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날 저녁
코고로는
신이치의 사촌형과 코난이 보는 앞에서
자위대 CQ-11 (특수전 교리 개발단) 시절 당시에 알고 지냈던,
옛 부하에게
비밀리에 코난의 메시지를
영국 대사관과
러시아 대사관,
그리고
NATO 극동담당 사무소 분실에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고,
그 뒤에
잠시 동안
더 코난과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에
조용히 탐정 사무소를 나가는
그 둘을 배웅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도
조용히 탐정 사무소를 나서고
곧 근처의 한 성당이
눈에 들어오자
말없이 성당에 들어가더니
뭐라 말을 할 수 없는 기분으로
성당의 고해실에 앉았다.
그리고,
곧 고해실 안쪽의 문이 열리더니
"주님의 은총이 당신과 함께 있으니
당신의 죄를 고백하십시오."
라는
신부의 목소리가 들리자,
코고로는
조용한 목소리로,
"용서하십시오, 신부님.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말을 하고 난 뒤
자기 자신도
우습다는 둣한 웃음을 흘리더니,
"오, 하나님 맙소사.
고해성사를 드리지 못한지 25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신부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턱을 만지작거릴 뿐이었고,
코고로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저는 제가 아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제부터 살인을 하려 합니다.
정의로운 살인이 존재하는지는 몰라도
누구도 할 수 없고
해서는 안되고
할 수 없는 일이고
그 일은 오로지 저말고는 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 말에
신부는
"........혹시 주님께 용서를 비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 말에
코고로는
고개를 떨어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곧
떨리는 목소리로,
"주님에게 용서를 비는 것은
저의 일을 끝내고 난 뒤에
다시 찾아뵙고 하려고 합니다.
이 일은
이 세상의 파멸을 막기 위한 최후의 방위책이니까요."
그 말에
신부는
코고로를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지켜보면서
도대체 무슨 죄를 지려고 하기에
저렇게 고뇌에 가득한 얼굴을 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 아이가
그 검은 조직
그리고
그 검은 조직을 조종하는 초거대 조직인
스펙터와 싸우기 위한 전쟁을 하기 위해서 행한
모든 일은
나의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첩보전이었다.
그 인간의 영혼조차 얼어붙을 것 같은
냉혹하고 차가운 전쟁을 치루는
코난 아니
신이치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진정한 신과 악마의 게임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면서
동시에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공포와 스릴,
그리고
흥분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단다.
그러면서
깨달은 사실은
이 세상에는 전대로 건드려서는 안되는 존재가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런 존재와 함께 일을 했다는 사실에
희열감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 훗날 모리 란과 키사키 에리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모리 코고로-
그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오자면
코난과 그의 사촌형이
다시 모리 탐정사무소로 돌아가는 것과
거의 동시에
탐정 사무소 안에 있던 코고로 또한
그 때
코난과 자신과의 만남 이후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
특히
즉응예비자위관 신분에서
다시 현역으로 돌아간 것도 모자라서
키리토의 인피니티 워가 진행되는 동안
팔자에 없는 경호 업무를 맡은 것도 모자라서
그 자신의 후배라고 할 수 있는
키쿠오카 세이지로와
아키 나츠키 두 사람의 무례한 행동들을
그 때
오션 터틀과
방위성 청사에서
각각의 얼굴에 권총을 들이댄 것 말고도
어떤 식으로 골탕을 먹여주면서
동시에
따끔하게 혼을 내 줄까 하는
사소한 걱정거리까지
머리 속을 휘저으면서
창문 밖을 보면서
말없이 맥주만을 홀짝일 뿐이었다........
빌더버그 위원회 ( 빌더버그 클럽 )
Bilderberg Club
지구의 미래를 결정하는 전세계 엘리트 그룹의 비밀 회의.
1. 개요[편집]
빌더버그 그룹(The Bilderberg Group), 빌더버그 컨퍼런스(Bilderberg conference), 빌더버그 소사이어티(Bilderberg Society)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처음 열린 네덜란드 현지 발음대로 빌데르베르흐로도 발음한다.
주로 유럽과 미국의 왕실관계자, 귀족, 국제 금융계 인사, 국가수반, 정치가 등의 거물들이 1년에 한두번 고급 호텔을 전세내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정치, 경제나 환경 문제같은 다양한 국제문제를 논의한다.
