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창고 ~ 정지한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잠들고, 꿈꾸다, 깨어난다.
좋은 꿈을 꿨다며 아침을 기분좋게 맞이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쁜 악몽을 꾸어 음울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간밤에 무슨 꿈을 꿨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답답해 하는 사람 역시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잊고 있는것이 있다.
그것은 잠이 드는 순간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보통, 평생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수천번, 수만번을 겪는 일 이지만 어째서인지, 아무도 그 순간만큼은 기억하지 못한다.
나 역시 그러한 평범한 사람들의 축에 속해있었다.
조심스럽게 고백하자면 그 일을 겪기 전 까지만 하더라도 '잠이 드는 순간' 따위의,
아무래도 좋을 일을 기억한다는 것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솔직히 그렇지 않아?
잠이 드는 순간을 기억해서 어떤 이득이 있다는거야.
나는 사람의 잠에 관해 연구하는 사람도 아닌데다, 그런 쓸모없는 것 보다는 다음달의 방값
을 지불하는것에 관해 더 많은 신경을 써야했던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그러나.
그러한 엉뚱한 상황이란, 언제나 그렇듯.
의외의 발견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생각하지도 못하게 찾아오는 법이다.
그것이 생각보다 빈번하게 벌어지지만, 그야말로 생각치도 못했던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우연한 일이기에 세상속에 들어나지 않았을 뿐이다.
나 역시 그런 '관계없는' 사람의 축에 속했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하게 될 이야기는 세상속에 묻혀버릴것이 뻔한 이야기.
그것을 알면서도 이 글을 쓸 수 밖에 없는 까닭은 내 가슴속 어딘가 아련히 남아있는
그 곳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때문이다.
그 날은 다른 날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별다른 피곤한 일도 없었고, 신경이 쓰이는 일 역시 없었다.
단지 한 가지 다른점은 어째서인지..
" 흔 아홉.. 뭐야, 이건. "
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다.
내가 나를 내려다보고있다.
이게 무슨 말도 안돼는 상황이란 말인가.
나는 기가막힌다는 기분이 어떤것인지,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 새로운 발견에도 진심으로 기뻐 할 수 없다는 점은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유체이탈.
순간 머리속으로 그런 단어가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평소 가위한번 눌려보지 못했던 나에게
유체이탈이란 단어는 로또 1등 당첨이라는 단어보다 멀게만 느껴졌다.
내 기분을 아는건지 모르는건지, 나는 여전히 영 편해보이지 않는 자세로 미동도 않고 잠들어 있다.
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런대 나는 잠을 자고 있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머리속의 혼란을 파리채로 후려쳐서 휴지에 잘 싼 후, 두번다시 살아나기 힘들도록 라이터로
지져버린다. 불타오르는 혼란의 마지막 단말마를 들으며 나는 미소지었다.
좋아. 진정됐어.
혼란이란 놈은 두번 다시 살아날 수 없겠지.
나는 다시한번 냉정해진 머리로 상황을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난 분명히 깨어있었다. 잠들기 전 분명히 어제 산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생각외로 그 만화, 재미가 없었지. 돈이 아깝다고 투덜대며, 지루하기 짝이 없는 전개에
하품을 해 댔다. 그러다 눈이 아파서, 잠시 안경을 벗고 손등으로 눈을 덮고..
아, 맞아.
그만 자자, 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시계가 오전 1:49분을 가르키는 것을 보면서 눈을 감았다.
나는 시계를 돌아보았다.
오전 1:53분.
그 때로부터 불과 4분도 지나지 않았다.
그 4분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의 기억을 재생시켜 보았다.
째깍, 째깍, 째깍.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를 세면서 의식이 멀어진다.
째깍, 서른 여섯. 째깍, 서른 일곱. 째각. 서른 여덟.
희미하게 멀어져가는 의식사이로, 단지 무의식적으로 초침의 수를 샌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 아흔 아홉, 이라는 숫자를 묵묵히 중얼거리면서.
그 순간 나는 깨닳았다.
혼란이란 녀석은 불사조란 녀석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혼란을 태워 없애다니, 그건 말도 안돼는 소리였다. 그 녀석은 변기에 넣고 멀리
떠내려보냈어야만했다. 배수구를 통해 멀리 떠내려간 혼란은 기어이 날 찾아 돌아오겠지만
그래도 역시 지금보다는 시간을 더 벌 수 있었을 것이다.
