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산에 머무는 심홍빛 현자
수통의 마개를 열고 수통을 뒤집어 물을 마시려던 사내는 결국 또 낙담하고야 말았다.
의뢰를 받았을 때만해도 별로 크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고 이렇게 궁지에 몰릴 거라곤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젠장 빌어먹을 영감탱이!!"
사내는 거칠게 수통을 집어 던지고는 뒤로 아무렇게나 누워버린 뒤 마른 고기를
분풀이 대상 마냥 씹어댔다.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양념에 오랫동안 절여둔 뒤 그늘에서
딱딱하게 말려놓은 고기는 이미 소금 덩어리나 다름없었다 마지막 물도 떨어진 상태에서 씹어봤자 오히려 굶느니만 못할 것 같았지만 어쨌든 뭐라도 먹어 둬야 내일 다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사냥꾼에게 그 산에 대해 자세한 정보 정도는 충분히 알려줬어야 할거 아닌가?
이건 대체, 샘이 하나밖에 없는 산이라니!
사내는 고기를 씹으며 분을 터뜨렸지만 사실은 자신의 불찰이란 것을 알고있었다.
그저 곰 한 마리만 잡아오면 된다는 말만 믿고 제대로 준비도 하지 않고 입산해버린 자신이 바보인 것이다. 어쨌든 이것저것 짐이 많아지면 행동에 지장이 오는 법이다. 여러 마리를 잡아달라는 것도 아니고 고작 한 마리라면 이 삼일 정도면 충분하겠다고 판단해서 식량과 물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사냥에 돌입했다. 그것까진 좋다고 쳐도 제대로 된 지도조차 준비하지 않은 사냥꾼은 이미 실격인 것이다. 촌장에게서 받은 간략한 지도가 있긴 했지만 그 지도는 하산할 때 길을 잃지 않는 정도의 용도밖엔 쓰지 못할 것 같았다.
사실 곰이라면 이미 두, 세 마리 정도 봤다. 하지만 그는 산에 오른 당일 촌장이 잡아달라는 그 곰은 특정한 어느 짐승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잔챙이들을 잡아가 봐야 제대로 보수를 받을 리 없었다. 무엇보다 이미 점찍어 놓은 사냥감을 두고 산을 내려가기엔 아직 몸의 괴로움보다 그의 자존심이 더 강했다.
나흘전 산에 오르자마자 그는 임시적으로 사용할 거점을 정하기 위해 산을 돌아다니며 적당한 장소를 찾기 시작했고 마침 보이는 적당한 굴에 자리를 잡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안쪽을 향해 들어가던 중 커다란 검붉은 바위 하나를 보았다. 어쩌면 제법 돈 되는 광석일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직접 제작해놓은 한 손으로도 사용할 수 있을법한 작은 곡괭이를 들고 바위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이 작은 곡괭이로 바위의 파편이라도 캐 갈라면 몇 번은 내리 쳐야겠구나 하는 짐작과는 달리 의외로 곡괭이는 바위 속으로 쑥 들어갔다.
그리고 바위가 눈을 떴다.
사내는 최대한 짐승을 자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아주 천천히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그 짐승은 웅크리고 자고있었던 걸로 보아 깊게 잠이 들었을 것이다. 만약 놈이 깊이 들었던 잠에서 막 깨어난 상태라면 아마도 아직 상황파악이 덜 된 상태일 테니까 굴의 입구까지 만 조심해서 물러난 뒤 그 후에 전력을 다해 도망친다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처음은 사내의 생각대로 흘러가는 듯 했다. 그 짐승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디서 공격을 받았는 지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내는 좀 더 빠르게 뒤로 물러나 거리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천천히 등에 매어져 있는 활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처음 느꼈던 당혹감이 사라지고 어쩌면 이 자리에서 죽일 수 있다는 자만심이 몰려 온 것이다.
