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소설은 거울단계 이벤트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직 해당 이벤트를 진행하지 않으셨거나 진행중이신 유저분이 계시다면 추후에 읽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천천히 눈을 떴다. 소설에서나 나오는, 눈을 뜨면 볼 수 있는 새하얀 공간 따위는 없다. 대신 뭔가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사방에 떠다니는 붉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으읏......!”
이마가 지끈거린다. 정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나를 깨운 것은 한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왁!”
“으앗!”
깜짝 놀라서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며 뒷걸음질을 치다가 추하게 엉덩방아를 찧어버렸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 뭐지? 분명히 내 뒤쪽에서 사람 소리가 난 것 같은데? 그런데 이번엔,
“헤헤~ 안보이지~”
“아악! 뭐야 정말!”
뒤에서 두 눈을 가리는 손. 짜증을 내며 손을 치우고는 빠르게 몸을 돌려 뒤를 보았다. 그러자,
“너, 너......!”
내 눈앞에 검보라색 단발머리를 한 소녀가 나타났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한 채로 나를 보던 녀석은 볼을 잔뜩 부풀리며 볼멘소리를 냈다.
“정말~ 왜 이리 늦게 일어난 거야? 한참 동안 기다렸단말야.”
거짓말이지? 자연스럽게 볼을 꼬집어본다. 엄청나게 아프다. 하지만 눈앞의 소녀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건, 일단 꿈은 아니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봐. 넌 누구야? 여긴 또 도대체 어디고?”
“뭐, 일단 진정해. 하나씩 설명해줄 테니까. 알았지?”
너무나도 태연한 표정으로 나를 진정시키며 녀석은 바닥에 앉았다. 그렇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녀석은 자리를 깔고 앉은 것이다. 내가 녀석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니 녀석은 오히려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왜? 앉기 싫어?”
“아니, 그게 아니라.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냐니. 너도 방금 했잖아? 이렇게, 팡~ 하고!”
처음에 내가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는 것을 그대로 따라 하면서 녀석은 앉으라는 듯 자신의 앞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뭔가 태클 걸고 싶은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일단 상황 파악이 우선이라고 생각해 나는 녀석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자리에 앉기로 했다.
“그래서 한 번 더 묻겠는데, 넌 도대체 누구야? 여긴 어디고. 난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나의 질문에 녀석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마치 상자 위에 앉은 듯 허공에 걸터앉은 채 말을 이어나간다.
“나는 오가스. 음, 간단히 설명하자면 육체에 치명적인 피해를 받은 사람들이 치료받은 후 깨어나기 전에 의식의 회복을 도와주는 일종의 가상 프로그램 같은 존재야.”
“으으...... 뭔가 좀 어려운데. 잠깐, 뭐? 육체에 피해? 그럼 지금 나 다친 거야?”
자신을 오가스라고 칭한 녀석은 입가에서 미소를 지운 채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의 말에 나는 황급히 내 몸을 둘러보며 손으로 더듬기 시작했다. 녀석의 말과는 다르게 이미 상처는 아문 건지 내 몸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저기, 괜찮으면 이거라도 입고 있지 않을래? 좀 추워 보여서.”
나에게 어디에서 난 건지 흰 원피스를 내미는 오가스. 그제야 난 깨달았다. 난 속옷 차림으로 있던 것이다!
“보, 보지 마!”
잽싸게 녀석이 내민 옷을 빼앗고는 뒤집어쓰다시피 입었다. 앞뒤를 바꿔 입어서 황급히 다시 입은 건 덤이다.
“에이, 뭘 그래~ 여긴 우리밖에 없는걸? 그리고 덧붙이자면 다친 건 여기 있는 네가 아니야. 정확히 말하면 ‘바깥’에 있는 너지.”
바깥에 있는 나는 또 뭐야? 으으. 뭔가 녀석이 입을 열면 열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것만 같아.