타고 남은 재 속에서 날아올라 나를 휘감는 혼란을 느끼며 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는 멈추어있었다. 오전 1시53분 21초. 혼란이 목까지 나를 감싸며 거세게 흔들어댄다.
시야가 흔들린다. 다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침대 옆으로, 안경이 떨어지기 직전에 고정되어 있다.
혼란이 코 밑까지 올라온다. 숨을 쉬기가 힘들다. 꺽여진 고개로 바라본 천장에는, 한 마리의 파리가
형광등을 향해 날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멈추어있었다. 호버링을 할 줄 아는 파리라? 혼란이
머리 끝까지 나를 뒤덮는다. 온 몸이 거세게 흔들린다. 그만 흔들어. 속이 메슥거린단 말이야. 머리속이
믹서기로 갈리는 것 같아. 그만 흔들어. 그리고 마침내, 뇌 속까지 혼란이 파고드는 것을 느낀다.
돌연, 어둠이 찾아왔다.
조심스럽게 눈을 떴을 때, 난 혼란이 남기고간 배설물에 축축하게 젖어있다는 걸 눈치챘다.
덧붙여 내 방에 있는게 아니라는 것 역시 눈치챘지만, 혼란이 벌여놓은 일에 더 이상 혼란스러워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머리속으로 그 녀석이 하는 짓거리가 다 그렇지, 하고 투덜거리면서.
어둠속에서 보이는 것은 나 하나 뿐이었다.
것 참, 어둠속에서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자기 자신이 형광등이라도 & #46080; 듯 한 묘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어둠속을 손으로 더듬었다.
손에 걸리는 수많은 물건들. 그러나 너무 어두워서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네모낳고 딱딱한 물건들. 그 위에 뭔가 잔뜩 가루같은 것이 묻어있는게 느껴진다.
어딘가의 창고라도 돼는건가, 라는 생각을 할 때 쯤. 내 손에 네모난 것이 아닌 , 둥근 물체가 걸렸다.
이 세계에선 무척이나 이질적인 모습을 한 둥근 물체가 '문고리' 라는 것을 눈치채기 까진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네모난 세상에 둥근 물체라니? 이 세상의 조화를 깨 놓은 물체에 분개하며 나는 그놈을
힘껏 비틀어 밀었다.
그 짧은 순간, 나는 치명적인 착각을 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문고리라고? 아니, 아니야. 이건 문고리 따위가 아니었어. 이건 단순한 배수구 꼭지였다.
어둠이 변기 물 빠지듯 문고리 밖으로 달아나며 키득거린다.
바람이 불었을리는 없다. 그러니 내가 반사적으로 눈을 가리는 동시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누른 것은 단순한 삽질이다.
어둠이 도망친 자리에 뒤늦게 빛이 찾아들었다. 이 녀석은 언제나 어둠을 & #51922;을 뿐, 잡지는 못하는
느림보군. 단순히 어둠이 빠른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빛은 어둠이 남기고 간 흔적을 찾기라도 하는 듯, 사방을 밝게 비추었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소수의 어둠은 빛의 시선을 피하듯 구석으로 물러난다. 어리석은 빛은 그런 어둠을
눈치채지 못한다.
바보같은 빛과 어둠의 숨박꼭질을 바라보던 나는 덤으로 그 방이 어떤 곳이지를 깨달았다.
그곳은 창고 따위가 아니었다. 수많은 책들으로 잔뜩 둘러쌓인 거대한 도서관이었다.
이 곳을 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하는것이 옳은지는 잘 모르겠다.
창고 따위가 아니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솔직히 자신은 없다.
어떤 책은 정성들여 정리되어 있지만, 어떤곳은 정신없이 쌓여 올라간 책과 바닥에 널부러진 책으로
가득하다. 아슬아슬하게 휘청이며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한 책무더기 사이를 통과하며, 생각한다.
아니, 역시 취소하겠어.
여긴 도서관이라기보단 책 창고야.
올려다 본 도서관의 천장은 가득히 쌓여있는 빈 책장과, 자리를 잃은 책이 꼭대기에 마른 나뭇가지처럼
솟아올라 있었다. 어디 있었는지 모를 창문으로 분주히 오가는 빛과 그 빛 사이를, 나른한 하품을 토해내며
떠다니는 먼지들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뱉았다.