사실 야생짐승과 불시에 조우한다는 것 자체에서 이미 최악의 상황이라고 말 할 수 있겠지만 피치 못하게 정면에서 마주쳤을 경우, 그것도 지금같이 덩치가 압도적으로 큰 짐승과 대치중일 때엔 작은 굴이라는 지리적 조건이 사냥꾼의 입장에선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벽이라도 등지는 순간에는 피할 수 있는 여건이 제한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차라리 넓고 시야가 탁 트인 곳을 선호하기 마련인 법이다.(사냥감이 무리 지어 생활하는 짐승인 경우엔 오히려 이런 곳은 치명적이지만 곰이나 범은 단체생활을 하는 짐승이 아니므로)
이런 기본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사내는 지금이라면 눈을 정확하게 노려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 빠르게 그 짐승과 눈이 마주쳤고, 문득 자신이 짐승과 눈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한참 동안 올려봐야 할 만큼 체격 차이가 난다는 걸 깨달은 그 순간 그것은 자신의 자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초원의 들소 떼나 혹은 타국의 높은 산에서만 산다는 산양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휘어진 뿔이었다 장성한 청년의 팔뚝 크기만큼이나 되는 뿔이 이마에서부터 시작되어 두 개나 달려있었다. 그 뿔의 인상과는 반대로 짐승의 얼굴은 곰보단 차라리 범에 가까웠으나 몸은 다른 곰보다 허리가 꽤 길다는 것을 제외하면 몸통과 팔다리가 굵고 강인해 보인다는 면에서 곰과 비슷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만 곰에 비해 털이 더욱 짧고 억세 보이며 선명한 검붉은색을 띠고있다는 점이 제일 다른 점이었다.
사내는 어디선가 그런 생김새를 한 짐승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았으나 채 떠올리기 전에 짐승의 움직임이 빠르게 시작됐다. 그와 동시에 사내도 몸을 날리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아슬아슬하게 맹수의 앞발이 그의 옆으로 비켜갔을 때 사내는 곰과는 달리 사람의 손 모양을 닮은 듯하기도 하고 얇고 긴 발가락과 발톱이(어디까지나 덩치에 비해 얇고 긴) 매의 그것 같기도 한 특이한 앞발을 보고 그 맹수의 이름을 떠올려 낼 수 있었다.
'조수(鳥手)의 주호(朱虎)!! 젠장 고양이과 신수(神獸)잖아!! 뭐가 곰이냐!!'
그제야 속았다는 걸 깨달았지만 화내고 있을 틈이 없었다. 주호는 심홍빛 현자라고 불릴 만큼 널리 알려진 현명함을 비롯해서 다른 특징들도 자자한데 그 중 하나는 보통 범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강맹한 연속 공격이었다. 분명 제정신을 차리면 쉴 틈을 주지 않고 달려들 것이 자명했다.
사내는 허리춤에서 조막 만한 구슬을 꺼내 주호의 콧잔등에 있는 힘껏 던졌다. 제 아무리 흉폭하기 그지없는 주호라도 결국엔 고양이과 짐승이므로 콧잔등에 자극을 받는다는 건 꽤나 견디기 힘들 터였다. 그리고 그 구슬의 역할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콧잔등에 정확히 맞은 구슬은 깨지면서 주변에 고운 가루를 사방에 날렸다. 붉은 색을 띄는 그 가루는 왜국에서(倭國=일본) 들여온 신화학 병기(고춧가루)였다.
사내는 구슬이 맞은 것도 확인하기 전에 재빠르게 밖으로 튀어나가 굴에서 조금 떨어진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사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처음 느껴보는 극심한 고통에 난동을 피우던 주호는 이내 굴 밖으로 뛰쳐나와 맹렬한 기세로 도망쳤다. 좇아가 볼까하는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범의 발을 사람이 따라잡기란 무리가 있을 것이고 진땀빼며 좇아봤자 달리던 도중에 힘이 빠져 사로잡을 수 도 없을 터였다. 다행히 뒷다리에 박아 넣은 곡괭이 덕분에 주호는 현재 출혈 상태이니 천천히 숨 좀 고르고 혈흔을 추적하면 은거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덤으로 피를 많이 흘려 기력이 쇠하게 될 테니 이것을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겠다, 라고 생각하며 혈흔을 좇아 주호를 추적을 시작한 다음 날 오후, 마치 일부러 길을 잃게 하려는 듯이 규칙 없이 그리고 목적지도 없이 한나절을 추적 할 동안 이어진 혈흔이 곡괭이와 함께 끊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곡괭이가 발견된 땅에는 아직 피기가 흥건하게 배어있었는데 아마도 그 자리에서 다리에 박힌 곡괭이를 뽑고 지혈을 한 모양인 듯 하다. 역시나 신수답게 현명한 것이 상황을 낙관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의 출혈이라면 멀리가지 못했으리란 믿음을 가지고 주변을 찾아보니 의외의 선물을 발견했다. 작은 물웅덩이를 발견한 사내는 조심스레 주변을 살펴보고 이내 웅덩이로 다가갔다.
