는.
아쿠아는 그 모습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어린 것들, 조금만 잘못돼도 픽 쓰러져버리는 그 여린 것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그런데 이 덩치 큰 언니가 나한테 어린아이를 맡겨서는….!’
짜증이 솟구쳐 올랐다. 그나마 자신은 아쿠아들 중에서는 크고 강인하다. 아 당연하다. 제조공정상 실수로 과성장해 버렸으니까. 이터니티? 말할 것도 없다. 감히 말하건대 오르카에서 가장 강한 바이오로이드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랬기에 친구를 모두 잃고 홀로 떠돌다 이터니티를 만났을 때, 아쿠아는 안심할 수 있었다. 그녀와 이터니티는 쉽게 죽지 않을 테니까. 죽을 때 죽더라도 자기가 먼저 죽지 소중한 친구가 먼저 죽는 꼴은 보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러면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을 테니까.
‘그래서, 내가 분명히 싫다고 했는데--!’
어린 것들과 정들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인간이건 바이오로이드건, 사령관과 라비아타의 아들이건 누구건. 그러다 그들이 영영 떠나버리면….슬프니까.
“으앗!?”
…한창 바쁘게 적의 시선을 교란하면서 하기에는 그다지 좋지 않은 생각이었다. 자기 앞에서 앵앵대는 유기체가 불쾌했는지 테스투도가 발길질을 해댔다. 황급히 피하려고 했지만, 불행히도 그녀의 지나치게 자란 몸은, 아쿠아용 소형 비행장치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굼떴다.
‘아, 항상 이런 식이야’
어린아이 체형에 맞게 만들어진 아쿠아들의 비행장치는 과성장한 아쿠아 556에게는 걸맞지 않았다. 날 수야 있지만, 다른 아쿠아들처럼 꿀벌마냥 날렵하게 윙윙 날아다니는 건 꿈도 못 꾸고, 순간가속력도 민첩함도 뒤떨어진다. 그렇다고 다른 비행장치는 그녀가 능숙하게 다루기가 어려우니, 아, 왜 멸망 전의 인류는 바이오로이드와 그들의 장비를 일대일 대응시키도록 만들어 놓았을까. 그 사려 부족함의 결과는, 간신히 테스투도의 발길질을 피했지만 미끄러운 숲길 위에서 균형을 잃어 철충 앞에 꼴사납게 주르륵 널브러지는 것이었다.
“아쿠아!”
저만치서 이터니티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기야 - 다행히 좀 길게 미끄러져서 거리가 좀 되긴 해도 - 철충 앞에 진흙투성이로 드르렁 드러눕는 게 별로 안전한 행동은 아니니까.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만큼 아쿠아는 2324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2324번은 그녀를 은인으로 생각하니까, 노심초사하고 있겠지.
‘아까 기동형이라고 그렇게 허세부렸는데, 부끄럽게 되었네’
슬슬 이터니티의 장전이 끝났을 타이밍이다. 그러나 이렇게 놈의 발 앞에 쓰러져 있어서는, 이터니티의 사선(射線)에 자신이 겹치고 말 것이다. 그러니까 이터니티도 진퇴양난인 셈이다. 아쿠아 때문에, 장전이 끝나고 방열된 관짝에서 발포할 순 없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자니, 저 터벅터벅 다가오는 테스투도가 아쿠아를 깔아뭉갤 터다. 아씨, 일어나야 하는데.
‘조금만…조금만 비켜주면 될 텐데’
조금만 옆으로 비켜줘도 이터니티가 테스투도를 걸레짝으로 만들어버릴 사격각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넘어지다가 다리를 삐었나 보다. 일어나기가 힘들다.
‘아, 하, 역시 우린 아이 돌보기는 낙제점이라니깐…’
후회되었다. 라비아타의 부탁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아이를 돌보는 데는 능력도 자질도 없는 그녀들이 주니어를 맡는 게 아니었는데. 이러다간, 어린 주니어에게 못 볼 꼴 보여주게 될지도 모른다. 어린아이에게 누가 피투성이로 짓밟혀 죽는 꼴 보여주는 게 애들 정신건상 상 좋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그래, 지금 자신의 팔을 잡아끄는 주니어 같은 어린아이 말이다.
“엥?”
자신의 몸이 훅 끌려가자 아쿠아는 두 가지 의미로 경악했다. 첫째는 무슨 다섯 살배기 어린애 힘이 이따구로 세냐는 것이었고, 둘째는…
“새 주인님? 돌았어?”
바로 이 자리에 주니어가 있다는 사실이다.
메이드로서 그다지 예의바른 말투는 아니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린아이가 철충 앞에 나서는 건 멸망 전 19금 하드 BDSM AV를 아이 앞에서 틀어주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위험하니까.
