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났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의 문 두드리는 소리가 있었다.
남자는화들짝 놀란 것처럼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코끝을 사정없이 에는 새벽 공기를 느꼈는지,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남자는 새하얗게 변색된 왼손으로 잘 뜨이지 않는 눈을 비볐다. 눈곱을 떼어낸 그의 눈에 침묵에 휩싸인 도장 건물이 들어왔다.
“젠장……”
그는작게 몸을 떨며 온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꼈다. 남자는 잠의 어둠으로부터기억을 깨우려는 듯 잠시 주위를 살폈다. 이윽고 그는 대청마루 한가운데에서 이불도 없이 밤을 지새웠음을깨달았다.
가을에서 겨울로 이행하는 때임을 감안하더라도 해가 지평선을 타넘기에는 일렀다. 흐릿하게 밀려나는 칠흑의 장막만이 몇 부지런한, 혹은 분주한 이들에게하루의 시작을 알릴 뿐이었다.
남자는완전히 몸을 일으켜 작은 마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흙 바닥은 단단히 얼어붙어 먼지 하나 날리지 않았다. 무엇이 거슬렸는지 그는 세게 발을 굴렀다. 여전히 지면은 미동도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대지를 잠시 노려본 그는 다시 서성이기 시작했다. 기분 나쁜 악몽을 걸음에 실어 털어내면서.
한동안그는 걷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그림자는 눈에 띄게 짧아져 있었다. 돋은 해가 문틈으로, 창으로, 그리고마침내 구름 없는 하늘에 우두커니 걸렸다. 그러나 그의 서성임을 멈춘 것은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대문을두드리는 소리였다. 손잡이가 나무 문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에 그의 걸음이 멎었다. 이윽고 고고한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남자를 불러냈다. 그 이면에숨은 조급함을 감지한 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칼렙(Chaleb)공, 계십니까?”
“문은 열려 있으니 들어오시오.”
칼렙이라불린 남자는 눈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제대로 깎지 않아 아귀가 맞지 않는 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지벤 황국의 수석 궁녀가 문지방을 타넘어 그에게 허리를 굽혔다. 마주목례를 한 칼렙이 약간 쉬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키츠카 양, 반갑군요. 급한 일이 있어 보이는데?”
“죄송합니다. 전하로부터의 전갈이 있어 이른 시간에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그렇소?”
칼렙은팔짱을 꼈다. 마를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 안에서 황국의 국새가 찍힌 봉투를 꺼내 건넸다. 안에는 조금 쭈글쭈글해진 종이 한 장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천천히 읽었다. 한 줄 한 줄 훑어 내려가는 그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새겨졌다. 그는 이내 종이를 접어 바지 주머니에 넣고 말했다.
“날 보자고 하신다고요?”
“예. 그……공께서 최근 경황이 없으셨으니 말입니다. 복구 작업에도 많은 도움을 주셨고요.”
그녀의말은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늑대 털 같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주름이 가기 시작한 얼굴을 미세하게 일그러뜨린 채였다. 마를렌은그가 입을 열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마침내 칼렙이 말을 꺼냈다.
“나를 찾으신다면 가야지요. 언제라고 말씀하셨는지 들었소? 이 서신에 적혀 있지는 않군요.”
“언제라도 무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라도…… 라.”
칼렙은마를렌의 말에 숨은 저의를 깨닫고 낮게 웃었다. 마를렌은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잠시 응시하던 칼렙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럼 돌아가서 오늘 저녁 시간 정도에찾아 뵙겠다고 전하시오. 듣자 하니 황녀의 정원 이외의 말상대가 필요하신 모양이로군요. 더 일찍 가고 싶으나 오후에는 선약이 있어 곤란하오.”
“잘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이외에 할 말은 있으시오?”
“없습니다…… 최소한 지금은 없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마를렌은목례를 하고 사라졌다. 칼렙은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잠시 바라보았다.높은 담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았으나, 겐트 거리는 여느 낮 시간과 같이 소란스러워져 있었다. 그는 이 중에 몇 명이나 지난 전쟁의 공로자를 떠올리고 있는지를 속으로 헤아리며 청명하고 차가운 허공을 응시했다. 결론을 내린 칼렙의 면면에 그의 코끝을 에는 칼바람만큼이나 차디찬 냉소가 어렸다.
그는도장 내실로 들어가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칼렙이마침내 도장 대문을 걸어 잠그고 나섰을 때 시계는 이미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잠시 식사를 하러사무실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던 사람들도 다시금 일터로 돌아가 거리는 몇 시간 전에 비해 한산했다. 그러나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삼십 분 정도가 남아 있음을 알기에, 그의 걸음은 여유로웠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하늘을 멍하니 응시하며 걷던 그가 불현듯 휘청하더니 자세를 바로잡았다. 보도는 보수 작업이 잘 되지 않아 군데군데 블록이 깨지고 뒤집어져 있었다. 포탄구멍에 가림막만 둘러 놓은 곳도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칼렙은 튀어나온 블록을 잠시 쏘아보았다. 차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거리 양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너진 것을 방수포로 대충 가려 놓은 건물이 푸딩의 건포도마냥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이곳저곳에치유되지 않은 상흔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가 정신없이 지나가며 칼렙의 어깨를 툭 쳤다. 그는 뒤돌아 서서 겐트 수비대 제복을 입은 남자의 다리 한쪽이 없는 것을 보았다. 그는 칼렙을 알아보지 못했는지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칼렙은어금니를 악물며 허리춤에 찬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평소와 달리 그는 그 감촉이 익숙하지 않다고느꼈다. 귀수 때문인지도 몰랐으나, 그는 다시 지난밤에 꾸었던꿈을 떠올리고 있었다.
생각하지 않은 걸음 끝에 그는 궁궐 근교의 작은 공원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이 잘 가꿔진 곳임을 보았다. 이른 시간이었기에젊은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상이 용사들과 노인들 몇이 느릿느릿 걷거나 벤치에 앉아 바둑이나 장기를 두고있었다. 그는 그 사이를 지나며 그들의 시선이 잠깐씩 자신을 향하는 것을 느꼈다 – 그러나 그 시선의의미만은 무시했다. 살얼음이 낀 호수 옆에는 작은 정자가 있었다. 거기에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아, 칼렙…….”
사자 갈기처럼 긴 금발 곱슬머리를 늘어뜨린 마계인 소녀가 반가운 목소리로 그를 맞았다. 그의 입에서 무심코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냉소와는 거리가 먼 미소였다. 하지만 소녀는 자기를 보자마자 웃는것을 보고 기분이 조금 상했는지 부루퉁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왜, 왜요? 왜 웃어요?”
“별 거 아니다.”
“매일 그런 식으로 얼버무리기나 하고.”
“알았다,알았어. 미안하다.”
칼렙은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정자에 앉았다. 소녀도 짐짓 마지못해 한다는 듯 그의 옆에 앉았다. 그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선은 얼어붙기 시작한 호수에가 있었다. 호수는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보이는 것보다 깊은지, 간간이살얼음 밑으로 지나다니는 물고기들이 그들의 눈에 띄었다.
문득칼렙이 말을 꺼냈다.
“그런데 엘리어스(Erlias)…….”
“네?”
엘리어스가가을 같은 눈길을 그에게 향했다. 칼렙은 말을 고르는 듯 침묵했다. 이윽고그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이내 다시 다물고 말았다. 그러나 엘리어스가 그에게 되묻기 전에 다시 말을 꺼냈다.
“요즘은 한 번 만나기도 쉽지 않구나.”
“그러네요…….”
그녀는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칼렙은 얼굴을 돌려 소녀의 면면을 살폈다. 피곤한듯, 그림자가 든 낯빛이 푸석했다. 도톰한 입술은 조금 갈라져있었다. 그녀는 칼렙이 그것을 보는 것을 알고 재빨리 입술을 축였다.
“학생 녀석들이 널 너무 못살게 구는 거아니니?”
“아뇨,그런 건 아닌데요.”
엘리어스가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무엇이 마뜩찮은지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훑어보던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강사 일이라는 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네요. 예전에 혼자 연구하는 거라고 쉬운 건 아니었지만요.”