책 사이를 피해다니며 이 빌어먹을 도서관인지 창고인지의 출구를 찾던 나의 시야에 문득, 상자 하나가
보였다. 터무니 없다는 단어로 잘 치장한 커다란 상자였다. 덧붙이면 어째서인지 굵은 쇠사슬로 칭칭
동여매져 있고 "접근 금지!" 라는 종이 쪽지가 마치 차압증마냥 상자 곳곳에 덕지덕지 붙여져 있었다.
별 생각없이 그 상자에 다가가, 상자에 손을 뻗는 순간,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가 나의 손목을 잡아챘다.
" 그거 건드리지 않는게 좋을걸? "
손을 잡아챈 목소리는 어쩐지 피곤함과 짜증이 가득 묻어있었다.
나까지 피곤해지는 것 같은 목소리를 손에서 털어내며 돌아보자, 목소리의 몇배는 더 피곤하고 짜증나보이는
한 여성이 두 손 가득 책을 안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들어왔다..?! 젠장!
" 으아어으으으억!? "
" 젠장, 빌어먹을놈! 손 치워! "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라는 단어는 잘못된 말이다. 나는 눈을 손으로 감싸며 비명을 질렀고, 그 여성은
나의 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버둥거렸다.
잠시후, 허공을 떠돌던 먼지들은 눈을 감싸고 신음을 흘리는 나와, 바닥을 양 손으로 짚고 헉헉거리는 이름 모를
여자라는 기묘한 대치를 바라보며, 몇번째인지 모를 하품을 했다.
" 크악! 눈 속 가득히 먼지를 한 웅큼은 우겨넣은 것 처럼 뻑뻑해! 게다가
좌측 안구의 수정체에 압박이 발생하여 출혈이 일어날 것만 같아! "
나는 눈에 가해진 고통에 구체적인 설명을 하며 비명을 질렀다.
나의 눈 속에서 기어나온 여자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내 곁으로 와선
- 빠악!
옆에 있던 책을 집어들어 분노란 감정이 가득 담긴 일격을 내 뒤통수에 선물했다.
와르륵, 이라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아닌게 아니라, 나의 눈 속에서 아까 여자가 들고 있었던 수십권이 책이
쏟아져 나오는게 아닌가.
순간, 머리속에서 어처구니라는 개념이 뛰어나왔다. 어처구니는 터무니없는 치장이 잘 어울리는 상자위에 올라앉았다.
그것을 보는 순간, 황당함이란 개념이 같이 뛰어 올라 어처구니의 옆에 내려 앉았다.
나는 다급히 막 두번째 도약을 하여 나에게서 도망치려는 어처구니와 황당함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두번째로 나의 손을 잡아챈 정체모를 여자덕분에 나는 어처구니의 실종을 눈 뜨고 볼 수밖에 없었다.
" 그거,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 "
여자는 내 손을 뿌리치며 퉁명스럽게 말 했다.
나는 황당도, 어처구니도 잃은 상태였기에 이렇게 질문 할 수 있었다.
" 저게 뭔대? "
사람의 머리속에 개념이 하나라도 빠지면 당연히 먼저 나와야 할 말의 순서가 엉킨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어처구니가 남기고 간 흔적을 더듬어 말을 고쳤다.
" 아니, 넌 누구야? 여긴 어디지? "
여자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곤 짜증스럽게 머리를 벅벅 긁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서야 여자를 눈에 넣는 대신, 그 여자의 모습을 살펴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피곤함에 쩔은 O.L을 생각나게 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짧은 쇼트 컷의 머리는 먼지가잔뜩 앉아 무슨색인지도 잘 보이지 않는대다, UFO의 신비로운 흔적이라는 다크 서클이 그려진 눈,
먼지가 잔뜩 달라붙어 하품을 하고 있는 구겨진 와이셔츠. 그런 그녀가 두번째로 나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머리속에서 현실감이라는 충직한 친구가 튀어나왔다.
방금의 공격으로 많은 충격을 받은듯, 현실감이란 친구는 끅끅 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하며 휘청였다.
나는 현실감을 안아들었다. 현실감은 늘어지듯 내 품 속에서 기절해버렸다.
나는 현실감의 뺨을 치며 현실감의 정신을 돌아오게 하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 하나씩 물어, 하나씩. "
짜증스럽다는 듯 으르렁거리며 그녀는 나의 현실감을 후려갈긴 책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져놓았다.
나는 현실감을 깨우는것을 포기한채 현실감을 안고 몸을 일으켰다.