일단 첫 번째 의문에 대한 답변은 대충 짐작이 갔다. 하기야 그 라비아타의 아들이다. 아쿠아가 쓰레기 치우는 거 돕겠다고 그녀 방에 있던 책상을 번쩍 집어들었을 때부터 알아봤지, 그래. 그러니, 낑낑대고는 있지만, 아쿠아의 흙투성이 몸을 조금 끌어당기는 것 정도는 가능하리라. 문제는 두 번째였다. 왜 이 애가 여기까지 따라온 건데?
“당장 물러나, 위험하다고!”
“시..싫어”
“저리 안 가?”
“싫어!”
평상시의 유약한 목소리였지만 대답은 전혀 유약하지 않았다. 평소답지 않은 고집에 어이가 없어졌다. 테스투도의 그림자가 둘 위에 드리우는 것도 잊을 만큼. 그러나, 놀랍게도, 그 겁 많은 울보 소년은, 무서워 떨면서도,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눈물이 잔뜩 고였으면서도, 이번만큼은 작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나…나 누가 죽는 거 싫어”
아쿠아의 눈이 커졌다. 그것만큼은, 그녀의 생각도 일치했으니까. 저만치서 둥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터니티의 생각도 같을 것이다.
“죽지 마. 응? 아쿠아씨도, 이터니티도, 제발”
어린아이들은 죽음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나이든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죽음을 어딘가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 것으로 이해하곤 한다. 그러나 주니어는 달랐다. 죽음을 알고 있다. 죽음이란 개념을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그것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래서 여기까지 뛰어온 거야? 그렇게 무서웠어도? 그렇게 겁먹었어도?’
갑자기 아쿠아는 웃고 싶어졌다. 온 몸이 진흙투성이였지만. 코앞에 철충이 있지만, 어린애를 앞에 두고서.
‘그러니까 우리 셋은 생각이 같은 거로구나’
살아가는 것. 소중한 이들이 죽지 않길 바라는 것. 가까운 이들이 다치지 않길 바라는 것. 감정 가진 모두가 바라는 것이지만, 또한 삶에 지치다 보면 종종 잊기도 하는 것.
지금 작디작은 꼬맹이가 낑낑대며 다리를 삔 아쿠아를 잡아끌듯이, 그런 주니어를 지키려고 아쿠아가 고군분투하듯이,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는 것. 서로 살아가게 해주기 위해.
주니어는 약하다. 아 뭐, 두 손으로 책상을 집어드는 애한테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힘이 센 것이랑 심지가 굳세고 강한 건 별개니까.
작은 일에조차 심하게 동요하는 감정을 가져서는, 그렇게 예민해서는, 금새 울어버리는 아이. 심약해서는, 쉽게 마음이 상처받는 아이.
그러나 그런 아이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면. 또한 자신의 예민함에, 자신의 나약함에 괴로워 자신에게 기대고 있다면.
어른으로 자라버린 어른 아쿠아는 어른답게 굴어야지, 암.
“아, 진짜 울보 꼬맹이 주제에, 제법이야”
“으…응?”
“근데 말이지, 새 주인님이 더 이상 날 걱정할 필욘 없어”
“?”
“고생할 필요도 없고.”
“으..응?”
철충이 다가오는데 왜 이렇게 느긋할 수 있는지 말이다. 아쿠아는 여유만만하게 손으로 뒷편을 가리켰다. 조금 전 주니어가 떠나 온, 이터니티가 있던 자리를.
“주인님 덕에 우리 방금 막 핑크의 사격각에서 벗어났거든”
“어?”
“그러니까 이제 주인님이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어”
“어어?”
“귀 막는 거. 도와줄게.”
아쿠아는 실실 웃으며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주니어를 품 속에 감쌌다. 그리고 그의 눈과 귀를 가렸다. 아직 너무 어린 나이부터 흉악한 불꽃놀이를 볼 필요는 없으니까.
그와 거의 동시에, 지옥 같은 폭음이 터져나왔다.
제대로 분기탱천한 이터니티의 포화가 아쿠아의 등 뒤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
“아 진짜 이 언니는 잠깐이면 된다면서 왜 몇 주째 안 돌아오는데!”
아쿠아는 입이 댓발이나 나왔다. 주니어에게도 이터니티에게도 화낼 수는 없으니, 그녀에게 그 모든 짐을 맡긴(그리고 그대로 안 돌아오는) 어떤 덩치 큰 백발 아줌마 바이오로이드에게. 아니 뭐, 면전에서 하면 트롤스버드가 날아올 것 같긴 한데, 아무튼 서약도 하고 아이도 낳았으니 이제 아줌마 맞지 않나? 그러나 제 엄마한테 불평하는 걸 모를 리 없는 주니어가 움찔하며 고개를 움츠리자 아쿠아는 핫, 하고 험험, 헛기침했다. 탈룰라가 필요하다. 아주 획기적인 탈룰라가.
“그래도 일단 잘 해결되었으니 다행 아닐까요”
옆에서 이터니티가 사람 좋게 웃는다. 얘는 진짜, 이것만큼은 참 이터니티답단 말이지.