“그런데 오늘은 어떻게 빠져나온 거니?”
“국립대학 학생회가 재건 사업을 돕는다고들었어요. 이번 주는 다들 나간다고 전해 주더라고요.”
“기특하기도 하지.”
젊은이들의 순수함에서 빛을 보았는지, 그의얼굴에서 번뇌의 색이 약간 가셨다. 엘리어스도 생긋 미소를 지었다. 칼렙이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거기서 뭘 한다고 했었지?”
“잊으셨어요?”
그녀가짐짓 뾰로통한 표정으로 그에게 눈을 흘겼다. 하지만 이내 빙긋이 웃어 보였다.
“원소학 강의를 해요. 물론 천계 사람들은 마법을 못 쓰고 산 지 몇 백 년이나 돼서 기초 지식이 전혀 없지만요. 그래서 지금은 개론 정도만 커리큘럼으로 짜고 있어요. 그리고 강의도강의이지만, 음…… 여기에 있는 과학자 분들하고 모임을 많이 가지는 편이에요. 세븐 샤즈 멤버들도 자주 오시고요. 저는 반대로 과학에 대해서는아직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생산적인 대화를 하기 위해서라도 공부를 더 많이 해야죠.”
“학자로 사는 건 참 어려운 일이로구나.”
칼렙은다소 측은한 시선을 그녀에게로 향했다. 엘리어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눈썹을 한 번 치켜 올렸다. 그가 다시 질문을 이었다.
“학생들은, 감당할 만하고?”
“솔직히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가르친다는게 좀 어색하긴 하죠.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녀는잠시 말을 고르는 듯 입을 다물었다. 엘리어스가 말을 잇기를 얼마간 기다리던 칼렙이 재차 물어 일렀다.
“그 점은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지. 젊은 친구들이 혹시…… 네가 어리거나, 타지 사람이라고 건방지게굴지는 않니?”
“아뇨!그렇진 않아요.”
엘리어스가얼른 부정했다. 워낙 단호한 목소리에 칼렙도 다소 놀란 듯 눈을 치켜 떴다. 그녀도 자기 말이 묘하게 반대로 해석될 수도 있음을 알았는지 약간 가라앉힌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히려 서로 존중하는 편이죠.”
“그러니?어떤 의미에서?”
엘리어스는잠시 골똘히 생각을 정리하고 그의 질문에 답했다.
“음……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서로의 분야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 때문이 아닐까 해요. 저사람은 어떻게 저런 걸 저렇게나 잘 알고 있을까, 그런 느낌 있죠?”
“그렇겠구나. 하긴, 너나 그 학생들이나 공부를 계속 할 사람들이니까 더 그렇겠지.”
칼렙은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대답을 머릿속으로 한동안 곱씹다가, 무엇인가가 생각난 듯 다시 말했다.
“사람은 자기와는 다른, 말하자면 생소한 것에 대해 생각보다 많이 민감하단다.”
그는잠시 말을 멈추었지만 엘리어스는 그의 말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이내 그가 팔짱을끼며 입을 열었다.
“물론 사람들이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그의 시선이 잠시 공원에 있는 사람들을 향했다 – 이런 상황에서 누군들 괴리감을 느끼지 않겠니. 나도여기 처음 왔을 때 그랬지만, 제국 병사들이 이 화려한 과학 문명을 처음 봤을 때 표정이 참 볼만했지. 하지만 천계인들이 보기에 나 같은 아라드인은 꼭 석기 시대 사람들 같을 거다.”
칼렙은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반 정도의 자기가 한 말에 대한 우스움, 나머지반 정도의 씁쓸함이 섞인 묘한 미소였다. 엘리어스는 그의 말을 이해하고는 나직한 한숨 소리를 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는 그들에게 동등하게 대우받을 수 없기에 아주 쉬운 위치에 있다는거란다. 우리도 마찬가지야. 이 사람들이 우리가과학적으로 발달하지 못했다고 깔보는 것만큼이나, 우리가 이 사람들을 마법의 마 자도 모르는 허우대만멀쩡한 허수아비로 보기도 쉬울 거란 말이지.”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엘리어스는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갈라진 입술에서는 쉽게 피가 흘렀다. 그녀는입술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솔직히 그런 사람들이 없다고는 말할 수없겠죠…… 하지만 최소한, 제가 보고 들을 수 있는 곳에서 그런 기색을 보이는 학생들은 못 봤어요. 그런 생각을 은연중에 품고 있을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서로 부족한 점을 배우려고 하는 의지는 분명하니까요. 전 그 점을 믿어요.”
“그래.”
칼렙은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공원의 사람들에게서 엘리어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내 그는 빙그레 웃음을 띄웠다. 그 미소는 분명한 신뢰와 자애를가득 담고 있었다.
“괜한 노파심이었을지도 모르지. 지금 같은 시기에 너 같은 선생이 있으니 겐트의 젊은이들은 복 받은 걸 게다.”
엘리어스는약간 수줍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도 약간 멋쩍었는지 몇 차례 헛기침을 했다. 그런 그들의 시선이 거의 동시에 서로를 향했다. 이내 두 사람은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이한동안 그렇게 웃고 났을 때, 돌연 바람이 쌩 하는 소리를 내며 정자를 타넘었다. 두터운 옷 틈새를 파고드는 냉기에 엘리어스가 몸서리를 쳤다. 그러자그가 슬쩍 웃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부터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네?”
“너, 마법사맞니?”
엘리어스는추위에 사고가 둔해진 탓인지, 잠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몇 초가 지나서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요, 요즘은이런 사소한 것도 깜빡 잊어버리네요…….”
“가끔 생각하는 건데 그 동안 내가 없었으면네가 얼마나 꾀죄죄하게 지냈을까 싶구나.”
칼렙이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놀려 댔다. 안 그래도 추위에 홍당무처럼 빨개진 엘리어스의 볼이 더욱더 새빨갛게물들었다. 그녀는 대답할 말이 궁한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케이프의 목 깃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허공을 몇 번 가르자 작은 별처럼 따스한 빛을 발하는 구체가 나타났다. 그러자 순식간에 언제 그랬냐는 듯 – 최소한 두 사람과 가까운 공간에서는 – 피어 오른 보송보송한 온기가 그들을휘감았다. 하지만 엘리어스의 두 볼은 여전히 새빨갰다. 그런소녀에게 잠시 그윽한 시선을 보내던 칼렙이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힘들지,이해한다.”
“어떻게요?”
“내가 너 같은 먹물은 아니지만 군인도강단에 서야 할 때가 있거든. 나도 해 봤고.”
고개를든 엘리어스는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칼렙이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사관학교 말이다.”
“그런 일도 하셨군요.”
“내가 너한테 얘기 안 했던가?”
“제가 기억하기로는, 네. 군인 얘기는 하셨지만.”
“그랬구나. 그 녀석들도 참 대단했지.”
그는어깨를 으쓱했다. 지난 몇 년간의 기억을 되살리는지 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엘리어스는 그 침묵을 깨지 않았다. 그들은 고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의 얼굴은 편안했다. 다만 함께 있는 것을 평안하게여길 뿐이었다.
십분쯤 지나 엘리어스가 불현듯 부산을 떨며 말했다.
“아, 잊어버릴뻔했네…….”
“뭘?”
“점심 식사, 안 하셨죠?”
그녀가작은 가방에서 플라스틱 밀폐용기를 꺼내 그에게 건네며 싱긋 웃었다. 햄이 든 샌드위치였다. 직접 준비한 듯 만듦새가 조금 어설펐다. 주름이 간 그의 얼굴에가만히 미소가 떠올랐다.
“조금 얼었구나.”
“어…… 그래요?”
그들이 있는 공간은 마법의 온기로 따뜻해져 있었지만,샌드위치는 찬 공기에 너무 오래 있었던 탓인지 버석하게 얼어 있었다. 그러나 칼렙은 그냉기를 무마할 만큼 뜨거운 무언가가 심장으로부터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괜찮아.고맙구나. 실은 아침부터 먹은 게 없었거든.”
