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할, 가면 갈수록 저건 규격 외라는 생각 밖에 안 드는데...
맹렬한 수증기 폭발과 함께 몸이 붕 떠오르듯이 뒤로 날아가려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기둥을 붙잡아서 저항하고 있던 카를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상식을 깨버린 현상을 일으킨 용에 대한 망연함이었다. 몸에 닿기도 전에 물마저 폭발적인 속도로 증발시킨 후 수증기 폭발로 날려버리는 그 상식을 벗어난 모습은 이미 도저히 고룡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두렵기 짝이 없었다.
-이렇게 약한 생각하면 아이샤하고 챠챠가 엄청 뭐라 할 텐데.
‘꾸드드득...!’
애써 다시 그가 아끼는 이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쓰려는 찰나, 순식간에 바로 위에 있던 갑판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망할...!”
‘쿠르르릉..!’
수위가 급격히 낮아짐과 동시에 시작된 일이었기에 카를은 물고 있던 호흡기를 뱉어낸 후 급하게 쏟아져 내리는 파편들을 피하기 위해 배를 뛰쳐나갔다.
“젠장, 해일에 폭발에... 대체 무슨 놈의 용이 저따위지?”
선체의 옆에 뚫려있는 구멍을 통해 간신히 밖으로 나선 후, 연달아 몰아치는 재난에 혀를 내두르며 숨을 고르던 중 얼마 안 가서 옆에 뒤이어 피하는데 성공한 사람이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후... 카를, 멀쩡히 잘 빠져 나왔나?”
“예, 타이밍이 아슬아슬했지만... 근데 벨라는 어디 있죠?”
“그러고 보니 저맘도... 맙소사, 설마 그 둘은 못 빠져나온 건가?”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선체의 구멍 앞에서 해일을 막아서고 있던 저맘과 해일 속에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던 벨라가 여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자 순간 두 사람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해일까지는 예상이 된 일이었지만, 뒤이어 들이닥친 엄청난 규모의 수증기 폭발은 완전히 상정 외였기에 어떤 식으로든 해를 입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기에 더욱 안색이 굳으며 차마 그 둘이 어떤 꼴을 당했을지 상상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쿠르르릉....’
ㅡ쿨럭...
“...더 움직이지 마! 이제 곧 밖이니까!”
“너, 그렇게 내가 판단을 잘하라고 했... 뭐야, 저맘은 또 왜 그래!”
그렇게 잠시 걱정에 휩싸여있던 것도 잠시, 무너져 내리는 배를 뒤로하고 익숙한 사람의 소리가 들려오자 카를은 바로 고개를 말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돌리며 안심과 분노가 동시에 서린 말을 내뱉으려했다. 하지만 그 직후 눈에 들어온 광경에 나오던 말은 중간에 갈 길을 잃어버린 채 증발해버렸다.
대 고룡용 발리스타 창이 등을 뚫고 들어가 가슴 아래로 튀어나온 그 모습. 걷기는커녕 숨을 쉬는 것도 고통스러워 보이는 그 모습. 피거품을 입에 머금은 채 식은 땀으로 범벅이 된 그 모습. 그 처참한 몰골을 한 채 저맘은 벨라에게 부축되어 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만들 정도로 충격적이기 그지없었다.
“맙소사, 저거 설마 배에 실려 있던 발리스타인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일단 저기에 기대어 눕혀! 젠장, 무슨 짓을 했기에 발리스타가!”
“나, 나 때문에... 내가 멍청하게 무리해서 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저맘이...”
ㅡ끄으으으... 쿨럭...
‘쿠구구구구구....’
저맘을 비스듬히 바위에 기대게 하자마자 바람 빠지던 소리가 나던 그녀의 입이 열리며 기침이 나왔다. 붉은 핏방울이 만신창이가 된 입에서 뿜어져 나와 대지의 진동으로 인해 멀리 흩뿌려졌다. 그 모습을 보며 얼굴이 완전히 새파랗게 질려서 제대로 말도 못할 정도로 패닉에 빠진 벨라였지만, 사시나무 떨리듯 몸을 떨면서 더듬는 그 말을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카를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옛날부터 카를은 여동생이 자기과신 때문에 판단 착오를 일으킬 수 있다고, 위급한 때에 실책을 저지를 수 있다고 이따금씩 주의를 주었다. 아마 그 자기과신 때문에 이번에도 빠져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선체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가 필히 탈출할 시기를 놓쳤고 그것을 알아챈 저맘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뛰어 들어갔다가...
“이 망할... 넌 살인을 저지른 거나 다름없어, 빌어먹을 녀석!”
“나, 나도 몰랐어... 몰랐...”
‘꾸욱’
“응?”
전말을 알아챈 격노 어린 카를의 일갈에 더욱 깊은 패닉에 빠진 벨라는 망가진 기계처럼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카를이 동생을 질책하는 동안, 리엘은 그 분위기에 끼어들 수 없어서 피투성이가 된 저맘의 입을 닦아주고 있었다. 헌데, 출혈로 힘이 빠져나가 부들거리고 있는 저맘의 손이 리엘의 손목을 붙잡았다.
“너, 그렇게 움직이면...”
‘꾸욱’
ㅡ부글부글...
“...알겠다, 불러주지.”
리엘은 저맘이 움직이는 걸 만류하려 했지만, 입에서 피거품이 끓어오르는 와중에도 핏기가 사라지고 있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누군가를 가리키자 왜 그녀가 힘을 쥐어 짜내서 자신을 잡은 건지 알아채고 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가리킨 사람을 불렀다.
“벨라, 저맘이 부른다.”
“예..?”
ㅡ쿵...
‘쿠구구구구...’
다시금 시작된 그란 밀라오스의 전진으로 인해 진동하는 땅을 뒤로하고 벨라는 다급히 저맘이 기대어 있는 바위로 뛰어갔다.
ㅡ쿨럭...
“미안해, 미안해... 나 때문에...”
다시 기침을 하며 피를 토하는 저맘을 보며 벨라는 그 옆에 가자마자 자세를 낮춰 그녀가 영영 사라질 거라는 현실에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 채로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서서히 힘이 빠져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마저 풀리고 있었지만, 저맘은 그 말을 듣자 핏기 없는 새하얀 손으로 벨라의 손을 잡았다.
‘네 탓이 아니야.’
눈물마저 못 흘릴 정도로 큰 패닉과 공포에 사로잡혀있던 벨라가 자신을 바라보자 저맘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된 피가 튀어있는 새파란 입술을 천천히 움직여 말을 전했다. 그렇게 말을 전한 후 안심시켜주려는 듯 힘이 빠져나가는 얼굴로 옅은 미소를 띠어 보인 저맘은 가쁜 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감기 시작했다.
“저맘? 정신 차려 줘, 눈을 감지 마!”
-이제 이걸로 끝이구나...
멀리서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벨라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멀어져가는 저맘의 의식 속에서는 이상하게도 자신을 영원한 잠에 들게 만든 일을 만든 근원인 연흑룡에 대한 원망이라곤 한 톨도 없었다. 단지,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녀가 재앙의 원인을 알아낸 후 줄곧 품던 의문이 그 속에서 한 꺼풀 답을 살짝 보여준 것만 같았다.
‘고작 3주로 지상과 바다의 대부분의 생명을 절멸시키는 것이 가능한 일이 백만 년간 지속되었으면...’
그 도저히 풀 수 없던 퍼즐과도 같은 모순. 그 모순에 대한 답을 지금 그녀를 암흑으로 인도하고 있는 사태를 일으킨 그란 밀라오스가 한 행동을 통해 얻어낸 것만 같았다. 만약에 어떤 계기가 생긴다면, 대지의 황혼은 스스로가 일으키고 있는 재난을 멈추고 돌아갈 수도 있다는 최초의 단서나 다름없는 현상.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 사실을 카를은커녕, 벨라에게조차 알릴 힘이 없었다.
