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 헬리안투스 일지 2045년, 2047년 신소련 육군사관학교}
2045년, 전쟁은 온 나라의 젊은이들을 군으로 모여들게 했다.
누구는 넘쳐나는 애국심으로 또 누구는 어차피 징병 될 거 장교로 군 생활을 하기 위해.
군인 집안 출신인 나 역시 전쟁 발발 후 군에 자연스럽게 자원입대하게 되었다.
“헬리안투스”
“네!”
4년간의 생도 생활이었지만, 전쟁인 관계로 빠른 인력의 배출을 위해 교육과정을 최대한으로 줄였기에. 사관학교의 입소식은 굉장히 빠르고 간략하게 진행이 되었다.
“레이나.”
“네?. 네!”
“대답은 한 번만 합니다.”
입대 심사는 어떻게 통과한 걸까? 많아 봐야 10대 중후반 쯤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체구의 여성이 이름이 불려 내 옆으로 걸어 나왔다.
“둘은 앞으로 한 조로 활동한다. 생활관은...”
냉정하게 생각해서 같은 조로 생활하기에는 최악의 파트너라고 생각했다. 2인 1조로 이루어지는 훈련도 많은 텐데. 발목이나 잡히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렇게 내 사관학교 생활이 시작됐다.
“휴 드디어 다 정리했다.”
생활관 정리를 끝마친 그녀는 기지개를 쭉 펴더니 이쪽을 바라보며 싱긋 웃는다.
“헬리안투스라고 했지? 헬리안이라고 불러도 돼?”
“편하신 데로 하십시오.”
“그래.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헬리안 아까 내 이름은 들었지? 난 레이나야. 벨로이 레이나.”
사무적인 목소리로 대답을 했음에도 레이나는 푸른색 눈을 반짝이며 재잘재잘 잘만 떠들어댄다.
‘툭툭’
레이나가 한창 자신의 고향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생활관 창문을 누군가 두드리는 소리. 새인가?
“야 너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5층 생활관 창문 밖, 그곳에는 사관생도 정복 차림의 웬 검은 머리의 동양인 남자 하나가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뭐 잘 있나 보러 왔지. 아까 입소식 때 잠깐 보고 말았잖아. 아, 이쪽이 룸메야?. 안녕?”
서로 알고있는 사이인듯 남자는 친근한 목소리로 레이나에게 말하다 말고 이쪽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참을 멍하니 그 남자를 쳐다보다. 정신이 돌아와 남자에게 말했다.
“제가 당신을 교관에게 신고를 하면 안되는 이유가 단 하나라도 있습니까?”
사관생도로서 무단 행동 그리고 여생도 생활관 무단 침입. 이건 무조건 퇴교감이었다. 빨리 신고하지 않는다면 나까지 엮여서 퇴교 처리를 당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변명 정도는 들어볼 의사가 있었다.
남자는 잠깐 고민하더니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음... 동기니까?”
아니다 잘못 생각했다. 들을 가치도 없었다.
“교관....읍!”
고려할 가치도 없는 대답에 교관을 부르기 위해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그 남자의 손이 내 입을 틀어막았고 난 그대로 침대 위에 밀쳐졌다.
“예쁜 얼굴로 너무 정 없는 거 아니야?”
“승훈 너 뭐 하는 거야!”
침대 위에서 남자가 여자를 덮치고(?) 입을 막고 있는 상황. 인정하긴 싫지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서로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 녀석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한다.
“그렇게 깐깐하게 살다가 평생 노처녀로 늙어 죽는다?”
‘빠직’
만일 내가 지금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이마의 핏줄이 잔뜩 튀어나와 있을 터였다.
“으악!”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어느샌가 아까와는 반대로 이번엔 내가 그 녀석의 얼굴이 침대에 파묻히도록 제압한 뒤 내 입을 틀어막았던 녀석의 손을 그대로 등 뒤로 꺾어 올렸다.
“방금, 제가 당신을 눈감아 줘야 하는 일말의 가능성을 스스로 날려 버리신 겁니다.”
“와, 너 진짜 얄짤 없구나. 그러다가 진짜로 노처녀로... 으아악! 항복! 항복!!”
그 녀석은 다른 쪽 팔로 침대를 내려치며 말했다.
“그, 저 헬리안. 날 봐서라도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 다신 이런 일 없도록 할게.”
아까부터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레이나는 그제야 나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그쪽이 나한테 뭐라고 이런 녀석을 봐줘야 합니까?”
레이나는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갸웃 거리며 말했다.
“그야... 동기니까?‘
“하?”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날 놀리는 건가? 하지만 진지한 눈빛을 보면 또 그건 아닌 것 같다.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어쩌다가 이런 녀석들이랑 엮이게 된 걸까?
“이번 한 번만입니다. 저도 첫날부터 이런 일로 주목을 받고 싶진 않으니까요.”
“응! 저 녀석은 내가 책임지고 관리할게. 약속해!”
제압되었던 팔과 목을 풀어주자. 녀석은 뒤로 꺾였던 손목을 위아래로 탈탈 털어대며 말했다.
“우리 아직 통성명도 안 했지? 난 강승훈이야.‘
능청스럽게 웃으며 손을 내미는 남자. 조금은 많이 엇나갔던 우리들의 첫 만남이었다.