거기서 사내는 작은 절망을 맛봤다.
이틀만에 발견한 웅덩이에는 산짐승들의 사체들이 물에 떠있었다. 수원을 오염시킨 것이다. 어디서 구한 건지 동물의 사체들 중엔 생각보다 부패정도가 심한 것도 있었다. 이래선 식수는커녕 씻을 물로조차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심홍빛 현자(賢者)라고 불리는 주호가 하나뿐인 수원을 오염시킬 리는 없다. 분명 어딘가 다른 샘이 있을 테지만 워낙 산세가 험한 탓에 함부로 움직이면 길을 잃을 위험이 있다고 판단해서 우선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이 곳을 중심으로 수색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이틀 전 그리고 지금은 벌써 산에 오른 지 나흘째 저녁이 되었다.
분을 좀 가라앉힌 사내는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주호가 자신을 먼저 덮치지 않는 걸로 보아 다리의 부상은 아직 치유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첫날 굴에서 봤던 것처럼 아무리 부상을 입었어도 인간이 따라가기엔 역부족인 기동성을 가지고 있다. 착용한 무구도 부실하고 준비해 온 보조 장비도 턱없이 모자라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젠 더 이상 남은 물이 없다는 게 치명적이다. 내일까진 어떻게든 버티겠지만 모레부터는 탈수 증상의 위험을 고려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활동 가능 범위가 제한 될 것이다. 아직까지 찾지 못한 다른 샘이 내일 턱하니 나타나 준다는 보장 따윈 없다. 자존심이 좀 구겨지더라도 우선은 하산해서 함께 할 동료 사냥꾼을 모으고 함정을 설치 한 뒤 오랜 시간을 들여서라도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토벌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아무리 촌장이 자신을 속였고 또 생면부지의 마을 사람들이더라도 저런 신수가 민가 근처에 있는 산에 살고있는 것을 외면할 수는 없는 법이다. 만에 하나라도 주호가 사람의 피 맛을 본다면 아니 이미 사람에게 습격 당한 경험이 있으니 분명히 이른 시일 내에 사람을 해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주호는 당연하다는 듯이 민가로 내려올 것이고 그것은 어줍잖게 주호를 건드린 자신의 탓이 되는 것이다.
이미 자존심을 따질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은 날이 밝는 즉시 마을로 내려가기로 마음먹은 사내는 모닥불의 기세를 조금 누그러뜨리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다시 천천히 몸을 뉘었다.
바로 그 순간 사내는 누울 때와는 반대로 용수철처럼 퉁겨져 일어났다. 그리고 재빠르게 옆에 두었던 소도(小刀)를 빼 들었다. 아주 작고 낮은 소리였지만 개과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귓가를 스친 것이다. 사내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고양이과인 범이나 표범 같은 짐승들은 불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불을 피워도 괜찮지만 오히려 개과인 늑대나 곰 같은 경우엔 불을 보면 호기심을 품고 근처에 접근하기 때문에 불을 크게 피워선 안 되는 것이었다. 머릿속에 주호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 차서 작은 것을 놓쳐버렸다. 이곳은 밝으니 적의 눈에 잘 띄겠지만 오히려 사내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적을 발견하기 어렵게 되었다. 더욱이 상대가 늑대라면 이미 포위되었을 것이다.
'잠깐, 늑대?'
늑대라면 주변을 완전히 포위하기 전부터 으르렁대는 어리석은 행동을 할 리가 없을 것이다. 사내가 간신히 포착할 만큼 아주 작은 소리였으므로 꽤 먼발치에서 난 소리일텐데 그렇다면 늑대가 아닌 단순한 들개일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들개들이 만만한 건 아니지만 시끄럽게 여러 마리가 짖는 소리가 아닌 한 마리로 추정되는 듯한 소리였으니 단순한 떠돌이 개 일 가능성도 있었다.
'들개고기는 맛있다던데..'
사내는 활을 집어들고 몸을 어둠 속에 감춘 채 천천히 소리가 난 곳으로 향해갔다.
PS:제목의 남산은 서울 남산이 아니라; 동네의 남쪽에 있는 산.. 그러니까 어디서든
흔히 볼수있는 산에 숨어있는 현자란 의미의 남산입니다;
수통의 마개를 열고 수통을 뒤집어 물을 마시려던 사내는 결국 또 낙담하고야 말았다.
