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몽롱한 기분에 도대체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은 가득 찼지만 무엇 하나 구체적이지 않았고, 그래서 이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데레는 갑갑했다.
답답했다. 멍하니 앉은 채 여러 생각에 휩쓸리면서, 유일하게 분명했던 건 답답함이었다.
확실한 기습이었지만, 대대적인 공격보단 테러에 가까웠던 건지 철혈공조는 이내 물러났다. 어쩌면 정규군의 개입을 경계하는 걸지도 몰랐다. 덕분에 사태는 예상보다 빠르게 소강될 수 있었고, 신속히 모든 일이 처리되었다. 인명 구조, 잔해 처리, 그 외에 잡다한 것들까지. 그렇게 그 둘은 해 질 녘에 거처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올 수 있었다. 적어도 ‘그 장소 안에 들어왔다’라는 뜻으로는 그러했다. 데레는 공허한 눈빛을 지은 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 덕에 안젤리아는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몇 차례 입을 열어보려고 해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해 도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녀가 생각한 건 가출한 아이가 으레 보일 것 같은 반응들이었다. 화를 내거나, 울거나, 싫다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등의 행동을 예상했다. 그렇기에 무반응을 비추는 데레의 모습에 그녀는 당황했다. 기껏 헤드폰을 돌려주며 한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몇 차례의 헛기침. 그녀가 선택한 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친절히 대해주기’였다.
“그래서, 괜찮아? 배는 안 고프고?”
아직 반응은 없었다. 바보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먼저 다가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안젤리아는 스스로를 설득했다.
“…하루 종일 밥도 안 먹었잖아. 배고플 텐데. 뭐라도-”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입이 열렸다. 메마른 목소리였다. 목의 점막이 갈라지는 듯한 울림. 정작 데레 자신은 막힌 둑이 열린 것처럼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느껴지는 건 건조함뿐이었다.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이해할 수가 없다고, 도저히. 아무리 깊이 생각해도 알질 못하겠어.”
그녀를 바라보던 시선이 별안간 날카로워졌다, 선과 선이 연결되는 것 같은 느낌이, 데레 자신의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그래. 이거였어. 내가 왜 이렇게 혼란스러운 건지, 그리고 내가 왜 이 사람에게 반발했던 건지. 그는 그것을 문장으로 짜맞췄다.
“전쟁을 일으킨 자들을 따르면서,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는 건지.”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양 눈꺼풀이 크게 벌려졌다.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푸른 눈동자를 둘러싼 흰자위가 도드라진 것 같았다. 시선이 가시였다면 수십 가닥으로 쑤셔냈을 듯했다.
“어떻게, 정말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 걸까?”
그 시선을 마주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안젤리아는 과거를 반추했다. 왜 아직도 알지 못했지? 그녀는 자신이 너무 ‘안젤리아’로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어느 순간부터 ‘안나’였던 자신과 너무 멀어져 있었다. 그래, 그때 온 세상을 다 부숴버리고 싶었던 자신도, 주변 사람들의 호의와 친절만으로는 마음을 열지 못했는데.
그래. 그 날, 그녀가 정말로 바랬던 건.
…잠시간의 정적, 그 사이에 악독함이 묻어나던 시선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그는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자신이 어떻게 말을 한 건지에 대해 당혹스러운 듯했다. 살짝 흐려지고, 작게나마 고개를 숙이면서, 초점이 흐려진 눈동자가 떨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안나’는 말없이 데레에게 다가갔다.
흠칫 놀라며 경계하는 그를, 꼬옥, 안아주고 나서야 말했다.
“미안해.”
순간 경련하던 소년은, 이어지는 말을 듣고 잠잠해졌다.
“이런 세상을 만든 어른이라, 미안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겨우 명확해진 것 같았는데, 또다시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지금 드는, 이 느낌은 무엇일까. 꽉 죄여냈던 나사가 풀리는 거 같아. 뭔가, 나 자신을 지탱하려고 만든 게 무너진 것 같아. 뭐지? 이 느낌은, 도대체.
새로운 혼란에 마주했을 때, 문득 데레는 시야가 부옇게 흐려진 걸 알게 되었다.
반사적으로 참으려 했는데, 억누르려고 했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 진한 뜨거움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왜. 왜 내가 이러는 건데. 왜 나는 이러는 건데. 도대체, 어째서.
왜,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건데.
