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만은 살아야 한다’, ‘왜 너만이 살아남은 거냐’, ‘차라리 모두 죽어버렸으면 좋을 텐데’, ‘미안하다’, ‘돌아갈 수 없어’, ‘집에 가고 싶어’, ‘이젠 싫어’.
‘온 세상이 시끄러웠다. 자동차가 굴러가고,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말을 하고, 숨을 쉬고, 몸을 움직이고, 움찔대고, 발목을 굴리고, 찌푸리고, 펼치고, 떠들고. 그 사이에는 끼릭대는 소리가 있었다. 숨길 수 없을 만큼 이질적인 소리. 모터가 감기고 금속이 움직이는 소리. 인간과 인형이 한데 이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맞물리지 않는 화음을 내면서.
열넷, 또는 열다섯. 내가 사는 세상은 언제나 시끄러웠고, 누나도 이건 알지 못했다.’
‘전쟁이란 단어를 알게 되었을 때, 내가 얼마나 그 단어를 없애고 싶었는지 선명히 기억한다. 다른 사람에 비해 나와 누나의 삶은 그럭저럭 괜찮았음에도, 나는 그 단어를 너무나도 없애고 싶었다. 끊임없이 들려왔거든. 온갖 소리가.
내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병원에 있었다. 몸이 아닌 마음을 치료하는 곳이라고 했다.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귀를 막아도 들리고, 눈을 감아도 보이는데 도대체 무슨 소용이야? 그리고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엄마와 아빠라는 단어에 대해 너무 늦게 배웠고, 그렇기에 그것은 나중에 생기는 무언가라고 생각했다. 누나. 그리고 누나는 때때로 책을 가져오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어. 같은 곳에서 살지도 않았고. 그저 때때로 와주는 사람.’
‘열넷, 또는 열다섯이 되던 날. 살기 싫단 생각은 죽기 무섭단 마음을 눌러냈다.’
‘나는 대부분의 일을 알지 못했다. 그저 그날, 언제나처럼 듣고 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에 있었다. 총성과 사이렌, 하얗지 않고 붉게 점멸하는 불빛. 아이러니하게도 죽기로 결심한 날 그런 일이 일어났다. 저항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정말 죽었을 텐데.’
‘제레. 누나가 왜 거기 쓰러져 있는 거야.’
‘온갖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 경적 소리, 그리고 새어 나오는 핏물에 땅바닥이 적셔지고, 두근대는 심장소리가 차츰 잦아들어가는 소리까지. 세상이 시끄러워졌다. 지금껏 잊어버린 것을 겨우 떠올린 것처럼. 존재하지 않았던 환상을 듣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듣게 됐다.’
‘정처 없이 도망쳤다. 겨우 누나를 데리고 도망쳤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그 공간에서 벗어났다, 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소리가 차츰 잦아들게 되자, 망연한 의문 하나가 내 머릿속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늘은 더없이 아득하고, 땅은 산산이 부서진 것 같았다. 오직 쏟아지는 비의 존재가 이곳이 현실이라는 것을 을러줬다. 누나. 나는 어디로 가야 해? 대답은 없었다. 빗소리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렸다. 아직 숨은 붙어있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다시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영겁 같은 시간이 흐른 뒤, 의수와 의족을 찬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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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첫날 이후, 한동안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안젤리아는 상당히 괜찮은 대우를 해주었다. 제레를 입원시켜준 다음, 그녀는 이 어린 남자아이랑 같이 있으면서 이 꼬마가 어떠한지 조금씩 이해했다. 사실 그만한 시간적 여유가 많은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합리화했다. 자신은 이미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으니, 더 이상 그리폰&크루거 측의 인맥을 쓰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안전국에 마냥 의지할 수도 없었다. 나비 사건과 연관되어 있단 걸 알게 된 이상 그들은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결국, 인력이 필요하면 그녀 자신이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자, 선물. 생각보다 잘 어울리네.”
…아니면, 그때 그녀 자신이 원했던 것을 대신 누리게 해준다던가. 온 세상을 다 부숴버리고 싶었던 그 시절을 생각했다. 그날 저녁, 부모 대신 찾아온 부고에, 안나였던 시절의 안젤리아는 그런 마음을 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이제 같은 마음을 품은 꼬마를 만난 어른이 되어 있었다.