“네? 칼렙이요?”
엘리어스가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그녀가 기억하기에 그는 융통성 없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별다른 이유 없이 생활의 순환을 깨는 사람도 아니었다. 엘리어스는금세 염려하는 빛을 보였다. 그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었다.
“피곤했을 텐데 어떻게 이런 걸 챙길 생각을했니?”
엘리어스는칼렙이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의 반문에는 다정한 관심이 어려 있었다. 그녀는 그가 하는 품을 따라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해 보고 싶었어요.”
“무슨 바람이라도 불었던 거니?”
“오랜만이니까,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거든요.”
말을마친 그녀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칼렙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 온기가 목구멍을 타넘는 것을 느꼈다. 자기가 한 말이 머쓱하게 느껴졌는지, 그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엘리어스가 얼른 입을 열었다.
“요즘 황도군을 도와 주신다면서요?”
“그래.”
“좀…… 어때요?”
엘리어스는막연한 것을 묻고 있었다. 칼렙은 그녀가 긴 대답을 원하는 것을 알았다.
“사람이 적어. 너무 부족해.”
첫운을 뗀 그는 말할 것을 속으로 정리하려는 듯 눈을 감았다. 그가 말을 이은 것은 얼마의 시간이 다시흐른 뒤였다.
“너도 알다시피 그들은 너무 많은 것을잃었지. 카르텔도 모자라서 사도까지 상대해야만 했으니까 – 우리가 도와주기는 했지만, 너무 많은 천계인의 피가 흘렀어.”
칼렙은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은 다시 시내를 향하고 있었다.
“내가 저번에 얘기했던 것 같은데, 난 그들의 교관 겸 군사 고문을 맡아 주고 있단다. 내가 배우고익힌 용병술과 이 쪽의 용병술이 사소한 부분부터 많이 다르니 원래라면 당연히 황도군이 전담해야 할 일이겠지만, 군인들을가르칠 수 있는 경험 많은 사람들이 많이 죽고 다쳤어. 이제 막 경험을 쌓아야만 할 젊은 풋내기 장교들조차도많이 남아 있지 않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든 적든 어떻게든 비어 버린 상급 지휘관의 자리를채워야만 했으니까……. 그 젊은이처럼.”
칼렙도 엘리어스도 그 젊은이가 누구를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목석 같은 붉은 머리 청년 장교를 떠올리며, 그는 다시 밀려오는쓰라림을 희석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샌드위치를 씹었다. 약간 얼어 버석거리는 식감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는 눈을 돌려 엘리어스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도 불과 얼마 전의기억을 떠올리는 듯 숙연해 보였다.
“물론 전례 없는 전쟁이 그 사람들에게가르친 것도 있었지. 하지만 미숙해. 여전히 미숙해…… 일개사병부터 연대장까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 하지만 열심히 배우려고는 해. 열정이 넘쳐. 그들도 자기들이 지금 어떤 짐을 짊어지고 있는지 잘알아. 하나같이 대견한 젊은이들이란다.”
어느 새 그의 손에 들린 샌드위치는 사라져 있었다. 그는자신의 빈 손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들과 내가 공통적으로 걱정하고 있는건, 지금 겐트에 한 번이라도 다시 난리가 나면 그 때는 정말 앞날을 장담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야.”
“저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엘리어스는긴장이 되는 듯 입술을 축이며 말했다. 칼렙은 손을 깍지 끼고 그녀에게 귀를 기울였다.
“실은 학생들이 돌아다니면서 그런 말을해요. 군대에 자원하겠다는 사람도 간간이 있어요. 그런 말을꺼내는 학생들이 다 그렇게 하지는 않아도, 정말로 휴학계를 내거나 자퇴를 하고 수업에 다시 오지 않는학생도 보이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보다는 다들 불안해 보여요. 교직원들도 그렇고…….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도 가끔 있어요. 그 사람들은 아마…….”
“피난을 갔겠지. 노스피스로.”
엘리어스는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아니면, 마가타라는 수단이 생겼으니 아라드로 갔을 수도 있겠구나.”
그는뭔가 떠오른 듯 말을 끊었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아니다. 그리로 가지는 않을 것 같구나.”
“그렇겠죠…… 그럴 만한 힘이 있는 사람이굳이 아라드로 가려고 할 리는 없겠죠?”
“그럴 거다.”
엘리어스는자신의 말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말했지만, 칼렙은 맞장구를 치자마자 그녀의 말을 뒤집어 해석했을때 나올 결론에 온 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엘리어스는 그런 그의 놀라움을 알아차리지못한 듯했다. 조금 전과는 다른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엘리어스는말없이 케이프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오래된 양모의 까슬까슬한 질감이 그녀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듯했다. 칼렙은 눈을 들어 멀지 않아 보이는 황궁을 바라보았다. 두 차례의전란을 거쳤음에도 눈에 띄게 상한 곳이 없이 높이 솟아 있었다. 그 모습이 무너지고 부서져 상흔이 완연한주위의 건물들과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그는 궁궐 안에 있을, 곧만나게 될 이와, 또 빽빽한 잔해의 숲에 꽉 들어찬 사람들을 떠올렸다.그는 거기서 또 다른 대비를 느끼고 몸서리쳤다.
문득칼렙이 입을 열었다.
“황녀님이 날 불렀단다.”
“황녀님이 칼렙을요?”
엘리어스에게는이것이 더욱 놀라운 소식인 듯, 반문하는 목소리는 한 톤 올라가 있었다. 칼렙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최근 현황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더구나. 그 밖에 개인적으로…… 내게 전해야만하는 소식도 있어 보이고.”
그의말의 뒷부분은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엘리어스에게만 겨우 들릴 정도로 소리가 줄어들어 있었다. 그녀는그 변화로부터 심상치 않은 기색을 감지하고, 그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으시대요?”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그런 것 같구나.”
“그런…….”
엘리어스는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검사의 짙푸른 눈은 연신 주위를 훑고 있었다.소녀는 초조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칼렙은 탐색을 멈추고 잠시 가만히 그 하얗고가는 손을 응시했다. 지나치게 굳어 버린 분위기를 풀려는 듯 그는 빙긋 웃어 보였다.
“뭐, 아닐지도모르지. 내가 지레짐작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런 일이 아니라도나를 자주 보자고도 전하시곤 했으니 괜한 기우일지 모르겠구나.”
“네에…….”
엘리어스는여전히 약간 불안해 보였지만 일단 그의 말을 듣기로 한 듯 그렇게 대답했다.
다시금호수와 같은 깊은 침묵이 임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청명한 초겨울 하늘로, 앙상하게 마른 단풍나무 숲으로, 또 사람들로 향했다가, 이따금씩 서로에게 돌아가 그윽한 정감을 나누었다.
얼마나지났을까, 멀찍이 떨어진 단풍나무 숲의 그림자가 호수의 얼음에 드리웠다. 칼렙은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엘리어스는그런 그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속삭였다.
“칼렙,자요?”
“아니.”
칼렙이슬그머니 눈을 뜨며 대답했다.
“왜 그러니?”
“잠깐 기대도 될까요?”
“곧 가야 하는데.”
“잠깐이면 돼요.”
엘리어스는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의 강인한 어깨에 몸을 맡겼다. 그는 가만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가 조금만 세게 건드리면 부서질 것처럼 연약해 보이는 육신이 그에게 의탁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 몇 년간의 여정을 떠올렸다. 불현듯 그는 지금까지 몇번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놀라운 책임감에 몸을 떨었다.
태양이내려앉고 주변이 따뜻한 까닭인지, 그녀는 어느 새 낮고 느린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칼렙의 눈은 빛을 밀쳐내고 나타나는 별들을 향했다. 그 가운데에서무엇을 읽었는지 나직한 탄식이 그의 튼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에 하나 둘씩불이 들어왔다. 밝지 않았다. 구석구석 밝혀 주지도 않았다. 그는 이 땅의 거대한 상처를 온전히 덮는 밤의 어둠과, 또 반딧불의무리처럼 점점이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았다.
