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스터 유성의 7일 9화 20년 전
“볼 일은 다 끝났어요?”
암페어의 집에서 나와 광장에 나오자마자 잔디마을 쪽에서 치아나가 걸어왔다.
“네, 그럭저럭.”
마치 내가 언제 광장으로 나올지 알고 있는 것 마냥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도박장에서도 그렇고 대체 이 아가씨는.......
“왜 그래요?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아니에요. 아무 것도. 근데 좀 늦긴 했네요.”
도박장 사건에, 관장전, 방금 전의 이야기까지. 어찌어찌하다 보니, 시간은 벌써 저녁이었다.
“으음, 그럼 오늘은 이만 쉴까요? 오늘이 이틀째니까 아직 여유는 있어요.”
“뭐, 의뢰인이 그러시다면야.”
이틀째라는 말에, 다시금 7일 이라는 기간이 머리를 스쳤다.
세계의 위험을 7일 안에 구한다니. 솔직히 말해 아직도 잘 믿기질 않았다.
“그럼 포켓몬센터로!”
통통 뛰어가는 치아나가 그런 위기감과 어울리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더 이상 철없는 아가씨로만은 보이지 않았다.
“후우....... 이건 정말 상상 못했는데.”
작은 한숨과 함께 암페어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
“수고하셨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함께 시합은 끝났다. 단판이라 보고 배울만한 게 있을는지 모르겠다.
나와 암페어씨는 그라운드 중앙에서 서로 악수를 나눴다.
“와하하, 정말 훌륭하군.”
“훌륭한 건 지진이죠. 1대1이라 바로 끝난 것도 있고.”
“그래도 승부는 승부라네.”
암페어씨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 내 이야기를 들을 준비는 되었나?”
이제부터 본론이다. 이 이야기를 듣는 게 좋은 선택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레쿠쟈를 연구하다 돌아가신 아버지.
레쿠쟈의 전승을 지키고 있다는 치아나.
과거의 일을 알려주겠다는 암페어.
그리고 레쿠쟈를 찾는 나.
무언가 맞물려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들려주세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
“하.......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군.”
암페어의 집으로 자리를 옮긴 후, 암페어는 자리에 앉아 입을 열었다.
“20년 전, 내가 대보라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은 알고 있지? 그 당시 대보라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는 것도.
그래, 캑터스 호 사건. 그 사건 때문에 대보라는 전례 없는 위기에 닥쳤다네.
캑터스 호 사건이 터지기 직전, 대보라는 씨보라를 통해 얻은 기술과 자본으로 거대한 프로젝트에 착수했어.
뉴보라 프로젝트라는 건데, 시골마을이었던 보라시티를 거대한 주상복합단지로 재개발한 뒤 도시에 필요한 전력은 뉴보라에서 공급한다는, 뭐 그런 프로젝트였지.
나는 그 프로젝트의 책임자였고, 자네 아버지에게 자문위원을 부탁했지. 동향이라 알고 지낸 것도 있었고, 마을 주민의 요구 중에 공원을 만들어 달라는 것과 주위 자연환경을 해치지 말아달라는 게 있었거든. 자네 아버지는 생태학자로 유명했으니, 딱 좋았지.
자네 아버지, 클라우 박사는 당시 레쿠쟈에 대한 연구와 병행해서 최대한 우리를 도와줬다네.
계획 자체는 문제가 없었어. 마을 부지를 사들이는 것도 큰 마찰 없이 해결됐고. 그러다 완성을 눈앞에 두고 예기치 못한 곳에서 문제가 터졌지. 맞아, 씨보라야.
사실 씨보라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란 건 대보라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었을 거야.
씨보라가 무리하게 자원 채굴을 하고 있다는 거나, 직원들을 혹사시키고 있다는 건 대보라 내부에선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니까.
설마 여객선이랑 부딪힐 줄은 아무래도 몰랐겠지만.
덕분에 뉴보라 프로젝트는 근간부터 무너졌지.
아까 말했듯이 뉴보라 프로젝트는 씨보라를 통해 번 자본과, 씨보라의 기술을 토대로 하고 있었어.
하지만 캑터스 호 사건 이후, 자본은 당연히 끊기게 되었고, 씨보라에서 쓰던 기술도 여론 때문에 더 이상 쓸 수가 없었지.
지금껏 자연을 파괴해온 기술로 시골도시를 재개발하려 합니다! 라고 발표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프로젝트를 뒤엎을 수는 없다. 그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 그때야말로 멈춰야 했을 때였다는 걸 몰랐어.
기존의 기술을 쓰지 못한다면, 새로운 걸 찾아야 한다. 다 망해가는 대보라를 일으켜 세울 기술이 있다면 대체 무엇일까. 그렇게 생각하던 때, 자네 아버지가 하고 있던 연구가 내 눈에 들어왔지.