의뢰를 받았을 때만해도 별로 크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고 이렇게 궁지에 몰릴 거라곤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젠장 빌어먹을 영감탱이!!"
사내는 거칠게 수통을 집어 던지고는 뒤로 아무렇게나 누워버린 뒤 마른 고기를
분풀이 대상 마냥 씹어댔다.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양념에 오랫동안 절여둔 뒤 그늘에서
딱딱하게 말려놓은 고기는 이미 소금 덩어리나 다름없었다 마지막 물도 떨어진 상태에서 씹어봤자 오히려 굶느니만 못할 것 같았지만 어쨌든 뭐라도 먹어 둬야 내일 다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사냥꾼에게 그 산에 대해 자세한 정보 정도는 충분히 알려줬어야 할거 아닌가?
이건 대체, 샘이 하나밖에 없는 산이라니!
사내는 고기를 씹으며 분을 터뜨렸지만 사실은 자신의 불찰이란 것을 알고있었다.
그저 곰 한 마리만 잡아오면 된다는 말만 믿고 제대로 준비도 하지 않고 입산해버린 자신이 바보인 것이다. 어쨌든 이것저것 짐이 많아지면 행동에 지장이 오는 법이다. 여러 마리를 잡아달라는 것도 아니고 고작 한 마리라면 이 삼일 정도면 충분하겠다고 판단해서 식량과 물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사냥에 돌입했다. 그것까진 좋다고 쳐도 제대로 된 지도조차 준비하지 않은 사냥꾼은 이미 실격인 것이다. 촌장에게서 받은 간략한 지도가 있긴 했지만 그 지도는 하산할 때 길을 잃지 않는 정도의 용도밖엔 쓰지 못할 것 같았다.
사실 곰이라면 이미 두, 세 마리 정도 봤다. 하지만 그는 산에 오른 당일 촌장이 잡아달라는 그 곰은 특정한 어느 짐승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잔챙이들을 잡아가 봐야 제대로 보수를 받을 리 없었다. 무엇보다 이미 점찍어 놓은 사냥감을 두고 산을 내려가기엔 아직 몸의 괴로움보다 그의 자존심이 더 강했다.
나흘전 산에 오르자마자 그는 임시적으로 사용할 거점을 정하기 위해 산을 돌아다니며 적당한 장소를 찾기 시작했고 마침 보이는 적당한 굴에 자리를 잡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안쪽을 향해 들어가던 중 커다란 검붉은 바위 하나를 보았다. 어쩌면 제법 돈 되는 광석일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직접 제작해놓은 한 손으로도 사용할 수 있을법한 작은 곡괭이를 들고 바위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이 작은 곡괭이로 바위의 파편이라도 캐 갈라면 몇 번은 내리 쳐야겠구나 하는 짐작과는 달리 의외로 곡괭이는 바위 속으로 쑥 들어갔다.
그리고 바위가 눈을 떴다.
사내는 최대한 짐승을 자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아주 천천히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그 짐승은 웅크리고 자고있었던 걸로 보아 깊게 잠이 들었을 것이다. 만약 놈이 깊이 들었던 잠에서 막 깨어난 상태라면 아마도 아직 상황파악이 덜 된 상태일 테니까 굴의 입구까지 만 조심해서 물러난 뒤 그 후에 전력을 다해 도망친다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처음은 사내의 생각대로 흘러가는 듯 했다. 그 짐승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디서 공격을 받았는 지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내는 좀 더 빠르게 뒤로 물러나 거리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천천히 등에 매어져 있는 활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처음 느꼈던 당혹감이 사라지고 어쩌면 이 자리에서 죽일 수 있다는 자만심이 몰려 온 것이다.