-저 용에게 존재를 알릴 수 있기를... 그렇게만 된다면...
지상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모르는 무미건조한 눈동자로 지평선을 향한 채 전진하고 있던 그 모습을 떠올리며, 점차 무(無)에 지워져가는 의식 속에서 저맘은 마지막 희망을 품은 후 마지막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야...
‘쿠구구구구구구....’
그녀가 마지막 숨을 내쉼과 동시에 마치 그것에 맞춘 듯한 지진이 대지를 울렸다. 메제포르타 사냥꾼 길드의 길드나이트이자 서사대원이었던, 단지 자신이 아끼는 이들을 위해 참가를 거절하더라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을 작전에 참가했던 저맘은 그렇게 연흑룡 방위 작전의 첫 희생자로써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
ㅡ쿵....
‘쿠르르르릉...!’
대지의 황혼은 그 자신의 몸에 비해 너무나 작은 생물들이 자신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 채 배를 땅에 붙인 채로 천천히 그 거체를 절벽까지 밀어 올렸다. 자신을 뒤덮으려는 해일을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증발시킨 후 발을 옮기자 지진이 일어났다. 그 지진은 처음 상륙했을 때 일어난 지진에 비해 눈에 띌 정도로 확실히 강해져있었다.
ㅡ쿵....
‘후두두둑...’
다시금 한 발짝 더 전진하자 연흑룡의 앞을 가로막으며 마치 천해의 요새처럼 우뚝 솟아있던, 탄지아 항구와 해변의 경계선인 거대한 절벽이 진동했다. 첫 진동은 돌멩이 몇 개가 떨어지는 것으로 말았지만, 이것이 시작에 불과한 것이란 것을 그 발아래의 생물들도 알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쿠구구구구...’
‘후두두둑...’
땅에 붙이고 다니던 거체를 천천히 일으키자 바다에서 기어 나온 이래 좀처럼 들지 않던, 천검의 뱀이 연상케 될 정도의 거대한 머리가 하늘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ㅡ크오오오오오...!
‘쿠오오오오오....!’
고룡들 중에서도 유달리 거대하다고 알려진 봉룡아목의 두 사막 고래를 압도할 정도의 엄청난 크기의 상체가 들어 올려 진 후 한 일은 여태껏 한 포효를 압도하는 거대한 포효였다. 그 포효를 신호로 날개에서 폭죽이 터지듯 뿜어져 나오던 붉은 열선들은 더욱 강하게 터져 나오기 시작하며 대지를 달구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가적인 것일 뿐이었다.
‘쿠구구구구...!’
‘쿠르르르릉....!’
마치 파도에 쓸려나가는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거대한 암석의 방벽은 그 몸을 허물어트려 대지의 화신에게 지나갈 길을 터주듯 엄청난 소음과 함께 바위를 사방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해안은 이제 모든 것을 집어 삼킬 기세로 들이닥쳤던 물의 재난의 뒤를 이어서 모든 것을 파묻어 버리려는 것만 같은 바위의 재난이 시작되고 있었다.
-
‘쿠구구구구....’
“망할, 가면 갈수록 지진이 강해지는데.”
막 숨을 거둔 저맘의 시신을 수습할 틈도 없이 들이닥친 지진으로 인해 순식간에 재앙이 넘실거리는 해안은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귀에서 피가 줄줄 셀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포효를 내지른 그란 밀라오스가 불러온 지진은 며칠 동안 겪은 지진 중에서 가장 강력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로 저 용...을 막을 방법이 있긴 한 걸까...?”
벨라는 이제 처음보다는 포효에 의한 그 뼛속 깊은 공포로 크게 동요하지 않게 되었지만, 무언가를 시도하기도 전에 저맘이 숨을 거뒀다는 사실에 의해 공포 대신 절망이 크게 떠오르고 있었다.
ㅡ탕, 탕, 탕!
그렇게 벨라가 좀처럼 정신을 다잡지 못하고 있는 찰나, 3발의 파열음이 황혼의 색으로 가득한 공기를 가르고 날아갔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에 잠시 파악을 못하는 찰나, 뒤이어 들린 소리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있었다.
“젠장, 왜 녀석에게 함대가 모조리 고기밥이 되어버렸는지 알거 같군.”
“방금 그거 철갑유탄 맞죠? 왜 착탄 폭발이...”
카를은 엽사가 아니었지만 이전에 여러 번 리엘과 같이 사냥을 나갔기 때문에 무슨 탄을 쐈는지 단번에 알아맞혔다. 탄을 쏘고 뭔가 심상치 않은 걸 깨달은 리엘은 얼굴의 어두운 그림자를 띄운 채 이를 악물며 카를에게 외쳤다.
“철갑유탄인데 저 망할 놈에게는 아예 박히질 않았어! 얼른 벨라 정신 잡게 만들고 거기서 벗어나!”
‘철컥!’
‘쿠르르릉....’
ㅡ쿠구구구구구...
재빠르게 다른 탄으로 굴러 장전하며 외친 리엘의 말에 카를은 고개를 끄덕인 후 여전히 좀처럼 정신을 못 잡고 몇 분전 까지만 해도 살아있던 연인의 식어가는 몸 앞을 못 떠나고 있는 여동생의 팔을 잡아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점차 진동이 강해지던 절벽에 이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정신 좀 차려! 지금 상황에서 정신 놓으면 개죽음 당한다!”
“하지만 수습을 해야...”
“거기 있으면 내가 널 수습해야할지도 모르니까 얼른 좀 움직여!”
‘쿠르르르릉...!’
차마 발을 못 때고 있던 벨라의 팔을 힘껏 잡아 당겨서 움직인 순간, 무너지기 시작한 바위들이 하나 둘 낙하하기 시작하며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남매가 서있던, 저맘이 눈을 감은 곳까지 덮치기 시작했다.
“젠장 철갑유탄도 안 듣는 놈한테 통할 리는 없겠지만...!”
‘쿠구구구구구...!’
‘탕, 탕, 탕!’
리엘은 떨어지는 바위 사이사이를 간신히 피하면서 장전된 옥랑룡의 소재를 두른 거무스름한 경석궁을 겨누고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 소리와 함께 철갑탄 3발이 숨 막히는 시커먼 연기로 가득한 공기를 가르고 날아갔다. 이번에는 그렇게 날아간 탄환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는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ㅡ쉬이이익...! 펑, 펑...!
“망할 저거 때문인가...”
그란 밀라오스의 날개에서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며 그 세를 넓혀가고 있는 황혼의 색을 띤 불꽃과도 같은 열선. 날개에서 뿜여져 나온 열선은 조금 지나자 그 기세가 죽어 아지랑이로 보였지만, 탄이 연흑룡에게 닿기도 전에 녹여 폭발시키는 데는 충분했다. 그 모습을 통해 리엘은 어째서 수렵용으로 판매, 지급되는 멸룡탄이 우습게 보일 정도로 강력한 고밀도 멸룡재를 쓴 함대의 고룡용 포탄들이 하나도 듣질 않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빌어먹을, 저거 때문에 물리적 타격이 전혀 듣질 않는 거였군.
그 상식을 벗어난 모습을 보니 격룡창이라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쩌면 저 아지랑이가 그라비모스의 거센 열선보다 더 강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리엘의 뇌리에 박혔다.
-적어도 개룡의 열선은 저렇게 몸에 닿는 거조차 허용하지 않는 건 아닌데 망할...
“형님, 녀석에겐 물리적인 타격은 전혀 듣질 않아요! 저희 무기로는 무리인 것 같습니다!”
“나도 안다! 저 놈을 대체 어떻게 막지?”
