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아. 나는 흑교회를 탈퇴할거야."
"그건 배신이야."
유리아의 말이 칼날이 되어 나를 베었다.
배신이라.
나는 그저 이 썩어빠진 세상을 이어가고 싶은 것 뿐이다.
세상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
그렇기에 이 세상을 이어가려는 행동도 아름다운 것이다.
변화는 평화를 담보로 하는 것.
지금도 평화로운데, 굳이 어둠을 바라야 하는 것일까.
나를 변호하지는 않았다.
"좋을대로 생각해. 나는 태초의 불을 계승하겠어."
떠나기 전, 나의 기사인 빌헬름 경에게 오닉스 블레이드를 하사하며 하고 싶은 것을 쫓으라 하였다.
그는 나를 따랐다.
......
여행을 떠났다.
흑교회를 떠났지만 흑교회에서 배운 것은 잊지 않았다.
쌍검으로 망자들을 베어가며 점점 태초의 화로에 다가갔다.
그리고 죽었다.
......
...종소리...?
여기는 어디지?
아아, 관 속이구나.
그래, 나는 불을 계승하려다 실패한, 장작조차 되지 못한 저주받은 불사.
불 꺼진 재.
관을 열고 나왔다.
관 뚜껑에는 흑교회의 문장이 있었다.
아아, 유리아가 나의 시신을 거두어 주었구나.
곁에는 빌헬름 경이 있었다.
어째서...?
이미 죽은 나의 곁을 지켰는가.
종이 울리지 않았다면 영원히 여기 있을 생각이었을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
여기가 어디지?
온통 눈으로 둘러싸인, 하얀 세계.
언제 여기로 오게 되었을까.
뭐, 그것이 중요한가.
장작조차 되지 못한 나는, 세상에게 버려진 자.
어디로 가던 상관없지 않은가.
눈으로 덮힌 이 세계에서 한 교회를 발견했다.
교회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자신을 아리안델이라 칭하는 이가 있었다.
그에게 이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은 회화세계이며, 버려진 자들이 흘러드는 곳이라고.
아아, 나에게 딱 맞는 장소로군.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렸다.
엘프리데라는 나의 이름조차도.
그리고 지킬 것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들이 수도녀의 모습을 바랐기에, 나는 수도녀가 되었다.
불의 계승을 실패하고서 깨달았다.
불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야 한다.
불은 그 자체로 변화한다.
점점 타오르다, 언젠간 꺼지는 것이지.
그래서 아예 숨겨버리는 것이다.
변화는 평화를 담보로 하는 것이니까.
곧, 아리안델 교부님을 설득해 나의 잔불과 회화세계의 불을 그릇에 숨겼다.
그리고 교부님은 회화세계가 피로 그려진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를 지키기 위해 피를 이용했다.
스스로를 채찍질해 나온 피로 불을 잠재운 것이다.
종이 울려 회화세계에 잠든 재들이 깨어나지 않도록, 종을 부숴버렸다.
이제 회화세계는 평화롭겠지.
하지만 신부님은 이 세계에 내려오는 전설을 하나 말해주셨다.
언젠가 두 개의 재가 와서 불을 일으킨다... 라, 하나의 재는 나일 것이다.
나머지 하나의 재는 누굴까.
그 언젠가가 오지 않았으면.
......
음?
바깥에서 빌헬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호오, 귀공... 불 꺼진 재로군. 종소리도 없었는데 어째서 회화세계에 헤매어 들어왔지? 뭐어, 상관없지. 길을 헤매고 있다면, 프리데 님의 말이 지침이 되어줄거다. 자아, 안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삼가 그 말씀을 경청하도록 해라."
아아, 또 하나의 재가 왔는가.
그가 다시 말을 걸었는지, 빌헬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왜 그러지? 우물쭈물거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프리데 님의 말씀을 경청하도록 해라."
곧 예배소의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
"어서 오시지요, 아리안델의 회화세계에. 저는 프리데. 신부님과 버려진 자들 모두와 계속 함께 하는 자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버려진 자가 아닙니다. 불 꺼진 재여, 당신이 왜 회화세계에 헤매어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에게는 사명이 있고, 그건 이곳엔 없답니다. 당신이 있을 곳으로 돌아가십시오. 저기 보이겠죠? 이 방의 화톳불이. 지금은 거의 사그라들었지만, 그래도 당신을 이끌어줄 테죠."
아, 그래도 회화세계에서의 추억을 되새길 기념품 하나 정도는 괜찮겠지.
"아아, 한 가지, 당신에게 건네 두죠. 헤매어 들어왔다곤 해도, 이렇게 만나게 된 당신에게 이 차가운 세계의 추억을... 당신의 사명에 도움이 되길 빌겠습니다."
그에게 내가 만든 반지를 건넸다.
"자아, 이제 당신이 있을 곳으로 돌아가십시오. 돌아갈 장소가 있다는 것은 굉장히 행복한 일이니까요."
......
갑자기 빌헬름 경이 어디론가 가 버렸다.
