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크벨트. 나의 친구여. 내가 왕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이것을 나에게 휘둘러 주게."
오랜만에 만나 술과 담소를 나누는 상황에 욤이 말했다.
"내가 그걸 휘두를 상황은 생기지 않겠군. 자네가 어진 왕이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것이니."
그러자 욤이 스톰 룰러를 건네며 말했다.
"약속해 주게."
대충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나는 그러리라고 말했다.
도시의 백성들은 욤을 장작의 왕으로 추대했다.
그 목소리에는 진심도, 감사도 없었다.
태초의 불을 계승해 줄 희생양이 필요했을 뿐이라는 마음을, 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현명하니까.
그럼에도 욤은 받아들였다.
욤은 이 도시의 무거운 칼날이 되었고, 동시에 단단한 방패가 되었다.
그 어떤 정복자도 욤의 도시를 침범할 수는 없었다.
그의 강함을 백성들은 두려워했다.
욤은 그들을 소중한 친구로 생각하여,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그들에게 주었다.
더이상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신뢰의 표시었다.
스톰 룰러. 거인인 욤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하다시피한 무기.
그는 그것을 두자루 지니고 있었다.
방금 말했다시피 한자루는 자신을 두려워하는 백성에게 주었다.
남은 한자루는 자신이 왕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죽여달라고 부탁하며 나에게 주었다.
친우인 나를 신뢰한다는 증거이며, 동시에 약속의 증표이겠지.
그리고 때가 왔다.
욤은 자신을 불살라 태초의 불을 되살렸다.
도시는 아무 일도 없었고, 나는 세상을 떠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이 울렸다.
장작의 왕이 깨어나고, 불 꺼진 재들이 되살아났다.
욤도 깨어났겠지.
세상을 떠돌다 보니 온갖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한 신관의 가족이 저주를 내려 도시가 파괴되었다는 소식도 그중 하나였다.
사람만을 태우는 불을, 사람들은 죄의 불이라 불렀다.
그리고 도시는 죄의 도시라 불리웠다.
사랑하는 백성들을 잃은 욤은 지킬 것이 없어진 방패를 버리고 도끼에 손잡이를 하나 더 만들어 적을 짓이기는 잔인한 전투법을 익혔다고 한다.
죄의 도시를 노리는 도굴꾼이나, 죄의 불을 탐하는 자들은 모조리 그 도끼에 목숨을 잃었다.
문득 욤과의 약속이 기억났다.
왕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자신을 죽여달라는 약속.
약속을 지킬 때가 왔다.
죄의 도시로의 여행을 시작했다.
한때는 마을이었던 곳, 이제는 불사자의 거리라 불리는 곳에 도착했다.
길을 가다 보니 배가 고파왔다.
불사자가 된지도 오래지만, 먹는 즐거움은 버릴 수가 없었다.
한 민가에 들어갔다.
조리기구과 솥, 화덕을 찾을 수 있었다.
가지고 있던 에스트를 넣고 수프를 끓였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슈우욱 쾅!
대형 화살이 잔뜩 박혀 있는 땅이 또다시 그 때문에 신음을 토했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보니 저 멀리 있는 탑의 옥상에서 날아오는 화살이었다.
탑으로 향했다.
탑에는 리프트가 있었다.
활을 쏘는 거인은 탑의 옥상에 있었고, 그러니 위로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리프트는 밑으로 내려갔다.
밑에서 다시 리프트에 올랐다.
리프트는 위로 올라갔다.
위에서 다시 리프트에 올랐다.
리프트는 아래로 내려갔다.
"음... 으음..."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직 시간은 많았고, 나는 똑똑하니까. 리프트의 비밀을 금방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하염없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리프트를 타고 있다.
그리고 그를 만났다.
"음... 으음... 오, 오오! 미안하군, 생각에 좀 빠져있었네. 나는 카타리나의 지크벨트. 실은 조금 곤란한 상황이라 말일세. 귀공은 자작나무 옆에서 대궁으로 쏘는 활을 맞은 적 없나? 아무래도 그건 이 탑 위에서 쏘아대는 것 같아.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잘 이야기하면 이해해 줄 거라 생각해서 말이지. 위로 올라가고는 싶으나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다네. 이 리프트는 밑으로밖에 가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고민돼는구나... 으음... 으음..."