그 모습을 보며 같은 생각을 한 것임이 분명한, 대검을 잠시 들었다가 탄이 열선에 가로막혀 사라지는 것을 보고 다시 등에 짊어지고 있는 카를의 외침은 리엘에게 자신이 본 현상이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님을 각인 시켜 줬다. 도무지 머리를 굴려도 파훼법이 전혀 떠오르지 않기에 경석궁을 등에 짊어진 순간, 무언가가 그의 귀를 울렸다
‘철컥’
“벨라, 활을 녀석에게 쏘지 마! 어떤 공격도 안 통한다는 걸 못 들었나!”
“네? 하지만 뭐라도 쏘지 않으면...”“젠장, 카를 얼른 네 여동생 정신 좀 되돌려놔! 왜 아직까지도 정신 못 차리고 있냐!”
ㅡ쉬이이이이익!
여전히 좀처럼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여 카를과 리엘의 말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쇄룡의 소재를 두른 활에 강격병을 장비하고 있는 벨라가 멍한 투로 한 말에 리엘은 순간 욱하고 뭔가 솟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도저히 무어라 더 나무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짜증이 가득한 투로 외친 후 움직이다가 순간 하늘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고개를 돌려 그 소리의 근원을 쳐다봤다.
‘쿠콰콰콰콰...!’
“얼른 피하세요! 저 운석 때문에 절벽이 더 빠르게 무너지려합니다!”
“망할, 산 넘어 산이네!”
눈앞의 절망적인 대지의 화신을 상대하느라 잠시 그 존재를 잊고 있던 검은 연기를 궤적처럼 끌면서 사정없이 낙하하는 운석들. 그 중 하나가 녹아내리듯 무너지기 시작한 기암절벽 위에 작렬하며 난 엄청난 굉음이 귀가 찢어져라 진동했다. 어느 정도 그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몬스터들과 달리, 한치 앞도 예측이 불가능한 산사태 속에서 리엘은 경석궁을 짊어진 채로 최대한 민첩하고 기민하게 바위의 소나기를 헤쳐 나가며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하나라도 피하지 못하면 그대로 죽는다.
사냥꾼들이 인육을 탐하거나 병들어서 흉포하게 변한 거대한 맹수들을 마주할 때마다 언제나 느끼는 죽음에 한없이 가까워지는 감각. 그 감각이 여느 때보다 강렬하게 육감을 후비듯 미쳐 날뛰는 느낌에 리엘은 등골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카를과 그 여동생에게도 별반 다를 바 없으리란 걸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이 재난에게 맞서야 한다는 생각은 단 한 톨도 들지 않았다.
ㅡ쉬이이이익!
“카를! 위를 조심해라!”
“이런 망할...”
‘쿠콰콰콰...!’
붉은 궤적이 하늘을 가르며 내는 휘파람 소리에 머리를 든 순간 카를과 벨라가 피한 곳 위로 날아들어 절벽으로 내리 꽂히는 것이 리엘의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정신 차리지 못한 벨라를 끌고 겨우 바위사태를 피한 터라, 카를은 평소와 다르게 반응이 약간 무뎌졌다. 리엘은 카를이 방금 전까지의 일로 진이 빠졌다는 걸 똑똑히 보았다.
‘쿠구구구구...’
-이런 썩을... 이 방법 밖에 없나!
남매를 향하여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거대한 바위들을 보며 이빨에 피가 뚝뚝 흘러내릴 정도로 악문 리엘은 눈 깜짝할 찰나에 무언가를 결심하고 더욱 정확히 움직이기 위해 투구를 벗어던지고 최대한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ㅡ쿵....
‘쿠구구구구구...!’
다시금 연흑룡이 한발 내딛으며 나는 엄청난 진동을 배경음 삼아 내달리고 있는 리엘이 향하고 있는 곳은 피할 시기를 놓쳐버린 카를과 벨라가 있는 곳이었다.
-
‘쿠구구구구...’
-빌어먹을, 이렇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가는 건가?
좀처럼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며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벨라를 끌고 나오다시피 하여 잠시 탈진에 빠진 찰나, 바로 위의 절벽에 붉은 궤적이 내리 꽂히어 나기 시작한 굉음을 들으며 카를은 생각했다. 나발데우스나 다른 용에게는 잘 통하다 못해 너무나 효과적이던 물리적인 수단은 연흑룡 그란 밀라오스의 아지랑이와도 같은 열선을 뚫지 못한 다는 것을 확실하게 확인했다.
하지만 그 방법 외에 다른 수단을 찾지 못하여 세계를 멸망시킬지도 모르는 용의 발을 격퇴는커녕 발을 묶지도 못하고 죽는 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선 너무나 큰 무력감과 분노를 불러오고 있었다.
“젠장, 이건 아니잖...”
‘퍼억!’
그 순간 다리에 가해진 충격과 함께 몸이 붕 날아가는 느낌.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그 일에 다른 사람이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잠시 어안이 벙벙했겠지만, 이와 똑같은 것을 그 스스로가 과거에 한 적이 있기에 몸이 날아가는 순간 무엇이 벌어졌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형...”
‘쿠르르르릉...!’
‘쿠콰콰콰....’
카를은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같이 떠밀려 붕 날아가듯 넘어져 구른 벨라가 무사한 걸 곁눈질로 확인하며 다급히 일어났다. 하지만 잠시 탈력 상태로 움직이지 못하던 자신을 족히 5피트는 넘는 거리 밖으로 차 날린 리엘을 보려던 그 순간, 바위사태가 리엘이 있을 위치로 쏟아지며 순식간에 자욱한 흙먼지를 사방에 흩날렸다.
예측조차 할 수 없던 두 재난의 조합으로 인해 벌어진 사태로 인해 카를은 충격에 빠졌지만, 언제 다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바위들로 인한 위험을 감수하고 리엘이 서있었던 곳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
‘후두둑...’
“쿨럭...”
-용케도 아직 의식은 있군.
절벽이 무너져 내리고 연신 기침을 하게 만드는 화산재와 흙먼지로 사방이 가득한 난장판 속에서 리엘이 떠올린 첫 번째 생각이었다. 만약에 1초라도 늦게 카를과 벨라를 차 날리지 않았다면 남매는 분명 자신이 깔려있는 바위 아래에 납작하게 깔려서 형체를 못 알아봤으리란 생각에 한줄기 식은땀도 이마 사이로 주룩 흘러내리기도 했다.
-땀...?
“크윽...!”
쿨드링크를 마시고 왔기에 땀이 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리엘은 팔을 움직이려했지만 순간 엄청난 격통이 가슴 아래에서 몰려오자 그제야 시선을 돌려서 자신의 상태를 확인 할 수 있었다.
‘꾸드드득...’
“아아, 이런 망할...”
눈에 들어온 모습에 그는 고통은커녕 헛웃음이 날 정도로 허무함에 사로잡혔다. 거대한 바위가 몸을 짓눌러 버린 탓일 까 몸을 보호하기 위해 두르고 있던 옥랑룡의 소재로 만든 방어구는 허무할 정도로 터져나간 채, 배 안에 온전히 자리 잡고 있어야 정상이지만 이제는 온통 튀어나와있는 내장과 함께 흩어져있었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어쩐지 감각이 느껴지지 않던 다리와 오른팔은 같이 떨어진 바위들에 의해 철저히 짓이겨져서 여기저기 살점과 뼈가 튀어나온 채로 부서져서 너부러져 있었다.
-이래 가지곤 살수도 없겠군.
‘쿠르르릉...’
꽤나 압력이 강한 탓에 도리어 출혈을 막아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출혈로 인한 쇼크사보다 언제 더 무너질지 모르는 바위에 깔려서 죽는 것이 더 빠를 거라는 직감이 그를 스쳐지나갔다.
ㅡ크오오오오오....!
‘쿠구구구구구...!’
“크윽, 망할 놈 또 빽빽거리네...”
다시금 그란 밀라오스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뒤틀며 울부짖으며 내는 포효에 리엘은 그나마 멀쩡한 팔로 한쪽 귀를 막고 반대쪽 귀는 땅에 들이대어 막았다. 대지의 진동이 선명히 느껴지는 자세로 심연의 홍염의 발아래를 향한 그는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연흑룡의 발 아래로 시선을 향한 채로 생각했다.
