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月 / 그림: Lazaroos
Story
“어리석다, 어리석어”
아득한 진공 상태에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는 귓가에 전해지는 소리가 아닌, 머릿속을 울리는 이명과도 같은 소리였다.
“거짓된 빛에 가려 한 치 발밑의 진실도 보지 못하는구나.”
카시야스는 미간을 모은 채 웅웅거리는 목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시선을 돌렸다. 잉크가 물에 번진 듯, 뙤약볕 아래 아른거리는 아지랑이처럼 흐릿한 존재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크?”
보랏빛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눈 앞을 제대로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어렴풋하게 보이는 형체로 그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었다.
카시야스는 루크로 짐작되는 존재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떼며 허리춤에 꽃인 검 손잡이로 손을 옮겼다.
그는 죽었다. 검은 악몽으로 가득하던 죽은 자의 성 안에서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으며, 희미하게 전해져 오던 사도의 기운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눈앞에 저것은 무어란 말인가? 이것은 꿈일까? 자신이 꿈이란 걸 꾸던가?
의심스럽게 흐릿한 존재로 다가갈 때쯤, 그 존재는 보랏빛 연기와 함께 사라지며 반대편에 다른 존재가 안갯속에서 일렁이며 형체를 갖추었다.
그 존재를 향해 돌아선 카시야스는 확신했다. 이것은 꿈이다.
매사가 생과 사를 오가던 에컨에서부터 수면을 취하지 않는 것이 버릇이 된 그에게 휴식이란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전부였지만, 이 이상의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눈 앞에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의 검으로 숨을 거두었던 그 존재는 루크에게 조종당하던 모습이 아닌, 먼 옛날 에컨에서의 그때처럼 당당하고 존재감 넘치는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친우여, 자네가 찾던 신념의 답은 찾았는가?”
숨이 턱 막힌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바라보는 야신의 시선에 어깨 위가 짓눌리듯 무거워졌다. 스스로도 계속 의심하고 되뇌던 질문. 그것을 자신의 오랜 친우이자, 경쟁자, 그리고 이제는 기억 속의 부산물이 되어버린 그에게 듣자 마음이 어지러웠다.
“찾을 때까지 검을 휘두를 것이네.”
자신에게 읊조리는 다짐이었다. 망령이 되어버린 기억의 조각에게 답하는 것이 아닌.
“그 검 끝이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나지막하게 건네는 목소리가 마치 꾸짖는 것처럼 들렸다. 평생을 자신의 검 앞에서 부끄럼 없다 생각했지만 담담한 그 어조에 괜스레 벌거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방향을 정하고 검을 휘두르지는 않아. 그저 검이 부딪히는 곳으로 휘두를 뿐.”
변명처럼 내뱉은 말에 카시야스의 입안이 썼다. 하지만 스스로 걸어온 길이 잘못되었다고는 추호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카시야스의 답에 야신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미소와 함께 또다시 무너지듯 연기가 되어 사라진 형체. 그 뒤로 다른 누군가의 모습이 흐릿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마계에 당신이 필요한 겁니다.”
차분한 얼굴 뒤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는 여인.
“난 누군가를 위해 싸우지 않는다. 거기에는 마계도 포함이야.”
힐더와 잠시 뜻을 같이한 것도 그저 검을 휘두르기 위해서였을 뿐, 그녀와 같은 대의명분 따위를 검에 새겨 두지는 않았다.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검 끝을 향하는 것이 마계도, 힐더도 될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녀는 웃었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물론이지요.”
저 의중을 알 수 없는 말들이 가끔은 그의 팔다리를 옭아맸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무기력한 나방이 된 것처럼. 그가 뭐라 입을 떼려는 순간 그녀 또한 연기와 같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웅웅거리는 이명 음은 그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 소리는 노인의 목소리인 듯, 여인의 목소리인 듯, 또는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로 혼란스럽게 엉켜 들었다.
“불쌍하다, 불쌍해.”
“가엾은 날붙이 같으니…”
“이것만은 기억…”
"찾는 것은 뒤집혀진 성 아래에…"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수많은 목소리,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들이 허공을 맴돌았다.
“세상을 투영하는 눈...”
“그들이 지키려는 것.”
"그것에 다다를수록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으니…"
정신없이 쏟아지는 목소리들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뒤집혀진 성이니, 투영하는 눈이니 따위는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장은 머리를 울리는 이 끔찍한 목소리에서 해방되고 싶을 뿐, 웅웅거리는 목소리들 사이에서 미간을 모은 채 두 눈을 감고 있던 카시야스는 번개 같은 동작으로 검을 내리그었다. 그러자 목소리가 잦아들며 어둡고 뿌옇던 공간이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눈을 뜬 카시야스는 가부좌를 튼 자세 그대로였다. 좀 전에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이 무엇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귓가에는 여전히 머리를 울리던 조각난 말들이, 야신이 건넨 질문이 맴돌았다.
