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스터 유성의 7일 3화 여행의 시작
여행에 필요한 짐들은 대부분 체육관에서 준비할 수 있었다. 갈아입을 옷이라든가, 간단한 먹을거리, 비상 의료품 등. 그러고 보니 치아나는 딱히 들고 다니는 게 없었다. 혹시 모르니 내 것 말고도 몇 개 챙겨 두기로 했다.
“으으... 언제까지 전화만 하는 거죠? 바로 출발한대매요.”
“아직 어머니께 전화한 게 다예요. 안 받으시니 어쩔 수 없잖아요.”
그리고 지금은, 포켓몬 센터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있다.
우선 어머니에, 레쿠자나 유성의 민족에 대해 물어볼 털보 박사님, 그리고 내 관장 업무의 휴무 신청을 처리해 줄 아단님 이렇게 셋.
어머니는 계속 전화는 받지 않으셨다. 지금쯤 알로라 지방에서 관광하고 있을 테니 무리도 아니다. 빠른 포기 후 털보 박사님께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박사님은 바로 전화를 받으셨다.
“여보세요. 털보 박사입니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저 레인입니다.”
“오오, 레인군, 무슨 일인가?”
“여쭤 볼 게 좀 있어서요. 혹시 유성의 민족이라는 부족에 대해 들어 보신 적 있으세요? 레쿠자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유성의 민족? 글쎄, 나는 들어 본 적 없구나. 그러고 보니 유성의 폭포라는 지형이 있긴 했었지. 그 이상은 잘....... 혹시 레쿠쟈에 대한 정보를 얻은 게냐?”
“유성의 민족은 대대로 레쿠쟈에 대한 전승을 전해 온 일족이라네요. 잠깐 체육관을 비우고 현장조사 겸 해서 다녀오려고요.”
“그러냐? 얘기만 들으면 뭔가 수상한데. 위험한 일일 가능성은 없고?”
예나와 같은 말을 하셨다.
실력 좋은 트레이너가 필요하다는 건 적당한 구실이고 실상은 그 트레이너의 강한 포켓몬들을 납치하려는 속셈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도 제법 있는 범죄기도 하고.
“왜요?”
라는 생각까지 했다가 옆에 치아나를 보고 관뒀다. 복장이야 그렇다 쳐도 포자 중독에 걸릴 정도로 도시와는 멀리 떨어진 사람이다. 조금 수상한 점이 있긴 하지만, 그런 속셈을 꾸몄다고 보긴 어렵다. 그리고
“설마 그렇다고 해도, 저랑 제 포켓몬들이 누구에게 당하고 그러진 않아요.”
“하긴 자네라면야. 현장조사라니, 뭐, 나야 대찬성이지만. 자고로 조사란 필드워크가 기본! 직접 발로 뛰어야 하는 거니까.
아무튼 체육관을 비운다니, 그럼 아단에게 연락해야 되는 거지? 그건 내가 해 두마.”
“아, 제가 연락드리려 했는데.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이 정도야 뭘. 으음,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내일 해야겠구먼. 아아, 그래. 그 대신이라 하긴 뭐하지만, 나중에 여행 얘기를 좀 들려줬으면 좋겠구나. 개인적으로도 흥미가 있고. 우리 애에게 들려 줄 얘기도 이제 다 써먹었거든.”
“아아, 이제 곧 이었죠. 박사님 자녀분이 여행을 떠나는 게.”
“그렇다니까. 세월 참 빠르지. 아무튼 잘 다녀 오거라.
아참, 체육관을 너무 오래 비워 두진 말거라. 자네는 자칫하면 협회에서 또 경고가 올 지도 모르고, 최악의 경우 관장직에서 해임될 수도 있으니.”
이번에도 예나와 같은 말이었다.
“내가 종종 얘기하지? 내 대학 동기 종길. 그 친구는 만날 때마다 관장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다니까? 관장되기가 그렇게 힘든 거야.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라. 괜히 사고치지 말고.”
“네, 네 알겠습니다. 잘 다녀올게요.”
그 후 몇 마디 더 나누다 전화를 끊었다.
“다 끝났나요? 다 끝난 거죠? 다 끝났다고 해줘요~”
“원래는 한 분 더 있었는데, 안 해도 되겠네요. 바로 출발합시다. 유성의 폭포로 가면 되죠?”
갑자기 치아나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바로! 바로 날아가는 거죠? 저 책에서 읽었어요! 공중날기라 하는 비전인 거죠? 비장의 기술인거죠? 날개 달린 포켓몬을 타고 슝 날아서 곧바로 도착하는 그거죠?