ㅡ아아, 망할. 아예 저 놈은 발아래를 검은 유리모래로 만드는 구먼...
‘쉬이이이이익.... 쉬이이이이익....’
한창 재난을 피하면서 그란 밀라오스의 움직임을 주시하느라 채 관심을 못 가졌던 땅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리엘은 일순간 절망을 넘어서 허무감을 느낄 정도로 그 압도적인 힘을 체감할 수 있었다. 대지에 귀를 들이대고 있는 꼴이었기에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는 대지의 화신 주변의 바닥이 시커멓게 타들어간 유리처럼 녹아내린 후 조각나고 있는 그 모습은 그들이 상대하려 한 존재가 생물이라는 생각조차 깔끔하게 접게 만들 정도로 기이하고 두려운데다가 절망스럽기 까지 했다.
“쿨럭.. 결국 막는 건 글러먹은...응?”
포효가 끝난 후, 손을 귀에서 떼고 숨이 막히는지 쿨럭이며 나지막하게 툴툴거리려던 순간 리엘은 무언가 이질적인 것을 느끼고 다시 연흑룡의 발아래 대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ㅡ저건... 젠장, 가능한 거였나?
화산재로 인해 한 치 앞도 제대로 보기 힘든 공기 사이로 나지막하게 보이는, 분명 대지의 화신이 두른 열선 안에 있음이 분명한 바위에 달라붙듯 자라고 있는 풀 한 포기가 내뿜고 있는 선명한 녹색이 눈에 들어오자 순간 그는 탄식을 내뱉었다. 비록 그 엄청난 고열로 인하여 시시각각 말라비틀어져가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살아있음을 증명하듯 열풍에 흔들거리는 그 모습은 본디 눈치라곤 둔하기 짝이 없던 리엘에게도 어떤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저걸 어서... 알려야...”
‘쿠구구구구...!’
“쿨럭!”
살아 돌아가는 건 포기했지만 방금 깨달은 사실을 남매에게 알리는 것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어떻게든 남매를 불러 알리기 위해 몸을 살짝 틀자, 바위들이 그의 가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젠장, 죽더라도 이건 알리고 가야지 이렇게 갈 순 없다고!
“..님, 괜찮으세요?”
정신을 잃고도 남을 그 상황 속에서 리엘은 도리어 호흡을 최대한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여태껏 살아오며 그 무엇보다 들리길 바랐던 목소리가 그의 귀를 울렸다.
-
“형님, 괜찮으세요?”
바위를 기어 올라가다가 뒤이은 낙석에 의해 잠시 주춤한 사이 들려온 쿨럭이는 소리에 카를은 서둘러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했다가 이내 눈에 들어온 모습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ㅡ맙소사... 이건 살아날 가망이...
“여, 왔나...”
카를의 눈에 들어온 건 거대한 바위 두 덩이에 상체 일부와 머리만 빼고 완전히 뭉개진, 겨우 겨우 숨이 붙어있지만 곧 기력이 다해 죽을 리엘의 모습이었다.
특히 탄지아와 바르바레 길드에서 리엘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에 공언 했던 대형 맹수의 공격도 어느 정도나마 막아내는 옥랑룡의 소재를 벼려 만든 갑주는 바위가 낙하하면서 준 충격은 막을 수가 없었는지 부서지고 짓이겨져서 내장과 피로 칠갑이 된 채였기에 더욱 그 모습에 카를은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쿨럭... 망할, 시간이 얼마 없군.”
-쿵....
‘쿠구구구구....’
‘후두둑...’
숨을 쉬기 힘든지 한 팔로 몸을 일으키면서 피를 토해내는 리엘의 모습을 안타깝게 보던 그 와중에 다시금 연흑룡이 발을 내딛는 소리와 함께 신음하는 대지가 일으키는 진동으로 인해 바로 위의 절벽이 흔들거리며 돌멩이와 자갈들이 떨어져내렸다.
“...카를, 절벽이 더 무너지기 전에 여기서 벗어나라.”
“예, 그러겠습니다.”
자신이 살아남지 못할 것임을 확실히 자각한 듯한 그 말은 형제나 다름없이 지내던 카를에게 있어선 그 무엇보다 안타까웠지만 그렇기에 확실히 지켜야할 약속이나 다름없이 느껴졌다. 그것을 리엘 자신도 알고 있었기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카를에 대해선 일말의 원망조차 하지 않았다.
“쿨럭, 그리고 녀석의... 발아래를...”
‘쿠르르르...!’
하지만 진정으로 전해야하는 마지막 말을 남기기 위해 버티고 있던 리엘에게 한계가 찾아와 다시금 피를 토하며 쿨럭여서 말을 제대로 끝내기도 전, 결국 바로 위의 바위가 굉음을 내며 무너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전하고자 했던 말이 중간에 끊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자신을 향해 굴러 떨어지기 시작한 바위가 눈에 들어오자 이내 입을 다물고 겨우 움직이는 팔로 마지막 손짓을 했다.
-어서 가서 녀석을 쫓아라.
그 최후의 손짓에 차마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더 물을 틈도 없이 카를은 어금니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이를 악다물고 뒤를 돌았다. 그리고 곧장 연흑룡이 지나가면서 열린 길과 가까운 곳에 놔두고 온 벨라에게로 달리기 시작했다.
-넌 그 누구보다 통찰이 뛰어나니 내가 뭘 전하려고 했던 건지 곧 알 수 있겠지...
‘쿠르르릉..!’
카를이 떠난 모습을 본 후 다시 눈을 위로 돌리자 굉음을 내며 맹렬하게 머리로 돌진하는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머리를 짓눌러 부숴버리기까지는 찰나의 시간이 흐를 것이 분명했지만 그 찰나의 시간이 마치 지금의 리엘에게는 기나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눈을 천천히 감으며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기다리던 그의 머릿속에서 카를을 처음 알게 되어, 형제나 다름없이 친해지게 된 그 날을 떠올렸다.
그의 첫 번째 의뢰. 유적 평원에서 아프노토스와 가구아를 위협하는 도스 재기를 격퇴하기 위한 의뢰. 그가 해군을 그만두고 사냥꾼 인생을 막 시작했을 때 받았던 의뢰. 단순한 격퇴 의뢰인 줄 알았지만, 미친 공폭룡이 자신과 남매를 향해 그 이빨을 드러냈던 의뢰.
그는 군인 출신이었기에 그 누구보다 눈치가 빠르다는 교만 아닌 교만에 빠져 있었지만, 그 눈치로도 미친 공폭룡이 도스 재기를 물어 죽이고 자신마저 물어 죽이려고 달려들 줄은 알 수는 없었다.
다행히 햇병아리 시절의 카를이 뒤에서 자신의 다리를 걷어 차 넘어트리고 동굴로 끌고 가지 않았더라면 그의 목숨은 그대로 끝났을 것이다. 그 후 미친 공폭룡은 점점 쇠약해지다가 헌터들이 일주일 넘게 귀환하지 않자 파견된 길드 나이트에 의해 격퇴되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카를의 예리한 통찰력이 없었더라면 유적평원에서 동고동락하며 살아남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걸로 그 날의 빚은 갚은 건가...
찰나의 시간 동안, 의형제를 맺게 될 정도로 서로 친해지게 되었던 그 날의 일을 되새긴 리엘은 피범벅인 입을 열어 바위가 머리에 닿는 순간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말을 조용히 읊조렸다.
“...이걸로 다 잘 되겠지.”
‘쿠지직!’
그 말이 끝난 순간, 리엘의 의식은 으스러져서 골편이 튀는 소리와 함께 영원한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
큰 충격으로 잠시 판단능력을 상실했다.