망가진 것처럼 방울져 내리는 시야에 데레는 독백했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갈라졌던 목구멍은 젖게 되자 다시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말을 안으로 삼켜냈다. 지금은 그저 말없이, 고요히 그녀에게 안겨 있었다.
믿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하면, 믿을 수밖에 없잖아.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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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동안은 꽤나 괜찮았다. 한동안은.
완치되고 퇴원한 제레는 안젤리아에게 부탁했고,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과정을 밀어붙여 처리한 끝에 그들의 신분을, 재산을 회복할 수 있었다. 물론 어린 시절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했던 데레는 깜짝 놀랐다. 이제 따르게 된 ‘주인’이 마련해준 새로운 선물인 것 같아서.
한동안은, 그동안 그러지 못했던 나날을 보상받으려는 듯 둘 다 어린애처럼 보냈다. 어느 날 버려진 인형을 줍게 된 데레는 이내 그것에 꽂히더니, 그들을 분해하는 이전과 달리 고치고 관리하는데 꽂혔다. 아예 그 모델만 대량으로 사들여 메이드로 쓰고, 제레는 그 옷 하나하나를 만들고 꾸미는 등 서로 못했던 어리광을 마구 토로했다. 게임도 많이 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즐기다 보면 세상의 소리를 잠시 잊어버릴 수 있어서.
하지만 남매 둘 다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지낼 수 없다는 걸.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해주고 싶었다. 자신들을 거둔 ‘주인’에게. 아니. 마스터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사실 그 둘이 부르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을 것 같다. 그저 단 한 번도, 부모라는 존재를 가져보지 못해 그래도 되는 건지 몰랐을 뿐.
험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안젤리아는 그렇게 만류했다. 물론 세상사에 적극적으로 파고들 생각은 남매 둘 모두에게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마스터를 돕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다시금 세상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단 의무감도 들었다.
그렇게 그 남매는 404, 존재하지 않는 그들을 지원하며, 자신들만의 삶을 보내게 되었다. 남는 시간에는 책을 읽고, 학식을 쌓고, 종종 일탈을 하기도 하며, 자그맣지만 나쁘지 않은 삶을 보내게 되었다. …본래라면, 그것에서 끝나야 할 이야기였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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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떠나서 미안해.
마스터는 이제, 엄청 나쁜 녀석들하고 싸워야 해.
그 녀석들이 제레랑 데레를 괴롭힐지도 모르니까, 한동안 떨어져 있어야 하거든.
부모다운 일을 하나도 못 해줘서 미안해.
너희가 날 싫어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나는 너흴 계속 사랑했어.
사랑해, 앞으로 부디 웃으면서 살 수 있기를. 행복하기를.
낯부끄러운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설령 모든 게 잘못되어도, 나는 하늘에서 너희를 지켜보고 있을게.’
마지막으로 이런 메시지를 남긴 채, 마스터는 실종되었다. 그날, 12년 만에 이 대지에서 붕괴액 폭발이 일어난 뒤, 마스터만큼은 돌아오지 못했다. 몸이 넝마가 된 채 돌아온 45도, 그나마 성한 모습으로 온 416도 마스터가 어디로 갔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으면서, 정작 둘 사이에 어떤 응어리가 풀린 듯 서로에게 웃어주는 그 모습을 볼 때, 나는 갈비뼈가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만이 괴리된 채 모든 일이 진행되는 것 같아서.
나는 의심하고 있었다.
너무 많은 것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마스터가 없어졌음에도 저 넷은 태연한지, 제레는 어째서 마스터를 찾질 않는 건지, 왜 마스터는 사라져야만 했는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의심은, 그리폰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이 과연, 마스터가 치른 희생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이 의심이 도저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 생각은 정신병이나 다름없었다. 더 이상 게임으로 비관하는 마음을 날릴 수도, 헤드폰으로 세상의 소리를 막을 수도 없게 만드는 정신병. 왜냐하면, 내 안에 울리는 마음의 소리가 너무 커져서 어찌할 수도 없는걸.
이건 광증이야.
내가 기대를 거는 건 오직 하나였다. 그 지휘관. 마지막까지 전장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 그날, 그 정체 모를 하얀 세력에 붙잡혔다고 했다. 45도 416도 그 사람을 구할 작전을 짜고 있었다.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 사람에게서 어떠한 가치를 발견한 걸지도 모르니까.
장시안, 이라는 이름이었다.