사실 야생짐승과 불시에 조우한다는 것 자체에서 이미 최악의 상황이라고 말 할 수 있겠지만 피치 못하게 정면에서 마주쳤을 경우, 그것도 지금같이 덩치가 압도적으로 큰 짐승과 대치중일 때엔 작은 굴이라는 지리적 조건이 사냥꾼의 입장에선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벽이라도 등지는 순간에는 피할 수 있는 여건이 제한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차라리 넓고 시야가 탁 트인 곳을 선호하기 마련인 법이다.(사냥감이 무리 지어 생활하는 짐승인 경우엔 오히려 이런 곳은 치명적이지만 곰이나 범은 단체생활을 하는 짐승이 아니므로)
이런 기본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사내는 지금이라면 눈을 정확하게 노려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 빠르게 그 짐승과 눈이 마주쳤고, 문득 자신이 짐승과 눈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한참 동안 올려봐야 할 만큼 체격 차이가 난다는 걸 깨달은 그 순간 그것은 자신의 자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초원의 들소 떼나 혹은 타국의 높은 산에서만 산다는 산양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휘어진 뿔이었다 장성한 청년의 팔뚝 크기만큼이나 되는 뿔이 이마에서부터 시작되어 두 개나 달려있었다. 그 뿔의 인상과는 반대로 짐승의 얼굴은 곰보단 차라리 범에 가까웠으나 몸은 다른 곰보다 허리가 꽤 길다는 것을 제외하면 몸통과 팔다리가 굵고 강인해 보인다는 면에서 곰과 비슷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만 곰에 비해 털이 더욱 짧고 억세 보이며 선명한 검붉은색을 띠고있다는 점이 제일 다른 점이었다.
사내는 어디선가 그런 생김새를 한 짐승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았으나 채 떠올리기 전에 짐승의 움직임이 빠르게 시작됐다. 그와 동시에 사내도 몸을 날리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아슬아슬하게 맹수의 앞발이 그의 옆으로 비켜갔을 때 사내는 곰과는 달리 사람의 손 모양을 닮은 듯하기도 하고 얇고 긴 발가락과 발톱이(어디까지나 덩치에 비해 얇고 긴) 매의 그것 같기도 한 특이한 앞발을 보고 그 맹수의 이름을 떠올려 낼 수 있었다.
'조수(鳥手)의 주호(朱虎)!! 젠장 고양이과 신수(神獸)잖아!! 뭐가 곰이냐!!'
그제야 속았다는 걸 깨달았지만 화내고 있을 틈이 없었다. 주호는 심홍빛 현자라고 불릴 만큼 널리 알려진 현명함을 비롯해서 다른 특징들도 자자한데 그 중 하나는 보통 범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강맹한 연속 공격이었다. 분명 제정신을 차리면 쉴 틈을 주지 않고 달려들 것이 자명했다.
사내는 허리춤에서 조막 만한 구슬을 꺼내 주호의 콧잔등에 있는 힘껏 던졌다. 제 아무리 흉폭하기 그지없는 주호라도 결국엔 고양이과 짐승이므로 콧잔등에 자극을 받는다는 건 꽤나 견디기 힘들 터였다. 그리고 그 구슬의 역할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콧잔등에 정확히 맞은 구슬은 깨지면서 주변에 고운 가루를 사방에 날렸다. 붉은 색을 띄는 그 가루는 왜국에서(倭國=일본) 들여온 신화학 병기(고춧가루)였다.
사내는 구슬이 맞은 것도 확인하기 전에 재빠르게 밖으로 튀어나가 굴에서 조금 떨어진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사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처음 느껴보는 극심한 고통에 난동을 피우던 주호는 이내 굴 밖으로 뛰쳐나와 맹렬한 기세로 도망쳤다. 좇아가 볼까하는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범의 발을 사람이 따라잡기란 무리가 있을 것이고 진땀빼며 좇아봤자 달리던 도중에 힘이 빠져 사로잡을 수 도 없을 터였다. 다행히 뒷다리에 박아 넣은 곡괭이 덕분에 주호는 현재 출혈 상태이니 천천히 숨 좀 고르고 혈흔을 추적하면 은거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덤으로 피를 많이 흘려 기력이 쇠하게 될 테니 이것을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겠다, 라고 생각하며 혈흔을 좇아 주호를 추적을 시작한 다음 날 오후, 마치 일부러 길을 잃게 하려는 듯이 규칙 없이 그리고 목적지도 없이 한나절을 추적 할 동안 이어진 혈흔이 곡괭이와 함께 끊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곡괭이가 발견된 땅에는 아직 피기가 흥건하게 배어있었는데 아마도 그 자리에서 다리에 박힌 곡괭이를 뽑고 지혈을 한 모양인 듯 하다. 역시나 신수답게 현명한 것이 상황을 낙관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의 출혈이라면 멀리가지 못했으리란 믿음을 가지고 주변을 찾아보니 의외의 선물을 발견했다. 작은 물웅덩이를 발견한 사내는 조심스레 주변을 살펴보고 이내 웅덩이로 다가갔다.