그는 리프트를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나는 다시 리프트를 타 볼 요량으로 리프트에 올랐다.
그런데 발판을 밟지도 않았는데 리프트가 움직였다.
리프트는 위로 움직였다.
리프트가 어떻게 위로 움직였는지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어느새 나는 밖에 있었다.
분명 위를 향했을 터인데... 그리고 저 멀리 광장에는 데몬이 보였다.
사방을 불태우며 광장을 배회하는 데몬이 보였다.
'대화로 해결할 수는 없을까...'
"으음..."
어떻게 말을 걸지 고민하던 차, 또다시 그를 만났다.
"으음.. 으음... 오, 오오! 귀공은 방금 전... 모습이 보이질 않아 걱정하던 참이었네. 귀공 덕분에 나한테도 신의 계시가 내려서 말이지. 멋지게 리프트의 수수께끼를 풀어냈다 이 말일세. 하하하하하하! 하지만 이거 참, 이상한 일도 다 있군. 분명 탑 위를 향했을 터인데 어느샌가 이런 곳에 있다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게다가 귀공도 보이겠지. 저 커다란 놈이. 나도 한 솜씨 하기에 절대 겁쟁이는 아니네만 어찌하면 좋을지 걱정이 돼서 말일세. 귀공도 가벼이 손을 대서는 안 될 걸세. 잘 이야기하면 이해해줄 것인가... 무리겠지. 너무 열을 내고 있어. 어찌하면 좋은가... 고민되는구나..."
그는 내 말을 듣지 못했는지, 듣고도 무시했는지 데몬에게 다가갔다.
물론 데몬은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귀공! 왜 기다리지 않았나!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카타리나의 기사 지크벨트! 가세하겠네! 으아아아아!"
나는 소리를 지르며 데몬을 공격했다.
그와 함께 수차례 검을 휘두르고서, 마침내 데몬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하아... 하... 훌륭했네, 귀공. 하지만 그런 터무니 없는 짓은 하지 말게나. 귀공 또한 불 꺼진 재일 터, 분명 사명을 지고 있을 터이니. 하지만 지금은 축배를 들도록 할까."
나는 그에게 내가 직접 빚은 술을 건네며 말했다.
"귀공의 용기와 나의 검, 그리고 우리의 승리에 태양 있으라! 아하하하하하"
그와 건배를 한 후 말했다.
"그러면 나는 잠시 눈을 붙이도록 하지. 축배를 나눈 뒤엔 으레 그리하기 마련이니. 으하하하하하..."
......
눈을 뜨니 그는 이미 어디론가 가 버렸다.
언젠가 그와 다시 만나기를 추억하며, 또다시 길을 떠났다.
발이 가는 대로 걷다 보니, 성당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자신을 패치라고 소개하는 이를 만났다.
그는 자신이 성당의 보물을 찾아 우물 속에 숨겨두었다고 말했다.
"구경해 봐. 아, 내가 끌어 올려주기 힘드니 갑옷은 벗어두고 가라구. 내가 잘 맡아 둘테니까... 흐흐흐."
나는 갑옷을 벗고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얕은 물과 약간의 쇳조각 말곤 아무것도 없었다.
'으음... 물건의 가치는 사람마다 다른 법이지.'
"구경 잘 했네. 이제 좀 올려주게나."
대답이 없었다.
다시 불러보았다.
대답이 없었다.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화장실이 급했나? 아니지, 아니야. 불사자는 그럴 필요가 없지. 그럼 잠이 든 게로군. 그래.'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속았다...!'
그때부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어ㅡ이! 어ㅡ이! 누구! 누구 거기 없는가!"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귀공인가. 오랜만이군! 나는 카타리나의 지크벨트라네. 정말이지 한심한 이야기네만, 나답지 않게 계략에 속아서 말이지. 누군가에게 갑옷을 도둑질당해 버렸다네. 귀공, 어디서 내 갑옷을 본 적이 없는가?"