멍하니 보는 데레에게 그녀는 헤드폰을 덮어 씌워줬다.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결 잦아들었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 주의를 기울여야 들릴 만큼 크게 줄어들었다. 수년 만에 느끼는 조용함이 어색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감사, 합니다.”
“편하게 말하래도. 괜찮아.”
살짝 고개를 숙이는 그에게 안젤리아는 푹, 부스스한 머릴 눌러 쓰다듬었다. 이럴 때 보면 그냥 평범한 애 같은데.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의수를 어떻게 분해했냔 말에 ‘들어서’ 알 수 있단 말에, 그녀 또한 처음엔 믿지 않았다. 그러나 길 건너 맞은편으로 가고 있는 초록색 옷을 입은 남자가 허덕이며 짧게 숨을 몰아쉬고 있다던가, 여기서 6, 7미터 뒤에 있는 여자는 손목 관절에 미세한 진동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비가 필요한 인형이라 말하자, 믿을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생각하게 됐다. ‘도대체 이 꼬마는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 걸까?’
그래서 준 선물은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듯했다. 처음 봤을 때 보였던 공격적인 모습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길거릴 가다가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며 몸을 못 가눌 땐 얼마나 당황했는지, 겨우 조용한 곳을 찾아 공원 벤치에 앉혀놨더니, 이번엔 진통제 사러 다녀온 사이 그새 지나가던 인형 하나를 부수려 들었던 탓에 뜯어말리느라 진땀을 뺐었다. 이런저런 시행착오들. 이제야 겨우 좀 얌전해진 덕에 실없이 웃으며 추억할 수 있는 일이겠지, 하고. 안젤리아는 생각했다.
이렇게 한동안은 꽤나 괜찮았다. 한동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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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오지 않았다. 그날은 어쩐지 그랬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이곳에 왔던 것처럼 새벽녘에 깨고 말았다. 아니, “어쩐지 그랬다” 같은 우연이 아니었다.’
‘나는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따라,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그 사람의 방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목소리는 그곳에서 흘러나왔다. 인기척은 하나인데 목소리는 둘이었다. 누구지? 나는 문틈으로 그 안을 지켜보았다.’
[…정말 많이 변했구나, 안제.]
‘통신 너머의 목소리는 가라앉은 투로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보여?”
[응…. 예전의 너는 무언가… 쫓기는 듯한 인상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라. 조금… 편안해진 느낌…? 뭐라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그 사람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좀 더 자세히 봤다. 하얀 가운을 입은 칙칙한 머리카락의 사람. 화상 통신인 듯했다. 이 둘은 서로를 이미 아는 것 같았다. 첫날 밤 들었던 목소리하곤 다른데. 친구일까? 생각해보면 나는 한 번도 그 사람의 지인을 본 적이 없었다.’
‘얼버무리듯 그 사람은 화제를 돌렸다.’
“AR팀 쪽은 어때?”
[…모르겠어. 네가 사라진 그날 이후로, 그 아이들도 전부 어딨는지 알 수가 없어. 사실 나는 너도 죽었다고 생각했으니까….]
“페르시카, 보다시피 난 멀쩡해. 그러니 그리 울적해 있지 말라고.”
[뭐가 멀쩡하다는 거야…! …정말, 아직도 너라는 사람을 잘 모르겠어. 너에 대해 알아갈 때마다, 이미 너는 조금씩 변해있어. 이해할 수가 없다고. 어떻게 팔다리가 잘리고도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는 건데…?]
‘순간 격앙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날 향한 게 아님에도 퍼득, 놀랄 만큼 박력이 있었다. 다행히 들키진 않은 것 같았다. 별 미동 없는 그 사람을 보면.’
“…뭐어.”
‘그 사람은 그저, 멋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누구나 시간이란 게 흐르면 변하는 거야, 페르시카. 너 또한 그렇듯 말야.”
[내가…?]
“그래. 네가.”
