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시야마. 嵐山
1.
서울 시내 한 복판에서 거리를 걷다 우연히 전에 사귀던 사람을 마주치는 건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제주도에서 만난다고 해도 어느 정도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교토 아라시야마에 있는 아무도 찾지 않은 지 오래되어 보이는 山寺에서 전 여자친구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조금은 놀라도 괜찮은 일이다. 그 정도로 호들갑 떤다고 핀잔을 주는 사람은 없을 테니.
아라시야마 명물인 하늘 끝까지 자라 있는 대나무는 걸음의 방향을 잃게 만들었고, 미숙한 여행자는 생각 없이 앞으로만 걸었다. 여행이란 도무지 성미에 맞지 않는 여가 활동이었다.
빽빽하게 푸른 기둥으로만 차있는 숲을 지나 언덕과 언덕을 돌아 올라가보니, 돌담의 허리가 무너져있는 허름한 절이 보였다.
어차피 길을 잃은 김에, 구경이나 하자는 생각에 안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누구도 찾아오지 않은 것이 분명한 廢山寺였다.
그래도 탁 트인 하늘 때문에 버려진 건물이 보이는 침울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브리 영화에서 나올 듯한, 생명이 지나간 자리에 다시 생명이 피는 장소 같았다. 불심이라곤 일도 없는 사람이지만, 진실한 영혼이 머물렀던 터에선 사뭇 진실된 마음을 갖게 되었다.
바람에서 나는 풀잎 냄새가 속을 깨끗하게 씻어 내주며, 몸을 지나갔다. 나무의 숨이 인간의 숨이 되는 곳이었다.
절 안을 들어갔다 나오자, 이끼가 잔뜩 낀 불상 뒤로 주황색 코트에 비니를 쓰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여자는 조그마한 필름 카메라로 풍경을 찍고 있었다. 찰칵거리는 셔터 소리가 조용한 풍경을 잘랐다.
한껏 분위기에 취해 있는 여행자를 방해하지 않으려, 나는 발소리를 줄이고, 가장자리를 따라 오른쪽으로 갔다. 그때 카메라를 내리고 돌아선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세린이었다.
“뭐야?”
“너야?”
이상한 질문에 이상한 반문이었다.
반갑다면, 반가운 얼굴이었다. 반갑지 않다면, 반갑지 않을 얼굴이었다.
2.
사진을 다 찍고, 우리는 함께 내려왔다.
“폰이 죽어서. 지도를 못 봤어.”
어쩌다 거기까지 갔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가까웠다면, ‘그러게 보조 배터리를 챙겼어야지.’라고 한소리를 들을 대답이었겠지만, 지금은 둘 다, 그만한 일로 열을 올릴 이유가 없었다.
원래 그런 애도 아니었고.
너도 여행 중이냐고 묻자 세린이가 대답했다.
“할머니 뵈러 왔어.”
“할머니가 일본에 계셔?”
“외가가 일본이야. 몰랐었어?”
“그런 말한 적 없으니까.
애초에 얘길 별로 안 했잖아.”
“그럼 우리 만나서 뭐했는데?”
“게임.”
정말 세린이를 만나면서 한 건, 게임 말고는 없었다. fc부터 닌텐도의 계보를 모두 외웠고, 미야모토 시게루를 숭배했다. fc 젤다의 전설을 플레이하는 걸 보고, 이런 그래픽으로 게임이 되냐고 하자, 그래픽은 상상력 부족한 사람들한테나 필요한 것이라고 세린이 훈계를 주었다.
데이트는 항상 게임으로 시작해서 게임으로 끝났다.
“좋았었네.”
그 말을 하며, 세린이는 물끄러미 서로를 등에 업고 밀려나가는 구름을 보았다.
아래로 완전히 내려오자 하늘은 노을을 받아 분홍빛을 띠었다. 카츠라 강 물비늘은 하늘의 색을 그대로 비추고 있었다. 물결마다 담긴 구름들은 작은 붓으로 분홍빛을 촘촘히 찍은 것처럼 보였다.