그것이 아마 벨라에게 있어선 가장 합당한 말일 것이다. 결코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최악의 일을 눈앞에서 마주한 후, 제대로 판단을 내려야 할 이성과 신경이 충격으로 동시에 마비되어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느리거나 어긋나게 판단할 정도였다.
‘쿠구구구구...’
-어..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 충격에서 서서히 벗어나며 마치 섬광에 눈이 먼 것처럼 희뿌옇게 되어있던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한 것은 익숙한 진동을 느끼며 서서히 눈에 주변의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였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해안에 있어야 할 정상이었던 자신이 익숙한 건물들이 처참할 지경으로 폐허가 된 채로 나뒹굴고 있는 곳에 있음을 깨닫자 무언가 일이 심각하게 잘못된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ㅡ쿵...
‘쿠구구구구....’
꽤나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발소리와 함께 울리는, 그녀의 기억이 혼미해지기 직전까지 보다 더욱 강해진 진동. 그 진동에 완전히 정신이 돌아온 벨라의 귀에 이내 익숙한 목소리가 중얼거리는 것이 들려왔다.
“젠장, 바닥을 보라니 대체 뭘 보란 말이었나요 형님...”
“오빠...? 왜 우리가 항구에 있는 거야? 리엘 씨는?”
‘쿠구구구구...’
연흑룡이 발을 옮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격렬히 진동하는 대지로 인해 간신히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잡고 던진 벨라의 말에 그제야 카를은 여동생을 향해 돌아봤다.
“어, 이제 정신이 좀 돌아 왔냐?”
“답이나 해줘, 왜 우리가 해변이 아니라 제 1항만에 있는 거냐고. 리엘 씨는 어디로 가고.”
사실 이미 벨라는 해일과 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채 간판과 한 때는 외벽이었을 파편을 통하여 자신과 카를이 제 1항만에 있던 길드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정신을 놓았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좀처럼 기억 못하고 있었기에 어찌하여 본디 연흑룡을 마주하고 있어야 할 그 재앙의 바다에서 항구로 오게 되었는지 의문만 가득했기에 그 답을 아는 것이 시급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방금 정신을 차린 벨라에게는 큰 충격이 되었다.
“형님은 돌아가셨다.”
“뭐? 그게 무슨...”
충격적인 말이 카를의 입에서 나오자 벨라는 순간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은 기분이 들 정도로 잠깐 이해를 못하여 되물었지만, 그 되물음에 대해 카를은 대못을 박듯 확실히 말했다.
“내가 위로 바위가 떨어지는 걸 급하게 밀친 후 대신 깔려 죽으셨다고.”
“맙소사...”
ㅡ그오오오오오...!
‘쉬이이이익!’
온 몸에 힘이 빠지는 것만 같은 그 말에 벨라는 순간 몸을 휘청거렸다. 저맘에 이은 리엘의 죽음에 엄청난 절망이 대번에 밀려오는 것을 느꼈지만, 대지의 화신은 그것조차 용납 않는 듯 거대한 포효를 하며 천지를 진동시켰다. 하지만 탄지아 항구의 하늘 위로 쏟아지는 운석이 내는 굉음과 함께 세상이 끝나고 있음을 알리는 포효는 다시 리엘의 마지막 말이 뭔지 알아내려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뇌를 가동시키는 카를에게 공포를 심어주지 못했다.
“젠장, 대체 뭘 알려주려 하신 겁니까. 녀석의 발아래를 보라니...”
“발아래? 리엘 씨가 용의 발아래를 보라고 하셨어?”
“아무래도 뭔가를 발견하고 알려주려 하신 거 같은데... 젠장, 녀석이 디딘 곳은 전부 검은 유리 밭이 되어버리는데 뭘 보라는 거야.”
발아래를 보아라.
리엘이 채 말을 끝내지 못하고 중간에 끊어졌기에 무엇을 보라는 것인지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말. 그 말을 듣자마자 벨라의 두뇌도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대체 뭐가 있었지? 모래? 돌? 파편들?
그란 밀라오스의 몸을 두른 형태로 점차 그 규모를 확산시키고 있는 열선과 용의 몸 자체에서 뿜어지는 고열은 벨라가 정신을 잠시 놓기 직전까지 기억하는 바로는, 그녀가 떠올린 것들을 전부 검게 탄화시키다가 이내 검은 잿더미와 유리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었다. 고로 저 세 가지는 순식간에 추측에서 지워지며 급하게 돌아가는 두뇌를 더욱 점입가경으로 몰아넣었다.
“모래, 돌, 파편들... 소금까지 증발시키는 고열에 애초에 저것들은 버티지도 못하는데...”
“젠장, 그 상황에서 눈에 들어올 만한 것이 대체 뭐가 있지?”
“모르겠어! 있어봤자 열하고 바닷물에 말라비틀어진 풀 뿐인데...”
패닉에 빠진 듯 무력하게 외치는 벨라였지만, 순간 그 말에 카를이 멈칫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다.
“풀, 풀, 풀... 설마...”
“설마라니 뭐? 뭐 짐작 가는 거라도...”
“아까 절벽이 무너지면서 위에 있던 풀들도 잔뜩 떨어졌었는데 설마.. 망할, 이건 직접 확인해야할 거 같은데...!”
ㅡ쿵...
벨라의 말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카를은 잠시나마 벨라의 안전을 위해 들어가 있던 폐허가 된 길드 건물에서 뛰쳐나와서 거대한 발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한 벨라 역시 재빠르게 그 뒤를 따라나섰다.
“콜록, 망할 공기가 이래선 숨쉬기도 힘든데...”
재앙의 바다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처음부터 나던 유황 냄새를 뒤덮을 정도로 쓰라리고 독한 공기 때문에 카를은 연흑룡과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냄새의 정체를 정신이 돌아온 벨라가 무엇인지 알아채기 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 냄새는... 오빠, 얼른 코하고 입을 가려! 이거 염산가스야!”
“뭐? 애초에 염산이 공기에 뿌려질 환경이 아니잖아!”
“녀석의 발을 디딜 때마다 물하고 소금이 모조리 증발했잖아! 어쩌면 그때...”
“젠장!”
‘쿠구구구구...!’
서둘러 코와 입을 가리며 외친 벨라의 말에 당혹스러워 한 카를이었지만, 뒤이어 한 말에 바로 이해를 하며 급히 코와 입을 가렸다. 그와 동시에 가까운 곳에 운석이 낙하해 엄청난 굉음을 내며 땅을 뒤흔들었다.
“대체 뭘 확인하려고? 녀석에겐 아무것도...”
“분명히 발아래를 보라고 하셨던 데에는 이유가 있어, 그런데 지금 상황에 그걸 확인할 수 있는 망할 풀들이 있기나 할지 의문이긴 한데...”
익숙한 굉음을 뒤로하여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는 폐허를 뒤로하고 급히 발걸음을 더 재촉하자 다시금 눈에 들어온 거체의 그란 밀라오스에 카를은 순간 말을 삼켰다.
대지를 자신이 바라는 대로 길을 열도록 하며, 어마어마한 해일이 닥쳐와도 그것이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 대지의 화신. 그 무엇조차 범접할 수 없는 그 존재의 전신이 눈에 들어오자 다시금 익숙해졌으리라 생각한 공포가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것을 느꼈다.
ㅡ쿵....
‘쿠구구구구...’
사방이 폐허로 뒤덮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란 밀라오스는 그런 것이 존재하는 것을 모르는 듯 여전히 그 거대한 눈을 먼 지평선으로 향한 채 배를 땅에 붙인 채로 마치 전설 속 숙명의 싸움을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 천천히 거체를 이끌며 발을 내딛었다. 그 존재만으로 대지는 신음하듯 시꺼멓게 변해가며, 발이 닿는 곳은 검은 유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꿀꺽..’