레쿠쟈.
호연 지방에 내려오는 전설 속 포켓몬. 그란돈과 가이오가를 진정시켰다는 그 강력한 힘을 어떻게든 다룰 수 있다면.
보라시티를 개조할 에너지도 얻고, 회사의 위상도 높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네.
......그런 표정 짓지 말게나.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아. 그때의 나는 어렸고, 어리석기까지 했지. 상황도 좋지 않았고. 다 변명일 뿐이지만 말일세.
자네 아버지는 내키지 않아 했지만, 막무가내였던 나를 막진 못했어. 나는 레쿠쟈를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물었고, 자네 아버지는 마지못해 답해주었지.
지금 유성의 폭포에서 살던 민족이 레쿠쟈와 관련되어 있다는 기록을 발견했고, 지금은 그 후손과 교우관계를 쌓는 중이라고 말이야.
그 말을 듣고, 나는 자네 아버지와 몇몇의 연구원들과 함께 에너지를 감지할 탐지기와 몇 가지 간단한 장비만 들고 유성의 폭포로 향했다네. 폭포에는 들은 대로 원주민들이 살았어. 유성의 민족이라고, 눈동자가 붉고 망토 같은 걸 두른 채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지.
우리가 찾아간 그 날은 마침 유성의 민족이 특별한 의식을 치르는 날이었어....... 후, 정확하게 말하면, 자네 아버지에게 캐물어서 그 날에 딱 맞추어 간 거였지.
유성의 민족은 빈말로라도 우릴 환영하지 않았어.
그럼에도 우릴 쫓아내지 않은 건, 그 동안 얼굴을 맞대온 자네 아버지를 봐서, 무엇보다 그 의식을 차마 중지시킬 수 없어서였을 거야. 괜히 우릴 쫓아내는데 시간을 허비하다 의식을 망칠 수도 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선 된다, 그런 말이 들렸던 게 기억나는군.
결국 우린 족장의 허가 아닌 허가를 받고, 의식 전에 동굴 여기저기에 손바닥만 한 에너지 탐지기를 설치할 수 있었어. 단, 의식을 직접 보는 건 안 되고 동굴 밖에서 대기하라는 게 조건으로 말일세.
별 수 없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얼마 안 가 동굴 안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네.
우리가 설치한 탐지기에도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감지되었어. 그야말로 전설적인 수치였지. 과장이 아니라 그 에너지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대보라를 다시 일으키는 것도 꿈은 아니었을 거야.
하지만, 족장과의 약속도 있었고, 이 이상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는 건 자네 아버지에게 면목이 없었어. 그래서, 우리는 한계치를 금방이라도 뚫을 듯한 에너지 수치를 그저 보고만 있었지.
그러다가 돌연, 솔방울이라는 연구원이 나서서 말했어. 응? 아, 독특한 이름이지? 놀랍게도 본명이야. 아무튼 그 연구원이 그러더군.
내가 탐지기와 같이 에너지 추출기도 설치를 했다고, 그런데 밖에서는 리모컨이 먹히지 않는다고, 지금 들어가서 이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이 막대한 에너지를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고, 말이야.
유성의 민족이 지켜온 의식을 망치고 그 에너지를 빼앗아 오는 일. 본능적으로 잘못된 일이란 건 알았지.
하지만 잘못된 일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건 어려운 일이야.
자네 아버지처럼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면 말일세.
자네 아버지는 더 이상은 안 된다고 필사적으로 말렸어. 솔방울은 그걸 뿌리치고는 동굴 안으로 뛰어 들어갔지. 그를 막으려 우리도 동굴도 따라 들어갔어.
사실 막으려 했단 것도 핑계고, 반쯤은 안으로 들어갈 구실이 생겨 내심 기뻐하기까지 했다네. 동굴 안쪽으로 달려가는 도중에도 솔방울이 계속 버튼을 눌러대는 소리가 동굴 안에서 울렸지.
갑자기 동굴로 처 들어간 우리는 순식간에 주목의 대상이 되었지. 다들 의식에 집중해 있었으면 모를까. 의식은 거의 막바지였던 것 같아. 새로운 족장, 뭐, 그런 말이 어렴풋이 들리더군. 새로운 족장이라 불린 아이가 당황한 표정으로 솔방울을 쳐다보았을 땐,
이미 추출기가 작동하고 있었어. 그리고....... 동굴이 흔들리기 시작했지.
.......기기의 결함이었는지, 추출기를 무리하게 설치해서였는지 아니면 추출하는 양이 너무 많아서였는지,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어. 어쩌면 전설의 포켓몬이 노했던 거였을지도 모르겠군. 확실했던 건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이었지.