어디로 간 것일까.
드디어 자신의 사명을 찾아 떠난 것일까.
부디 그가 자신의 사명을 이루기를.
......
화가 소녀가 돌아왔다.
분명 가둬두었을 텐데.
뭐, 이제는 상관 없다.
불을 보지 못하면 회화를 그릴 수 없을 테니까.
음? 화가를 가둬둔 방의 열쇠는 빌헬름이...
아아...
그는 마지막까지 나의 기사였구나.
......
쿠구궁
아아, 신부님이 계신 방의 입구가 열렸다.
누구의 짓인지는 당연히 알 수 있다.
저곳엔 불이 있고, 불을 갈망하는 것은 재이니, 바로 그겠지.
"역시 재는. 불은 갈망하는군요..."
......
그가 다시 예배소에 왔다.
그가 신부님이 있는 방으로 갔다.
그리고 신부님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불이 보인다, 불이 또다시, 눈앞에서 일렁이고 있어... 분명 피가 부족한거다... 채찍을, 채찍을 가지고 와줘... 아아, 프리데, 너는 듣고 있지 않느냐... 부탁이니, 채찍을 들고 와주게..."
천천히 일어나 낫을 집어들었다.
회화세계에서, 낫은 아련한 그리움의 대상이며, 그렇기에 나는 이것을 무기로 삼았다.
그리운, 나의 동생 유리아와 리리아네.
다시 볼 면목이 없구나.
아, 그래, 지금은 나의 세계에 신경써야지.
어느새 그가 신부님께 다가갔다.
신부님이 고개를 들었다.
"아아, 너, 프리데를 불러주게. 보이지 않나? 불이 다시 일렁이고 있어. 지금이라도, 넘쳐흐를 것 같구나..."
더 이상은 안 돼.
낫을 단단히 쥐고, 신부님의 방으로 들어갔다.
"신부님, 괜찮습니다. 아직 채찍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저 헤매어 들어온 재에게, 불이 일렁이고 있는 것 뿐. 부디, 눈감아주시지요. 제가 바로 재를 처리하겠습니다."
변화를 원하는 그와 평화를 원하는 나, 두 재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
그의 검이 나의 가슴을 꿰뚫었다.
"아아... 하아..."
풀썩
바닥에 쓰러졌다.
내게서 빠져나온 피가 바닥을 적셨다.
피가 흐르고 흘러 신부님에게까지 닿았다.
신부님이 감았던 눈을 떴다.
곧 신부님의 괴성과 사슬을 끊는 소리, 불을 담아둔 그릇이 여러번 내려쳐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쾅. 쾅. 쾅. 쾅. 쾅!
불이 방의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나의 잔불이 내게로 돌아왔다.
다시 일어섰다.
이번에야말로, 이 회화세계에 평화를.
신부님과 나에 맞서는 그에게 다시 한 번 낫을 겨누었다.
......
아아, 또다시 패배했다.
큰 상처를 입은 채로 바닥에 쓰러져 신부님과 그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둘이서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신부님 혼자서 그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신부님이 그릇을 떨어뜨리며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앞도 잘 보이지 않는다.
아아, 죄송합니다, 회화세계의 주민분들.
저는 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
신부님이, 입을 여셨다.
"언젠가 두 개의 재가 와서 불을 일으킨다. 역시 자네에겐, 재에겐, 불이 어울려..."
검은 화염이 나를 휘감았다.
아아, 두 개의 재가 나와 저 사람이었나.
그래, 나는 재다.
그리고 그도 재이지.
재는 불을 바란다.
변화를, 불을 바라는 그에게 불을 선사해 드리지.
나의 불, 검은 화염을.
나는 흑염의 프리데.
이 아름답고 아련한 세계에 평화를.
저번에 신청받은 프리데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사실 유리아와 같이 하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아무래도 따로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리아의 이야기도 물론 할 거에요.
다음은 헤이젤 한 번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다만 게임 내의 대사가 없어 살짝 걱정이 됩니다.
그래도 노력 해봐야지요.
아래는 지크벨트와 시리스의 이야기입니다.
한 번 읽어보셔요.
지크벨트 - 약속 : https://bbs.ruliweb.com/family/4892/board/183787/read/9575125?page=2
제목이 왜 평화냐 하면, 프리데(friede)라는 단어가 독일어로 평화를 뜻한다 합니다.
121.160.***.***
121.160.***.***
그래서 로자리아 앞에 구데기를 못죽이겠어요. | 20.08.24 11:21 | | |
59.19.***.***
정말 감사합니다. 헤이젤은 손가락에 충실했다는 설정이 있죠. 그래서인지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해 구더기가 되었고요. | 20.08.24 11:35 | | |
121.160.***.***
아~그래서 구더기 된거군요. 인사성이 밝아서 좋았어요. | 20.08.24 11:44 | | |
221.152.***.***
헤이젤 드디어 완성! https://bbs.ruliweb.com/family/4892/board/183787/read/9575594 | 20.08.30 14:53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