“그럼 지금 이 상황은 정확히 뭐라고 이해하면 되는 거야?”
나의 질문에 녀석은 턱에 손을 괴고 곰곰이 생각하듯 눈을 감았다. 뭐지? 내가 너무 어려운 질문을 한 건가? 아니면 어디서부터 나를 이해시켜야 할지 고민하는 건가? 일단 답변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후자 쪽에 가까운 것 같았다.
“음, 글쎄? 좀 어려운 개념일 수도 있겠지만. 종교적으로 따지면 영혼의 세계라고 하면 쉬우려나? 너희 집 종교 같은 거 믿었었잖아. 그거하고 연결 지어서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 같은데?”
집? 우리......집? 오가스의 말을 듣고 나는 무언가 생각해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정말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텅 빈 도화지를 보고 있는 것처럼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머릿속은 온통 새하얬다.
“......미안. 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정말?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어? 그래도 이름 정도는 기억하지? 그렇지? 마이나?”
“어......? 마이......나? 내 이름이 마이나였어?”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쳐다보는 오가스. 녀석은 충격적이라는 듯 이마를 붙잡고 무언가 어려운 말들(대충 어쩌고 프로토콜이라는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머리를 감싸 쥐던 녀석은 나름대로 정리가 된 건지 다시 표정을 정리하고는 내 어깨를 붙잡는다.
“거, 걱정마 마이나! 처음부터 차근차근히 기억을 정리해나가면 되잖아? 응! 그러면 될 거야, 분명!”
어깨를 잡은 손이 떨리고 있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내 상태에 대해 적잖이 당황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저기, 오가스. 솔직히 얘기해줘. 왜 지금 네가 당황하고 있는 거야? 나의 뭐가 잘못된 건데?”
내 질문에 오가스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리고 나직이 한숨을 쉬고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너의 의식을 안정화시킨다음 간단하게 바깥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고 바로 깨어나게 해줄 생각이었어. ‘그 사건’ 이후로 의식을 잃은 너를 ‘아버님’과 우리 패러데우스가 발견한 지도 벌써 6년이 지났으니까, 아무런 설명도 없이 눈을 뜨면 바뀐 세상에 너도 많이 혼란스러울 거고. 하지만 지금의 너는 그 사건까지의 기억 자체가 사라져있어. 그걸 넘어서 심지어 네가 누군지 조차도 모르는 상태란 말이지. 이건 꽤 심각한 거야, 마이나.”
또다시 뜻을 알 수 없는 말들이 귀를 타고 흘러들어온다. 혼란스러웠다. 제아무리 새하얀 도화지라도 갑자기 많은 양의 색으로 채워지면 금방 검게 물드는 법. 지금의 내가 그랬다. 뭔가, 속에서 올라올 것 같이 메슥거렸다.
“......괜찮아?”
걱정되는 듯 내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뻗는 오가스. 겨우 침을 꿀꺽 삼키고 나는 힘겹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도 괜찮을까?”
“응.”
입을 열기 전,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잠깐 흐트러졌던 정신이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난 오가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걱정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그렇게 얘기해도 난 네가 왜 나를 걱정해주는지, 그리고 왜 내가 심각한 상황에 놓인 건지 전혀 모르겠어. 무엇보다도, 난 아직 널 신뢰할 수 없어.”
“......”
나의 말에 오가스는 뻗으려는 손을 거두었다. 녀석의 갈색 눈동자가 흔들린다.