벽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졌지. 그것도 새롭게 족장이 되었다는 그 아이 바로 아래에 있던 땅이.
하지만, 우린 아무 것도 하지 못했어. 그 아이가 서 있는 절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도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 그 상황에서 몸을 던지는 건 어려운 일이야.
그래, 자네 아버지처럼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면 말일세.
자네 아버지는 몸을 날려 그 아이를 구하곤 대신 절벽 밑으로 떨어졌어. 정말 순식간이었지. 다행히도 아이는 무사했어.”
“.......”
그 뒤의 이야기는 나도 알고 있다. 아버지는 무사하지 못했다.
“프로젝트 도중 외부 자문위원이 사망. 대보라는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었어. 대보라는 정말 회생불가능한 지경까지 이르렀지.
결국 뉴보라 프로젝트는 중지됐고, 바다 위의 캑터스 호처럼, 뉴보라도 지금까지 방치된 채 보라시티 남쪽에 있는 거라네.”
암페어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자네 어머니께는 사실대로 말씀드렸다네. 레쿠쟈에 대한 무리한 연구를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우리 측의 실수로 사고가 났고, 남편 분께선 그 사고에서 어떤 아이를 구하려다....... 그렇게 되셨다고.
고민 끝에 자네에겐 사고에 대해 자세히 알리지 않기로 해주셨지.”
어린 시절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어땠을까. 9살이었을 나는 아버지의 사고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미안하네.”
암페어는 고개를 숙였다.
“자네에게 사과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어버렸어. 그것도 자네가 먼저 찾아와서, 내가 말을 잘못해서 고백하는 꼴이라니. 염치가 없는 것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암페어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어. 정말 미안하네. 다 내 탓이고 내 잘못이야.”
“....... 괜찮아요. 라고 하면 아무래도 거짓말이긴 하지만. 뭐, 이제 와선 사실 많이 무뎌져서 잘 모르겠네요.”
“무뎌졌다 해도, 나 때문에 그런 그 사고가 일어난 건 사실이야. 정말 미안하네.”
이렇게 사과하는 사람에게 죄를 묻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는 암페어의 야망에 삼켜졌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저와 어머니를 많이 도와주신 것도 사실이잖아요.”
암페어가 고개를 들었다. 그 눈은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죄책감 때문이었겠지만, 사고 이후로 암페어는 우리 가족에 대한 지원을 계속해 주었다.
지금까지도 계속. 그 돈을 다 모았으면, 보라시티도 개조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둘 중 고민되는 게 있으면 자기가 좋아하는 선택을 해라. 아버지라면 아마 그렇게 말씀하셨겠죠.
그리고 그 아이를 구한 것도 아마 자기가 좋아서 한 선택이었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자. 어차피 아버지를 다시 뵐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아버지는 자신의 선택으로 아이를 구하신 것이다.
“고맙네....... 정말 고맙네.......”
흐느끼는 암페어를 앞에 두고 가만히 있기 머쓱했다. 애써 말을 꺼냈다.
“저, 그런데 그럼 유성의 민족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 붕괴 사고 이후로.”
“어,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다시 찾아갔을 땐 이미 전부 동굴을 떠났는지 아무도 남아 있질 않아서 말이다.”
확실히, 한번 무너졌던 동굴에서 살기는 위험한 일이다. 어라? 처음 만났을 때 치아나가 분명 자기는 유성의 폭포에서 왔다지 않았었나? 으음.......
“그런데, 그런 사정은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네? 그게 무슨?”
“체육관으로 들어오는 길에 봤다네. 자네랑 있던 그 아가씨, 유성의 민족 사람이지? 그 독특한 복장,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지.”
“아, 그 아가씨라면.”
암페어에게 지금까지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버섯포자라. 그러고 보니 나도 아직 예방주사를 맞지 않았었지. 하.......”
암페어는 평소처럼 호쾌하게 웃지 못했다.
“치아나라. 그래, 그 아이였나....... 얄궂은 인연이군, 그래.”
“응? 치아나씨가 왜요?”
내 말에 암페어는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정말 몰랐나? 아까 이야기에서 새롭게 유성의 민족의 족장이 된 아이, 그 아이의 이름이 분명히........”
***
“아, 그 솔방울? 이란 사람에 대해서 물어볼 걸 그랬네.”
이제 와서 돌아가기도 뭐하고. 나중에 다시 물어봐야겠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뭐하세요? 어서 안 오고.”
앞서가던 치아나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갈게요. 잠시만요.”
가볍게 뛰며 치아나를 따라 센터로 향했다. 머릿속에는 암페어의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치아나. 자네 아버지가 구한 아이, 분명 치아나라는 이름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