그는잠든 소녀를 돌아보며 들릴 듯 말 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지금이야말로 빛은 구원이 되고, 어둠은 안식이 되어 주는 것 같구나.”
날은어둑해져 달빛이 비치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걷던 칼렙이 한 손을 빼 손목시계를 흘끗 쳐다보았다. 시계는 여덟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늦었군…….”
칼렙은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뿌연 김이 눈에 띄게 일었다. 거리는한산했다.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적었다. 밤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하러 나온 사람들만 간간이 눈에 띄었다. 드문드문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그는 켜지지 않은 등이 켜진 등보다 더 많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엘리어스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있던 공원에서 황궁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그녀가 사는 곳은 한참이나 떨어진 성곽 근처였다. 그녀를 깨워 데려다주는 동안 그들 사이에는 한 마디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이 그들의 친밀함을 증명해 주는것임을 그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손을 잡기도 하고 놓기도하였으나 온기는 끊이지 않고 오갔다.
“아니,모험가님 아니십니까?”
문득누군가가 칼렙에게 말을 걸어 왔다. 그는 뒤로 돌아 말을 건 남자를 보고 그가 겐트 수비대에서 본 적이있는 병사임을 알았다. 바빌론의 별동대를 습격할 때 구해 준 자였다.그 남자는 걸음을 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아이는 칼렙의인상에 겁을 먹었는지 자기 아버지에게 철썩 달라붙었다. 남자는 몸을 굽혀 아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이가 낯을 많이 가려서요.”
“괜찮네.”
그는빙긋 웃으며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쭈그려 앉았다.
“자네 아들인가?”
“예, 그렇습니다.”
“아버지를 닮아 듬직한 대장부로군.”
칼렙은아이의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아이는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한 손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자그마한 머리였다. 그는 천천히 아이의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나를 용케 기억하고 있군.”
“어떻게 잊어버리겠습니까? 옆에서 함께 싸우는 영광을 입었는데…….”
“영광이라고 할 게 있나? 난 어중이떠중이 칼잡이일 뿐일세.”
“모험가님은 황도의 영웅이시기도 하지만, 제게는 생명의 은인이시기도 하니까요.”
잠시말을 끊은 남자는 자신의 아들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이는 그들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듯, 빛나는 눈을 깜빡이기만 하고 있었다. 남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때 모험가님께서 제 근처에 계시지않았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겉으로는칼렙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그 말의 뼈는 아들을 위한 것이었다. 칼렙은조용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애 엄마도 저처럼 군인이었죠. 좋은 여자였습니다. 막 결혼하고 나서는 이젠 다 잘 될 거라도 생각했던적도 있었죠. 아들도 낳고…… 첫 번째 전쟁에서 둘 다 무사히 살아남았을 때는 정말로 두려워할 게 없다고생각했죠. 하지만 두 번은 없더군요. 2차 때 그 사람은전사했습니다. 전 외동아들이었고, 저희 부모님이나 장인어른, 장모님도 전쟁 통에 포격에 돌아가셔서……. 이 아이에겐 저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말을끊은 남자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칼렙은 그가 눈물을 감추고 싶어하는 것을 알았다. 그 생각대로, 다시 입을 여는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정말로 그 때 모험가님께서 도와 주시지않았더라면…….”
“자네에게 도움이 되어서 기쁘네. 이 아이에게도.”
칼렙은목 깊은 곳으로부터 차오르는 감동을 느끼고 눈을 깜빡였다.
“요즘은 지낼 만한가?”
“실은 순탄하지만은 않습니다.”
남자는어렵게 웃어 보였다. 칼렙은 남자가 할 말이 벌써부터 머릿속에 죄다 떠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미간이 미약하게 찌푸려졌다. 군 관계자이거나 관계자였던 이들은모두 그와 같은 정보를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근에 대대적인 군 규모 감축도 있었고……그래서 저도 지금은 군대에 있지 않습니다.”
“퇴직금이나 연금은?”
“아시다시피 지금 나라가 어려우니, 정해진 만큼은 받지 못했습니다.”
남자는적당히 둘러대려고 하는 모양이었지만, 칼렙은 그의 어두워진 표정으로부터 그가 단 한 푼의 보상도 없이쫓겨났다는 것을 읽어냈다. 그는 겐트에 머무르게 된 이후 자신이 만난 모든 퇴역 군인들은 한 명의 예외도없이 전부 이와 같이 답했음을 기억하고 관자놀이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자넨 아직 젊지 않나. 혼자 애도 키워야 하고. 그런데…….”
칼렙이이를 악물며 말을 마쳤다. 남자는 입술을 축였다. 복잡한눈빛이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래도 기본적인 식비는 받고 있기도 하고, 전 사지 멀쩡하게 살아남았으니 괜찮습니다. 다시 일할 수 있으니말입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일감도 많습니다. 한창복구 작업이 진행 중이니까요.”
“공사장에서 일하나?”
칼렙은슬쩍 그의 손을 살펴보았다. 굳은살과 티눈으로 뒤덮이다시피 하여 거칠었다. 총칼을 잡았던 자의 것이 아니었다. 흐릿한 가로등 불빛이었지만 햇빛에탄 살갗은 눈에 쉽사리 띄었다.
“네, 그렇습니다.”
“다행인가?”
“이 정도인 것에 감사해야 하겠지요. 특히 모험가님께는 더더욱 말입니다.”
그의말은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에 가까웠다. 살아남은 것으로, 사랑하는아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남자는 대답을 하면서도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고있었다. 칼렙은 먼젓번의 것과는 다른 쓰라림이 가슴을 할퀴는 것을 느꼈다. 남자는 그나마 긍정적인 축이었다. 그는 그가 만났던 다른 이들을떠올렸다. 그들 중의 누군가는 분노했다. 누군가는 절망했고, 누군가는 체념했다. 그들 중 많은 수의 비보를 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이는무거워진 분위기에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칼렙은 아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린아이의 눈빛은 그에게 애처로울 정도로 순진해 보였다. 그는 한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끊어서 말했다.
“잘 듣거라.”
아이는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 부모님께서는 영웅이시다. 마음껏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다. 비록 지금은 알아 주는 사람 하나없지만…….”
칼렙은잠시 말을 끊고 황궁을 바라보았다. 그를 한참이나 기다리고 있을 사람을 떠올렸다.
“네 세대에서도 그리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명심하거라. 너희가 감당할 싸움은 카르텔이나 안톤과의 싸움이 아니야. 온 지벤 황국의 인민들의 싸움이지. 네 아버지와 어머니와 같은 위대한영웅들이, 공로자들이 비로소 올바른 대우를 받으며 온전한 기쁨으로 웃을 수 있을 때까지, 그 싸움은 계속될 게다.”
그는몸을 일으켰다. 어느 새 시간이 흘러 있었다. 어린 황녀는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아이는 당연하게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에게서 어떠한 감흥을 느낀 것만은 분명했다. 칼렙은 고개를숙이고 있는 남자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함께 싸워서 영광이었네.”
“저야말로 그렇습니다.”
그들은굳게 악수를 나누고 돌아섰다. 칼렙은 뒤돌아보지 않고 성큼 걸음을 옮겼다.
칼렙이황궁 앞에 도달했을 때 시간은 거의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근위병 몇을 제외하고, 궁궐 문간에서 서성이며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그는그 사람을 알아보고 큰 소리로 불러 일렀다.
“키츠카 양?”
“아니,칼렙 공!”
그를알아본 마를렌이 거의 날다시피 하여 허겁지겁 다가왔다. 그녀의 표정은 당혹스러웠으나 그를 질책하는 기색이역력했다.
“대관절 어디 계셨길래 이제 오시는 겁니까?”
“약속이 내 생각보다 길어졌소. 오는 길에 퇴역 군인을 한 명 만나기도 했고. 전하께서는 아직 날기다리고 계시오?”
그의말의 두 번째 부분을 듣고 마를렌은 약간 납득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책망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고 다그쳤다.
“전하께서는 오후 다섯 시부터 쭉 공이오기만을 기다리시고 계셨습니다!”