2047년. 기존의 교육과정을 최대한 압축한 결과 하루하루 계속되는 실전을 방불케하는 훈련과 교육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인정해야겠다. 레이아와 강승훈 두 사람은 뭔가 부족해 보였던 첫인상과 다르게. 우리 기수의 사관 생도생 전체를 놓고 봤을 때도 범접할 수 없는 현장 지휘관을 표본이었다. 물론 그 것이 군인으로서의 자세까지 완벽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강승훈, 그 녀석은 그런 일이 있고 나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5층에 있는 우리 생활관으로 기어 올라와 시간을 보냈다.
경고를 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결국 나도 지쳐서 포기하고 그러려니 했다. 이미 안면을 튼 사이에 신고하기 에도 찝찝하고, 이런 인재를 이렇게 퇴교시키는 것도 효율적이지 못했으니까.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 둘과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북란도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에서 러시아로 망명한 이야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승훈과 레이나가 처음 만났던 이야기.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서 군에 입대했다는 이야기.
뭐 사실 난 듣고만 있고 그 둘이 떠들어 댄 것뿐이었지만. 그렇게 어느샌가 나 역시 그들과 같은 동료라는 공동체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게 동료애라는 걸까?
그리고 드디어 수료식 전날 밤.
“다들 어디로 발령받았어?”
오늘도 어김없이 승훈은 창문을 넘어 생활관 안으로 들어왔다. 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어떻게 5층까지 맨몸으로 기어 올라오는지 미스터리다.
“내일까지 발령지 서류를 보면 규율 위반 아니야?”
“헬레나 말이 맞아. 교관이 내일 수료식 전까지 서류 열지 말라고 했잖아.”
기밀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사관들 사이에 발령지 차이로 인해 벌어질 불만을 막기 위해서인지(당연하겠지만 대부분의 사관생도는 후방근무를 원하고 있으니.) 오늘 발령지가 담긴 서류를 받았음에도 내일 수료식이 끝나기 전까지 열어보지 못하게 명령이 내려온 상태였다.
“와 역시 바른생활 소녀. 그걸 아직도 안 열어 본 거야? 우리 남자 생도들은 이미 다 열어봤는데?”
승훈은 실화냐라는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며 정복 안쪽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발령 명령서]
이름 : 강승훈 계급: 소위
발령 부대 : 남아프리카 전선 제1자동화 보병 중대 1소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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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승훈 너 최전방으로 가는 거야?”
레이나는 승훈이 위험한 최전방으로 간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왕에 군인이 됐으면 제대로 하는 게 낫지 오히려 잘됐다고 봐.”
남아프리카 전선이면 지금 한창 전투가 벌어지는 격전지 중의 격전지였다. 그곳을 발령받은 이상 목숨을 내놓을 각오는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곳에 발령을 받았으면서 승훈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너희들은 어디야. 빨리 열어봐. 혹시 알아?, 우리 셋 다 같이 남아프리카 전선으로 갈지.”
승훈을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며 우리에게 서류를 개봉할 것은 은근히 강요했다. 정말 이 녀석은 진지함이라고는 찾아 볼 수 가 없다.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라 신소련에 얼마나 많은 부대가 있는데.”
솔직히 나 역시 발령지가 궁금했었기 때문에. 받았던 서류 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어 안의 서류를 살펴보았다.
[발령 명령서]
이름 : 헬리안투스 계급: 소위
이름과 계급 그리고 그 아래 보이는 발령 부대의 이름
“...”
발령 부대 : 남아프리카 전선 제1자동화 보병 중대 3소대장
“뭐야? 헬리안도 남아프리카 전선이야? 설마 나만 다른 곳으로 발령 난 거 아니지?. 차라리 최전방이여도 너희들이랑 같이 가고 싶단 말이야!”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라는 심정으로 발령지가 적힌 서류를 보고 있는데 레이나가 자신만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불안했는지 서둘러 서류 봉투를 뜯는 모습이 보였다
“으으으!”
레이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왠지 결과는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우리 기수의 수석인 승훈이 1소대장 3등인 내가 3소대장인 걸 보면...
[발령 명령서]
이름 : 벨로이 레이나 계급: 소위
발령 부대 : 남아프리카 전선 제1자동화 보병 중대 2소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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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나도 너희랑 같은 부대야!”
보통이라면 최전방에 배치된 것에 대해 좌절해야 하는 게 정상이었지만, 레이나는 우리들과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더 기쁜 모양이었다.
“근대 자동화 보병 중대가 무슨 부대야?”
레이나의 말처럼 나 역시 처음 들어보는 부대였다. 신설 부대인가?
“뭐 어떤 부대인지 무슨 상관이야. 우리 셋이서 같은 곳으로 발령이 났다는 게 중요하지.”
승훈이 갑자기 나와 레이나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씩 웃음을 지었다.
“그래 맞아 최전방이든 어디든 우리 셋이면 다 잘 해낼 거야!”
레이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 드디어 너희 둘에게서 벗어나나 했는데.”
말과는 다르게 나 역시도 이 멤버로 같은 곳으로 가게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좋든 싫든 간에 2년간 얽히고설킨 두 명과 헤어지는 것이 사뭇 싫었던 모양이었다.
“야. 넌 사람이 그렇게 정이 없어서야. 너 그러다 진짜 노처녀로.... 아아악! 잠깐만!”
첫 만남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팔을 등 뒤로 꺾이며 고통스러워하는 한 남자. 연애 경험이라곤 전무했던 나에 찾아온 지도 모르고 있었던 내 첫사랑이었다.
PS. 하지만 헬리안은 노처녀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이미 헬리안이 아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