토게츠교 앞에는 강을 자르는 바위 턱들이 쏟아지는 물의 계단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교토로 가기 위해 28번 버스를 기다렸다. 여행지의 길은 좁아서 어디로 가든, 가는 길이 정해져 있다. 방향이 같은 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할머니댁이 거기 있었고, 나는 돌아가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버스에 타자마자, 세린이는 스위치를 꺼냈다. 화면 속에선 초록색 옷의 검을 든 노란 머리 남자가 누비고 있는 풀밭은 분명 하이랄의 평원일 것이다. 거의 모든 게임을 좋아했지만, 젤다 시리즈에 대한 애착은 유별났다. 사이트 링크를 보내달라고 하면, 링크 사진을 보내줄 정도였다.
나중에는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었다.
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일본 버스는 차가 아니라 지하철 같았다. 기계로 작동되는 것처럼 정확히 정류장 위치에 정차하고, 일정한 속력으로 주행한다.
버스 안에서, 스위치를 한다.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의 버스는 지하철이 아니라, 롤러코스터의 친척이니까.
흔들림 없는 창 너머로 낮은 키의 빌딩들이 되감기를 하듯 뒤로 밀려나갔다.
어깨 너머로 화면을 보고 있다는 걸 안 세린이가 고개를 돌렸다.
“왜, 하고 싶어?”
“아니, 그냥.”
“이거 장난 아냐. 새로 나온 거거든
말도 안 되는 오픈 월드야.“
“얼마나 넓기에?”
“‘중요한 건 얼마나 넓으냐’가 아니라,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야.”
“뭐가 다른데?”
“맵이 아무리 넓어도 구현만 되어 있는 거라면 없는 곳이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여기에서는 어디든 갈 수 있어, 지도에 보이는 곳 모두.”
세린은 그게 마치 인류가 성취한 새로운 발견인 듯 말했다.
“게다가, 얼음에다 고기를 넣으면, 얼어.
불에 넣으면, 구워지고.”
“당연한 거 아냐?”
“그 당연한 게 안 되던 세상이었어.”
건조한 말투에 담백한 눈동자,
여전했다.
3.
세린이를 만나게 된 건 동수를 따라 ‘은은’ 카페에 들어갔을 때였다. 동수와 세린은 같은 과 동기였고 나는 동수와 같은 동아리에 다녔다. ‘러닝타임’이라는 촌스런 이름의 영화제작동아리였다. 영화도 40년이나 지난 것들만 보는, 지루한 동아리였다.
물론 그런 영화를 좋아해서 들어간 것이었고, 결국 나도 그곳에서 있던 모두와 다름없이 다른 자리에서는 따분한 사람이었다.
찰리 채플린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대화의 구석으로 밀려나기란 너무 쉬운 그때였고, 요즘이었다.
‘은은’은 그런 사람들만 찾는 카페였다.
주문하러 계산대에 갔을 때, 동수가 요란하게 인사를 했고, 세린이는 시큰둥하게 받아주었다. 그래도 둘은 친해보였다. 대놓고 무시하려면, 어지간히 친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니.
둘을 뒤에서 바라보던 나는 그 장면이, 바스트 숏이었다, 각 인물의 표정을 번갈아 클로즈업 하는, 익숙하게 느껴졌다. 세린도 낯선 얼굴이 아니었다.
테이블에 앉아 주문한 커피를 마시면서, 출처를 알 수 없는 기시감이 어디서 왔는지 머릿속을 이리저리 뒤적였다. 그러나 그 선명하게 잘려나간 기억 있었다는 것만 기억 날 뿐,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쟁반을 반납대에 돌려놓을 때, 세린이 다가왔고 나는 멍한 얼굴로 한 걸음씩 걸어오는 동작을 느리게 재생시켰다. 정신을 차렸을 땐, 불편할 정도로 얼빠진 채 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라는 후회가 뒤통수를 때리고 있었다.
그 뒤로 매일같이 ‘은은’을 들리기 시작했다. 그 집 커피는 끝내주게 맛없었지만, 그것마저도 참을 만 했다.
제대로 만나기 전까지, 거의 모든 게 다 참을 만했다.
4.
저녁은 어디서 먹으려고.
쿠로고마
여행 블로그에서 명소로 이름난 곳이었다.
거길 왜 가?
맛있대.
그거 먹으면, 관광객들이 한국 와서 순삭 토스트 줄 서서 먹는 거랑 같은 거야.
세린이가 안됐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딱히 잘못한 일도 없는데, 나도, 순삭 토스트도.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 스위치를 가방에 집어넣은 세린이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로컬 맛집 데려다 줄게.”