“큰 결례를 범했군. 안내하시오. 즉각 가리다.”
“알겠습니다. 속히 따라오시지요.”
그는빠른 걸음으로 거의 공중에 붕 뜨다시피 성큼성큼 걷는 마를렌의 뒤를 따랐다. 궁궐의 관청 건물들에는당연하게도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전깃불도 모두 꺼져 건물들의 윤곽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황녀가 거처하는 황녀궁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빛에 의지하여야만 넘어지지 않고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은 걱정하지 않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서두르는 수석 궁녀가자빠져서 체통이라도 구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약간 불안함을 느낀 듯 이마를 찌푸렸다.
다행스럽게도그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다. 궁의 침전 내부에도 불은 밝게 들어와 있지 않았다. 앞이 겨우 보일 정도였다. 마를렌은 유일하게 밝은 불이 들어와 있는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궁녀 몇이 앞에서 대기하다가 마를렌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황녀의 서재였다. 그녀가 문을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전하,칼렙 공이 뵙고자 하나이다.”
“들라 이르라.”
근엄하게무게를 잡은 소녀의 목소리가 문 안에서 대답했다. 쉽사리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잘 포장된 음성이었다. 마를렌이 칼렙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검을 풀어 그녀에게 넘긴 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인들은 물러가도록 하라. 칼렙 공과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예, 전하.”
문바깥에서 궁녀들이 멀어지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에르제는 돌아앉아 있었다. 몸 전체가 의자 등받이에 가려져 있었다. 읽다 말고 덮은 것처럼보이는 책 몇 권이 마호가니 책상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 책 한 무더기 사이에서 식어빠진찻잔과 다과 몇 조각을 찾아낼 수 있었다. 벽 전체를 차지하는 책장에는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뽑았다가집어넣기를 반복한 듯 제대로 꽂히지 않은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칼렙은 그 풍경으로부터 황녀의 심란함을읽어내고, 무릎을 굽혀 예를 표했다.
“청하심을 받고 찾아왔습니다. 생각지 아니한 일로 늦게 되었습니다.”
그의말을 듣고서야 마침내 황녀가 의자를 빙글 돌려 그에게로 몸을 비췄다.
“일어나게.”
칼렙은그녀의 말대로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심신의 피로에 전 황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계속 서재에 있었는지 편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의생각과는 달리 황녀의 표정으로부터 화가 난 기색을 찾을 수 없음을 알고 당혹했다. 그녀는 그저 지친모습일 뿐이었다. 그것이 다른 모든 감정을 집어삼킨 듯 보였다.
“그런데 늦었다고……? 지금이 몇 시나 되었는가?”
“밤 아홉 시 십 분입니다.”
그는대답하기 위해 시계를 확인하며, 일국의 군주와의 약속에 이렇게나 늦은 스스로에게 놀랐다. 그러나 황녀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기만 했다.
“그렇군.마를렌이 전하기를 저녁 식사 시간 정도에 오겠다고 했다던데, 아닌가?”
“맞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겐가?”
“낮에는 엘리어스를 만났습니다…… 전하께서도그 아이를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알다마다. 자네 두 사람이 함께 다녔던 이야기를 많이 했었지. 그녀와도 자네와한 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그런데 엘리어스 양과만 그렇게 오래 있었던 건가?”
“그 아이를 집까지 데려다 주고 여기까지오는 길에 퇴역 군인을 한 명 만났습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의도치 않게 말이 길어지게 되더군요. 송구스럽습니다.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닐세.그런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내 마땅한 책무이거늘…… 그대가 대신해 준 셈이군.”
에르제는말꼬리를 흐렸다. 마를렌이 근처에 있을 때의 근엄한 가면은 지극히 옅게 희석되어 있었다. 칼렙은 말 못할 긍휼함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잠시 눈을 감은채 생각을 곱씹던 황녀가 책상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좀 앉게.”
“감사합니다.”
칼렙은살짝 목례를 하고 의자에 앉았다. 에르제가 앉아 있는 의자와 같은 것이었다. 빠져들 것 같은 푹신한 질감의 고급품이었다. 황녀는 그를 잠시 복잡한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녁은 들었는가?”
“아닙니다. 정신이 없다 보니 그만 잊고 있었습니다.”
“그럼 시간이 늦었지만 같이 들도록 하겠는가? 나도 그대를 기다리고 있던 터라.”
“아직 잡수시지 않으셨다고요?”
“뭐…… 그렇게 되었네.”
에르제는꺼질 것처럼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느긋해 보이는 미소였다. 허나 굳어 있는 입매가 그녀의 엉킨 실타래 같은 심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칼렙은 불현듯 치미는 죄책감에 어금니를 악물며 말했다.
“전하,제가 전하와의 약조를 가벼이 여긴 것은 사실이오나……”
“아니,아니야. 그 일에 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도록 하세. 짐은 정말로 거기에 대해서는 신경 쓰고 있지 않네.”
그녀는약간 신경질적으로 손을 내저으며 칼렙의 말을 끊었다. 그도 마지못해 하던 말을 멈추고 이 어린 황녀가원하는 대답을 줄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같이 들겠습니다.”
“그렇게 하겠다니 기쁘군.”
에르제는빙긋 웃으며 손을 뻗어 천장에 매달린 줄을 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궁녀들이 나타났다. 미리 얘기가 된 것인지 별도의 말이 없었음에도 야참으로 보이는 그릇 몇 개와 식기 두 벌을 큼직한 쟁반에 들고있었다. 그들은 어질러진 책상을 대강 정리하고 접시를 놓아 준 뒤 목례를 하고 물러갔다. 칼렙은 그들의 기계처럼 정확하고 군더더기 없는 행동거지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야참이라고해도 저녁 수라를 받지 않고 때우는 끼니라서인지, 칼렙이 보기에 음식은 제법 다채로웠다. 다채로울 뿐만 아니라 김이 올라오는 흰밥, 쇠고기가 든 미역국, 수란, 편육과 대구 살 부침, 동태찌개, 석쇠에 구운 쇠고기 구이가 먹음직하기도 하였다. 그는 하루 종일엘리어스가 만들어 준 샌드위치 한 개만 먹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슬며시 웃었다.
에르제는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수저를 들며 칼렙에게 권했다.
“사양 말고 마음껏 들게.”
“영광입니다. 감사히 들겠습니다, 전하.”
그들은식사를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허기져 있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의외로누구도 너무 허겁지겁 먹거나 너무 느리게 먹지 않았다. 간간이 인사치레로 – 혹은 진심으로 – 하는음식에 대한 칭찬을 제외하면 그들 사이에는 말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둘 모두 수저가 오가는 속도를더 이상 늘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수저가 은제 식기에 작게 부딪히는 소리정도만 간간이 날 뿐이었다.
제법풍성하게 차려진 반상이었지만, 그다지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릇은 깨끗하게 비었다. 에르제가 다시 천장의 줄을 당기자 예의 궁녀들이 나타났다. 그들은조금 전의 동작을 거꾸로 재생하는 것처럼 빈틈없는 동작으로 상을 치우고 새로 가져온 찻주전자와 다과 접시를 놓고 돌아갔다.
에르제는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잠시 칼렙의 얼굴을 응시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피곤해 보이지만 꿰뚫어보는 듯한 예리함과 담대함을 품은 눈길이었다. 그는그녀를 마주 바라보았다. 부담스럽지 않게 든든히 한 식사는 황녀의 기운을 보충해 주었을 뿐 아니라 가라앉은기분도 약간이나마 띄워 준 모양이었다. 아주 잠깐 동안의 탐색이 지나고, 에르제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식사는 마음에 들었는가? 괜찮다면 숙수의 실력을 평해 주었으면 좋겠군.”
“송구스럽습니다. 저와 같이 유리하는 자가 평가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긍정적인 의미로 말인가?”
“물론입니다.”
그것은분명한 진심이었다. 에르제는 손을 깍지 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무엇인가 떠오른 듯 말을 건넸다.
“그대나 나나 오늘 하루는 참으로 분주하게보낸 듯하군.”