“좋아, 내가 기억을 잃어버린 게 사실이라고 쳐 아니, 사실이겠지. 실제로 난 네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내 이름조차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 아니 프로그램? 뭐 어쨌든. 그게 너뿐이라면 난 네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을 거야. 여기엔 우리 둘뿐이고, 기억이 없는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거라곤 네가 가진 일방적인 정보뿐이니까. 하지만 내가 뭘 근거로 그걸 믿어야 하지? 막말로 네가 거짓말로 날 회유한 다음 현실에 있는 내 몸을 뺏을 수도 있는 거 아냐? 널 믿을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나의 말에 침묵하는 오가스.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처음 봤던 생글거리던 표정도, 방금까지 짓던 어두운 표정도 아니다. 말 그대로 녀석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바닥을 보고 있었다. 그런 녀석을 보며 나는 속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녀석이 어떤 식으로 나오든 냉정하게 판단할 것이다. 혹시 힘으로 협박한다고 해도 입 하나 뻥끗하지 않을 테다. 하지만 녀석이 보여준 행동은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알았어. 보여줄게.”
뭔가 결론을 내렸다는 듯이, 녀석은 무표정으로 품 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 이게 무슨......?”
그건 다름 아닌, 오가스 본인의 사진이었다. 자기 사진을 보여줘서 뭘 어쩌려는 거지? 내가 황당하다는 듯 녀석을 쳐다보자, 오가스가 입을 열었다.
“이게 바로 네가 날 믿어야 할, 그리고 네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야.”
“......무슨 소리야? 이건, 그냥 네 사진이잖아?”
내 말에 오가스는 말없이 내게 거울을 건네주었다. 그것을 건네받은 나는 습관처럼 내 얼굴을 그것에 비춰보았다.
“......!”
소리 없이 사진이 내 손에서 미끄러졌다. 그리고 난 다시 녀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난...... 난 대체......?”
내 앞에 서 있는 오가스의 모습. 그리고 거울에 비친 나. 두 피사체는 완전히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너하고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건, 네가 정신을 차렸을 때 좀 더 빨리 진정할 거라는 판단에서 모습을 일시적으로 바꾼 것뿐이야. 뭐, 그것도 네가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린데다가 무려 6년이나 정신을 잃은 탓에 완전히 소용없는 일이 되어버렸지만. 하지만 분명히 말하는데 사진 속 인물은 내가 아니야.”
“네가 아니라고? 그럼 이건 내 사진인 거야?”
오가스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아니고, 나의 모습을 따라 한 오가스도 아니다. 그럼 도대체?
“네 언니야. 세상에 단 하나뿐인, 쌍둥이 언니.”
오가스의 말이 귀에 닿자마자 빠르게 안으로 퍼져나간다. 마치 가슴 속에 따뜻한 물을 들이붓는 것처럼 ‘언니’라는 단어에 나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혹시 이것도 거짓말이 아닐까? 라는 의문도 아예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나의 이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어느새 내 곁에 온 오가스가 입을 열었다.
“혹시 괜찮으면, 지금부터 옛날이야기를 조금 들려줘도 괜찮을까? 네가 어렸을 때에 대해서. 나한테 네 기억이 일부 백업되어 있으니까, 어쩌면 네가 기억을 찾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몰라.”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될까?”
잠시 제4의 벽을 넘자면, 녀석이 해준 이야기는 1, 2화의 이야기와 같았다.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나의 가슴 속에서는 여러 감정이 피어 올라왔다. 날 아끼고 사랑해주시던 아버지의 부재, 어머니와의 미묘한 관계, 그리고 마흐리안 언니에게 느끼는 양가감정.
이어서 오가스는 처음에 말했던 패러데우스와 ‘아버님’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패러데우스는 테러조직들과 맞서 싸우고 감염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하기 위해 비밀리에 결성된 단체. 그리고 녀석이 ‘아버님’ 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 단체의 수장인 듯했다. 과학(오가스는 더 전문적인 용어를 썼지만 자세히는 모르겠다.)에 능통해서 테러지역에서 많은 아이들을 구원해준 위대한 분이라고 오가스는 이야기했다.