" 좋아. 그럼 여긴 어디야? "
나의 질문에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 허어? 너 그것도 모르면서 온거냐? "
라고 말하며 넌저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실종된 황당함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들었다. 황당아, 너라도 있었으면 이럴때 그리움 이외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을텐데.
" 모르니까 묻고 있는거 아니야. "
나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 후.. 너 바보라는건 충분히 알았다..
여기가 어디냐고? 그래, 넌 니 대가리 속에서 여기가 어디나고 묻고 있냐? "
나는 현실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현실감은 여전히 기절중이었다.
아무래도 한동안 깨어나긴 글렀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어처구니까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더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려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뒤를 & #51922;았다.
" 이봐, 기다려. 머리속이라고? 젠장, 그런게 어딨어. 내 머린 여기있다구!? "
나는 내 머리를 가르키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그리곤 내가 가르키고 있는 내 머리, 즉 정수리를 책의 모서리로
가차없이 찍어버렸다.
" 그래, 이게 니 대가리다. 알겠냐, 응? "
우르르,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내 머리속" 반의 "개념" 분단의 녀석들이 단채로 땡땡이를 치는걸 바라봐야했다.
나는 휘청이는 몸을 가누며 어눌하게 말했다.
" 어, 그래.. 여기 내 머리속이군. 그런대 넌 누구야..? "
" 관리자. "
" 무슨 관리자란 소리야.. "
" 바로 빌어먹을 네놈의 기억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젠장!
피곤해 죽겠는대 자꾸 말 걸거야!? "
그녀는 나를 돌아보며 으르렁거렸다. 아닌게 아니라, 그녀는 정말 피곤해보였다.
하지만 나는 개념들이 단채로 땡땡이를 쳤기에 그런 그녀에게 조금의 미안함을 느끼지 못했다.
" 기억을 관리한다니? 여기가 어딘대? "
그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자신의 와이셔츠에 내려앉아 나른한 하품을 하던 먼지를 짜증스럽게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오늘은 잠 다잤군.
" 아, 젠장.. 귀찮게.. 옆에 있는 책 아무거나 집어서 읽어, 그럼 알거아냐. "
나는 그녀의 말대로 옆에 있던 책을 아무거나 집어들었다.
책은 무척이나 두꺼웠다. 먼지가 잔뜩 앉아 나를 보며 나른한 하품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 먼지에게 씩, 웃어주곤 훅 불어 허공으로 날려버렸다. 그러자 먼지는 내 얼굴에
달라붙는 복수를 감행했다. 훌륭한 돌진공격이었다. 난 재체기를 하며 얼굴의 먼지를 털어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여자는 참으로 한심하다는 듯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었다.
1992년12월 11일.. 아침 7시에 기상하였으나 시계를 끄고 다시 잠들다.
그리고 30분동안 누워서 뒹굴다가 그제서야 기어 일어나 세수하고 이 닦고 학교에 등교.
가는 길에 실내화 주머니를 휘두르다 나무에 걸리다. 한참이나 실내화를 내리려 삽질을 반복하다
지나가는 어른이 도와줘서 간신히 실내화 주머니를 찾다. 그러나 결국 지각..?
" 뭐야, 이건...? "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 니 기억이지. "
" 뭐? 무슨 소리야, 난 이런 적 없다? "
그녀는 씨익, 웃으며 (처음으로 웃는것을 봤다.) 내 발치에 흩어진 수많은 책들을 가르키며 말 했다.
" 당연하지. 그건 니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기억이니까. 분명히 겪은 일이고, 니가
한 일이지만 넌 그걸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어. 그러니까 잊어버리는게 당연하지 않아? "
" 무슨.. "
" 저기 정리되있는 책장은 니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고. 바닥에 떨어져있는 것들은 네가 잊어버렸거나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은것, 혹은 잊어버린 기억들. 나는 그런 기억을 관리하는 사람. 자, 이제 좀
알아 들을 것 같으신가, 바보? "
요컨대, 그녀가 말하는 것은 주변에 이 모든 책들이 내 기억이라는 듯 하다.
정리돼어 있는 것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기억들, 바닥에 수없이 흩어지고 책과 책 사이에 파 묻힌 책은
내가 잊어버린 기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나의 기억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어디선가 꺼낸 흔들 의자에 누워 느긋하게 빛을 쪼이고 있었다.