철그렁, 쿵
"오, 오오! 이건 내 갑옷! 정말이지 면목없네! 이 카타리나의 지크벨트, 귀공에게 감사를. 이 갑옷만 있으면 나머지는 나 혼자서 탈출해 보일 테니 다시 만나세 귀공! 음하하하하하!"
그가 다시 말을 걸었다. 걱정이 되는 것이겠지.
"귀공. 이제 걱정할 필요는 없다네. 이 갑옷만 있으면 이 뒤는 나 혼자서 탈출해 보일 테니. 다시 만나세 내 벗이여! 음하하하하..."
우물을 탈출하고서, 다시 길을 떠났다.
스톰 룰러는 보기에는 별로 특별할 것 없는 낡은 검일 뿐이라서인지, 도둑맞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약속의 도구이니까.
늪지대에 도착했다.
온통 독늪밖에 없는 곳이었지만, 남아있는 에스트로 수프를 끓일 수 있었다.
남은 것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누군가가 유용하게 쓰기를 바라야지.
차가운 골짜기의 이루실에 도착했다.
달의 귀족의 도시.
이 밑에는 죄의 도시가 있다.
자신을 법왕이라 칭하는 미치광이를 무시하고 계속 죄의 도시로 향했다.
아, 벽난로가 있다. 조리도구도 있다.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에스트를 솥에 붓고서, 끓였다.
훌륭한 에스트 수프로군.
벽난로 앞에 앉아서 잠시 쉬기로 했...
......
또다시 그를 만났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오, 오오! 미안하군. 나답지 않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네. 아무래도 따뜻한 곳은 안 되겠군... 그건 그렇고 귀공, 오랜만이지 않은가. 다시 만나서 기쁘네. 게다가 그때의 감사도 아직이었으니 카타리나의 지크벨트, 다시 한 번 그대에게 감사를. 이건 그 마음일세. 부디 받아 주길 바라네."
나는 그에게 포스 방출 주문을 알려 주었다.
아, 그에게도 식사의 기쁨을 알려주어야지.
"그렇지, 귀공, 함께 식사라도 어떤가? 마침 지크벨트 특제 에스트 수프가 완성된 참이라네. 불사자라고는 하나 가끔은 이런 흉내도 필요한 법이야. 그리고 재회의 축배를 나누지 않겠나. 귀공의 용기와 나의 검, 그리고 우리들 각자의 사명에 태양 있으라! 으하하하하하...!"
그래, 벗에게 또다른 벗의 이야기를 조금 해 볼까.
"귀공은 알고 있는가? 이 도시, 이루실의 어딘가에 깊은 지하 감옥이 있음을. 그리고 그 밑에는 죄의 도시가 잠들어 있다고 하지. 고독한 거인 왕, 욤의 고향이다. 약속이란, 정말이지 괴로운 것이라네..."
아, 분위기를 처지게 하는 이야기였군.
"아아, 미안하이, 분위기가 처졌군. 그러면 나는 잠깐 눈을 붙이도록 하지. 축배를 나눈 뒤엔 으레 그리하기 마련이니."
......
드디어 지하감옥에 도착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한 여정도 이제 끝이 보인다.
......
아아, 감옥에 갇혀버렸다.
욤이 아직 나를 잊지는 않은 듯 하다.
다른 이들의 시체는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것을 보니 다 죽이라고 했겠군.
나는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둔 것인가?
문득 욤과 옛날에 했던 대화가 기억났다.
"욤, 자네는 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욤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왕... 왕이란 불과 같다네."
"불이라니? 어째서인가? 다른 이들의 길을 비춰줘서인가?"
"자신을 죽이며 다른 이들의 어둠을 지워주기 때문이라네."
"스스로를 죽인다니?"