그 두려움은 정신이 돌아온 벨라도 마찬가지인지, 마른 침을 삼켰다.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神)의 앞에서 오빠인 카를만큼은 아니어도 노련한 헌터인 그녀는 스스로가 개미만도 못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인 차이와 공포를 느끼며 팔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 벨라가 느끼는 공포는 하나가 아니었다.
슈레이드의 전설에 나오는 존재인 흑룡의 이름을 받은 용.
설령 눈앞의 존재가 대지의 화신이 아닌 고룡이라 한들 그 별명 하나로 인해 더욱 깊은 공포를 느낄 것은 자명한 일. 재앙의 바다에서는 그 모습을 제대로 보기 힘들었기에 검은 용에 대한 공포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는커녕 대지를 파괴하는 악마로써만 두려움을 느꼈었지만, 이제 그 거구가 지상에 올라와있는 모습에서 그 형태가 정말로 사냥꾼 길드의 검은 용 문양과 비슷하다는 것에서 뿌리 깊은 학습을 통한 공포가 등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라, 그런데 굳이 발아래에 있는 풀을 찾아야하나?
공포에 정신이 잠식되어가던 그 순간 번개처럼 떠오른 생각에 벨라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탄지아 항구는 꽤나 발전한 항구, 그렇기에 절벽에서처럼 자라나있는 해초와 풀들을 보긴 어렵지만 다른 형태의 식물들은 분명 바닥 곳곳에 자라나고 있었다. 만약 다른 식물이라도 상관없다면, 틀림없이 그것들을 찾아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떠오르자 그녀는 급히 튀어나가려는 오빠의 어깨를 잡았다.
“오빠, 용의 발아래에서 식물을 찾으려는 거면 굳이 찾기 힘든 풀들을 찾을 필요가 없어!”
“뭐?”
“이끼, 이끼가 낀 돌이 연흑룡의 발밑에 있는지 찾아봐! 그거면 충분해!”
‘펑...퍼펑!’
그 순간, 불이 붙었던 폐허를 중심으로 격렬한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하더니 폭발하기 시작했다. 마치 공기 중의 무언가가 격렬히 화염을 폭발적으로 가속한 것처럼 보이는 그 폭발은 점차 확산되며 불이 붙은 폐허들 전부를 삽시간이 불구덩이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현상이 무엇에 의한 것인지 벨라는 순간 깨달았다.
-산소와 수소의 농도가 엄청나게 높아진 건가?
염화수소로 충만한 공기와 유황 냄새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헌데 돌이켜보니 해안에 있을 때부터 머리는 살짝이나마 어지러웠다. 벨라는 그 사실이 떠오르자 일순간 얼굴이 굳어버렸다. 도저히 그 외에는 설명이 안 되는 폭발적인 화염의 모습에 벨라는 서둘러 천천히 확산하고 있는 열선에 아슬아슬하게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한 카를을 데리고 도망치기 위해 내달렸다.
“오빠! 당장 여기서 벗어나야 해! 안 그러면 폭..”
“알아냈다... 왜 바닥을 보라고 하셨는지 알아냈다고!”
‘콰콰쾅...!’
벨라가 부름과 동시에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카를이 외쳤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남매의 시야는 강렬한 빛에 가려지며 엄청난 충격과 열의 폭풍에 휘감겼다. 한 때 탄지아 최대의 항만이었던 제 1항만의 외곽에 어마어마한 굉음이 울려 퍼지며 탄지아는 다시금 대지의 신음 외에는 들리지 않는 침묵에 잠시 휩싸였다. 대지 위의 모든 것의 운명이 경각에 달하고 있었다.
-
ㅡ크오오오오...!
“쿨럭...”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카를은 숨쉬기조차 힘든 독한 공기를 들이 마시다 쿨럭이면서 이내 그란 밀라오스가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포효에 의해 눈을 떴다.
-천운인가...
그것이 의식을 찾은 직후 카를이 한 첫 번째 생각이었다.
거대한 섬광과 함께 뒤에서 폭발한 화염은 그가 리엘이 남긴 말의 뜻을 알아낸 순간, 화염 폭풍이 터져나와 그의 몸을 휘감고 의식을 빼앗아 방금 전 있던 장소 멀리 내동댕이쳤다. 때문에 화염에 취약한 면모를 보이는 해룡 라기아크루스의 소재를 엮어 만든 갑주를 입은 카를에게 있어서 의식을 찾자마자 든 생각이 저런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우드득...’
“크윽... 망할...”
처음에는 사지가 멀쩡하게 달려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고 왼쪽 다리를 움직여 보았지만,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다. 다시 보니 그의 다리가 완전히 부러져서 뼈가 근육, 살갗 다리 갑주까지 뚫고 나와 있었다. 그리고 점차 의식이 돌아오며 몸 여기저기에서 불로 지져진 것만 같은 통증이 느껴지자 인상이 순식간에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두 번 다시 제대로 걷기는 힘들겠군...
‘후두두둑...’
“오빠... 살아있어?”
그런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을 한 것도 잠시, 화염의 폭풍에 함께 휘말려 날아가기 직전까지만 해도 힘이 들어가 있던 여동생의 목소리가 폐허가 무너지는 소리 사이에서 마치 모기 소리만큼 작아진 채로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을 안 카를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끼며 일어났다.
“벨라? 크윽... 어디 있어?”
“여기 있어...”
아마 평상시였으면 곧장 스스로에게 응급처치를 한 후 일어났겠지만, 벨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그는 완전히 박살나다시피 한 왼쪽 다리로 일어나 그 예리한 청각을 통해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ㅡ쿵....
‘쿠구구구구구....’
“세상에, 벨라 너...”
“오빠는 그나마 멀쩡하구나, 다행이야...”
한층 더 커진 연흑룡의 발걸음과 함께 울리는 대지의 울림을 뒤로하고 대검을 짊어진 채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폐허로 고통을 참으면서 발을 들인 카를은 눈에 들어온 벨라의 모습에 숨을 삼켰다.
쇄룡의 소재를 두른 방어구는 여기저기 고열에 녹아버린 듯 뒤틀려 있는데다 사지는 숯덩이요, 머리카락과 얼굴마저 간신히 자신이 익히 아는 여동생임을 알 수 있을 정도만 남은 채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녹아들어있었다. 그 참혹하기 그지없는, 언제 죽어도 모르는 모습으로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모습은 간신히 버티고 있다는 것이 역력히 느껴질 정도였다.
“이 바보 오빠... 폭발 전에 뭘 알아낸 거 같은데, 답은 찾았어...?”
“...그래, 찾았어.”
“다행이다, 혹시나 나보다 더 크게 다쳤을까봐 걱정했는데...”
평상시나 다름없어 보이는 말, 하지만 답을 알아냈냐고 묻는 그 말에서 점차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고 있는 것이 느껴지자 카를은 차마 그 모습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 어느 사람이 자신의 여동생의 생이 다 해가고 있는 모습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을까.
“오빠, 저기 내 화살집 안에 약병이 두 개 있을 건데... 좀 꺼내 줄래...?”
“잠시만... 화살집 안의 약병? 여기 있다.”
“고마워...”
점점 버티기 힘들어지는 듯, 작아지는 목소리로 하는 벨라의 말에 그나마 손상이 덜 간 채로 근처에서 나뒹굴고 있는 화살집 안에서 두 개의 다른 색을 띤 병을 꺼내어 곧장 건네주자 간신히 움직일 수 있는 시커멓게 타들어간 팔로 그녀는 차례대로 병의 뚜껑을 천천히 열었다.
“원래 화살촉에 묻혀서 쓰려 했던 건데... 이렇게 쓰게 되는 구나...”
뚜껑을 열자 그 폭발의 충격에서도 기적적으로 깨지지 않은 채 안에서 찰랑이고 있는 액체를 보며 벨라는 한숨과 함께 조용히 혼잣말했다.