“어디?”
“있어, 아는 데”
세린이는 버스에서 내려 또 다른 버스에 나를 태웠고, 다시 한 번 더 내렸을 땐, 어두운 주거지 한 복판이었다. 초등학교 하나를 지나고, 불 꺼진 가게 하나를 지났다. 어둔 밤에 걷는 낯선 길에선, 따라갈 사람이 코앞에 있어도, 길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로컬에게는 전혀 아니겠지만.
10분 정도를 걷고 나자. 비로소 작은 창으로 불빛을 내는 음식점이 나왔다.
가게 입구엔 돌고래 야고가 그려진 검은 노렌이 걸려있었다. 천을 스쳐 지날 때, 긴 세월만 새길 수 있는 짙은 시간의 냄새가 났다.
안으로 들어가니, 주방을 둘러싸고 있는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도 겉이 닳아 누런 나무의 속내가 언뜻 언뜻 보였다. 낡은 가게였다.
풍경 소리를 들은 사장이 나와 살갑게 손님을 맞아주었다. 등이 벌어진 건장한 체구의 그는 세린이랑은 친한 눈치였다. 농담을 주고받았는지, 둘이 크게 웃었고, 나는 섬처럼 바에 앉아 딴 짓을 하는 척 했다. 몇 초를 때울 메뉴판도 없었다.
로컬은 알아서 메뉴를 주문했고
잠시 후
오코노미야끼 둘, 사케 하나가 나왔다.
입안에서도 김을 피워내는 오코노미야끼는 소개시켜주고 싶을 만한 맛이었다.
“맛있네, 자주 왔었나봐?”
“어릴 때부터 왔지. 집이 여기거든.”
사케 한 잔에선 사과 맛이 났다.
두 잔에선 청포도 맛이 났다.
나중에는 아무래도 좋을 맛이었다.
“너 박 교수 랩실에 들어갔었다며?”
동수에게서 들었던 마지막 소식이었다.
“아. 응.
아직도 거기 있어.”
“우리 과에서도, 박 교수 사납다고 소문났었는데.
괜찮아?”
괜한 트집이었다.
“다닐 만 해, 일하는 사람들이 좋아서.”
“다행이네.”
세린이는 테이블 앞에 타일을 바라보았다.
“진짜 좋은 사람이야.”
수가 줄었다.
“웃기도, 잘 웃고.
사람 마음 잘 알아주고.”
뒤이어 좋은 소식이 들릴 것이다. 좋은 소식을 예고하는 말이었으니까.
“나, 결혼해.”
시선은 여전히 타일에 있었고, 나도 타일을 보았다.
사장은 안 보는 척, 한국어로 대화하는 세린이를 보았다. 드문 장면이었을 것이다. 알고는 있었어도.
“잘 됐네.”
“그치. 잘 된 거지.”
말이랑은 다르게, 목소리엔 힘이 빠져있었다.
결혼하기 전에, 괜히 뒤숭숭해진다더니, 그런 것도 같았다.
“신기하네.”
“뭐가?”
“이렇게 말 많이 하는 거 처음 봐서.”
“취해서 그런가 보지.”
“취하면 원래 그래?”
“원래 그래.”
“그런 얘기도 한 적 없잖아.”
“별로 안 좋아했었나 보지.”
그 말을 뱉고는 실수를 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아무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세상엔 실수 같은 건 없었다. 실수 같은 생각은 있어도.
5.
밖으로 나오자, 숨에서 김이 나왔다. 늦가을의 밤은 겨울을 닮았다.
가게에서 충전한 폰을 켜, 시계를 봤다. 6시간 만에 다시 찾은 시간이었다.
“늦었네, 숙소 어디야?”
“그게 사실 오사카에서 자야하는데….”
가기는 무리일 테다. 잠잘 곳도, 수고스럽게 구해야 하는 여행은 정말 내 취미가 아니었다.
“지금 못 가.”
“뭐, 에어비앤비 찾아봐야지.”
“재워줄게, 바로 앞이야.”
“할머니댁?
아, 괜찮아. 찾아보면 나오겠지.”
아까부터 폰만 바라보며 대화하고 있었다. 그게 안전하다는 판단이었다.
“내가 안 괜찮아.”