멤버로는 데이비드 록펠러, 헨리 키신저, 조지 소로스, 벤 버냉키, 빌 게이츠 등 내로라하는 유명인사들이 즐비하며 대부분이 UN, 왕립국제문제연구소, 외교 관계 협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 삼각 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 등의 멤버이기도 하다.
제1차회의는 조지프 레팅거(Joseph Retinger)[1]의 아이디어와 베른하르트[2] 네덜란드 대공의 주도로 1954년 네덜란드 빌더버그 호텔에서 개최되었다. 매번 120명[3] 정도가 참석하는데 거의 전부가 유럽인과 미국인이다. 이스라엘과 중동의 일부 인사만 참석했으나 2011년 회의에는 중국도 참가한것으로 보인다.?관련기사.
참석자의 약 3분의 2가 다국적 기업, 다국적 금융관계자, 국제 미디어관계자이고 3분의 1이 각국의 정치가들이라고 한다. 매년 미국에서 30명, 유럽 각국에서 80명, 국제기관 등에서 10명 정도가 참석한다고 한다.
참석자의 약 3분의 2가 다국적 기업, 다국적 금융관계자, 국제 미디어관계자이고 3분의 1이 각국의 정치가들이라고 한다. 매년 미국에서 30명, 유럽 각국에서 80명, 국제기관 등에서 10명 정도가 참석한다고 한다.
유명인사들이 무더기로 모이는 것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는 이 회의를 전혀 보도하지 않았으며, 회의장소에 출입하는 것도 원천봉쇄되어 있었다.
1970년경 부터 서서히 존재가 일반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회의의 내용은 여전히 비공개를 유지하지만 참석자나 의제는 언론들이 공개하고 있다.
폴 헬리어 캐나다 전 국방장관에 의해 외계인과 함께 언급된 적이 있다.
1970년경 부터 서서히 존재가 일반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회의의 내용은 여전히 비공개를 유지하지만 참석자나 의제는 언론들이 공개하고 있다.
폴 헬리어 캐나다 전 국방장관에 의해 외계인과 함께 언급된 적이 있다.
2. 세계정복의 음모를 꾸미는 비밀그룹인가?[편집]
빌더버그를 단순히 기업가들의 국제음모단으로 보는 시각도 있고 자유무역을 통해 경제적 장벽을 무너뜨려 하나의 세계를 만들려는 뉴 월드 오더의 일환으로 보는 음모론도 있다.
다음은 빌더버그 클럽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
1991년 빌더버그 회의에 참석한 빌 클린턴은 아칸소 주지사에 지나지 않았으나 2년뒤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르윈스키 스캔들의 핵심인물인 버넌 조던(Vernon Jordan)은 빌더버크 클럽 운영위원회 위원이라고 한다. 그의 영향력 덕분에 클린턴이 대통령에 오를수 있었다고 한다.
인용문의 주지사 云云에 대해 말하자면, 주지사 출신 미국 대통령은 클린턴 이전에도 로널드 레이건, 지미 카터 등이 있었다. 주지사에서 대통령이 된것이 빌더버그 때문이라 보기는 힘들다. 아마 대통령 당선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초청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리고 원래 지방자치제도가 극도로 발달한 미국의 경우는 대통령이 되려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주지사로서 두각을 보여야만 한다.
위의 관점과는 달리 빌더버그 회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다음의 세계대전을 막아보자는 취지와 대서양관계의 재구축을 위해 시작된 모임일뿐이며 기업가들이 많이 참가하고 또 철저한 보안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각국 정부에 기업가들이 경제정책을 알리기전에 사전 조율을 하는 단순한 모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아니면 정경유착?
회의 참가자들도 이를 부정한다. 한 멤버는 뉴미디어,전자통신업계의 거물들이 죄다 빠졌는데 무슨 뉴 월드 오더냐고 코웃음친다.[4] 차리리 오프라 윈프리가 더 영향력이 높을 것이라고 말하는 멤버도 있다.[5]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힘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음모론적인 시각인데, 그렇게 돈많고 힘있는 사람들이 굳이 골치아프게 뭐하러 그런 일을 하냐는 회의론적인 시각도 있다.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힘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음모론적인 시각인데, 그렇게 돈많고 힘있는 사람들이 굳이 골치아프게 뭐하러 그런 일을 하냐는 회의론적인 시각도 있다.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3. 개최지[편집]
1954년 5월29~31일 : 네덜란드 오스테르베이크(Oosterbeek) 빌데르베르크 호텔.