이후에 녀석은 ‘그 사건’에 대해서도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10살이었을 무렵. 그러니까 어머니에게 호되게 혼나고 난 그날 오후, 정체를 알 수 없는 테러단체에 의해 우리 마을에는 생화학테러가 발생했다. 그로 인해 마을은 파괴되었고 어머니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
“우리 패러데우스가 마을을 수색했을 때 생존자는 너 하나뿐이었어. 아버님께서 살아있는 너를 발견하시고 시설로 데려오셔서 겨우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지. 그리고 그 후로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거야.”
“잠깐, 그럼 언니는? 언니는 어떻게 된 거야?”
“아까 말했잖아? 네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언니라고. 그게 무슨 뜻인지 맞춰볼래?”
생각할 것도 없이 답은 간단했다.
언니는, 그 수라장에서 살아남은 것이었다.
“사실 아버님도 우리 패러데우스도, 너희 언니를 찾기 위해서 큰 노력을 기울였어. 아쉽게도 결국 찾지 못했지만 말이야. 하지만 너라면, 유일한 혈육인 너라면 반드시. 언니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난 믿어. 마이나.”
검게 칠해진 도화지에, 문양이 새겨진다. 그리고 그 문양에 여러 가지 색이 덧칠해진다. 그 모습이 난 더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처럼 지금 내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희망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좋아. 네 말을 믿어줄게.”
나의 말에 오가스의 갈색 눈이 빛난다. 그리고 부담스럽게 나를 꽉 하고 껴안기 시작했다.
“진짜? 진짜 믿어주는 거야? 와아~ 고마워 마이나~”
“으, 으윽...... 잠깐! 숨막혀!”
끈덕지게 달라붙는 오가스를 겨우겨우 떼놓고 나는 숨을 골랐다.
“후우. 그럼 이제 처음에 말한 의식 회복인가 그것 좀 도와줄래? 빨리 이곳을 벗어난 다음 언니를 찾으러 가야겠어.”
나의 말에 순간적으로 오가스가 눈을 가늘게 뜬다.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녀석의 표정에 순간적으로 나는 긴장되기 시작했다.
“흐응~ 그래? 그런데 말야, 내 계산대로라면 넌 일단 의식이 충분히 회복되긴 했지만,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몸을 다루기엔 무리야.”
“뭐? 왜 그렇게 생각, 아니 계산한 건데?”
사실 ‘생각했다’ 라고 말했다면 어떻게든 반박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프로그램이라고 한 녀석이 ‘계산했다’고 선언하듯 이야기하자 자신감이 조금 사라져버렸다. 나와 반대로 오가스는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말을 이어나갔다.
“테러로 인해서 망가져버린 네 몸은 거의 회복되었지만, 대부분은 정교한 기계장치들에 의존해서 유지되고 있는 상태야. 난 네 의식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기계장치들을 제어하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지. 물론 네가 노력해서 스스로의 힘만으로 그것들을 제어할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일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내 계산에 의하면 네가 현재의 몸을 완벽하게 다루기까진 최소한 5년은 더 필요할 거야. 물론 네 노력 여하에 따라서 시간이 단축될 수는 있겠지만, 글쎄? 네가 어떤 결론을 도출해야 할지는 이미 답이 나와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갈색 눈동자가 빨아들일 듯이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녀석에게 삼켜지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눈에 힘을 줘본다. 그러자,
“헤헤. 조금 놀려봤더니 금방 무서운 표정을 짓고선. 농담이야 농담~”
또다시 표정을 바꾸는 오가스. 녀석은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내 입꼬리를 억지로 위로 올리기 시작했다. 정말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재주 하나는 타고난 녀석이다.
“그럼 말해봐, 오가스. 어떻게 하고 싶어? 네가 생각하는 답은 뭐야?”
손가락을 떼어내며 묻자, 오가스의 얼굴이 다시 전에 보여주었던 계산적인 표정으로 돌아간다.
“흐음. 우리끼리 계약을 하나 맺는 건 어때? 아버님도, 패러데우스도 관여하지 않은. 나와 너, 단 둘만의 계약.”