“핑크…이쯤 되어서 느끼는 건데, 우린 베이비시터로서는 완전 막장 아닐까.”
“그러면 어떡할래요? 다른 바이오로이드에게 맡길까요?”
“…하청의 하청을 하자고?”
그 생각은 못해보았다. 확실히, 다른 바이오로이드에게 짬때리는 짓거리긴 하지만, 굳이 하려 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아무튼 그녀들보다 아이를 잘 돌보는 바이오로이드들은 세상에 쎄고 쎘으니까.
‘하지만’
어쩐지 내키지가 않는다. 아직도 어린아이는 귀찮지만. 아이들을 돌보는 건 자신이 없지만. 그래도. 아쿠아가 머뭇거리며 말이 없자 이터니티는 자신의 치마폭에 달라붙은 주니어를 내려다보았다.
“주니어는 어떤가요?”
“으..응?”
“우리와 다니는 거요. 괜찮은가요?”
아쿠아는 슬쩍, 이터니티를 바라보는 주니어에게 시선을 던져보았다. 괜찮을 리가. 이번 달에 벌써 철충을 둘이나 만났는데. 그 흉악한 놈들 때문에 볼 꼴 못 볼 꼴 다 보여줬는데. 누나들이랑 같이 다니기 무섭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모깃소리만큼 작게, 끊어질 듯 약하지만 가늘게 흘러나온 주니어의 대답은 꽤 의외였다.
“응….더 같이 있고 싶어“
“그래요?”
“엄마랑 아빠는 맨날 어디 나가 있어. 많이 보지도 못하고…하지만 이터니티랑 아쿠아씨는 늘 내 곁에 있어주잖아”
이터니티의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주니어가 고개를 들었다.
“나…이렇게 누구랑 오래 같이 지내 본 적 처음이야. 누나들 떠나지 않았음 좋겠어”
“그런가요?”
“응…나…나 안 울게…으…아니, 아예 안 울진 모르지만…덜 울어볼게, 응?”
아이답지만, 또한 순수한 욕망이다. 아쿠아의 눈이 커졌다. 어째서? 왜? 이런 상처입고, 결함 투성이인 우리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뻐끔대는 그녀를 향해 이터니티가 돌아본다.
“그렇다고 하네요”
“쳇. 핑크 너도 남에게 맡기자는 거, 본심은 아니었잖아”
“그러면 아쿠아 생각은 어떤데요?”
잔뜩 핀잔을 주려던 아쿠아는, 그 응수에 그만 슬쩍 이터니티의 시선을 회피하고 말았다. 그리고, 우물쭈물거리며, 머뭇머뭇거리며, 주춤주춤거리다가, 간신히 자신의 결론을 말했다.
“그…음…조금…조금은 더 오래 맡아줘도 될 것 같아”
“……”
“왜…왜!”
슬쩍 나온 본심에 이터니티는 그만 웃고 싶어졌다. 이거야 원, 그리폰을 보는 건지 아쿠아를 보는 건지 모르겠다. 마침 둘 다 같은 금발이네.
“흐음. 평소의 아쿠아답지 않은데요”
“뭐…뭐가!”
“주니어가 맘에 들면 든다고 정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텐데.”
“아니야!”
“우리 큰쿠아, 평소에는 좀 더 솔직했는데”
“야, 이씨!”
추적추적 내리던 이슬비가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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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1107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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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닭마요"님의 허락을 받아 3차창작을 해봅니다. "불닭마요"님의 오리지널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배경은 본편 이후, 사령관이 마침내 성공하여 어느 정도 평화가 정착되고 아이들이 태어난 세계입니다.
2)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08355 원본이 뵈는 이 글에서 원작자님이 아쿠아와 이터니티 이야기를 그릴 생각이 없다 하셔서, 둘이 사령관과 라비아타 사이의 아들인 '주니어'를 가장 처음 만난 때(라비아타의 부탁으로 떠맡게 된 때)를 써보았습니다.
3) 설정상 불일치하거나 라스트오리진 원작 혹은 "불닭마요"님의 생각과 어긋나는 부분은 전부 다 저의 불찰입니다.
4) 다만, 아쿠아의 고유번호인 556과 이터니티의 고유번호인 2324만은 제가 임의로 정한 것입니다. '556'은 원작자님 그림에 들어가는 사인이 556을 닮아서 가져온 거고...2324는 원작자님의 루리웹 회원번호 앞숫자 4개를 따왔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마음에 안 드시는 경우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5) 소설에 나온 테스투도는 철충이 패배한 세상이므로 홀로 떠돌던 개체입니다. 당연히 탄약이나 무장의 보급 같은 거도 제대로 안 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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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전의 감성은 참 알기 어렵읍니다 ㅋㅋㅋㅋ | 21.10.20 19: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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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라비아타가 최애 아니셨습니까? | 21.10.22 00:2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