난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 젠장, 내가 잊어버린게 이렇게 많은가..? 기왕이면 정리좀 해 놓으면 어때? 관리자라며."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살짝 실눈을 떠서 나를 노려보았다.
" 니가 잊은 기억인대 내가 왜? 그리고 그걸 다 꽃았다가 책장이 못견뎌. 머리통 터지고 싶냐, 넌? "
" 저 책장이 내 기억의 허용 용량이란거야? "
나의 질문에 그녀는 손을 설래설래 저으며 대답했다.
" 아아, 대충 비슷해. 그러니까 좀 조용히 안해줄래? 난 하루종일 일했단 말이다, 망할.. "
" ..그러던지."
그녀는 날 상대해 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아까 문득 나의 개념들이 단체로 가출한 장소- 그러니까 즉
커다란 상자 근처로 몸을 돌렸다.
분명히 이 근처에 내 개념들이 숨어 있을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상자에 대는 순간
- 끼익
들릴리가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자식이내돈을훔쳐갔엄마가지마세요네가훔쳤지다내탓이야강아지가죽었다친구가
배신당했다빌어먹을바퀴벌래가콜라속에있어낚시줄이끊겼다버림받았어팬티속에꼽등이가있어
수술비가부족합니다돈내던지방빼던지결정해니글재미없어핸드폰요금미납으로발신을정지하겠습니다
니어미는애버리고어딜가서다리나벌리고있겠지죽일테다개자식돈내놔넌쓰래기에불과아버지가날팔았다
경찰입니다만잠시같이가주셔야겠습니다누나가죽었어강간혐의로체포합니저녀석이그녀석이래
수많은 단어들이 머리속을 달려, 머리속에서 붉고 푸른 색들이 번뜩인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어
이가 딱딱 부딪힌 몸이 떨린려 이렇게도 밝은대도 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 멍청아! "
누군가 내 목덜미를 잡아채 뒤로 힘껏 끌어당겼다.
쿠당, 하고 뒤로 넘어지며 머리를 어딘가에 찍었는지 눈에서 불이 번쩍 튀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신음을 흘렸다.
" 방금 그건.."
" 괜찮냐!? "
누군가 내 볼을 찰싹이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녀였다.
멀리 보이는 흔들의자가 거칠게 흔들리고 있는것으로 그녀가 얼마나 황급히 뛰어왔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쿨럭, 기침을 토해냈다.
어째서인지 아직도 손이 떨렸다. 방금 뭘 본거지? 아니, 뭘 기억해 낸 거지?
나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내 의지대로 감기지 않는 눈이 제 멋대로 푸들거리며 경련을 반복했다.
순간,
" 야 이 멍청아! 너 글자 못 읽냐?! 손대지 말라고 써 붙여놓은거 안보여?! 건드리지 말라던거 안들리디?
귀는 점심으로 처먹고 눈깔은 디저트로 먹었냐?! "
누군가의 거친 고함이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관리자? 관리자다.
그녀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보며 뭐라고 고함을 치고 있었다.
" 그거.. "
" 아, 됐어, 젠장. 바보인줄 알았지만 이정도로 얼간인줄은 몰랐네. 제기랄, 됐어! 됐으니까 잊어버려.
전혀 생각할 필요없어. 아무것도 아니니까. "
" 그것도.. 내 기억.."
" 됐다니까! "
찰싹, 뺨을 맞았다.
그녀는 그대로 내 얼굴을 붙든 채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 좋아, 잘 들어. 사람은 잊어버려도 좋은 일들이 있어. 알아들어? "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이나 내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들여다봤다가 법썩을 친 후에야
" 휴.. 어디 망가진대는 없는 것 같네. "
안심한 표정으로 내 머리를 놔주었다.
" 니가 망가지면 한동안 내가 있을곳이 없어지니까 좀 조심하라구. "
나는 그녀의 말에 멍청히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 무슨 소리야, 그거. 그러니까 즉 넌 기생추.."
그녀는 내 목을 잡아 채 말이 돼지 못한 단어를 내 목째 눌려죽였다.
" 그 이상말하면 뇌를 두부로 만들어버린다, 이 은혜도 모르는 기생충같은
자식아... "
으르렁 거리는 그녀에게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어가 압사한것을 확인이라도 하듯 내 목을 꼬아보던 그녀는 팽개치듯
손을 놔 주었다. 제기랄, 황송도 하셔라.
나는 팻, 하고 바닥에 죽은 단어를 뱉어내었다.
