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알지 못했다. 나도 누나도 그 당시엔 살아남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철혈 폭동’이라는 명칭 또한 몇 달에 걸쳐 S09 지역에서 빠져나간 뒤에야 알게 되었고, 그 명칭에 아연실색함을 느꼈다. 나와 누나가 겪었던 건 폭동 따위로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생존이었지.
나 홀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 명이었다면, 의논이란 걸 하고 심정을 토로하고 이야기를 하고 듣는, 대화라는 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미쳐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마스터하고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릴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살인 기계 따위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팔과 다리가 하나씩 잘려나간 채 쓰러진 사람을 살리기로 결정한 건 누나였으니까. 그저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출혈만 막은 수준의 응급처지를 했을 뿐이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나와 누나는 죽은 사람이 되었다. 신원을 증명할 수 있는 모든 걸 잃어버리고, 도심에서 생존을 이어나가던 어느 날. 나는 그 사람과 만났다.
없던 팔다리는 갈아치워져 있었다. 생각해보면 장관이었다, 죽은 사람들끼리 재회하다니.”
덜커덩, 드르륵, 으저저적, 간헐적인 쿵쿵거림이 잠시 그치는가 싶더니 소란스러운 금속음이 일어났다. 그리고 뚝, 환풍구 덮개가 나가떨어지며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하아, 하고. 나지막한 한숨 소리. 잠입하곤 좀 많이 거리가 먼 행동이었지만, 그는 소란을 피우지 않고선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철퍼덕, 땅바닥에 널브러지고 나서야 데레는 겨우 잠잠해졌다.
“…진짜 미친 짓이네, 이거. 영화에서 나오던 건 다 가짜였어. 다신 안 해.”
기름때 짜증나. 옷도 머리도 검댕이 묻은 채 데레는 비틀비틀, 겨우 일어났다. 이런 고전적인 방법보다 훨씬 쉽고 간편한 방법들이 있었지만, 보안 인력에게 얼굴이 찍힌 이상 하나 같이 쓸 수 없는 것들이었다. 시도하기 전에 잡혀서 내쫓길게 뻔하니까. 404 이들은 이딴 걸 어떻게 하는 거지, 그렇게 뇌까리며 그는 몇 분에 걸쳐 숨을 쉬고, 접혀있던 팔다리를 피고, 어지럼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최소한 위치는 제대로 맞춘 것 같았다. 지하에 위치한 트램을 보며 데레는 그렇게 생각했다.
‘IOP S11 지부 사옥은 도심과 맞닿아있다’와 ‘그리폰&크루거의 현 임시 본부는 IOP 사옥 단지 내에 존재한다’. 이 두 명제가 동시에 성립하는 이유는 해당 지역 자체가 사옥이 건립됨과 함께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개척 도시가 그렇듯. 덕분에 S11 지역은 지도로 볼 때 샴쌍둥이 같은 모습이었다. 한쪽은 사람 사는 곳, 다른 한쪽은 공업 지대. 회사 자체에 지하 철도가 존재하는 이유였다.
데레는 사원증을 대는 트램의 패널을 잡아 뜯어버리곤, 조심스레 내부에 손을 집어넣어 기판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문득 그는 기판도 마저 쥐어 떼내고, 문짝을 걷어차고, 유리창을 때려 부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안젤리아가 실종된 이후 종종 느끼던 충동이었다.
파직, 순간적으로 튄 스파크와 함께 새된 신음을 냈다. 황급히 손을 빼내고, 저릿함에 몇 차례 털어내고, 다시 집어넣었다. 회로를 직접 건드리는 방식은 시도만 할 수 있다면 어떤 보안이든 무력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지만, 소프트웨어를 건드리는 것과 달리 사고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방금 전처럼.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제레가 맞을지도 모른다. 그리폰이든 안전국이든, 데레 자신보다 더 거대하고 강대한 이들을 믿으며 가만히 있는 것 또한 괜찮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안젤리아가 멀쩡하리라 믿는 것 또한 괜찮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전선을 뽑아냈고, 한 번 더 스파크가 튀기는가 싶더니 트램의 출입구가 열렸다. 세 번의 심호흡, 그리고 데레는 할 일을 되새겼다.
기록 찾기. 도움이 될 만한 건 싹 다. 특히 중요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리벨리온과의 통신 기록’. 안젫리아가 데리고 있던 두 무기. 해당 기록을 역산해보면 모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용했던 주소든 대역폭이든 간에. 다른 하나는 ‘국가 안전국에 대한 단서’. 무엇이든 좋았다. IOP나 그리폰과 달리 그들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추적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최소한의 연결고리라도 찾아야 했다. 둘 중 하나라도.
…미친 짓이었다. 몇 시간 동안 환풍구를 기어다닌 것 이상으로 제정신이 아닌 일이었다. 그런데 할 수밖에 없잖아. 가만히 앉아서 집 지키는 개처럼 기다리기엔, 데레의 인내심은 슬슬 바닥을 기고 있었다. 9주 동안은, 45나 416이 말하던 ‘납치된 지휘관 구출하기’에 기대를 걸기로 했다. 그 인형 넷의 전투 기록에서 그 사람의 행적은 그야말로 ‘기적 같다’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 사람이 돌아온다면 활로가 열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스스로가 조급한 건지, 아니면 기대가 너무 과하게 부풀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트램에 타려고 한 순간이었다.
또각 또각.
구둣발 소리가 이토록 무섭게 들린 건 처음이었다.
…조금이나마 정신적인 여유가 있었다면, 분명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데레는 피로했고, 스트레스가 쌓여있었으며, 배가 조금 고팠고, 전기가 통했던 오른손이 저릿했다. 그리고 긴장하고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그는 난데없이 나타난 발소리에 완전히 굳어버렸다.
“거기 누구야?”
발소리가 그치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레는 트램에 타려다가 굳은 어색한 자세 그대로, 천천히 소리가 난 지점을 향해 몸을 돌려 바라봤다. 그리폰&크루거는 세간에 테러조직으로 알려져 있었고, 그 이전에 PMC였다. 이는 모든 인원이 필요하면 언제든 무장할 수 있으며, 동시에 호신용 화기 정도는 언제든 소지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했지만, 안타깝게도 데레는 지휘관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에게 권총을 겨누며 경계하고 있는 사람의 이름이 카리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
아 아무튼 3월 28일에 썼고 올린 날만 29일이니까 1003일도 찍은 거임 ㅡㅡ.
여러분들은 규칙적인 수면 시간을 확보해주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3000자입니다. 감사합니다.
[이 소설은 포스타입에서 모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