“실은 전하를 뵙기 전까지 먹은 거라곤샌드위치 한 개가 전부였습니다.”
“그랬나?그걸로는 그 몸을 움직이기에 충분하지 않아 보이는데.”
“평범하지는 않은 경험이었으니, 괜찮습니다. 오히려 시장기가 좋은 반찬이 되었습니다.”
“그렇군.나도 그렇네. 부끄럽지만 오늘은 다소…… 마음이 편치 않았거든.”
에르제는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말에 흥미가 돌았는지, 그녀는 약간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샌드위치, 엘리어스 양이 만들어 준 건가?”
“그렇습니다.”
칼렙은그녀의 예리함에 약간 놀라며 대답했다. 에르제는 잠깐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는 잠깐 동안, 그녀가 일국의 군주이기 이전에 평범한 십대 소녀라는생각에 묘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맞았군.”
“이런 것도 통찰력이라고 하지요.”
“고맙네.”
에르제는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그녀가 약간정색을 하고 다시 물었다.
“그런데 식사도 잊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겐가?”
“오늘 저는 휴가였습니다만…… 고민거리가조금 있었습니다.”
“휴가?”
그녀는잠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뜻을 이해하고 말했다.
“아, 그대가훈련소 일을 맡아 주고 있었지. 이런 공을 잠시나마 잊다니 나도 참으로 부덕한 자야.”
“부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잠시 갈 곳을 잊어 맡은 가벼운 일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네. 그대는 참으로…… 큰 일을 연달아 해 주고 있어.”
황녀는잠시 입을 다물고 미간을 찌푸렸다. 칼렙은 에르제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음을, 그리고 이제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본격적으로 꺼낼 것임을 느꼈다. 그는눈을 돌려 주위를 살폈다. 마땅히 나야 할 생활의 소음 외에 다른 소리가 있는지, 그들 두 사람의 호흡 외에 낯선 이의 숨소리가 섞여 있는지, 오랜시간 동안 단련된 예민한 감각을 집중했다.
그들에게는다행스럽게도 그는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칼렙은 다시금 에르제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의 실타래를 푸는 동안 그가 무엇을 했는지 아는지 모르는지,느리고 낮게, 그러나 또박또박 한 단어씩 힘을 주어 말했다.
“오늘 보자고 한 건 앞으로의 일에 대해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네.”
에르제는잠시 말을 멈췄다. 스스로가 할 말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듯, 감정의소용돌이가 표정으로 드러나 있었다. 칼렙은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특별히 그대와 엘리어스 양, 그리고 여타의 모험가들이 많은 힘을 써 준 덕분에 카르텔과 사도라는, 천계의외적인 문제는 일단락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 짐이 그 과정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보고받고 있지는 못했지만그대들 두 사람이 얼마 전에 알려 주어 일의 진행을 보다 수월하게 알 수 있었네. 고맙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짐이 생각하기에는, 진정한 문제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황도를 좀먹고 있다네.”
황녀는이를 살짝 악물었다. 제대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표정의 변화였다. 칼렙은 그녀의 고운 얼굴에 드러난 고뇌를 보았다.
에르제는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말을 이었다.
“칼렙.”
칼렙은일순간 그녀의 목소리에서 일국의 군주가 아니라, 진정으로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십대 소녀의 애처로움을느꼈다. 그는 가슴을 찌르는 동정심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그대는 지금은 모험가의 신분이나, 젊었을 적에는 한 나라의 장수였다고 했었지.”
그의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 군의 일을 도와 주고있고.”
“말씀하시는 대로입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아라드와 우리 지벤 황국의힘에 대해 객관적으로 알고 있다고 봐도 되겠나?”
칼렙은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머릿속으로 잠시 정리했다. 그는 대답하기를 망설이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런가?”
황녀는긴장이 되는 듯 입술을 축였다. 그녀는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을 반쯤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본디 하려던 말을 하기에 당장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러다가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그대도 아는 일일 터이나 지금 제국인들이여기에 많이 오가고 있네. 그들은 마계 탐사에도 황녀를 보낼 만큼 흥미를 많이 보였지. 실제로 나도 마계에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네. 그토록어려운 상황에서도 많은 강자들과 사람들이 나름의 사회를 구축했고, 테라나이트를 비롯한 흥미로운 성질의광물들도 많지. 그리고 그 마계로 가려면 이 지벤 황국의 영토를 거쳐야 하고. 그들이 오가면서 제국과 우리와의 교류도 활발해졌네. 여기서 일반백성들이 소비하지 못하는 고급품들이 제국으로 흘러가고 있고, 제국의 문물도 조금씩이나마 들어오고 있지. 서로를 알아 가고 있어. 그 점은 좋다고 하겠지만…….”
에르제는멍하니 손을 뻗어 차를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속이 타는 듯했다. 새로가져온 주전자에 든 차는 그새 다 식어 있었다. 칼렙은 다과를 한 조각 집어 천천히 씹으며 그녀의 표정을살폈다.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듯 눈에 띄게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그로 인해 가장 큰 이익을 보고 있는건 귀족들이네. 제국이 관심을 보일 만큼 좋은 고급품을 생산하는 공장이나 공방은 거의 모두가 귀족들의손에 있어. 게다가 제국만 귀족들의 물건을 탐내는 것이 아닐세. 새로운문물을 접하면 항상 일어나는 일일 테지만, 귀족들 사이에서 지금 유행이 뭔지 아는가? 제국풍(風)일세. 아라드에서 들어온 사치품으로 치장하고 제국 귀족들의 복식을 모방하고, 제국에서벤 나무로 제국에서 만든 식탁에 앉아 제국에서 구운 도자기와 부어 만든 유리 식기들로 식사를 하는…… 뭐 그런 것 말일세. 그런 소비 자체가 모두 나쁘다고는 말하지 않겠네. 때로 그런 사치는풍요의 상징이기도 하니까 말일세. 하지만 이와 같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익을 보고 즐거워하는 건 제국과귀족뿐일세. 지금 가장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보통 백성들은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해. 오직, 오직 제국과 귀족들의 밀월 관계만 더 돈독히 다져 줄 뿐일세.”
말을이을수록 그녀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더해졌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에게 이러한 것들을 털어놓는 것 자체가 괴로운 듯했다. 에르제는칼렙의 표정을 보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그 또한 그녀만큼이나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얼굴에서손을 뗀 그녀의 표정에는 더욱 큰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은 귀족을 등에 업고 날이면 날마다방자한 행동을 일삼고 있네. 아직까지는 백성들도 그들을 좋게 생각하기는 해. 민심을 얻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복구 작업을 돕고 있기도 하고, 머무르는동안 생필품도 사다 써 주니 말일세. 그러나 그런 호감이 언제까지나 지속될까? 관리들에게 무례하게 행동하고, 부녀자들을 희롱하거나 술에 취해 난동을부리는 제국인들의 추태에 대한 보고가 가면 갈수록 늘어나고 있네. 체포라도 할라 치면 귀족원은 그런그들을 비호해 주고. 마계에 오가면서도 우리 군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요구 사항을 추가하고 있어. 테라나이트 운송에 들어간 비용을 떠넘기지를 않나, 호위 병력을 제공해달라고 하지를 않나, 그건 다 우리 돈과 인력이 들어가는 문제일세. 그러잖아도카르텔과 안톤을 상대하며 경험 많은 정예 인력이 줄어들 대로 줄어들었는데, 그나마 남아 있던 인력의규모와 예산마저 크게 감축된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들의 편의를 봐 줘야만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생각되네.하지만 귀족원은 동맹과 친교를 운운하며 국고를 아낌없이 열고 있지. 정작 우리 군 예산은병원을 지을 돈, 연금을 지급할 돈, 심지어 다 써 버린무기와 탄약을 보충할 돈도 가차없이 깎아 버렸으면서 말일세.”
에르제는가까스로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음성은 반 정도는 진노로, 나머지 반 정도는 슬픔으로 인해 부들부들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가녀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칼렙은직감적으로 그녀가 마침내 원래 하려던 말을 꺼낼 것임을 알았다.
