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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보레는 고쳐졌다. 아우로라가 생각하던 것보다 금방. 정비원 더치걸이 이왕 하는 김에 작정하고 튼튼하게 수리하기로 결심했는지 어디서 무지막지한 철판을 가져와 현가장치에 용접해버리는 바람에 어쩐지 좀 더 투박해진 느낌이었지만, 뭐 괜찮았다. 멸망 후의 세계에서 떠돌아다니기에는 우아하고 섬세한 것보다 무식하지만 튼튼한 게 더 좋을 것이다. 연료도 마을의 액화석탄 탱크에서 꽉꽉 채울 수 있었고, 모든 것이 (적어도 아우로라에게만큼은) 만족스러웠다. 이제 철충놈들 오기 전에 손 탁탁 떨고 떠나면 되는 문제였다. 이제 다 끝났다고, "이젠 빠빠이"라고 풀어 준 애니가 다시 돌아오지만 않았더라도 그녀와 발키리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뭐야? 왜 다시 나타났어? 다시 묶어 줘? 그런 취향이야?”
놀리듯 핀잔하는 아우로라에게, 그러나 애니는 딱딱하게 답했다.
“곧 철충들이 올거야”
“그렇겠지. 우린 그 전에 갈게. 안녕, 바이, 짜이찌엔. 수고해”
“시간이 너무 부족해.”
“응?”
“당신 말이 맞다면, 앞으로 한나절, 늦어도 하루면 놈들이 올 거야. 마을을 발견하겠지.”
“그래서?”
“마을 주민들은 나만 빼곤 전부 비무장이야. 민간용 바이오로이드란 말이야. 얘네는 싸울 수 없어.”
멸망 전에 치안을 집행한 보안관인 애니는 인간의 뇌파를 내뿜는 철층을 어떻게든 상대하는 것이 가능하다. 철충을 파괴 행위를 일삼는 범죄자로 인식하면 되니까. 하지만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은 그렇지 않다. 범죄자와의 총격전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애니와 달리, 이들은 애초에 전투를 치르도록 훈련된 이들조차 아니다. 그들이, 통신기를 완성하고, 그걸 가지고 해안까지 이동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이.
“그래서 뭐”
태평스럽게 그건 니들 사정이라는 태도를 유지하는 아우로라 앞에서 애니가 절박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그건 거의 애원에 가까운, 아니 애원 그 자체인 부탁이었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으르렁대던 이들에게.
“저기, 당신들, 우릴 좀 도와줄 수 없어?”
“하아?”
“나 혼자만으론 역부족이야. 나 혼자 그 많은 철충들을 다 막을 순 없어”
“.......”
“한나절...한나절 정도만 시간을 벌면 돼. 놈들을 마을로 유인해서 시간을 버는 사이에, 주민들을 해안으로 대피시켜서 저 배에 통신을 보낼 거야. 구조가 올 때까지만 놈들을 묶어 둘 수 있으면 돼...응? 제발.”
그러나 아우로라는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냉정하게 답했다.
“미안하지만 안 되겠어. 우린 못 도와줘”
“어째서...”
그거야 당신네 마을 사정이니까, 하고 매몰차게 말하려던 아우로라는, 꼴에 그 잠깐 동안 정들었다고 흥, 하고 어깨를 으쓱하고 좀 더 부연설명을 해주기로 했다. 그녀는 뒤에서 엉거주춤 서 있는 발키리를 가리켰다.
“얘는 못 싸워”
“뭐?”
“얘는 철충 무서워해. 근처에 철충...아니 철충 조각만 떨어져 있어도 사시나무 떨듯이 부들거린다고”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기에게 냉혹하게 총구를 겨누던 존재가 그렇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애니는 이 요리사년이 거짓말을 하나, 싶었다. 그러나 자신을 깎아내리는 동료의 평가에 반박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는 발키리의 모습에 그녀의 얼굴이 무너졌다.
“정말이야...? 무슨 그런...”