‘그 사람은 잠시 헛기침을 하고선 말을 이었다.’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그 아이들은 유능하니까,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라고 말이야.”
[그럴만한 이유…?]
“어쩌면 네가 쫓는 진실에 대해 알아냈을지도 모르지. 나비 사건 말야. 비록 일부만 깨달았을 뿐이지만, 나도 놀랐거든.”
‘그 사람은 통신 너머의 목소리가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먼저 말을 이었다.’
“내가 속한 국가 안전국이, 그 사건의 흑막이란 것 말야.”
[뭐라고…?]
‘그 순간, 통신 너머의 목소리와 내 마음은 같은 말을 했다. 국가 안전국? 잘 생각해보면, 그 사람은 단 한 번도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에 속했는지에 대한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그저 호의로 그러한 의심을 녹여냈을 뿐이지.’
“캐묻지 마. 내가 아는 건 오직 그뿐이니까. …사실 지금도 실감이 안 나. 특히 ‘왜’ 그랬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가고. 그래서 네게 묻는 거야. 감 잡히는 것 있어?”
[…엘더 브레인? 아냐. 그들이 설령 그걸 가진다 한들… 기술력을 노린다 해도 유지보수 부담만 늘어날 뿐이야. 비용 면부터 전혀 수지가 안 맞아. 그렇다면….]
‘통신 너머의 상대는 혼란스러워했다. 내 심정과 같았다. 너무 비슷해서 거부감이 들 정도였다.’
[…나도 모르겠어. 그럴듯한 추측은 몇 가지 있지만, 전부 큰 부담을 감수해야 하니까… 굳이 그들이 그래야 할 이유로 성립하지 않아.]
“그러니까. 어쩌면 그 아이들이 바로 그 ‘왜’라는 단서를 찾았을지도 모르지. 그 정보가 너무 위험해서 네게 보낼지 고민하거나, 아니면 전송을 막으려는 철혈을 피해 멀리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거나. 중요한 건 그거야. - 네 아이들이잖아. 믿어보라고, 엄마.”
[어, 엄마는 무슨….]
‘그 뒤로 몇 차례 언사가 오갔지만, 나는 집중할 수 없었다. 나는 이 ’믿고 싶었던 사람‘이 누구인지 본질적으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평소처럼 태연히 인사하면서도 그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그날 병원에 가지 않았다. 제레의 병문안을 같이 갈 거냐 묻는 말에, 나는 피곤해서 그러지 않겠다고 답했다. 그 대신, 그 사람이 자릴 비운 사이 그녀의 방에 들어가 ’이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보게 되었다.’
‘그러지 않았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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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아침이었다. 거처로 돌아오는 길, 안젤리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레라는 여자아이는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몸 상태는 빠르게 호전되고 있었고, 그녀하고는 나름대로 이성적인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이상한 쪽은 데레라는 남자아이였다. 언제나 함께 따라나선 병문안을, 오늘은 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생각해봐도 짚이는 건 없었다. 물론 그 나이대 애들이 변덕스러운 건 예삿일이지만, 오늘 아침에 보인 태도는 확실히 이상했다. 꼭 처음 봤을 무렵, 그 날 선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은 인상이었다.
제대로 물어봐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거처에 도착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뭐야…?”
방문들은 훤히 열려 있었고, 누군가 급하게 나간 듯 전체적으로 집안이 심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가장 먼저 데레가 머물던 방을 확인한 안젤리아는, 그가 없단 걸 확인하자 이어서 자신의 방을 확인했다. 책장도 서랍도 엉망이 된 채 화면 보호기가 켜진 모니터만이 미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살짝 마우스를 움직이자 본래 비추던 내용을 드러내는 모니터. 그게 자신에 대한 신상 정보라는 걸 알자, 그녀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았다. 물론 알 수 없는 침입자가 들어와 그녀에 대한 정보를 빼간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고 확신했다. 책상에 놓여있는, 그에게 선물했던 헤드폰을 집어 들며 안젤리아는 중얼거렸다.
“가출…일까?”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라도 물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하필 주머니는 텅 비어있었다. 남매를 거둔 다음엔 다 버렸단 걸 뒤늦게 깨달은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엄마가 따로 없는 신세네. 그럼 이제….”