얼마의시간이 지난 후 에르제가 속삭이듯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말해 주게…… 만약의 만약이지만, 혹시라도 지금 당장, 아니면 멀지 않은 시일 내에 제국과 전쟁이일어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는가?”
그는눈살을 찌푸렸다. 에르제는 누가 승자일 것인지, 혹은 패자일것인지 묻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묻고 있었다.그 재앙의 무게를 알고자 하였다.
칼렙은즉각 대답해 주지 않고 반문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거기에 대한 답을 드리기 전에 하나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게.”
“전하께서는 만약이라고 하셨지만, 이미 제국과의 전쟁을 기정 사실로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까?”
에르제는그 질문이 돌아올 것을 예상한 듯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층 더 일그러진 표정이 전혀 받고 싶지않은 의문이었음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한 차례 입술을 깨물고 대답했다.
“그렇네.”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공국 출신의 모험가 몇 사람으로부터 제국에대해 들은 바가 있네. 그대도 몇 가지 말해 준 바가 있지 않았는가?”
에르제는모험가들에게 들은 말을 기억해 내려는 듯 뜸을 들였다. 칼렙은 대꾸하지 않고 그녀가 말을 이을 때까지가만히 기다렸다.
“제국은 그란플로리스 삼림에 대화재를 일으켰고, 여러 힘없고 작은 국가들을 침공해 수탈과 간섭을 일삼고, 전이를이용하여 끔찍한 실험을 자행하기도 했지.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 아라드의 존립이 위태로울 지경이 되었다고들었네. 모든 국가가 정의로울 수는 없다고는 하나 그들은 도를 넘었다고 생각하네. 짐이 보기에는 국익을 위해서라면 아라드가 멸망하더라도 개의치 않을 자들로 보이네. 천치가 아닌 다음에야 그들이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카르텔과의 싸움을 돕고 마계에 탐사대를 보내 엄청난 힘을가진 광물을 무더기로 채집하고, 우리와 교역의 물꼬를 터서 귀족들을 한 편으로 만들었다고는 도무지 생각할수가 없을 것일세.”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는드디어 자신이 말할 때가 왔음을 알고 대답했다. 그는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새하얗게 변색된 귀수가 감정의 격동을 나타내려는 듯 부르르 진동했다.
“누가 이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온전한 전력을 가지고는 물론 제국군은 숫자가 얼마나 많든 황도군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천계가 알지 못하는 마법과 기의 힘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그것도 결국 물리적인 세계에 종속된 힘이고, 아무나 연습한다고 제대로 쓸 수 있는 종류의 힘도 아닌 반면, 황국은압도적인 기술력에서 비롯된 막강한 화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상황이 다릅니다. 황도는 파괴되었습니다. 카르텔의 군홧발에 짓밟히고 탐욕스러운 안톤이수많은 귀중한 생명과 재산을 집어삼켰습니다. 회복이 절실한 때에 와 있습니다. 제국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이토록 빠르게 손을 뻗치는 것입니다. 이황도가 제대로 된 힘을 회복하기 전에 집어삼키고자 호시탐탐 들개 같은 눈을 빛내고 있습니다.”
칼렙은주먹을 불끈 쥐었다. 관자놀이의 혈관이 터질 듯 움찔거렸다. 에르제는그의 온 몸으로부터 폭정과 탐욕에 대한 보편적인 분노 이상의 것을 보고 전율했다.
“제국뿐이었다면 훨씬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카르텔과 안톤이라는 공공의 적이 있었을 때, 상황은 절망적이고 빛이보이지 않았으나 그 때 사람들은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해안 수비대도 황도의 중앙군도 심지어 귀족들도최소한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노블 스카이에서 최소한 겉으로는 한마음이되어 있었습니다. 비단 카르텔과 안톤이 아니라 사도와 전이로 인한 문제를 직면했을 때 아라드도 하나가되었습니다. 당장 터질 것처럼 험악한 관계이던 흑요정과 인간이 뜻을 합하여 디레지에의 환영으로 인한문제를 해결했고, 오랜 시간 소외를 당해 분노와 슬픔에 절어 있던 사이퍼들의 힘을 빌려 마침내 더러운들개 디레지에를 처치하였습니다. 그 폐쇄적이고 호전적인 반투 인들과 함께 가증스러운 냉룡 스카사를 물리쳤습니다. 반 발슈테트의 아이언울프 기사단과 모험가 길드에 그림시커까지 힘을 합쳤던 일은 잘 아시겠지요. 오랜 시간 동안 서로 싸워 왔던 자들도 거대한 위기로 인해 손을 잡았습니다.그렇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생각하시는 대로입니다. 진정한 문제는 이제 막 수면 위로 드러났을 뿐입니다. 아직 이 나라의사회에 대해 속속들이 안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그런 제가 보더라도 갈등은 너무나 심각합니다. 신문과방송에서 매일같이 다루는 주제가 군부와 귀족들의 갈등입니다. 에를록스 장군처럼 웨스피스 출신으로서 공을세운 군인들에 대해서도 험악한 분위기를 쉽사리 읽어낼 수 있습니다. 예전에도 죄수나 보내는 유배지 취급이었다고들었는데, 바로 그 무법지대에서 온 카르텔이 황도 전체를 때려부수다시피 했으니 더 말할 바 없겠지요. 비단 귀족만이 아니라 시민들조차도 그 적개심을 애써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불과얼마 전에도 라이오닐 대령이 웨스피스에서 밀항해 온 일가를 해치려고 한 퇴역 군인을 제지하려다가 그를 불가피하게 사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자가 다리를 잃은 퇴역 군인이라 그랬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아이와노인들도 징집했던 황도에서는 시민이 곧 군인이고 군인이 곧 시민입니다. 누가 그 둘을 구분 지을 수있겠습니까?”
칼렙의말을 듣는 에르제는 괴로운 듯 다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가 가차없이 말하는 사실들은 그보다도 그녀가훨씬 더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칼렙의 입으로 듣는 것은 그녀에게 새로운 충격이었다. 그는 잠시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제가 아는 한 귀족이라는 족속들은나라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 황국의 귀족이 아라드의 귀족과 같은 자들일지 확신은 못 하겠습니다만, 제가 아는 귀족들과 토호들이란 대개 자신의 작위와 봉토와 명예에는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지만 나라와 인민을 그백만 분의 일만큼도 눈여겨보지 않는 족속이었습니다. 그들은 중앙군이 강해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신들이 거느린 사병들이 국방을 책임져야 그들의 권한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부가분배되고 가난한 자들이 기뻐하는 것에 질색합니다. 아랫것들은 굴종해야 하고 부는 지체 높은 자들이 당연히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관심은 오직 기득권을 지키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이 제국을 지지하고, 제국군이 이 땅에 멋대로 들어오도록 끌어들이는건 그들이 무슨 대단한 비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제국은 귀족들의 돈줄입니다. 제국의 물건과 황금으로 인해 그들은 지금보다 더 사치스럽게 지낼 수 있고, 제국이이 땅을 정복하더라도 그들은 제국에서 받은 작위와 보상을 가지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고, 오히려 제국의충성스러운 꼭두각시가 되어 지금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고, 자기들이 보기에 아니꼬운 무법지대떨거지들이 흘러 들어와 자신들과 맞먹는 꼴을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오, 어쩌면 이 백성들도 다른 건 몰라도 ‘무법지대 떨거지’ 들과 상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기뻐할 수도 있겠군요. 저조차도 아라드에서 기어올라온 땅딸보 야만인이라며 멸시하는 자들이 간간이 있는 마당에 하물며 무법지대 출신은어떻겠습니까?”
칼렙은빈정거리며 차가운 냉소를 지어 보였다. 무서운 분노와 경멸이 어려 서릿발처럼 날카로운 웃음이었다. 그 거침없는 냉혹함에 에르제는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에르제는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대는 귀족들을 잘 아는 것 같군.”
칼렙은대답하지 않았다. 황녀의 너머에 있는 먼 지점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에르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칼렙을 잠시 응시하던 그녀가 다시 말했다.