약간의 조사를 통해 얻어낸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2062년 입사한 지휘관으로, AR소대의 실질적 소유자. 입사한 지 1여년 만에 여러 말도 안 되는 작전을 성공시키고, 지휘관 중 유일하게 철혈공조의 간부 인형을 포획하기까지 한 엘리트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의심하고 있었다. 과연, 이 사람에게 마스터의 희생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직접 어떠한지 봐야만 했다. 그 사람이 활동하는 모습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그 모든 걸 지원해줬다. 구출 작전에 필요한 물자와 장비, 그 외에 조사 작업을 비롯한 모든 것을. 태연함을 가장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저, 나는 이 의심을 멈추고 싶었다.
그날로부터 9주가 흐른 뒤, 모든 것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방어선을 뚫었고, 보안을 마비시켰으며, 지휘관은 구출되었다. 사상자는 없었다. 그리폰 측도 404도 모두 자기 할 일을 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의심은 멈추지 않았다.
그 사람은 상상 이상으로 무능했다.
아무 일도 없던 건 아니었다. 그녀가 무슨 일을 하는지, 무슨 일을 할 건지 알기 위해 해둔 도청 처리는 확실히 제 기능을 했다. 하벨 할아버지는 그리폰의 새 스폰서가 되어준 동시에 국가 안전국을 주선해줬다. 영입 과정이 협박조였을 뿐, 사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들의 상황은 크게 좋아졌다. 더 큰 설비에 더 좋은 숙소, 더 나은 장비까지. 더구나 안전국의 명령을 받는단 뜻은, 그들이 그리폰의 존재를 감수해준단 뜻이기도 했다. 결코 나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사람은 정말 무능했다.
석 달이었다. 나는 석 달 동안 지켜보았다. 석 달 동안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물론 이해할 여지는 있었다. 그들이 가진 모든 교통수단이 파괴되었으니까. 멍청한 안전국이 무슨 생각으로 한 건지 모를 어처구니없는 명령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정말 무슨 생각인 걸까? 쥐 죽은 듯이 고요히, 은둔하듯 살아가는 그 사람을, 그리폰&크루거라는 집단을 보면서 나는 의심했다. 왜 이들을 위해 마스터가 희생해야 했을까? 그것이 올바른 판단이라고 믿고 싶었다. 절실하게. 정말 간절하게. 그래야만 말이 되니까. 그래야만….
석 달이었다. 석 달이 지난 다음에야, 그들은 겨우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레가 사라진 날도 그때였다. 무슨 생각인지 모를 누나는 그렇게 소리소문없이 종적을 감췄다. 마스터가 그랬던 것보다 더 고요히. 왜? 도대체 누나마저 왜 날 떠나는 건데? 한탄할 시간은 없었다. 베오그라드. 그들이 향한 곳으로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404에겐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오래 안 걸릴 테고, 작전도 안 나가니 별일 없을 것이다. 실종된 마스터와 사라진 제레. 이 둘 중 한 명이라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의심이 겨우 그칠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홀로 열차를 탔고, 국경을 넘었으며, 걷고, 뛰고, 조급해하고, 기다리고, 꿈꾸고, 숨 쉬며, 다시 걸었다.
그리고 마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으론, 보고 싶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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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https://youtu.be/27thXn0jYHU]
하늘이 갈라지는 것 같았다. 땅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온 세상이, 단 하나도 남김없이 균열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모든 면이 선으로 꽉 차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검어질 만큼.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저 빗방울만이 쏟아져 내릴 뿐이었다. 그저 빗소리만이 지금 내가 딛고 선 자리가 빌어먹을 현실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내 잘못이라고.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마스터는 여전히 비석에 기댄 그대로였다. 정말 많이 피로했구나. 초췌한 몰골, 창백한 안색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뜨거운 멍울 하나가 가슴팍에 잡혔다. 비수 같은, 깨진 유리 조각 같은 무언가가 가슴 안에서 자라나는 느낌. 살집을 헤집고 찢어내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
…하나도 변한 게 없는데. 정말 “하나도” 변한 게 없는데. 마치 지금 당장 입으로 소리 내어 부르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랬으면 좋겠다. 부스스 눈을 떠서 비몽사몽한 목소리로 묻겠지.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어쩌면 너무 몽롱해서 내가 누군지 못 알아볼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냥 쉬게 해주자. 담요를 덮어주고 전부 괜찮다고 말해주자. 이제 괜찮다고. 그냥, 모든 게.
그런데 왜 그러지 못하는 걸까.
“대답해줘.”