어디서 찾아야 하지? 꽤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갈 만한 곳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서로에 대해 모르는 점이 많다는 걸 통감한 안젤리아는 컴퓨터를 끄곤 다시금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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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였음 하는 때가 많다. 그러지도 못했기에. 왜냐하면, 그날 이후 의심하지 않음 살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이것이 어쩌면 신뢰의 증거라고 생각하니, 가슴 한 켠이 순간 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확실하게 알아야만 했다. 직접 물어봐야 들을 수 있는 건 잘 포장된 대답일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이 방법이 낫다, 라고. 나는 되뇌었다.’
‘방 안의 모습은 수수했다. 어쩐지 어수선한 느낌도 들었다. 생활에 딱 필요한 가구만 겨우 있으면서도, 책장 서랍 따위는 난잡하기 짝이 없었다. 너무 많은 자료에 정리 정돈을 포기한 듯 대충 얹어놓은 것 같았다. 겨우 몇 개, 철해둔 파일 중 신원이 분명해 보이는 것을 확보할 수 있었다.’
‘보고서, 보고서, 자료, 보고서. 이 사람은 무엇을 찾으려고 했던 거지? 사건이나 지역, 집단에 대한 자료나 보고서 나부랭이들이 한 무더기였다. 출처도 신소련 환경부, 내무부 같은 정부 기관이나 IOP 제조회사 같은, 일반인은 쉬이 접할 수 없는 곳들이었다. 도대체 왜?’
‘문득 툭, 하고 건드린 마우스에, 꺼진 줄 알았던 컴퓨터의 화면이 밝아졌다.’
‘방바닥에 펼쳐놓은 문서들을 출처별로 정리하던 중, 켜진 화면을 보자 그 앞에 달라붙었다. 어제 화상 통신을 한 다음 끄는 것을 잊고 그대로 둬버린 모양이다. 빠르게 스크롤하다 생각했다. 어떤 걸 찾아야 하지?’
‘하나하나, 그럴 듯 해 보이는 것들을 뒤적이다가 나는 하나의 이름을 발견했다. 소련-N2-K라는 이름의 파일. 그것을 열었던 건 우연인지, 아니면 필연인지.’
‘국가 안전국.’
‘내무부.’
‘내무군 대위.’
‘군인.’
‘나는 전쟁이란 단어를 처음 알았을 때를 생각했다.’
‘나는 그 단어를 너무나도 없애고 싶어했다.’
‘빌어먹게도 나는 세상 물정이라곤 하나 모르는 얼간이가 아니었다. 적어도, 그날 이후 온 세상을 떠돌다시피 하며, 제레를 돌보며 살아가는 동안 많은 걸 듣고 보고 말았다. 알고 싶었던 것 이상으로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알게 된 간단한 사실은 분명, 알고 싶지 않은 것 중에서도 최악이라 생각했다.’
‘나는 헤드폰을 벗었다.’
“…전쟁을 일으킨-.”
‘어딜 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나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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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했다.
무작정 걸어 나왔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너무나 막연했다. 멍하니, 반쯤 무의식적으로 걸으면서 데레는 생각했다.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은 걸까.
짤막한 진실을 알게 된 순간 피어난 거부감은, 식물의 뿌리처럼 그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언뜻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들어내려 하면 완강히 저항하는 점이 그러했다. 갑갑해서 참을 수가 없는 기분. 두어 차례, 데레는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뜯어낼 듯 가슴팍 위에서 움켜쥔 채 몇 차례 숨을 토해도 도저히 가시질 않았다.
도대체 왜?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도대체 왜 이토록 싫은 마음이 드는 걸까. 엄밀히 생각해보면 그는 전쟁의 기억이-.
‘너만은 살아야 한다’, ‘왜 너만이 살아남은 거냐’, ‘차라리 모두 죽어버렸으면 좋을 텐데’, ‘미안하다’, ‘돌아갈 수 없어’, ‘집에 가고 싶어’, ‘이젠 싫어’.