꼭 한 번 해 보고 싶은 거였거든요. 관장급 트레이너들은 다 할 수 있다고 책에서 봤거든요.
으으, 저도 오는 길에 테일러를 잡아볼까도 생각했다니까요? 그래도 잡아서 스왈로까지 제대로 키울 자신이 없어서 포기했는데, 이렇게 빨리 기회가 오네요!
사실, 여기서만 말하는 건데 원규님께 부탁했을 때, 솔직히 거절당해서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바위 타입은 대부분 날 수 없잖아요!
레인님은 풀 타입 트레이너니까, 아! 트로피우스라는 포켓몬이 있었죠? 갖고 계신거죠? 그렇죠?”
“잠깐, 잠깐. 말이 너무 빨라요. 좀 진정해요.”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나. 갑자기 피곤해진다.
“트로피우스라면 가지고 있습니다. 공중날기도 일단 배우고는 있고.”
누가 봐도 기쁜 듯이 치아나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공중날기는 못 해요.”
“왜요? 어째서요? 배웠다면서요? 혹시 두 사람 이상은 타면 안 되는 건가요?”
그런 규정이 있었나? 그러고 보니 왠지 두 사람이 포켓몬을 탄 건 본 적이 없다. 파도타기도 그렇고.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게... 제가 면허가 없거든요.”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 치아나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호연에서 공중날기를 포켓몬 배틀 외에서 쓰려면 비행 타입 전문가인 은송님께 이겨서 허가를 받아야 해요. 검방울체육관에서 발급하는 배지가 그 허가증이죠.”
그럼 이기면 되지 않느냐는 표정을 짓는 치아나에게 확실히 말했다.
“근데 못 이기겠더라구요.”
은송은 못 이긴다. 포켓몬 타입도 그렇고. 인간 타입도 그렇고. 뭐랄까, 상대하기 껄끄러운 사람이다.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관장끼리니까 서로 봐주고 그러면 안 돼요?”
“그게 안 되는 사람이라서요. ‘저희는 관장으로서 다른 트레이너들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라나.”
“그... 그러면? 공중날기를 못 쓰면 폭포까지 어떻게 가요?”
“걸어가야죠. 배 정도는 탈 수 있겠네요.”
무안해진 나는 한 마디 더 했다.
“아, 파도타기라면 할 수 있어요. 파도타기 면허증은 제 배지거든요.”
안 탈 생각이지만. 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파도타기? 물 위를 슥슥 헤쳐 나가는 비전? 그거도 꼭 해 보고 싶었는데! 야호! 바다 위를 건너다니, 그것도 포켓몬을 타고! 정말 대단해요!
언제 타러 가나요? 혹시 저 해변가에서 출발해 지금 바로? 우후후, 기대되네요.”
“그럼 다행이네요. 먹으면 이번에야말로 출발하도록 하죠. 갈 길이 꽤 머니까.”
“갈 길이 멀다뇨?”
“폭포 쪽에서 내려왔으면 산을 타서 내려온 거 아닌가요? 그 산, 내려가려면 어찌어찌 가는데 올라가는 건 고역이거든요. 거의 절벽이니까. 돌아가는 게 나아요. 내려오는 것도 마냥 쉽진 않았을 텐데, 어떻게 내려오신 거에요?”
“아, 그게....... 내려왔달까, 거의 굴러 떨어졌어요.”
“애도 아니고.”
“하하. 확실히 도로 올라가는 건 힘들겠네요.”
“어라? 그럼 치아나씨는 어떻게 가려고 했어요?”
“저는 관장님이시면 누구든 공중날기를 할 수 있는 건 줄 알았죠.......”
치아나는 살짝 볼을 부풀렸다. 또 죄인이 된 기분이다.
“그래서? 어떻게 가나요? 파도타기면 바닷길이죠?”
“그건.”
포켓몬 센터에는 보통 지도가 있다. 센터에 온 건 연락 목적도 있지만, 한 번 여정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럴 때 필요한 포켓내비가 보이질 않아서 이 고생이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지도를 찾았다. 그때 손에 이질적인 감촉이 느껴졌다. 손바닥 정도 크기의 딱딱한 게 만져졌다. 포켓 내비다. 집에 두고 온 줄 알았는데 코트 안주머니에 있었나.
이게 있으면 따로 지도는 필요 없다. 전화하러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었는데. 괜히 포켓몬 센터까지 왔다. 손해 본 느낌이다.
“지도를 보면서 설명하는 게 편하겠죠?”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주머니에서 포켓 내비를 꺼내면서 말했다.
“그... 그건?!”