1955년 3월18~20일 : 프랑스 바르비종(Barbizon).
1955년 9월23~25일 : 서독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Garmisch Partenkirchen).
1956년 5월11~13일 : 덴마크.
1957년 2월15~17일 : 미국 조지아 주 세인트사이먼스아일랜드(St. Simons Island).
1957년 10월4~6일 : 이탈리아 라치오(Lazio) 주 피우치(Fiuggi).
1958년 9월13~15일 : 영국 더비셔(Derbyshire) 주 벅스턴(Buxton).
1959년 9월18~20일 : 터키 이스탄불.
1960년 5월28~29일 : 스위스 니트발덴(Nidwalden) 주 뷔르겐슈토크(Burgenstock) 팰리스(palace) 호텔.
1961년 4월21~23일 : 캐나다 퀘벡 주.
1962년 5월18~20일 : 스웨덴 살트셰바덴(Saltsjobaden).
1963년 5월29~31일 : 프랑스 칸.
1964년 3월20~22일 : 미국 버지니아 주 윌리엄즈버그(Williamsburg).
1965년 4월2~4일 :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주 케르노비오(Cernobbio).
1966년 3월25~27일 : 서독 비스바덴(Wiesbaden).
1967년 3월31~4월2일 : 영국 케임브리지(Cambridge).
1968년 4월26~28일 : 캐나다 퀘벡 주 몽트랑블랑(Mont Tremblant).
1969년 5월9~11일 : 덴마크 헬싱괴르.
1970년 4월17~19일 : 스위스.
1971년 4월23~25일 : 미국 버몬트 주 우드스탁(WoodStock).
1972년 4월21~23일 : 벨기에 크노케(Knokke).
1973년 5월11~13일 : 스웨덴.
1974년 4월19~21일 : 프랑스 오트사부아(Haute-Savoie) 주 므제브(Megeve).
1975년 4월22~24일 : 터키 이즈미르(Izmir).
1976년 : 록히드 사건으로 취소.
1977년 4월22~24일 : 영국 데번(Devon) 주 토키(Torquay).
1978년 4월21~23일 :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Princeton).
1979년 4월27~29일 : 오스트리아 바덴(Baden bei Wien).
1980년 4월18~20일 : 서독 아헨(Aachen).
1981년 5월15~17일 : 스위스 니트발덴(Nidwalden) 주 뷔르겐슈토크(Burgenstock) 팰리스(palace) 호텔.
1982년 5월14~16일 : 노르웨이 베스트폴(Vestfold) 산데피요르드(Sandefjord).
1983년 5월13~15일 : 캐나다 퀘벡 주 몬테벨로(Montebello).
1984년 5월11~13일 : 스웨덴 살트셰바덴(Saltsjobaden).
1985년 5월10~12일 : 미국 뉴욕.
1986년 4월25~27일 : 영국 스코틀랜드 글렌니글스(Gleneagles).
1987년 4월24~26일 :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주 케르노비오(Cernobbio).
1988년 6월3~5일 : 오스트리아.
1989년 5월12~14일 : 스페인.
1990년 5월11~13일 : 미국 뉴욕 글렌코브(Glen Cove).
1991년 6월6~9일 : 독일 바덴바덴(Baden Baden).
1992년 5월21~24일 : 프랑스 에비앙레벵(Evian-les-Bains).
1993년 4월22~25일 : 그리스 블랴그메니(Vouliagmeni).
1994년 6월2~5일 : 핀란드 헬싱키.
1995년 6월8~11일 : 스위스 니트발덴(Nidwalden) 주 뷔르겐슈토크(Burgenstock) 팰리스(palace) 호텔.
1996년 5월30~6월2일 : 캐나다 온타리오 주 킹시티(King City).
1997년 6월12~15일 : 미국 조지아 주 레이크레이니어(Lake Lanier).
1998년 5월14~17일 : 영국 스코틀랜드 턴베리(Turnberry).