“....예”
짧지만 무거운 인정이었다. 진심임을 의심할 바 없을 정도로, 쥐어짜는 듯한 수치스러움이 묻어나는. 바이오로이드가 스스로의 가치를 부정하는 발언을 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수줍음을 타는 바이오로이드라도 자기가 만들어진 목적에는 제대로 봉사할 줄 안다. 바이오로이드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지니까. 스스로 그 용도를 부정하는 순간, 그녀들의 쓸모도 존재의의도 사라진다. 그러나 발키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용 바이오로이드는 싸우고 죽이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철충을, 정확히는 인간의 뇌파를 내뿜는 이들을 상대로 싸우지 못한다. 부끄럽고, 수치스럽지만, 그녀가 겁쟁이요 무능한 건...사실이다.
“봤지? 얜 다른 건 몰라도 철충만큼은 상대 못 해. 안 그랬으면 얜 이미 오래 전에 철충에게 대들다가 죽었을...”
털썩, 애니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예상치 못한 태도라 그녀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총구를 겨누던 상대에게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애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애니의 절박함은 사실이기도 했다. 아무리 애니가 재빠르게 달리는 보안관이더래도, 그녀 혼자서 이십여 기의 철충들을 상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지금 이 마을에서 애니 외에 싸울 수 있는 존재는....
“제발, 부탁이야. 도와 줘”
거의 울 것 같은 기세였다. 너무나 간절하게 빌어서 오히려 발키리와 아우로라가 당황할 정도였다.
“너 진짜 이 마을 좋아하는구나”
“......”
입 아프게 답할 가치도 없었다. 이 마을은, 그녀, 아이언 애니에게 모든 것이었다. 그녀가 그 모든 추악한 죄악과 악랄한 범죄를 저질러 가면서도 지키고자 했을 만큼. 이곳이, 보안관이 보안관다울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의 바이오로이드들만이, 그녀의 존재 의의였다. 그녀들만이 애니의 전부였다. 그녀의 가족이었다. 그러니...제발. 이들을 지키게 해줘.
“하지만,”
그러나 아우로라는 꼿꼿이 선 채 요지부동이었다. 따지고 보면 애니의 마을이지 아우로라나 발키리의 마을은 아니지 않은가. 그녀들이 애니와 마을 사람들을 목숨까지 걸어가며 지켜줄 정이나 의리가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우린 당신네들 일에 상관 안 할거야. 연료만 채운 다음에 바로 떠날 거라구.”
사정은 안되었지만 그녀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철충들이 오기 전에 바삐 떠나는 것만 할 수 있을 뿐. 그녀들과 달리 아우로라는 딱히 인간에 목맬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친구와 함께 이 북미 대륙을 떠돌며 살아가는 것, 그거면 충분했다. 그깟 얼굴도 못 본 인간 하나 때문에 그 삶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러나 그렇게 매정하게 돌아서는 아우로라와 달리 발키리는 잠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뭐해, 발러, 가자니까?”
“아우로라, 도와 줍시다.”
“.....”
아우로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얘는 너무 착해서 문제다. 가능하지도 않은 일인데도 말이다. 그렇기에 60여년의 여행 동안 늘 그녀가 옆에서 발키리에게 현실적인 지적을 하는 역할로 남은 것이다. 아마 발키리도 인정하겠지만, 아우로라가 없었다면(그리고, 반대로 아우로라 역시 발키리가 없었더라면)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그 사람 좋은 성격 때문에라도.
“어떻게?”
“....윽”
“어떻게 도와 줄 건데? 너 철충 상대로 싸울 수 있겠어?”
“......”
발키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참 쓸데없이 사람 좋은 그녀에게 아우로라가 하아, 하고 핀잔을 줬다.
“발러, 너 착한 거 알지만, 난 개죽음당하는 거 싫어.”
바전투 바이오로이드와, 철충과 싸우키는커녕 실금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인 바이오로이드가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러나 애니는 동정심을 내비친 발키리를 애타게 붙잡았다. 그 모습에 아우로라는 뻔뻔하고 끈질긴 보험 판매원을 만난 듯한 진저리치는 표정을 지었지만 애니로서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당신 군용 바이오로이드잖아. 저격수. 철충이랑 전혀 싸워 본 적 없어?”