왜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오가스의 제안은 달콤한 노래처럼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확실히 만나보지도 않은 아버님이라는 사람이나 패러데우스라는 단체보다도 지금 직접 만나서 오랫동안 대화까지 나눠본 이 녀석이라면 신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오가스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우선 앞에서 얘기한 이유에 더해서, 언니를 찾을 때까진 내가 네 몸의 통제권을 가지고 있을게. 같이 보강해둔 기계장치들을 활용한다면 보다 수월하게 네 언니를 찾을 수 있을 거야. 물론 진전이 조금이라도 있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너에게 물어볼게.”
“좋아. 대신 언니를 만나게 되면 바로 나에게 몸을 넘겨줘. 몸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가하고는 상관없이 말야. 알았지?”
“물론이지. 아, 그런데 그건 알아둬. 아직 패러데우스의 기술은 완벽하지 않아서, 통제권을 전환할 때 오류가 발생할 수도 있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리 사과해둘게.”
오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살아있을 수 있다면. 그리고 언니를 만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만약 언니를 직접 보게 된다면, 그때의 난 어떤 행동을 할까? 기쁨의 눈물을 흘릴까? 아니면,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하게 될까? 아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지나치게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흥분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옆에 있는 오가스를 바라본다. 비록 만난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오가스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를 6년이라는 시간 동안 곁에서 지켜주고,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살아갈 용기를 준. 최소한 지금 순간 내게 있어선 최고의 친구이자 또 다른 자매다.
난 오가스에게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녀석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나를 껴안으며 속삭였다.
“고마워, 마이나...... 넌 올바른 결정을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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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장시설 내부에 있는 거대한 시험관. 그 안에는 한 소녀가 서 있었다. 무수한 기계장치에 자신의 몸을 의존한 채, 소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초록색 액체 안에서 호흡기에 의지해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한 남성이 턱을 어루만지며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 충분하겠지. 풀어주게.”
옆에서 모니터를 주시하던 다른 남성에게 명령한다. 그가 장비를 조작하자 시험관에 가득 차 있던 액체가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소녀에게 연결되어있던 기계 장치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액체가 완전히 없어지고 소녀의 호흡을 도와주던 호흡기가 마지막으로 떨어져 나갔다. 동시에 몸이 앞으로 쏠리면서 소녀는 바닥에 쓰러지려 했다. 하지만,
타탓.
소녀의 등에 붙어 있던 거미의 다리와도 같은 기계장치가 그녀의 몸을 지탱해주었다. 커다란 두 집게발이 지지대처럼 버텨주고 작은 두 개의 침이 그 뒤를 받쳐준다. 체온 변화로 인해 몸을 떨고 있는 소녀의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다가갔다.
“......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느냐?”
“......”
갈색과 황금색이 묘하게 섞인 눈동자가 남자를 바라본다. 그리고 소녀는 떨리는 입으로 천천히 대답했다.
“네......아버님......”
최악의 니토가,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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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3화를 읽어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사실 이번 화는 거미의 집이라는 팬픽을 쓰면서 가장 많이 고민했던 파트였습니다.
마이나와 오가스(우리가 아는 몰리도죠?)의 심리 묘사는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
개연성은 충분한가? 혹시 중복 서술된 부분은 없었는가?
분명히 오류가 없진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ㅠㅠ
동시에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도 함께 전합니다.
첨언드리자면 중후반부에 서술한,
'검게 칠해진 도화지에 문양이 새겨지고 채색되는' 부분의 경우 오가스에 잠식되어 패러데우스에 심취되어가는 마이나의 모습을 묘사하고 싶었습니다.
여러분들께 의도가 잘 전달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ㅠㅠ
혹시라도 그렇게 받아들여주신 분들께는 또다시 감사의 인사를, 아닌 분들께는..... 네. 또다시 겉멋을 부려 죄송합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