1999년 6월3~6일 : 포르투갈 신트라(Sintra).
2000년 6월1~4일 : 벨기에 브뤼셀 교외.
2001년 5월24~27일 : 스웨덴.
2002년 5월30~6월2일 : 미국 버지니아 주 챈틸리(Chantilly).
2003년 5월15~18일 : 프랑스 베르사유.
2004년 6월3~6일 :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주 스트레자 (Stresa).
2005년 5월5~8일 : 독일 로타흐에게른(Rottach-Egern).
2006년 6월8~11일 : 캐나다 오타와 교외 브룩스트리트(Brookstreet) 호텔.
2007년 5월31일~6월3일 : 터키 이스탄불 리츠칼턴(Ritz Carlton) 호텔.
2008년 6월5~8일 : 미국 워싱턴 D.C. 매리어트(Marriott) 호텔.
2009년 5월14~16일 : 그리스 아테네.
2010년 6월3~7일 : 스페인 시체스(Sitges).
2011년 6월9~12일 : 스위스 생모리츠(St. Moritz) 슈브레타(Suvretta) 호텔.
2012년 5월31~6월3일 : 미국 버지니아 주 챈틸리 매리어트 호텔.
2013년 6월8~9일 : 영국 하트퍼드셔 주 더 그로브 호텔.
2014년 5월29일~6월1일 : 덴마크 코펜하겐 메리어트 호텔.
2016년 6월9~12일 : 독일 드레스덴
열리는 국가들을 보면 대부분 그 영역에서 돈좀 많거나 힘좀 쓴다는 나라들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대체로 서유럽이고 아시아에서는 선진국이라는 일본이나 싱가포르에서도 단 한차례도 안 열렸다.
[1] 폴란드 난민 출신으로 2차대전 후 유럽통합을 주장하며 1948년 헤이그에서 유럽회의(Council of Europe)를 발족시켰다. 이를 계기로 세계 문제를 논의하는 비밀회의를 열자는 그의 제안이 주목받게 된다.
[2] 네덜란드 베아트릭스(Beatrix Wilhelmina Armgard) 여왕의 아버지. 나치 SS대원이었던 전력이 있다.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정보인데, 베른하르트 대공은 독일 귀족 출신으로, 네덜란드 율리아나 여왕에게 장가들기 전에 잠시 나치에 가입했지만 곧 탈퇴하고, 2차대전 중에는 오히려 자유 네덜란드군을 이끌면서 나치에 대항했다.
[3] 상황에 따라 늘거나 줄기도 한다. 대체로 100~150명 사이로 볼 수 있다.
[4] David Rothkopf, 《슈퍼클래스》, 이현주 역, 더난, 2008, p. 440
[5] 같은 책 p. 442
아돌프 히틀러의 유일한 사랑 겔리 라우발 ( 앙겔라 라우발 )
겔리 라우발은 1908년 6월 4일 린츠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안젤라 라우발은 아돌프 히틀러의 배다른 누나이다. 과부로 살던 안젤라는 히틀러가 오버잘츠베르크(Obersalzberg)에 셋집을 얻은 후 자신의 집에 와 집안일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자 1928년 딸과 함께 히틀러의 집으로 이주했다.
40살이 된 히틀러는 조카 겔리에게 매혹되었으며 그가 어린 조카와 연인관계라는 소문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히틀러는 겔리에게 극도의 집착을 보였고 역시 겔리에게 관심을 보인 운전사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해고되었다.
두 사람은 2년동안 함께 살았다. 겔리와의 관계는 위태로운 것이었고 두 사람은 서로를 상대에게 충실하지 못하다며 비난하고 다투었다. 겔리는 특히나 에바 브라운에게 신경을 썼는데 당시 17살이던 에바 브라운은 종종 히틀러와 함께 벤츠에 동승하곤 했다.