발키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철충이랑 싸울 줄 알았다면, 다른 군용 바이오로이드처럼 놈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더라면, 발키리는 지금까지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놈들과의 전투를 시도하다 불귀의 객이 되었을 테니까. 생각해보면,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철충을, 그 인간 비슷한 뇌파를 내뿜는 놈들을 무서워하게 된 게 그녀에게는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다. 철충을 감지하고 피하는 데는 누구도 못 따라올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셈이니까. 철충에게 대항하지 않았기에, 그저 도망만 쳤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아온 바이오로이드에게, 애니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정말 없어...? 당신 멸망전쟁에도 참전 안 해봤어?”
“흥, 싸워 본 적이 있냐고 얘한테 물어본들...”
발키리는 군용 바이오로이드다. 따라서 멸망 전 군부대 소속으로서 멸망전쟁에 참가해 봤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아우로라가 나서서 발키리의 어깨를 툭, 쳤다.
“얘는 멸망 전의 기억이 없어.”
“왜....”
“낸들 알어? 하여튼 안됐지만 얜 싸울 의지도 능력도 기억도 없는 애야. 붙잡지 말어”
어쩐지 자신이 무능한 겁쟁이 깡통이라는 소릴 듣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발키리의 고개가 수그러졌다. 멸망 후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요리, 운전, 아우로라에게게 써먹을 드립력 등 이거저거 배우긴 했지만 그녀의 본질은 결국 전투용 바이오로이드다. 싸우기 위해 태어난 군용 바이오로이드가 싸울 용기도, 싸워본 경험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은 어찌 보면 그녀의 정체성을 짓밟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기야 지금 상황에선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어쨌든 애니와 마을 주민들을 도와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니까.
“...미안합니다”
그녀는 자기 잘못은 아니지만 무릎 꿇은 채 절망에 빠져 땅만 쳐다보는 애니의 어깨를 한 번 쓸어 주고 돌아섰다.
그 순간, 애니의 머리속에 뭔가 떠올랐다. 조금 전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져 준 그 심약한 ‘군용’ 바이오로이드에 대해.
전투를 위해 태어난 군용 바이오로이드가 전투에 공포를 느낀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멸망 전에는 모든 군용 바이오로이드가 인간의 명령 아래 철충과 싸웠다.
그 중에 하나였을 발키리가, 마땅히 맞서 싸워야 할 대상에게 공포를 느낀다면, 그건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넣었을 가능성이 높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만약 철충에 대한 공포도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주입한 거라면......아까 멸망 전의 기억이 없다고 했지?
애니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잠깐만.”
돌아보는 아우로라와 발키리에게, 애니는 그 스스로도 약간 확신은 없었지만 말을 계속했다. 그것밖에 그녀가 붙잡을 수 있는 게 없었으므로.
“방법이 있어”
<계속: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10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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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출처에 대한 이야기
1) 삽입된 곡은 고전 서부영화 '장고(Django)' (1966)에서, 'Luis Bacalov'가 작곡한 OST입니다. 육성이 없는 instrumental 버전입니다.
OST입니다.
1. 본편에 대한 이야기
1) 아우로라가 말한 "안녕, 바이, 짜이찌엔"은 엄청 오래 전 KBS 개그콘서트 코너에서 밀던 유행어였는데 기억하실 분이 있을는지 모르겠군요. ㅎㅎㅎ;;;
2. 잡담
오늘 저녁에 올리기로 한 걸 조금 이르게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음 편은 내일 밤이나 모레 새벽에 올라오겠습니다.
소설은 읽는데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도, 제 서투른 글들을 항상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덧글과 추천이 언제나 큰 힘이 됩니다! 달아주시는 댓글에 모두 빠짐없이 답글을 단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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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다음편은 설정에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 21.07.19 18: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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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은 설정보다 창작자의 주제가 더 중요하니 괜찮겠죠ㅎ | 21.07.19 18:3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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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중간에 드립 넣는게 낙인데 이젠 틀딱이 되어서 철지난 것들밖에 모르네요 ㅎㅎ | 21.07.19 22:5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