부숴진 성 패드릭 성당 잔해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카시야스는 한동안 굳어진 듯 일어날 줄 몰랐다.
“떠나시는 건가요?”
센트럴파크에서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한 케이트의 말이었다.
“어차피 허울 좋은 계약 관계였을 뿐, 제대로 싸우게 해준 적도 없지 않나.”
“제가 카시야스님의 손을 빌릴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래… 어쩌면 네 제자들도 이제는 내 분신의 도움이 필요 없을지 모르겠군.”
케이트는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한 아이들입니다.”
“너나 내 손을 탈 일도 얼마 안 남았을 거야.”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때까지만 부탁드릴게요.”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콧바람 소리가 들렸지만, 무언의 긍정에 가깝다는 걸 케이트는 알고 있었다.
“아라드로 가시는 건가요?”
카시야스는 대답 대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자의 성에서 느꼈던 뚜렷하지 않지만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미약한 기운. 그 것이 시발점이 된 것이리라.
그것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신경에 거슬리는지, 희미하게 느껴지는 옅은 기운만으로도 왜이리 강렬하게 이끌리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어쩌면. 머릿속의 존재들이 읊조린 자신이 찾는 것이라는 게 그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을 어지럽혔던 목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왜 그들이 자신에게 그러한 메시지를 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갑갑하고 막연했던 기분이 그 일로 하여금 실마리를 얻은 듯 조금은 움트였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들이 전한 조각난 단어 중 뒤집혀진 성 아래. 이것도 필시 죽은 자의 성 아래의 그곳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했다. 나름대로 머릿속 조각난 말들을 끼워 맞춰가던 그때, 케이트가 입을 열었다.
“힐더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걱정과 근심이 섞인 염려이기도 했다. 어쩌면 허울뿐인 계약 관계였을지라도 그들 사이에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무언가가 생겼는지도 모른다.
“알고 있다.”
정말 개의치 않는다는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그가 알아챌 정도라면 힐더가 모르고 있을 리 만무했다. 그녀라면 한 발, 아니 몇 수를 앞서 계획하고 내다보고 있을 테니.
그런 그녀가 아직까지 조용하다는 것은, 그녀의 계획에서 ‘이것’보다는 ‘다른 것’의 우선순위가 더 높다는 것이거나, 아니면… 아직은 그녀도 이 기운의 정체를 정확히 모른다는 것일 거다. 뚜렷한 목적과 결론 없이 불확실한 계획을 준비할 만큼 허술한 여자가 아니니까...
그렇다면 그에게는 잘된 일이다.
힐더가 계획하기 전에 먼저 그 기운을 찾아내면 되는 거니까. 생각보다 행동, 말보다 칼이 먼저 앞서는 것이 귀면족 아닌가.
번뜩이는 송곳니를 드러내는 그의 모습이 위협적일 만도 했지만, 케이트는 그간의 세월로 그것이 그가 짓는 미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이겠군요.”
씁쓸한 그녀의 물음에 카시야스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더 이상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들 사이에 침묵이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깊은 유대감은 없었지만 말 없이도 서로의 의중을 눈치 챌 만큼의 시간을 함께한 그들이었다.
애초에 살아온 환경도, 목적도 달랐던 그들. 그런 그들이 계약이라는 울타리 안에 연결되어 생긴 짧은 인연. 하지만 케이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스쳐가는 바람과 같은 자. 어디에도 묶어 둘 수 없으며, 스스로도 끊임없이 방황하며 헤매일 존재였다. 이렇게 짧게나마 인연이 닿았던 것도 신기한 일이리라.
가타부타 말없이 홀연히 돌아서는 그다운 뒷모습에, 케이트는 그가 찾는 것에 대한 답을 얻기를 작게나마 빌어주었다. 하지만 가슴 한 켠에는 불안감이 조그맣게 움트기 시작했다.
사도는 마계에서 크나큰 상징성을 지닌 존재,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마계의 균형과 질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카시야스와의 계약 덕에 센트럴파크와 서클메이지가 마계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해도, 사도라는 존재만으로 주는 위압감이 그러했으니까... 케이트는 마계의 균형을 위해서 카시야스의 부재를 굳이 공론화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작아지는 케이트의 머리 위로, 마계의 하늘이 한바탕 쏟아지려는지 어지러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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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소설형식으로는 이렇게 분위기 있게 쓸수 있으면서 천계스토리는 그따위..? 스토리북은 참 좋았는데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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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허울 좋은 계약 관계였을 뿐, 제대로 싸우게 해준 적도 없지 않나.” “제가 카시야스님의 손을 빌릴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래… 어쩌면 네 제자들도 이제는 내 분신의 도움이 필요 없을지 모르겠군.” | 20.04.02 13:4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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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소설형식으로는 이렇게 분위기 있게 쓸수 있으면서 천계스토리는 그따위..? 스토리북은 참 좋았는데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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