“있지, 오빠... 난 오빠가 은퇴하면 아이샤랑 두 바보 챠챠브들하고 같이 고향에 돌아 가보고 싶었어...”
“벨라...”
‘뚝, 뚝, 뚝’
제대로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을 손으로 잡고 있는 암적색의 병 안에 노란색 병의 액체를 몇 방을 흘려 넣은 후 벨라는 조용히 말했다. 그 말에는 자신의 끝이 얼마 안 남았음을 직감하듯 짙은 감정이 어려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바람도 못 이룰 거 같아... 마을 밖의 그 검도 한번 뽑아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어 버렸지, 너도 나도 이 모양 이 꼴이니까.”
‘부글, 부글...’
방울진 액체들이 떨어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포가 일어나기 시작한 붉은 병의 뚜껑을 역시 천천히 닫자 거품이 하나 둘 일기 시작하는 내용물을 본 후 뚜껑을 닫고 흔들기 시작하면서 벨라는 겨우 녹아내린 것을 피한 두 눈을 망연하게 먼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고향에서 배우고 살아온 길이 옳았을까...?”
머나먼 고향에서 살 때, 한없이 철이 없던 시절 그 전설적인 일화를 들으며 동경해왔던 강룡 크샬다오라를 몰아내고 마을을 구해낸 영웅의 이야기. 그 영웅이 추구하던 방식인 상생과 공존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 한없이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마을을 떠나 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하여 대륙을 건너 바르바레에서 사냥꾼 등록을 한 후 살아온 길. 지금껏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한없이 앞만 보고 달려오던 남매에게 있어서 겨우 숨을 돌릴 수 있게 해준 것은 전속 사냥꾼으로써 파견되어 처음으로 살다시피 하게 된 모가 마을이었다.
비록 마을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파견된 것이었기에, 그 원인을 몇 주간 천천히 조사하며 추적하다가 죄 없는 해룡의 탓으로 오인하게 되어 토벌하게 되는 등 여러 가지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마을에 온 후 인연을 통해 동반자 아이루처럼 도와주게 된 두 차차브의 도움으로 그 원인을 알게 되어 해결한 후 남매는 자신들이 추구하던 길의 끝이 보였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전 세계를 무너트릴 기세의 격변과 재앙을 불러오며 탄지아에 상륙한 용을 마주하며 벨라는 자신이 과연 진정으로 그 길을 추구했어야 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의문이 이제 죽음과 한없이 가까워진 지금 더욱 크게 일렁이며 과연 자신들이 살아온 길이 올 바랐는지, 그리고 그 길을 통해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맞는 지 카를한테 묻는 말로 나오고 있었다.
“그래, 옳았어. 그 영웅이 추구한 것을 따라간 우리의 길은 옳았어.”
그리고 스스로의 생을 후회하는 것만 같은, 여태껏 자신들이 살아온 길이 옳았는지 묻는 동생의 조용한 말에 카를은 조용히 답했다. 그것은 이 대지의 황혼을 어쩌면 종식시킬 지도 모르는 열쇄를 알게 된 카를이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안심의 말이자, 벨라에게 있어선 카를이 무엇을 알아냈는지 확실히 느끼게 해주는 말이었다.
“그렇구나...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을 확실히 해줘야겠네...”
“벨라...?”
간신히 비틀거리며 몸을 비스듬하게 일으킨 벨라는 병을 꾹 잡은 후 입을 열었다.
“이 병에는... 내가 원래 화살에 묻혀 쓰려던 브라키디오스의 점균이 들어 있어...”
“너, 설마...”
쇄룡의 점균.
수룡인 쇄룡을 화산 생태계에서 염과룡과 개룡, 심지어 때로는 금사자마저 압도할 수 있는 그 엄청난 힘의 원동력인 공생 균체. 서사대의 의뢰를 받아 생태조사에 나섰을 당시 브라키디오스를 수렵한 후 그 때 채취했음이 분명해 보이는 점균이 동생의 손에 들려있다는 것을 알자 잠시 당황했다가, 이내 그녀가 마지막으로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카를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뒤이어 그녀가 하는 말에 그는 말릴 방법조차 사라져갔다.
“오빠가 알아낸 방법은 결국... 저 용의 열선을 직접 헤치고 나가야하는 거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그 방법은 안 돼!”
“그러면 만에 하나 가다가 옆에 운석이라도 떨어져서 발화하면? 농도가 높을 때는 예외 없이 지금 나처럼 된다고...?”
그렇다고는 해도 도저히 납득해버리면 안 되는 벨라의 행동이었기에 카를은 잠시 멈칫한 후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지금 염산가스도 짙어서 질식하기 딱 좋아. 어떻게든 날려야 하니까... 그러기엔 쇄룡의 점균만큼 효과 좋은 발화원도 없을 거야...”
자신이 해야 할 마지막 일을 정한 듯한 그 말에는 망설임이 느껴지지 않으며, 오히려 침착함이 느껴졌지만 뒤이어 한 말들은 카를의 마음에 대못을 박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이샤의 말대로 집 카펫을 바꿨어야 하는데... 이제 바꿔도 보지도 못하겠구나...”
“벨라...”
사소한 후회가 담긴 말이었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의 미련이 묻어나는 그 말에 카를은 그저 여동생의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ㅡ쿠오오오오오....
‘쿠구구구구구구....’
그 짧은 이별이나 다름없는 시간의 끝을 고하도록 신호한 것은 그란 밀라오스의 포효와 함께 울려 퍼지는 거대한 진동이었다. 그걸 기점으로 벨라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붉은 점균이 담긴 병을 꾹 눌러 잡았다.
“오빠, 팔은 움직일 수 있지...? 그럼 좀 멀찍이 떨어져서 대검으로 가리고 있어....”
“...알겠다.”
“그리고... 꼭 대지의 화신에게 알려줘... 인간이, 무수히 많은 생명들이 지상에 있다는 걸...”
‘후두두둑...’
그 말을 마지막으로 조금씩 무너져가는 폐허 속에서 나가라는 듯, 벨라가 고개를 돌리자 카를은 라기아크루스의 소재로 만든 푸른 투구를 눌러쓰며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최후의 희망이자 염원을 담은 여동생의 말을 가슴 속에 깊이 담은 채 폐허에서 빠져나오는 그의 눈은 슬픔과 절망, 그리고 한줄기의 희망이 뒤섞인 채로 연흑룡이 전진하고 있는 방향을 향해있었다.
-
-아, 결국 끝은 이렇게 되는 구나...
카를이 빠져나간 것을 본 벨라는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붉은 점균이 담긴 병을 내려다봤다. 일반적인 브라키디오스에게서 채취할 수 있는 형광 녹색의 점균이 아닌 붉은빛의 점균. 그것이 뜻하는 것은, 그녀가 서사대의 생태조사에 응하여 탐색하기 위해 나섰을 때 수렵한 쇄룡이 일반적인 쇄룡이 아니었다는 것과 함께 또 다른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다.
-때가 되면 보여줘서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했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품에서 꺼낸 것은 폭발로 인해 여기저기 손상되었지만, 선명히 G급 수렵면허증이라는 글이 쓰인 작은 자격증이었다. 모가 마을에서 아이샤와 카를에게 표했던 G급에 대한 열등감과 같은 말은 애초에 그녀가 품고 있던 진짜 생각이 아니었다. 단지, 때가 되면 두 사람과 저맘, 그리고 리엘이 모였을 때 놀라게 해주면서 보여주기 위한 그녀의 작디작은 깜짝 선언을 위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작은 계획은 할 기회도 놓쳤고, 결코 이룰 수 없어지리란 것을 안 지금 큰 후회가 밀려오고 있었다.
-아마 일찍 보여줬다면, 아이샤 언니랑 오빠가 가장 기뻐해줬겠지...?
