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파 캐스트 마감이 코앞이군요.
한 편 더 써보았습니다.
두 개의 대지와 두 개의 하늘을 품은 별.
-행성기록자 네스트의 <별의 기록> 중 아라드에 대한 설명.
“……그래, 알겠어. 제안을 받아들일게. 그 대신, 내가 바라는 바를 명확하게 들어주어야 할 거야.”
헤이라는 단단히 못을 박았다. 헤이라가 원하는 작업 환경을 조성할 것. 이안이 아라드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나면 이안과 헤이라가 함께 살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줄 것.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정당한 조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힐더는 승낙했다.
“그러면 바로 하도록 할까요? 이안을 데리고 오세요.”
“잠깐. 그 전에…….”
헤이라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매드를 불렀다. 탁자 위로 폴짝 뛰어오른 매드에게 속삭였다. 매드는 씩 웃으며 끄덕거렸다. 헤이라는 힐더를 흘겨보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어. 허튼 생각은 하지 마. 매드가 지켜볼 테니까.”
“걱정 말고 갔다 오시지요.”
차분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속이 뒤틀렸다. 치사하다고 해야 하나. 따귀 한 대만 올려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헤이라는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며 계단을 올랐다.
저택의 모든 문에는 잠금장치가 없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책장에는 갈색 표지의 책이 두 권 꽂혀있고, 바닥에 겉옷이 떨어져있다. 침대가 불룩해서 다가가보니 이안이었다. 이불 밑에 파묻혀 있었다.
헤이라가 피식 웃자 이불이 조금 흔들렸다.
“이안.”
그 순간 이불이 파도처럼 크게 일어났다. 헤이라는 체구가 작기에 이불에 통째로 덮였다. 이불을 옆으로 치웠다. 그러자 눈물로 범벅이 된 이안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나…….”
헤이라가 이안을 가만히 마주보았다. 자그마한 손을 펼쳐, 이안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안은 계속 훌쩍거렸다.
“말 없이 나가서 미안해요. 화 많이 났어요?”
“났지. 이안,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면 안 돼. 말해주지 않았니?”
“한 번도 말해준 적 없는데…….”
“……상식이야.”
설득력이 없었다. 헤이라는 숲에 낯선 사람이 쓰러져 있을 때마다 저택으로 데리고 오기에. 헤이라와 이안 둘 다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게 굉장히 재미있게 여겨졌다. 덕분에 사이좋게 웃음을 터뜨릴 수 있었다.
한참을 웃다가 숨이 찰 지경이 되었다. 웃음이 가라앉자 익숙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로를 너무도 잘 알기에 어색하지 않은 침묵. 그 잠깐의 정적을 깨고 헤이라가 입을 열었다.
“이안. 독립하고 싶어?”
이안은 차마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독립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마계 팔면을 통틀어 순진한 소년이 홀로 살 수 있는 곳은 없다. 혼자 있는 아이나 노인을 테라니움 광산으로 끌고 가는 괴한에 대한 소문은 더 이상 소문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안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다. 그런 이안의 눈을 보고 헤이라는 싱긋 웃었다.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는 저 순진무구한 소년에게 어떻게 화를 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 그러면 독립하자.”
“네?”
이안이 놀라 물었다. 헤이라는 힐더와 차를 마시며 나눈 대화를 천천히 들려주었다. 사도의 행방불명과 남겨진 땅을 정화하는 작업, 그리고 아라드라는 행성까지. 그 모든 이야기가 너무도 새로웠다. 꿈만 같았다.
“그래서 저 누나가…… 사도 힐더라는 말씀이죠. 누나가 일하는 동안 제가 아라드에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실 예정이고.”
“그렇지.”
무언가를 고민하듯 입술을 깨물었다. 이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괜찮을까요?”
“뭐가?”
이안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레 물었다.
“누나 말이에요. 솔직히 누나가 어디에 소속되어서 일할 사람은 아니잖아요. 금방 싫증낼 것 같은데…….”
“우와, 이안. 너 왜 이렇게 솔직해?”
“그러게요. 그런데 정말로 걱정되어서 그래요. 혹시 누나가 일 하기 싫다고 도망이라도 친다면…… 힐더 누나가 곤란해질 텐데…….”
“언제 봤다고 힐더 누나야?”
헤이라가 재미있다는 듯 깔깔댔다.
“홀딱 반하기라도 한 거야? 그럴 만도 하지! 저 년 옷차림 봤어? 할렘의 윤락가에나 어울릴 법한 옷이잖아. 그런데 마계를 지키는 사도래! 너무 웃기지 않니?”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들으면 어쩌려고요.”
“들으라고 그래! 상관 없어!”
웃음이 진정이 되지 않는지, 이불 아래에 들어가 있는 이안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는 계속 킥킥댔다. 그러다가 뚝, 웃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안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난 저 년 싫어. 너, 저 년한테 마음을 주기라도 해 봐.”
“그럴 리 없잖아요. 저는 누나의 인형인 걸요.”
헤이라가 이안을 만들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이안은 헤이라의 종이다. 흑마법의 연결로 이루어진 계약관계이자, 영원한 소유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서로에게 각별한 존재이다.
“제가 없으면 누나는 어떻게 해요? 제대로 씻기는 하실 거죠?”