조금이나마 반추하려는 순간 퍼득, 차오르는 구토감. 그대로 허릴 숙인 채, 다만 토사물이 아니라 힘겨운 신음과 한숨만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떠올렸다. 제레. 이제 마음 놓을 수가 없다. 그가 사라진 이상 제레가 좋은 취급을 받을 거란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하지만 빼내올 수도 없었다. 그렇다 한들 뭐가 달라지지? 그 아픈 몸을 이끌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누나가 당해선 안 되는 일인데.
머리를 감싸 쥐었다. 헤드폰을 쓰지 않아 거리의 소음은 여과 없이 들려왔다. 데레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차츰 커져만 갔다. 나는 정말 뭘 해야 하는 거지? 뭘 할 수 있는 거지? 답할 수 없는 의문이 차올라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나는.
그 순간.
세상에 거대한 조명 하나가 더해졌다 빼진 것 같았다. 잠시 먹먹해진 귀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어서, 데레가 알 수 있었던 건 그 정도뿐이었다. 아니, 어찌할 새도 없이 들어 올려진 몸이, 이내 강하게 내팽개치는 경험 또한 있었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가시자 멀리서 울리는 듯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팔다리는, 아직 붙어있는 것 같았다. 무릎과 손바닥이 뜨거웠다. 머리도 아팠지만 그리 심하게 부딪친 것 같진 않았다. 아무래도 데굴데굴 구른 것 같았다. 덕분에 죽진 않았지만, 몸 구석구석이 쓰라려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뭐, 야. 도대체-” 겨우 입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가, 곧 알게 되었다.
비명. 사람인 것과 사람을 흉내 내는 것이 섞여 있었다. 두 블록 아래 사거리에선 화재가 발생했다. 아니, 그곳만이 아니다. 여기서 서쪽, 북쪽, 동쪽, 그리고 남쪽에도. 여기서 가깝고 멀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 바스라지면서, 마저 붕괴하는 건물의 소릴 듣는 것과 동시에 모든 것이 좀 더 분명해졌다. 포격에 맞아 다리가 잘린 사람, 부서진 잔해에 깔린 사람, 부모를 찾는 아이, 그리고.
인간이 아닌 것들. 열을 이뤄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데레가 떠올린 것은 인형으로 된 군대였다. 그중에서도, 사람의 통제에서 벗어난 것들.
“철혈공조….”
어디로 가야 하지? 순식간에 머리를 굴린다. 어디로, 어디부터 가야 하지? 제레는 어디있지? 병원에. 하지만 그 병원이 어디지? 지금 듣고 있는 불타는 소리 중 단 한 곳도 그 병원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
데레는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누구라도 좋으니까, 대답해줬으면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 아니, 이번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그 순간, 데레는 하나의 소리를 포착했다. 온갖 소음 속에서도 확실하게 그 존재를 각인시키듯 다가오고 있었다. 다급하게, 서둘러 뛰어오고 있다. 헐떡이는 걸 보면 사람인데, 끼릭대는 소리가 들리는 게-.
“숙여!”
살짝 돌아보려는 순간 다급하게 외치는 목소리와 함께, 그리고 쾅 터지는 폭음과 함께, 데레는 다시금 자기 몸이 어찌할 새도 없이 들어 올려지는 경험을 했다. 아니, 그 전과 달랐다. 누군가가 확실하게 붙잡고 있는 느낌. 꼬옥, 뒤에서 안은 채 몇 바퀴를 구르고 나서야 겨우 멈췄다.
그는 올려다봤다. 그리고 가장 떠오른 생각을 먼저 말했다.
“…왜, 당신, 이…?”
그리고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안젤리아는 말했다.
“놓고 갔더라, 선물.”
팔을 풀어주며, 흔든 오른손에는 그때의 헤드폰이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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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하고도 2주 남짓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연쇄분열 깨고, 개장 스크립트 보면서 머리 싸매고 전개랑 캐릭터 해석 뜯어고치느라 많이 늦어졌네요;; 혹시라도 기다리셨던 분들께 죄송하단 말씀 전하면서, 덕분에 겨우 마칠 수 있었습니다. 감사인사 전하며, 내일 이어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