거기서 사내는 작은 절망을 맛봤다.
이틀만에 발견한 웅덩이에는 산짐승들의 사체들이 물에 떠있었다. 수원을 오염시킨 것이다. 어디서 구한 건지 동물의 사체들 중엔 생각보다 부패정도가 심한 것도 있었다. 이래선 식수는커녕 씻을 물로조차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심홍빛 현자(賢者)라고 불리는 주호가 하나뿐인 수원을 오염시킬 리는 없다. 분명 어딘가 다른 샘이 있을 테지만 워낙 산세가 험한 탓에 함부로 움직이면 길을 잃을 위험이 있다고 판단해서 우선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이 곳을 중심으로 수색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이틀 전 그리고 지금은 벌써 산에 오른 지 나흘째 저녁이 되었다.
분을 좀 가라앉힌 사내는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주호가 자신을 먼저 덮치지 않는 걸로 보아 다리의 부상은 아직 치유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첫날 굴에서 봤던 것처럼 아무리 부상을 입었어도 인간이 따라가기엔 역부족인 기동성을 가지고 있다. 착용한 무구도 부실하고 준비해 온 보조 장비도 턱없이 모자라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젠 더 이상 남은 물이 없다는 게 치명적이다. 내일까진 어떻게든 버티겠지만 모레부터는 탈수 증상의 위험을 고려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활동 가능 범위가 제한 될 것이다. 아직까지 찾지 못한 다른 샘이 내일 턱하니 나타나 준다는 보장 따윈 없다. 자존심이 좀 구겨지더라도 우선은 하산해서 함께 할 동료 사냥꾼을 모으고 함정을 설치 한 뒤 오랜 시간을 들여서라도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토벌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아무리 촌장이 자신을 속였고 또 생면부지의 마을 사람들이더라도 저런 신수가 민가 근처에 있는 산에 살고있는 것을 외면할 수는 없는 법이다. 만에 하나라도 주호가 사람의 피 맛을 본다면 아니 이미 사람에게 습격 당한 경험이 있으니 분명히 이른 시일 내에 사람을 해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주호는 당연하다는 듯이 민가로 내려올 것이고 그것은 어줍잖게 주호를 건드린 자신의 탓이 되는 것이다.
이미 자존심을 따질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은 날이 밝는 즉시 마을로 내려가기로 마음먹은 사내는 모닥불의 기세를 조금 누그러뜨리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다시 천천히 몸을 뉘었다.
바로 그 순간 사내는 누울 때와는 반대로 용수철처럼 퉁겨져 일어났다. 그리고 재빠르게 옆에 두었던 소도(小刀)를 빼 들었다. 아주 작고 낮은 소리였지만 개과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귓가를 스친 것이다. 사내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고양이과인 범이나 표범 같은 짐승들은 불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불을 피워도 괜찮지만 오히려 개과인 늑대나 곰 같은 경우엔 불을 보면 호기심을 품고 근처에 접근하기 때문에 불을 크게 피워선 안 되는 것이었다. 머릿속에 주호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 차서 작은 것을 놓쳐버렸다. 이곳은 밝으니 적의 눈에 잘 띄겠지만 오히려 사내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적을 발견하기 어렵게 되었다. 더욱이 상대가 늑대라면 이미 포위되었을 것이다.
'잠깐, 늑대?'
늑대라면 주변을 완전히 포위하기 전부터 으르렁대는 어리석은 행동을 할 리가 없을 것이다. 사내가 간신히 포착할 만큼 아주 작은 소리였으므로 꽤 먼발치에서 난 소리일텐데 그렇다면 늑대가 아닌 단순한 들개일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들개들이 만만한 건 아니지만 시끄럽게 여러 마리가 짖는 소리가 아닌 한 마리로 추정되는 듯한 소리였으니 단순한 떠돌이 개 일 가능성도 있었다.
'들개고기는 맛있다던데..'
사내는 활을 집어들고 몸을 어둠 속에 감춘 채 천천히 소리가 난 곳으로 향해갔다.
PS:제목의 남산은 서울 남산이 아니라; 동네의 남쪽에 있는 산.. 그러니까 어디서든
흔히 볼수있는 산에 숨어있는 현자란 의미의 남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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