- ㄱ ㅅ ㅐ ㅊ
눌려죽은 단어는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나는 어쩐지 우울해졌다.
" 제길, 역시 열려있어.."
그녀- 즉, 관리자는 상자를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어째서인지, 상자는 반쯤 열려있었다. 묶어놓은 쇠사슬이니, 차압증처럼
붙어있던 수많은 종이 쪽지는 어딘지로 사라져버린 상태였다.
나는 그 상자를- 정확히는 불판위의 조개처럼 반쯤 벌어진채 들썩이는
상자의 검은 속안을 바라보는것이 어째서인지 너무 두려워서 고개를 돌렸다.
저건 기억해서는 안& #46084;일이다.
어째서인지 머리속으로 그렇게 붉은 불이 번뜩이며 경고를 하는 느낌이다.
그녀는 가차없이 상자를 발로 밟아 열리려던 뚜껑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어디선가 꺼내든 쇠사슬로 상자를 빈틈없이 묶기 시작했다.
그런대, 그녀의 얼굴이 마치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일그러지고 있는게 아닌가.
난 떨떠름하게 질문했다.
" 왜.. "
마렵냐? 라고 질문하려다 문득 목이 메어 쿨럭거렸다.
돌이켜보면 그건 상당한 행운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녀는 내 말을 오해했다.
" 뭐, 너무 신경쓰지마. 네가 이런일로 망가져버리면 내가 골치아프니까.
우울한 기억을 관리하는건 나도 아프지만.. 앗차. 뒤는 직업 비밀이니 잊어. "
그제서야 나는 눈치챘다. 저 기억은 내가 잊으려고 노력한 기억, 아무리해도 잊을 수 없지만
잊을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기억이라고. 그것을 만진다는건 즉,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린다는 것이다.
아무리 타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고통스럽지 않을리는 없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 미안.. 저런것만 잔뜩 있어서. "
그녀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 됐어. 이게 내 일이니까. 다른 사람에 비해서 적은 편이기도 하고.. 아 거, 인상 펴! "
" 그래? 그럼 그러지 뭐. "
나는 가능한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녀는 기가막히다는 표정을 지었고, 나는 문득 거울이 보고 싶어졌다.
" 넌 개념이란게.. 아차, 아까 전부 도망갔지. "
" 원인은 그쪽이 제공했고. "
" 지성이 가출하면 인간과 원숭이의 차이점이 없어진다는 걸 알려주랴? "
손에 책을, 그러니까 나의 기억을 집어드는 그녀를 보며 나는 "인생이 조금
비굴하다 하더라도 무엇이 나쁜거지? " 하고,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며 말했다.
" 근본적인 원인은 역시 나겠지. "
그 후로 나는 상당히 오랜 시간을 들여 그 창고와도 같은 기억의 도서관을
돌아보았다. 한번 호된 꼴을 당하긴 했지만, 내가 잊은 기억이라던지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이 무엇인지 다시한번 확인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보던 중 나는 가출했던 개념분단의
대부분을 잡아들일 수 있었다.
관리자, 즉 그녀는 흔들의자에 누워 쉬는 듯 했으나 내가 개념들을 & #51922;아
우당탕 거리거나, 웃긴 일을 겪었던 기억의 책을 읽으며 낄낄거리거나 하면
초조한 표정으로 나를 훔쳐보았다.
처음에는 그게 뭐 어때서, 라는 기분이었지만 개념들을 잡아들임에 따라 나는
그녀의 휴식을 방해하는것이 차차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 아, 참.. 그러고보니, 여기 다른 관리자는 없는거야? "
나는 개념들이 가득 담겨 꿈틀거리는 천주머니를 억누르며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녀는 나의 질문에 손을 설래설래 흔들며 대답했다.
" 없어- 나 혼자. "
" 언제부터 여기 있었는대? "
" 말 했잖아? 나는 네 기억을 관리한다고. 당연히 태어났을 때 부터지. "
그녀의 기분에 나는 황당이 천 주머니 위로 빼꼼히 머리를 내미는 것을 보았다.
이야, 오랜만이구나 황당아. 니가 돌아와서 참으로 기쁘다. 그런대 기왕이면
내 안으로 좀 다시 돌아오지 않으련?
" 그럼 22년이나 줄곧 혼자였다고? "
" 그~ 래. 게다가 휴가도 없이 말이지. 매일매일 격무에 시달리고 하루 한번
얼마 있지도 않은 휴식 시간에 누구씨가 처들어와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있고 말이야. "
" 외롭진 않아? "
나는 개념중 한 녀석을 잡아들며 별 생각없이 물었다.