“잔소리꾼이 없어지면 마음이야 편하겠지만…… 보고 싶기는 하겠어. 좋아, 결심했어. 일 끝나고 나면, 나도 그 아라드라는 곳으로 가야겠어. 칙칙한 마계보다야 몇 배는 좋겠지. 그러니 이안! 내가 가기 전까지 그곳에서 기틀을 잘 닦아두도록 해.”
“알겠어요. 매드는요? 매드와 인사해야 하는데.”
“아래에 있어. 내려가자. 그 전에 화장실부터 가고.”
이안은 화장실에 가고서야 눈물자국이 말라붙어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은근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힘차게 세수했다. 화장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헤이라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천천히 저택을 둘러보면서. 곧 있으면 이곳을 떠나 아라드로 가게 된다니. 상상이 가지 않았다. 우선 짐을 챙겼다. 헤이라가 직접 만든 배낭에 옷가지를 넣고 공책과 필기구도 넣었다. 헤이라가 그 안에 저주인형 하나를 넣어주었다.
“필요할 때 꺼내 써. 그럴 일은 없겠지만.”
“……어디에 쓰는 물건인데요?”
짐을 전부 챙겨도 많이 나오지는 않았다. 한 손으로 가볍게 들 무게이다. 배낭을 손에 쥐고 계단을 내려왔다. 부엌에서 힐더와 눈이 빠져라 힐더를 노려보는 매드를 보았다.
“오셨군요.”
“그래, 오셨다. 힐더야.”
헤이라의 말투는 건방졌지만 힐더는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이안은 매드에게 다가가며 이제 그만 보아도 된다고 말했다. 매드는 이안을 노려보다가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주인을 걱정시킨 데에 대한 벌인 듯 했다. 머리를 문질렀다. 눈물이 핑 돌았다.
힐더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시작하도록 하지요. 제가 아라드와 마계를 잇는 통로를 열 테니, 들어가면 됩니다.”
힐더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손으로 마력이 모여들었다. 이안은 묘한 박탈감을 느꼈다. 헤이라 누나의 빗자루를 들고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데, 마법 한 번을 성공시키지 못했었지. 저 누나는 저렇게 간단히 하는데, 왜 나는 안 될까. 힐더의 손길을 따라 마나가 진동했다. 모이고 어우러지고 흩어지다가, 일순간 재조합되며 공간의 벽을 찢었다. 신비했다. 옆에서 보면 종이를 세워둔 것처럼 얇은 선으로 보였지만, 정면에서 보면 벽에 구멍이 뚫린 것과 같이 속이 비어있었다. 평범한 벽이었다면 구멍을 통해 벽 너머가 보였겠지만, 이 통로는 달랐다. 구멍 안에서 적색과 청색을 비롯한 여러 색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색의 소용돌이였다.
헤이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생긴 것만 보면 닥치는 대로 빨아들일 것 같이 생겼는데, 의외로 잠잠하네.”
“간혹 그런 종류의 차원문도 만듭니다만, 이번에는 안 그랬습니다.”
“잘 생각했어. 만약 그랬다가는 봉제인형으로 만들어 버렸을 거야.”
힐더가 문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는 뒤를 돌며 말했다.
“따라오세요. 좌표가 흔들리기 전에 지나가야 합니다.”
“아, 알겠어요.”
이안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다 갑자기 뒤를 돌아, 헤이라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눈이 이어지며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강렬한 감정을 느꼈다. 이안이 인형의 숲에서 정신을 잃은 채 발견되었던 때를 떠올렸다. 그 날 이후로 처음으로 떨어져서 지내게 되는 것이다.
“누나, 기다리고 있을 게요. 일 할 때에는 변덕 부리지 말아요.”
“너야말로 가서 나 보고 싶다고 징징대지나 마. 넌 누구 소유라고?”
“헤이라 누나.”
“그렇지. 잘 가. 예쁜 곳에서 지내. 마계보다 수천 배는 밝고 멋진 곳으로.”
“알겠어요.”
마지막으로 서로를 꼭 안아주고 나서야 비로소 출발할 준비가 되었다. 헤이라는 이안이 힐더를 따라 차원문 속으로 걸어가고 문이 닫히기 까지 말없이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문이 닫혔다. 마나의 흐름이 멈추며 제 자리를 찾았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침묵이 낯설었다. 저택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매드가 흘끗 올려다보았다. 복잡한 표정이었다.
“음…… 피곤해. 매드, 나 쉴 거야. 조용히 하고 있어.”
늘 쓰던 침대로 향하다가, 문득 멈추고 무언가를 고민했다. 이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계단을 걸으며 생각했다.
‘예전에는 어떻게 혼자 살았는지 모르겠네.’
참 놀라운 일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고독은 우울을 동반했다. 이 마음을 달래고자 이안이 쓰던 방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 까지 함께 얼굴을 묻고 웃던 침대로 올라갔다. 이불을 덮고 누우며 이안을 떠올렸다. 갑자기 너무도 사무치게 외로워져서, 헤이라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울다가 조용히 잠들었다. 그게 최선이었다. 고독이 익숙하지 않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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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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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래도 즐겁게 읽으신 것 같아 좋네요 감사합니다! | 19.08.25 09:0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