겔리는 또한 히틀러가 그녀의 삶을 통제하려 한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1931년 9월 8일, 히틀러는 비엔나에 가고 싶어하는 겔리와 격심한 말다툼을 벌인 후 함부르크로 떠났다. 그는 차에 타기 전 겔리에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말하지. 안돼!” 히틀러가 떠난 후 겔리는 리볼버 권총으로 심장을 쏘아 자살했다.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자신도 자살하겠다며 슬퍼했으나 나찌당 고위 멤버들의 설득으로 그만두었다. 겔리의 자살은 히틀러를 채식주의자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고기를 볼 때마다 겔리의 시신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겔리의 사망과 관련한 소문은 히틀러의 정적들에게 재빠르게 퍼져나갔다. 겔리가 자살하기 전에 그녀가 히틀러로부터 심한 구타를 당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겔리가 히틀러의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에 자살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어떤 사람들은 겔리가 히틀러를 상대로 협박을 하려했기 때문에 하인리히 히믈러에게 살해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소문들은 입증할 만한 증거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겔리가 자살한 이유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 히틀러의 조카 패트릭 히틀러의 겔리에 대한 회상(오버잘츠베르크에서 만났을 때)
겔리는 소녀라기보다는 아이처럼 보였습니다. 솔직히 예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타고난 매력을 듬뿍 가지고 있었죠. 겔리는 모자는 쓰지 않았고 주름진 치마와 하얀 블라우스처럼 아주 평범한 옷을 입었습니다. 아돌프 아저씨가 준 순금 나치스 표장 외에는 보석도 걸치지 않았죠.
▶ 겔리가 운전사 에밀 모리스에게 보낸 편지(1928년 12월 24일)
집배원이 당신의 편지를 벌써 세 통이나 갖다주었어요. 하지만 전 지난 며칠 동안은 예전처럼 행복을 느끼지 못했답니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가 지난 며칠간 그렇게 나쁜 일들을 겪었나 봐요. 아돌프 아저씨는 우리가 2년 동안은 기다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생각해 보세요, 에밀. 2년동안 가끔씩 서로 키스만 할 수 있고 언제나 아돌프 아저씨의 간섭을 받아야 하다니. 전 이렇게 당신께 저의 사랑을 전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과 함께 할 거라는 말을 전할 수 밖에 없군요. 당신을 너무나 사랑해요. 아돌프 아저씨는 저에게 공부를 계속해야만 한다고 하시는군요.
▶ 히틀러가 친구 하인리히 호프만에게 한 말(1955년 책에서 발췌)
자네도 알겠지만 호프만, 난 겔리의 장래가 매우 걱정되고 그녀를 돌보아야 한다고 느끼고 있네. 난 겔리를 사랑하고 그녀와 결혼할 수도 있어. 좋아! 하지만 자네도 내 입장을 알 걸세. 난 독신으로 남고 싶네. 그래서 난 겔리가 적당한 남자를 찾을 때까지는 그녀 주위에 적절한 친구들만 모이도록 조종할 생각일세. 겔리는 간섭으로 느끼겠지만 사실 그건 신중함이지. 나는 겔리가 부적당한 남자들의 손에 떨어지도록 놓아두지는 않을 걸세.
▶ 히틀러와 겔리의 아파트 경호를 맡은 나치돌격대 장교 빌헬름 스톡커의 인터뷰(1974)
히틀러가 정치 집회나 당내 모임 때문에 베를린이나 다른 지역으로 며칠간 떠나있는 경우, 겔리는 다른 남자들과 어울리곤 했습니다. 나 역시 그녀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녀가 그런 날 밤에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죠. 겔리가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나 인스부르크(Innsbruck) 출신의 스키 강사와 어울렸다는 걸 히틀러가 알았다면 아마 불같이 화를 냈을 겁니다. 겔리는 제가 히틀러에게 말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하게 되자(저에게는 히틀러에게 보고하지 않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종종 저에게 비밀스런 이야기를 털어놓곤 했습니다. 그녀는 히틀러가 가끔씩 그녀의 방에 찾아와 그녀에게 메스꺼운 일들을 하게 시킨다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럼 어째서 히틀러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죠. 자신은 히틀러의 요구를 무엇이든 들어줄 여자에게 히틀러를 빼앗기고 싶지는 않다고. 그녀는 관심이 필요한 여자였고 종종 관심을 끌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분명히 히틀러의 가장 가까운 여자로 남고 싶어했죠. 그녀는 그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려 했습니다. 1931년 초엽, 겔리는 히틀러의 삶에 새로운 여자가 나타난 것 같다며 걱정하기 시작했죠. 그녀는 히틀러 아저씨가 더 이상 예전처럼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습니다.