치아나는 갑자기 겁먹은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문명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을 테니 처음 보는 게 많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왠지 애 보는 것 같다.
“아, 이건 데봉 코퍼레이션에서 만든 휴대용 기기인데, 포켓 내비라고 해요. 전화도 되고, 지도를 볼 수도 있거든요.”
“호... 혹시 누르면 벽이 무너진다든가, 땅이 갈라진다든가 하는 건 아니죠?”
“그렇게 위험한 물건은 안 들고 다녀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 이걸 이렇게 하면”
경계하는 치아나를 옆에 두고 맵 내비를 켰다. 화면에 호연 지방 지도가 떠올랐다. 치아나는 호기심 많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아! 이거 포켓 삐삐같은 거였어요? 저도 옛날엔 있었는데~. 왠지 그립네요.”
“포켓 삐삐라니, 10년도 더 전에 단종된 건데.”
게임기를 처음 본 아이마냥 치아나는 포켓내비에 떠오른 화면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나도 치아나를 따라 포켓내비의 화면을 보며 지도에서 반짝이는 점을 가리켰다.
“지금 있는 곳이 여기 등화도시입니다. 유성의 폭포는 이쪽이고. 바로 올라갈 수 없으니, 빙 돌아가야 해요. 여기서 남쪽 수로를 따라 쭉 돌아간 뒤, 잿빛도시와 보라시티를 거쳐서 올라가서, 단풍마을을 지나 폭포에 도착. 이네요.”
“이 정도면 절벽을 기어 올라가는 편이 더 낫겠는데요?”
“보이는 건 멀지만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아무리 길어야 사흘? 혼자서 최대한 서두르면 하루 만에도 갈 수 있죠. 둘이서 가는 거고, 벌써 이른 저녁이 지났으니까.......”
어림짐작으로 거리를 계산해 본다.
“아마 오늘은 잿빛도시까지 갈 수 있을 겁니다. 혹시 너무 오래 걸리나요? 분명 기한은 7일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으음, 사흘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괜찮을 것 같아요. 아! 그럼 혹시?”
치아나는 지도에서 호연지방 남쪽 105번에서 109번까지의 수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 파도타기를 하는 거군요! 그렇죠?”
기대에 찬 치아나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아뇨. 거긴 배 타고 갈 거예요.”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치아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배?”
“네, 배.”
“파도타기가 아니라?”
“파도타기가 아니라. 배.”
“아까, 파도타기로 간다고 했었잖아요.”
“파도타기로 간다고는 안 했어요. 할 수 있다고만 했지.”
속았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치아나를 앞에 두고 계속 말했다.
“파도타기로 못 갈 건 없지만, 제가 가진 물 타입 포켓몬은 로파파 뿐이거든요.
파도타기를 하면 로파파 머리를 타고 바다를 건널 텐데, 탑승감이 그렇게 좋진 않아요. 아니, 많이 나빠요. 둘이 타면 더 그렇고. 애초에 배라는 좋은 탈것이 있는데 굳이 포켓몬을 타고 갈 이유는 없죠. 멀미할걸요.”
치아나는 순간 실망한 표정을 짓다 이내 웃으며 말했다.
“근데 배가 있어요?”
“104번 도로에 하기 라는 어르신이 계신데, 그 분 배를 빌릴 거예요.”
“만약 그 분이 안 계시면요?”
“지금 시간이라면 집에서 보통 갈모매 피코랑 놀고 계실 거니까 괜찮아요.”
“그러니까 만약에요.”
이상하게 집요한 치아나였다.
“뭐, 시간이 남아도는 건 아니니까, 그땐 별 수 없이 파도타기를 쓰겠지만. 그럴 일은-”
“그래요? 그러면 됐어요. 그럼 출발하죠!”
***
“와! 큰일 났어요! 정말 안 계시는데요?”
이상하다. 분명 배는 있는데, 하기 영감님이 안 계신다. 연락할 수단도 달리 없는데.
“아아, 벌써 저녁인데. 이대로 안 돌아오시면 어떡하죠? 저희 바쁘다고요?”
치아나는 말하는 거랑 달리 즐거워보였다.
“아! 좋은 방법이 있었죠? 탑승감이 안 좋다곤 해도, 배를 탈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네요, 그렇죠?”
“......그건 그렇네요.”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무언가 기묘한 아가씨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것 같은.......
“후,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하지만 배를 탈 수 없는 건 사실이다.
“어쩔 수 없으니까. 비장의 수단을 써야겠네요! 말 그대로 비전을!”
어쩔 수 없다면서 정작 얼굴은 해냈다는 표정을 짓는 치아나였다. 무슨 말이 나올 지는 대강 짐작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