빚 주고는 못 사는 성격, 세린이는 기어코 나를 할머니댁으로 끌고 갔다.
손녀의 늦은 귀가에도, 느닷없는 손녀 친구의 방문에도. 할머니는 언짢은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으셨다. 별 말씀도 없이 방을 내어주고, 옷가지를 챙겨주시는 모습에서, 세린이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빌린 방은 세린이가 게임방으로 쓰던 방이었다.
꼼꼼하게 정렬된 팩과 기기, 캐릭터 브로마이드를 보니, 꼭 예전에 자취방에 놀러온 것도 같았다.
이런 곳이 편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비슷한 물건들이 있는 곳은 비슷한 기분을 들게 한다. 이따금, 기억의 주인은 물건들이란 생각을 했다. 굴릴 때마다 바스락 거리는 생각이었다,
할머니가 주신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불을 끄려고 했을 때, 문이 열렸다.
“자기 전에 조금 할래?”
불쑥 들어온 세린이는 TV 아래 wii를 가리켰다.
“좋아.”
그땐 지겹도록 했는데, 오랜만에 한다하니, 또 재밌게 느껴지는 게 사람이었다.
그 사람도 게임에 시달리고 있으려나.
세린이가 고른 타이틀은 슈퍼 스매쉬 브라더스였다.
그나마 좋아했던 게임이었다. 때리고, 날려버리기만 하면 되니까,
세린이는 링크를 선택했고, 나는 젤다였다. 나름 짓궂은 선택이었다. 물론 플레이에 들어갔을 때 세린이의 링크는 사정없이 검으로 프린세스 젤다를 내리쳤고, 나는 다른 캐릭터들과 함께 화면 밖으로 날아가기만 했다.
이 게임의 매력은 자신이 날아갈 때도 통쾌하다는 것이었다. 진다고 해서 열 받지도, 못한다고 해서, 짜증나지도 않는다. 그저 펑펑 터지고, 팡팡 터뜨리면 된다.
“나, 결혼한다고 했잖아.”
왜 그렇게 얘기하고 싶은 건지.
“결혼식이 10월 11일이야.”
“다음 주네.”
그래서 오라는 건지.
“남자친구 축구 진짜 좋아하거든.”
체격 하난 좋겠다.
“그게 뛰다보면 심장이 빨리 뛰잖아.”
그렇겠지.
“근데 그게 멈췄어.”
고개를 돌렸을 때
세린이는 컨트롤러를 꽉 쥐고 있었다.
“다행히 죽진 않았는데.
의식이 없어.
몸만 살았대.“
컨트롤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럼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니잖아.
좋아해도, 좋아하기가 힘들잖아.
그게 두려운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컨트롤러가 떨어졌고, 흐느끼는 소리가 시끄러운 게임 음악에 섞여 나왔다. CPU들은 아직 게임중이었다.
커비가 쏜 별에 맞아, 젤다 공주가 날아갔다. 그 틈을 타, 와리오가 해머를 들었고, 스테이지에 있던 모두를 마구 튕겨내기 시작했다. 해머를 내려칠 때마다 배경음악은 더 박진감 넘치게 연주되었다.
명랑한 사운드에 포개진 캐릭터들의 장난스런 소동은 주인이 손을 놓았어도, 계속 되었다.
해줄 말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게임을 끄는 것조차
미안했다.
흐느끼다, 울었고, 울다가 지쳤다.
지쳤다가, 다시 울었고, 울다가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서도, 울고 있었다.
세린이가 완전히 잠들고 나서,
wii를 껐다.
방은 조용해졌고,
나는 거실로 나갔다.
6.
다음날 새벽 일찍 세린이네를 나왔다. 할머니께 인사도 드리지 않고 나온다는 게 맘에 걸렸지만, 오래 있을 순 없었다.
깨우지 않고 방에서 짐을 챙겨 나온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아침 9시, 공항으로 가는 기차에 오를 때에도 연락 온 것은 없었다.
혹시나 싶어 주소를 찍어둔 게,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7.
의자에 앉아 비행기를 기다렸다.
앞에서 프랑스인 부부가 시끄럽게 구는 아이를 혼냈다.
한 자리 건너, 비니를 쓴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탑승을 알리는 방송이 들렸다.
8.
비행기가 떴을 때,
‘잘 가.’
라고 왔다.
하마터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