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내 말을 따르라. 나의 종복이 되어 그 목숨을 바쳐라.
홀연히 몸이 움직여졌다. 나는 왜 이곳에 있었던가. 어쩌다 이런 곳까지 오게 되었던가. 여기는 하늘을 나는 고래의 등. 온전히 땅에 붙어있어야 하는 발이 어쩌다 이런 높은 곳까지 오게 되었나. 나는, 나는.
나는 거대한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이곳에 있었다. 자신들을 도와달라는 한 여인의 말을 따라서. 사악한 괴물에 의해 괴멸되어버린 종교집단을 구해달라는 말을 따라서. 나는, 커다란 괴물에게서 비롯된 작은 괴물들을 찢어발겼고, 괴물에게 당해버린 불쌍한 종교인들에게 안식을 주었다. 그리고, 나는.
나는 달렸다. 아직 내 일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내 일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너버린 불쌍한 종교인들을 해방시켜주고, 끔찍한 괴물들을 죽이고, 결과적으로 거대한 괴물을 쓰러뜨리는 거니까. 아직, 아직 남아있는 괴물이 저렇게나 많은데, 어떻게 얌전히 서서 이야기나 나눌 수 있을까.
신도, 몬스터, 신도. GBL교 신도들이 내 앞을 막아섰다. 불쌍한 사람들이 내 앞길을 막아섰다. 내게 한 뼘 남짓한 단검을 들이밀면서. 내 뒤로 얼마나 많은 신도가 죽었는지 뻔히 보이는데도, 세뇌된 신도들은 절대 도망치지 않았다.
저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괴물에게 머릿속이 휘저어져 충성을 외치게 되어버린 자들이니까. 그런 불쌍한 자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오직 평안하기를 빌어주며 조금이라도 빨리 안식을 찾아주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디 좋은 곳에 가기를.
부디 내세에는 이런 끔찍한 일에 휘말리지 않기를.
부디 영혼만은 저 괴물에게 종속되지 않기를.
부디 이들의 불행이 더 이어지지 않기를.
그렇게 하나씩, 둘씩 쓰러뜨리던 도중 문득 희한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당황하며 도망치는 신도. 그 짧은 단검으로 내 공격을 막아내려 하는 신도. 다쳐 쓰러진 신도를 데리고 이탈하는 신도. 저런 것이, 가능한 거였던가?
오직 그 괴물만을 생각하며, 얼마나 많은 동료가 쓰러지든, 자신이 얼마나 부상을 입든 오직 전진만을 거듭하는, 그야말로 광신도 다운 행위만이 저들이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니었던 건가?
저들에게 있어서 공포심 같은 것은,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 따위는 이미 거세되어버린 게 아니었던 건가?
아니, 그런 사고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제 와서?
혹여나, 세뇌된 자들 사이에 숨어 세뇌된 척을 하던 자들이 아니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아 손을 뻗으려던 중에 갑작스레 텐타클 하나가 내게 덮쳐들었다. 그 많은 다리 사이에 숨은 입으로 날 물어뜯기 위해서.
그 끔찍한 주둥이로부터 내 얼굴을 보호하던 차에 다리가, 팔이, 몸통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크기 상관없이 온갖 문어 자식들이 내게 들러붙어 그 주둥이로 날 물어뜯고 있었다. 그 두꺼운 다리로 나를 후려갈기고 있었다.
문어 때문에 정신없는 와중에 또 다른 날카로운 감각이 서늘하게 파고들었다. 단순히 물어뜯고 두들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고통. 흐릿하게 보이는 것은 굽이치는 칼날. GBL 신도의 단검. 반 이상 가려진 시야 저 너머에서 간신히 보이는 것은, 신도들이 이끄는 대포였다.
세뇌고 나발이고 그까짓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이 무자비한 공격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끝없는 고통 속에서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생각이란 걸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뿌리치고, 짓밟고, 으깨고, 내치는 행위만을 반복하였다.
그러는 끝에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발악과도 같은 저항 끝에 남은 것은 지긋지긋한 거대 문어에게로 향하는 길목뿐이었다. 문어도, 신도도, 신도들이 끌고 다니는 대포도,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 오직 앞으로 나아가는 길뿐.
눈앞에 넓게 뚫린 길목이 놓이자, 머릿속에서 무언가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이 길이라고. 이 길의 끝에 그 괴물이 있다고. 종교집단을 망하게 한 그것이 있다고.
그러니 얼른 그것을 죽이고…죽여서…분명히, 자신을 도와달라고, 부탁한, 그녀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그 길의 끝에 있는 것은, 분명 그것이었다. 증오스러운 괴물. 하늘 위 종교인들을 몰살시킨 끔찍한 것. 하지만 그까짓 것에겐 눈길조차 가지 않았다. 그것의 앞에 있는 건….
검은 제복. 분홍색 단발. 붉은 눈동자. 하지만 하늘성에서 봤을 때처럼 당당하고 남을 내려다보는 듯한 그 눈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흐리멍덩한 듯한, 그러면서 날카롭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그녀는 나를 보고 있었다.
"…로터스 님을…위해…."
레니는 그렇게 말하며 날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기집애. 맨날 잘난 척하더니…단장님이 그냥 시간만 끌고 있으라고 하셨는데…."
"…."
"뭐예요. 그렇게 있지 말고 정신 차렸으면 얼른 도와주러 가세요. 사도하고 싸우러 간 거라고요.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할 거예요."
허망하게 앉아있는 나를 책망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니. 내 앞에 쓰러진…죽어버린…내 손으로 죽인, 레니의 동료가, 나를.
나는 차마 아무 말도 못 하고 이를 악물었다. 내가 약했던 탓에, 애먼 기사가 죽었다. 나를 막기 위해서, 용감히 온몸을 내던졌다가, 죽어버렸다. 다른 무엇도 아닌, 내 손으로. 용서해달라 빌 수도, 용서받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정신 차린 거 맞죠? 제 말 들리나요?"
그녀의 물음에 난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실수로 생긴 희생에 어떻게 책임져야 할까. 답은 간단했다. 레니의 동료, 피오나의 말대로 서둘러 앞서간 이들과 합류할 것. 그리고 더욱 증오스러워진 문어 자식을 갈가리 찢어버리는 것 말고 달리해야 할 게 있을까.
나는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강하게 레니의 손을 잡아주었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용감했던 그녀를 기려주기 위해.
"이 뒷수습은 우리가 할 테니까 당신은 얼른 합류하세요. 피오나 말대로 사도와 싸우러 간 거잖아요. 뒤는 돌아보지 말고 가세요."
"꼭 살아 돌아오세요. 당신을 조종한 로터스가 모든 걸 망치게 하지 말아 줘요. 그래야…희생이 헛된 일이 되지 않을 테니까."
기사들의 격려를 받으며 나는 서둘러 발을 내디뎠다.
로터스와 대치하고 있을 다른 사람들에게로.
이 등 뒤에 남겨진 것의 무게를 느끼며.
달려간 끝에 무엇이 있는지…정녕 제대로 보고 있는가.
─
우리가 정신지배를 당했을 때
정말 우리의 앞을 막은 게 텐타클과 GBL신도 뿐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