버둥거리는 개념을 어떻게 하면 다시 돌려놓을 수 있을지 고심하던 차에
난 끼익 끼익 거리던 흔들의자의 소리가 멈추어 있다는걸 깨달았다.
문득 돌아본 그녀는, 천장을 올려보고 있었다.
천장보다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나는 어쩐지 해선 안& #46084;
소리를 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 뭐.. 걱정없어. 사람의 인생을 짧으니까. 나무라던지 거북이 같은 녀석의
기억을 관리하는 것 보단 짧은대다.. 재밌는 기억도 많아서 즐겁거든. "
미안, 이라는 단어는 목구멍 안에서만 맴돌다 다시 뱃속으로 들어갔다.
어째서인지 뱃속에서는 그 단어를 내보내는것이 안& #46084; 일이라고 생각했나보다.
그래서 나는 다른것을 묻기로 했다.
" 잠깐, 아까 휴식이 어쩌구 했었지? 그럼 아무래도 내가 잘 때 너도 쉴 수
있다는 것 같은대, 맞아? "
" 잘 아네. "
" 그럼 내가 꾸는 꿈들은 어찌 & #46080;거야? 기억나는 꿈도 분명히 있을텐데. "
" 아아, 그거.. 그거야 뭐 대부분 잘못 기억하고 있거나, 잊어버릴 기억
들이니까. 그건 제 멋대로 생겨나는 거라서 말이야. 뭐 책들 사이 어딘가에
파묻혀버리더라구. "
그래서였나, 꿈 같은 게 잘 기억나지 않는건..
그렇게 생각하다 나는 문득 떠오른 것을 물어보았다.
" 잠깐, 그럼 지금 이 기억은? 어떻게 돼는거지? "
나의 질문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 글쎄, 이 도서관의 어딘가에 제 멋대로 생겨있겠지 뭐.. 그건 그렇고,
너, 슬슬 돌아갈 시간이다. "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 안 어딘가에서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나에서 두개로, 두개에서 세개로, 세게에서 네개로 그
소리가 늘어가면서 점점 소리는 커저만 간다.
" 아, 잠깐. 이건 어떻게.. "
나는 개념들이 든 주머니를 들어보였다.
그녀는 말 없이 개념들을 하나씩 꺼내, 내 입 속에 밀어넣었다.
마지막 개념까지 모두 삼키고 쿨럭거리던 나는, 그 순간에서야 처음에 물었어야
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관리자란게 대체 뭐야?
시계소리에 묻혀 그녀에게 그 말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는 개념이 들었던 주머니를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주머니에서는 전혀 보지 못했던 책 한권이 튀어나와 있었다.
세계를 시계소리가 덮어간다.
따르르르릉, 이란 글자가 수없이 귓구멍을 파고 들어온다.
시야를 가득 매운 따르르릉 이란 글자들을 손으로 휘어저 & #51922;으려 노력하며
나는 다시한번 고함을 질렀다.
네 정체가 대체 뭐야?
그녀는 주머니에서 꺼낸 책을 책장에 꽂고있었다.
그리곤 문득 나를 돌아보곤
" ---야. "
씨익 웃으며, 자신의 머리위에 떠 있는 찬란한 빛의 고리를 가르켜보였다.
그 날의 아침은 무척이나 평범한 아침이었다.
해가 2개가 뜬다거나, T.v에서 해성이 출동직전이라는 뉴스가 흘러나와도
이상할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쨋거나 그랬다.
몇가지 다른것이 있다면..
안경이 바닥에 떨어져있던 걸 까먹고 그것을 밟아버렸다는 것과
간밤에 천장에 날던 파리가 떨어져 죽어있었다는 점.
내가 언제 잠들었었는지를 확실하게 기억한다는 것과..
마지막으로..
간밤에 꾼 꿈인지 뭔지를 생생하게 기억한다는 점이다.
" ..였나. "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가락으로 머리위에 빙, 하고 고리를 그려보았다.
- End
//////////////////
아크로폴리스라는 창작 커뮤니티에서 낸 과제로 쓴 글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글의 매력을 꼽으라면 과감히 '오타' 라고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너무 많아서 고칠 엄두가 안나는군요.. (솔직히 귀찮습니다.)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