▶ 알란 불록의 책 “Hitler: A Study in Tyranny” 중 일부(1954)
겔리 라우발은 단순하고 매력적인 여성이었으며, 예쁜 목소리를 지녔던 탓에 성악을 공부하고 싶어했다. 그 후 4년동안 그녀는 히틀러의 동반자가 되었으며, 히틀러가 프린츠레겐텐플라츠(Prinzregentenplatz)에 아파트를 얻은 후에는 오버잘츠베르크에서 그랬듯이 히틀러와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뮌헨에서 보냈다. 히틀러는 후일 이 시기를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회상했다. 그는 겔리에게 심취했으며 자신보다 20살 연하인 이 여인을 어디든 데리고 다녔다. 한마디로, 그는 겔리를 사랑했다.
겔리도 히틀러를 사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녀는 유명인사인 아저씨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히틀러와 함께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녀는 히틀러의 극심한 질투심으로 괴로와했다. 히틀러는 겔리에게 사생활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겔리가 성악공부를 위해 비엔나로 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겔리가 운전사인 에밀 모리스와 동침했다는 사실을 알고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했으며, 이후 그녀가 다른 남자와는 그 어떤 일도 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겔리는 분개했고 히틀러의 집착과 강제에 힘들어했다.
▶ 히틀러의 측근이던 에른스트 한프스탕겔의 책 “The Missing Years” 중 일부(1957)
겔리 라우발의 죽음이 히틀러의 성격 변화에 전환점이 되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 형태였건, 그것은 잔혹함과 흉포함을 탈출구로 삼던 히틀러의 신경질적인 에너지를 쉬게 만들 휴식의 기회를 히틀러에게 생애 최초로 제공해 주었다. 히틀러가 에바 브라운과 가졌던 오랜 관계는 결코 히틀러가 겔리와 즐겼던 기괴한 여흥은 낳지 못했으며 따라서 어쩌면 그를 보통 남자로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겔리의 죽음과 함께 그의 성생활이 다시금 양성적이고 나르시소스적인 허영심 속에 타락하고 에바 브라운이 가정내 부속물 그 이상의 의미는 지니지 못하게 되면서, 히틀러가 마침내 악마로 변하고 말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 되었다.
이렇게 히틀러가 유일하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사랑한 여인이 겔리 라우발이라는
역사학자들의 증언에 따라서
어쩌면 그녀가 자살하기 전에 히틀러의 아이를 낳았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아직까지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한 증거로서 역사학자들이 제시하는 심층적인 증거로는 독일 뮌휀에 있는 그녀의 무덤이
그 당시 독일의 나치당원들에 의해 1941년에 훼손되고
아직까지 그녀의 무덤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나 발굴작업이 허가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확실한 점은 그녀가 자살한 뒤 히틀러는 평생 죽을 때까지 고기를 입에 대지 않고
오로지 채식만 즐겼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 이런 부분은 영화 ' 히틀러: 악의 탄생 ' 이라는 영화에 아주 잘 묘사되고 있다.
참고서적으로는 김태권 작가의 만화책 ' 히틀러의 성공시대 ' 에 잠깐 정도 묘사되기도 하니
참고하시면 좋을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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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리 코고로의 이런 모습도 신선하네요!!! 원작과 애니에서는 가끔 보여주는 그런 진지한 모습을 여기서는 제대로 보여주는 것 같군요!!! 앞으로 나올 글들도 몹시 기대가 되는데 좋은 글 부탁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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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리 코고로의 이런 모습도 신선하네요!!! 원작과 애니에서는 가끔 보여주는 그런 진지한 모습을 여기서는 제대로 보여주는 것 같군요!!! 앞으로 나올 글들도 몹시 기대가 되는데 좋은 글 부탁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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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사실 이번 코난 소설에서는 코난보다도 코고로의 멋진 모습을 많이 보여드릴 예정이니까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사실 원작과 애니를 보면 코고로는 능력면에서는 코난에 뒤지지 않는 그런 멋진 모습을 보여줄 때도 있지만 그런 모습을 란 말고는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극장판 14번째 표적, 수평선상의 음모) 그래서 제 소설에서는 그런 모습을 많이 보여드리는 겁니다. | 20.10.09 13:4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