이제야 겨우, 자식이 되었는데.
“…엄마.”
…나는, 이제 어디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다시금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얼굴에 부딪히는 빗방울만이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에 하늘이란 걸 알려주었다.
…문득, 그 하늘이 보기 싫어졌다.
아니, 보고 싶지 않은 건 하늘이 아니었다. 가슴팍을 찢어내고 튀어나올 듯한 느낌, 방금 전까진 예리하고도 날카로운 비수였다면, 지금은 자라나는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는 것 같았다. 온몸을 갈라낼 듯 파고든 그 뿌리에, 나는 가지를 띄우듯 생각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정규군이었다. 카터 준장,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자들. ‘냉전 회귀파’. 그 구세계의 망령들. 살아남은 것도 감사할 줄 모르고 이데올로기를 외치는 것들.
그다음, 국가 안전국이 떠올랐다. 고작 인형 두 기 쥐어주고 군대를 막으라고. 정작 자기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주제에. 사람들 시선이 두렵단 핑계나 대면서, 꼴에.
이어서 떠오른 건 그 하얀 것들, 정체도 모르고 무슨 생각인지 알 수도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 도대체 왜? 이 녀석들은 왜 이 빌어먹을 판에 나타난 거지?
그리고 IOP가 떠올랐다. 하벨 할아머지. 사람 좋은 척 굴면서 정작 쥐어 준 건 독약이었다. ■■하라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썩어빠진 위선자 주제에.
마지막으로 그리폰.
한없이 무능하고 나약한 것들.
과연 그들에게 마스터가 치른 희생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그 무능하고 나약한 것들에게, 과연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 다 죽여버리자.”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살아야 할 가치가 없으니까.
“전부.”
눈에 핏발이 돋았다.
…시궁창보다도 더럽고, 폐허보다도 처참한 내 자그마한 삶 속에서 나의 주인의 존재는 더없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안 그런 적이 없었다. 처음엔, 첫 만남에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는, 그 빛이 너무나도 눈부신 탓에 차마 똑바로 마주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무심코 부숴버리려 했다. 그것의 존재를 의심했다. 짧고도 가녀린 생 속에서, 내 눈은 어둠만을 봐왔으니.
멍청하게도.
그리고 그런 나를, 나의 주인은 안아줬다.
나는 왼팔을 바쳤다.
살갗이 찢어질 때 들었던 타는 듯한 아픔도, 근육이나 핏줄이 제멋대로 당겨질 때의 고통도, 혈액이 주륵 하고 어깻죽지에서 흘러나오는 느낌도, 그리고 마침내. 몸에 달라붙은 마지막 한 줄이 내게서 떨어질 때의 감각도. 나는 괜찮았다. 치밀어오른 구역질에 차마 버티지 못하고 이 속 안에 든 것을 게워낼 때도, 위산으로 목이 지져지는 느낌이 스며들 때도 괜찮았다. 힘이 풀려 주저앉고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숨을 할딱일 때도, 땅바닥에 나뒹굴며 머릴 찢어낼 것 같은 고통에 몸서리칠 때도.
나는 괜찮았다.
…천천히, 그 모든 것이 잦아들고 나서. 비척비척 일어난 나는 주인의 왼팔을 잡았다. 이젠 괜찮아. 나의 주인. 당신의 한은 내가 짊어질게.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담을 수 없는 귀에 나는 온 마음을 담아 속삭였다. 너무 낡았던 탓일까. 파삭, 하고. 내가 바친 그것에 비해 주인의 왼팔은 너무나 쉽게 떼어졌다.
비로소 나는 생각했다.
그날, 처음으로 나를 안아줬을 때.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모든 이들을 대신해 ‘미안하다’라는 말을 전해줬을 때.
당신이 알려준, 내 안에 남은 이 마지막 마음을.
- 사랑이라고 이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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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입니다. 드디어 진짜 보여드리고 싶었던 이야기가 시작되었네요. 이 소설을 기획했을 때, '어떻게 데레라는 캐릭터가 이토록 변화하는 걸 납득시킬 수 있을까?'에 대해 엄청 고심을 많이 했습니다. 연쇄분열 업데이트 때 추가된 설정도 그렇지만, 이 부분을 구상하는 게 너무 어려워서 이 짤막한 서막을 맺음하는데 너무 오래 걸린 듯 합니다. 다시금 늦어져서 죄송하다고, 그리고 기다려주셔서 감사하단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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