어릴 때 고향을 떠날 때부터 줄곧 바보라고 불러왔지만, 그 누구보다 든든하던 오빠였던 카를. 비록 평상시에는 무뚝뚝하지만, 늘 동생인 자신을 아끼고 그 뒷바라지를 하며 지내왔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가 무리한 의뢰도 받아들이는 이유 역시 동생인 자신이 무모하게 의뢰를 받는 걸 막기 위해서였음을 벨라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방위 작전도 무모하다며 말려보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강한 그의 의지에 결국 자신의 고집을 꺾고 따라 나선 것이었다. 그 결과 이렇게 되었지만 그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아, 그래도 죽는 건 좀 무섭구나...
‘쿵!’
멀찍이서 들려오는 대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그 소리를 신호삼아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기억의 홍수에서 다시금 죽음의 공포가 느껴졌다, 하지만 자신보다 더욱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다 죽은 저맘을 떠올리며 벨라는 눈을 감은 후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남은 힘을 쥐어짜내면서 병을 바닥에 내던져 산산조각 냈다.
‘쨍그랑!’
“오빠가 용을 진정시킨 후... 모든 일이 잘 되기를...”
‘꾸득..꾸득... 끼이이이익...!’
점균이 충격에 의해 완벽히 활성화되어 부글부글 거품을 내며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며, 벨라는 손에 들고 있던 G급 수렵면허증을 떨어트리며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을 작게 읊었다. 그리고 눈을 감겨가는 벨라의 앞에서 밝은 섬광과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벨라의 한줄기 남아있던 의식은 폭발에 묻히며 지워졌다.
-
‘쿠콰콰콰....!’
약 1분 후.
엄청난 굉음이 탄지아 제 1항만을 울리며 사방으로 파편과 그 분노와도 같은 에너지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ㅡ빌어먹을, 열선이...!
그 폭발 속에서 엄청난 고열로 휘어져버린 대검의 뒤에서 그것을 막아내다가 몸이 공중으로 붕 치솟은 카를의 머리에 든 생각은 스스로의 안일함을 자책하는 것이었다.
쇄룡의 점균으로 인해 촉발된 첫 번째 폭발은 몇 분전에 일어났던 폭발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엄청난 빛과 함께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는 열과 폭풍의 향연, 그렇기에 첫 폭발이 일어난 직후 카를은 온 힘을 다하여 대검의 끝을 바닥에 박은 채 그것을 막아냈고 그 시도는 일단 성공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내 그의 생각대로 산소와 수소를 격렬히 소비하며 공기 중의 염산까지 일순 날려버리며 폭발은 빠르게 잦아들었지만, 진짜 문제는 그 뒤에 일어났다.
그란 밀라오스가 확장하고 있는 엄청난 에너지를 품은 열선, 그 열선이 두 번째 기폭제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ㅡ쿠르르르릉...
1차 폭발보다 더욱 강하게 느껴진 2차 폭발의 징조는 산소와 수소를 모조리 태우며 첫 폭발이 사그라진 직후 일어났다. 예상보다 약했던 첫 폭발의 충격을 모조리 빨아들이면서 일시적으로 주변을 침묵시킬 정도로 고요해진 것이었다. 그 후 엄청난 속도로 팽창을 하며 화염과 암석의 증기를 한껏 압축시키기 시작하며 주변을 진동시켰다. 어떻게 보면 그 두 번째 폭발의 징조만 보면 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느릿느릿했지만, 그것을 알아챘을 때 몬스터가 준 충격보다 더욱 강대한 충격을 몸으로 받아낸 직후의 카를에게 있어서는 한 끝 차이로 늦게 대비를 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로 지금 이 순간 엄청난 굉음을 일으키며 터져 나온 암석의 증기가 카를의 몸을 사정없이 강타하여 엄청난 속도로 공중으로 치솟게 하고 있었다.
‘쿠드드득! 푸직!’
“커헉...!”
그리고 순식간에 뜨거운 암석의 증기를 뒤집어 써버린 채로 사정없이 바닥에 내리꽂힌 카를은 그 운을 다한 듯, 튀어나온 파편에 옆구리를 사정없이 꿰뚫렸다. 일전에 라기아크루스를 대면한 적이 있기에 고열로 인한 고통까지는 참을 수 있었지만, 옆구리에 바람 빠지는 것만 같은 소리를 내며 사정없이 박힌 파편이 낸 고통에는 짧은 신음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크윽... 망할...“
‘꾸드드득....’
일반적인 상황에서라면 그 쇼크로 충분히 기절하고도 남았어야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도리어 그 고통으로 인해 정신이 더욱 번쩍 든 카를은 자신을 졸지에 대지에 구속시켜버린 기둥의 파편을 뽑기 위해 다행히도 멀쩡한 양팔로 잡고 뽑아내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도리어 더 끔찍한 고통을 불러왔다.
“크아아아아...!”
ㅡ쿵.....
‘쿠구구구구구구....’
비명이 튀어나올 정도의 고통, 그 고통 속에서 정신이 잠시 혼미해진 사이 그리 머지않은 곳에서 그란 밀라오스의 발걸음이 내는 울림과 그로 인한 진동이 울렸다.
-젠장, 이걸 써야...
그 진동에 멀어져가려는 의식을 다시 강하게 움켜쥔 카를은 다시 이를 악물고 피투성이가 된 허리춤의 칼집에 넣어뒀던 갈무리 칼을 떨리는 손으로 끄집어냈다. 그리고 그 직후, 앞뒤를 생각할 틈 없이 사정없이 파편을 치며 뜯어내듯 잘라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퍽... 퍽... 우드득...’
파편이 튀고 움직이며 내장을 더욱 헤집어갔지만, 그 고통을 각성제로 삼아 카를은 더욱 이를 악물고 칼날의 이가 다 나가도 모자를 그 완력으로 사정없이 파편을 쳐서 뜯어나갔다. 그리고 그 부질없어 보이던 노력이 빛을 발하듯, 파여져 나가는 파편이 부러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우지끈..!’
“아, 망할... 살아서 가긴 확실히 틀렸군...”
겨우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부러져서 몸이 앞으로 쏠려 구르려는 찰나, 간신히 몸의 균형을 맞춰 일어서며 그는 갑주를 맥없이 뚫고 나간 파편이 박힌 옆구리와 고열에 녹아 피부에 눌러 붙어버리다시피 한 방어구를 보며 중얼거렸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여태까지의 재앙 앞에서도 버텨왔던 그의 두 다리는 비록 다 부러졌지만 불에 그슬려 녹아 눌러 붙은 다리의 갑주가 다리에 붙으면서 고통스럽지만 제 할 일은 할 수 있도록 해준 점이었다.
“이건 이제 필요 없겠군.”
그나마 투구는 열에 녹아버려 시야를 가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그는 이제 쓸모없어지다 시피 한 해룡의 소재를 엮은 투구를 벗었다.
-이제 슬슬 마지막인가...
투구 안에 가려져있던 갈색의 머리카락을 여전히 열을 품은 바람에 사방으로 흩날리며 여러 번의 충격으로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대지의 황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함께 했던 이들의 목숨을 바쳐서 얻어낸 해답. 그 해답이 맞을지 틀릴지는 이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지 그것이 이제 그가 마지막으로 지켜야 할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만 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더 여한이 없었다.
“쿨럭.. 좋아... 해보자고.”
‘쿵!’
다시금 짙어지는 염산가스로 인해 고통스런 기침을 쿨럭이며 최후의 각오를 다잡은 후, 카를은 평생을 갈고 닦으며 여러 몬스터의 소재를 덧대어 오며 완성한 그의 목숨이나 다름없던 이제는 휘어지고 여기저기 녹아 눌어붙은 대검을 일으켜 세워 땅에 박은 후 그 손잡이에 들고 있던 투구를 씌우면서 뒤로하며 그 인생 최후의 여정을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대지의 황혼, 연흑룡 그란 밀라오스는 마치 거짓말처럼 그가 있는 방향을 향해 그 대지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거체를 옮겨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