“제국은……”
칼렙은 대답하지 않았다. 뭐라고 중얼거리기는했으나 황녀의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누구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나직한 속삭임이었기에 에르제는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듣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그의 두 눈에서 시퍼런불꽃이 튀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에르제는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딱 벌렸다. 칼렙의 얼굴은 무섭도록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고통을 참는 것처럼이를 악문 채로 말했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제정신인 자가 몇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황제부터 일개 노예에 이르기까지 전부 그렇습니다. 인간애와 덕성이 남아 있는 자들은 애초에 그 미친 나라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양심이 남아 있는 자들은 망명하거나 죽거나, 굴복했지요. 창칼이 부러지면 이로 물어뜯고, 이가 빠지면 주먹으로 때리고, 팔다리가 부러지면 몸이라도 날려 부딪힐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런가상한 투기를 죄다 가증스럽고 역겨운 탐욕에 쏟아 붓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황제 폐하와 제국의 영광이라는허울 좋은 이름을 뒤집어쓰고 말입니다. 약자와 패배자의 피와 골수와 비명을 먹고 자란 참렬한 우상 앞에그 통탄할 제물을 쏟고 있단 말입니다! 여기 귀족들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습니다. 유르겐 그자를 포함해서요. 지금은 자기들이 그들을 이용하는 것처럼보이겠지만 실상은 철저히 이용당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국을 통제할 수 있다니…… 제 눈에는 외교한 번 해 본 적 없는 어리숙한 허수아비들이 부리는 치기에 불과해 보입니다. 핏줄과 허례허식과 말재주만능력인 줄 아는 그 돼지 같은 자들의 교만에 웃음이 나올 지경입니다! 전하, 제 눈에는 벌써부터 나라까지 팔아먹고도 팽(烹) 당해 산 채로 펄펄 끓는 기름 솥에 튀겨지면서 혓바닥을 빼물고 눈을 까뒤집으며 꽥꽥거리는 추태가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와 문무백관이 그 번드르르한 배때기 기름을 안주 삼아 승전의 술잔이나 기울이겠지요! 그 때가 되어서야 잿더미를 뒤집어쓰고 의복을 찢으며 울부짖어 본들 누가 기꺼이 듣겠으며, 누가 터럭 한 올만큼이나마 긍휼한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듣기만해도 살벌한 악담을 거침없이 내뱉은 칼렙은 잠시 숨을 몰아 쉬었다. 에르제는 여전히 방금 전과 같은표정으로 그가 하는 말을 한 글자도 남김없이 새겨듣고 있었다. 그는 잔에 차를 따라 단숨에 다 마셔버렸다. 차갑게 식어빠진 차가 속을 조금 진정시켜 주었는지, 말을잇는 그의 목소리는 다소나마 차분함을 되찾고 있었다.
“전하,제국과는 언젠가 반드시 부딪힐 것입니다. 전하와 천계 백성들이 절대로 원하지 않더라도 먼저군사적인 행동을 취할 것이 분명합니다. 황도는 반드시 그 때를 위해 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황국에 미래는 없습니다. 모두 노예 백성으로 전락하거나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귀족들은 지금을 평화로운 때라고 말하고 있지만,바보가 아닌 자라면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자신들이야말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요.”
“하지만 짐이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말인가?”
에르제는거의 외치다시피 말했다. 그들은 고요한 황녀궁이 쩌렁쩌렁 울리는 것처럼 느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거의 절망적이었다. 칼렙은 그녀가 몰라서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황녀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약하게 쥐어뜯었다. 여린 갈색 머리카락 몇 올이툭툭 떨어져 나왔다. 에르제는 땅이 꺼질 것 같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칼렙,그대가 말한 것은 나도 충분히 짐작하고 있던 바이나 그대의 입술로 들으니 이제는 그 짐작이 확신이 되는군. 그대의 말대로 나도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기에 조치를 취하고자 했네. 유르겐공이 아직 섭정의 인을 놓지 않고 있으니, 귀족원이 군대의 규모를 계속 줄이는 것은 내 권한으로 도저히막을 수가 없더군. 하다못해 아라드의 문물을 배우고 외교적인 접점이라도 찾기 위해 사절단을 보내려고했지. 그 대표자로 라이오닐 대령을 택하려고 했네. 그는거절했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여겨 다른 사람이라도 택해 보냈네. 그러나 그것으로 뭘 할 수 있단말인가? 그대의 말대로, 이 나라의 거의 모든 권력을 가지고있는 귀족들이 제국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는데? 그들이 혹 딴 마음이라도 품으면 이 한 줌도 남지않은 군대로 그들을 능히 막을 수 있을까? 그 군대조차 속으로는 사분오열이 되어 있는데? 흑요정에게도 사절을 보냈네. 그러나 그들은 애초에 우리를 좋게 여기지도않더군. 그들이 적대하는 제국과 동맹을 맺은 건 때문이겠지. 기실은이렇게 외교적인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적절한지도 확신할 수가 없네. 그들이라고 악독한 생각을 품지 말라는법도 없거니와, 그런 움직임이 외려 제국을 자극하고 침략의 명분을 줄까 두렵기 때문일세.”
그녀는다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괴로움이 소용돌이치며 어린 황녀의 심장을 쿵쿵 울렸다. 칼렙은 분노와 동정심이 마구 뒤섞인 시선으로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그는자신이 나서야 할 때임을 느꼈다. 싸움을 앞둔 것 같은 두근거림이 그의 가슴을 울렸다.
“전하,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보입니다.”
“뭐라고?그게 무언가?”
에르제가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황급히 물었다. 그는 뒤엉킨 생각의 실타래 속에서 하나의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자신도 그것이 충분한 힘을 가진 해법인지 확신할 수 없었으나, 그가자신을 세우기도 전에 말은 목구멍을 넘어 나오고 있었다.
“다시 아라드에 다녀오고자 합니다. 아라드의 거의 모든 국가들은 제국과 악감정이 있습니다. 지벤 황국은표면상으로는 그런 제국과 동맹 관계이니 내막을 잘 모르는 그들의 입장에서 선뜻 전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와 그 아이라면 다를지도 모릅니다. 저희는 그들에게도 어느정도 호의를 얻은 바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불쾌한 동맹의 속사정도 잘 설명해 줄 수 있을 테고 말입니다. 대화가 잘 된다면, 만약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제국과의 공동 전선을형성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황국의 공식적인 사절이라면 몰라도 제가 개인적으로 움직일 뿐이라면 제국의의심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오오,그렇게 해 주겠는가……!”
에르제가그의 손을 덥석 부여잡으며 말했다. 그녀는 거의 눈물까지 흘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그의 손을 으스러지도록 꽉 잡은 작은 손의 온기로부터 새로운 사명을 보았다. 지금까지 그가 모험가의 이름으로 감당해 왔던 사명과는 확연히 달랐으나, 그는오히려 더욱 뜨거운 열정의 불꽃이 온몸을 뒤덮는 것을 느꼈다.
따르릉
운라이오닐은 빠질 것처럼 응시하던 서류에서 눈을 뗐다. 그 혼자만 남은 사무실의 정적을 전화기 소리가깨고 있었다. 그는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연락을 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지 머릿속으로 얼른 헤아려보았으나, 후보가 될 만한 자를 찾아낼 수 없었는지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찰나의 헤아림을 끝낸 그는 반 정도는 반사적으로, 나머지 반 정도는고민하며 손을 뻗어 수화기를 잡아 귀에 가져다 댔다. 그러나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의목소리가 말했다.
- 대령, 오랜만이군.
운은그 날카로운 저음의 주인을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대답했다.
“칼렙 공, 시간이 늦었습니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 에를록스원수를 만나야겠네. 이번 주 안에 일정을 잡아 주게.
젊은대령은 그에게 타협할 생각이 없음을 깨달았다. 운은 자기 상관의 일정표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금요일 저녁에 시간이 빕니다. 그 때 뵙기로 하셨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 고맙네. 그리고, 적당히…… 비밀스러운 장소였으면 좋겠군.
공홈에 사람이 없어 보여서 여기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