"불은 장작을 태우지. 그리고 그 장작이 없다면 불은 꺼지게 된다네. 불은 타오르는 것이지만, 동시에 타오른다면 자신을 죽이는 것이라네."
"희생... 이라는 것인가?"
"... 이 이야기는 그만 하지."
그래, 이런 대화를 했었다.
흠... 생각이 깊었나.
환각이 보이는군.
환각이라도 반갑네. 나의 벗이여.
"으음... 으으으음... 으음... 으음... 오, 오오!"
아, 환각이 아니야. 정말 그로군.
"귀공인가, 미안하군. 생각에 조금 빠져있었네. 보다시피, 어째선지 갇혀버리고 말았지 뭔가. 하지만 귀공이 염려할 필요는 없네. 그렇지 않아도 쭉 이곳에 앉아 궁리하고 있으니. 슬슬 해답이 보일 때가 됬어. 그리고 아마도 나한텐 시간이 조금 필요할 걸세."
다시 고민을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열쇠가 필요하다... 열쇠는 밖에 있다... 으음... 어려운 문제로군..."
......
음? 싸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감옥을 지키는 마술사가 있었는데... 마술을 사용하는 소리도 들린다.
싸움의 소리는 금방 멎었다.
누구였을까?
......
갑자기 감옥의 문이 열렸다.
아, 또 그다. 그에게는 항상 도움만 받는 것 같군.
"오오! 이거 면목없군! 또 한 번 귀공에게 도움을 받고 말았군 그래.카타리나의 지크벨트, 그대에게 한없는 감사를. 이건 내 마음일세. 부탁이니 받아 주길 바라네."
떠돌아다니며 얻은 쐐기석 원반을 그에게 주었다.
나에게는 이제 약속의 증표만 있으면 된다. 이제 그런 물건은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그는 유용하게 사용해 주겠지.
"아아, 귀공, 미안하네만 먼저 가주지 않겠나. 나도 금방 뒤따르겠네. 이번에야말로 사명을 이룰 각오를 다지고 말이야."
그래. 이번에야말로. 나의 사명을, 약속을 지킬 각오를 다져야 한다.
오랜 친구와의 약속을.
......
저기가 욤의 왕좌가 있는 방이었지.
아, 그도 저기에 가는군.
그가 욤의 왕좌가 있는 방에 들어섰다.
그리고 나도 그를 따라 들어갔다.
아아, 욤. 오랜 친우여.
약속을 지키려 여행을 떠나 여기로 도착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네.
이제야 자네를 마주하는군.
"욤, 내 오랜 벗이여. 카타리나의 지크벨트, 약속을 다 하고자 여기 왔다네. 장작의 왕에게 태양 있으라."
망상 소설을 쓰고 있던 차, 약간 지친다...는 느낌이 들어 환기하려고 다른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글을 씁니다.
'소설' 이라는 검색어로 게시판에서 검색을 하다가 '소설의 소재를 정해달라' 라는 글의 댓글 중, 지크벨트 1인칭 해달라는 글이 있어서 끄적여 봅니다.
뭐, 제가 신청받은 것도, 제가 신청 받는다고 한 적도 없지만 그냥 써보고 싶어졌거든요.
여담으로, 이 글은 대략 4시간~5시간동안 쓴 글입니다.
빡집중했어요. 아아, 힘들어라. 두마디만 더 하고 자러 가야겠어요.
지크벨트. 상당히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사랑스러운 양파갑옷과 털털한 웃음, 약간의 허당끼까지...
카타리나의 기사에게 태양 있으라.
61.75.***.***
183.99.***.***
성직자 캐릭터는 시리즈 대대손손 슬픈것 같네요 ㅠㅠ 호드릭과 시리스 이야기는 어떠신지...? | 20.08.22 02:15 | | |
59.19.***.***
아, 이미 썼는데 알려드리는 게 늦었네요. 이미 읽으셨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링크입니다. https://bbs.ruliweb.com/family/4892/board/183787/read/9575180?page=3 | 20.08.24 09:41 | | |
218.101.***.***
61.75.***.***
감사합니다. | 20.08.22 01:22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