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차 인간에게서 영혼을 빼앗아 가지 못했다.
미 연방에서도 희망을 버린 도시. 고담. 권력층은 부패하다 못해 고름을 흘리고 시민들의 눈물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그 중에서도 동양인 거주 지역은 한층 더 암울했다. 불법 밀입국자들로 가득해 복지 따위 꿈보다 더 부질없는 현실. 발버둥칠 수 있을 때까지 발악하며 어떻게든 삶을 움켜쥐려는 것이 이들의 운명이었다.
이런 곳에서 병원을 찾는 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때때로 공상을 넘어서지 않는가. 공장에서 일하다가 다친 사람, 다툼에 휘말려 칼이나 총을 맞거나 하는 건 거의 매일 일어났다.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동양인들이 상처를 움켜잡고 찾아가는 곳이 있었다. 절단된 자신의 손가락을 얼음에 재워 필사적으로 계단을 오르는 한 노동자. 가죽이 찢어진 소파 몇개가 이 병원의 대기실이었다. 노동자는 잘려진 손끝에서 파고드는 격통에 겨워 당장 수술실 문을 열려고 했다. 그때 뺨에 닿을 듯한 간격으로 매스가 날아와 꽂힌다. 철문을 꿰뚫은 매스를 보자 본능과 같은 공포가 다가왔다. 대기실의 환자들에게 응급조치를 하고 있던 중년의 남자. 그는 손가락 잘린 노동자에게 분명하게 말했다.
"절대로 수술실 문 열지 마."
대기실은 핏자국과 비명 소리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중년의 남자는 칼에 찔린 동양인의 상처를 앞에 두고 차가운 눈빛을 했다. 뱀이 독을 주입한 먹잇감을 휘어감는다, 그런 묘사가 어울리는 조용하고도 합리적인 움직임.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는 일련의 동작이 이루어 지는 동안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눈동자는 단 한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매스와 함께 던진 차가운 경고는 곧 사라졌다. 급한 환자들을 치료한 그는 바로 손가락 잘린 노동자를 수술실로 들여 보냈으니까.
허벅지에 총을 맞은 이를 막 치료한 의사가 있었다. 백 오십 센티 정도 되는 키와 체격은 누가 봐도 어린아이일 뿐. 녹색 수술복과 마스크는 가혹한 삶에서 우러나온 허무적인 표정을 감추고 있었다. 소년은 노동자를 보자마자 바로 봉합 수술에 들어간다. 고통에 굴복한 노동자는 소년에게서 정신적인 부담감이나 시술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 대기실에 있는 스승보다 더욱 깔끔하고 완벽한 손놀림. 봉합 수술은 인간의 살점을 다시 붙이는 것이라 하기엔 너무나 빨리 끝났다.
"초."
긴장이 풀려 실신한 노동자. 이름을 불린 의사 소년, 초는 스승의 부름에 시선을 두었다. 보기보다 더 마른 체격으로 입고 있는 수술복이 어색하리 만큼 컷다.
"한숨 눈을 붙여라. 벌써 21시간을 일했어. 나머진 내가 하마."
"알겠습니다."
마스크를 벗자 싸늘한 인상이 수술실에 가득한 피비린내 사이로 환각처럼 드러난다. 무리한 신체 활동에 익숙한 듯 다소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어딘지 강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피와 뼈. 비명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21시간을 버틴 이 소년은 이제 열네 살이었다. 초는 스승이 수술복을 입는 것을 확인한 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더 이상 수술을 계속했다간 체력에 심각한 손상을 입을 터. 사진도 티브이도 없는, 사막을 닮은 듯한 방에서 소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뿐이었다.
초가 의사로서 활동한 건 열 두살 때부터 였다. 자신을 인지하기 시작한 기억부터 부모의 존재를 모르는 아이. 몇몇 친척들 사이를 오가다 지금의 스승 라스에게 거두어 졌다. 선천적으로 모든 분야에 뛰어남을 보인 초는 무면허 의사인 라스와 함께 이 병원을 유지하고 있었다. 약 다섯 시간 동안 잠을 잔 초는 눈을 떴다. 예민한 청각으로 환자들이 모두 돌아갔음을 알고 그대로 침대 밖으로 나온다. 가장 흔하고 완벽한 근육 단련법 중 하나인 팔굽혀 펴기. 아주 천천히 턱을 지면에 붙였다가 다시 들어올리는 반복한다. 14세 소년이 가진 체지방 7%의 육체는 아름다움을 넘어 그로테스크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정확한 자세로 백번을 채우고 나서야 문을 나서는 초. 라스는 대기실 소파에 길게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탄퇴. 모든 동작을 다섯 번 반복해라."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초는 구십도 각도로 하체를 낮추었다. 중국 무술 중 기초에 해당하는 동작, 연계되는 주먹질, 발차기 동작은 면도칼이 연상되리 만큼 정확하고 예리했다, 심신에 있어 자신이 있는 방향을 알지 못할 땐 기초를 돌아봐야 한다. 이미 자기 자신과 주변 환경을 잔인하리 만치 잘 알고 있는 초. 어쩌면 이 소년에게 무술의 기본이란 유일한 즐거움일지도 몰랐다. 눈을 감고 있지만 숨소리만으로도 제자의 상태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라스였다. 가벼운 한숨을 내쉰 후 말을 잇는다.
"숨을 고르고 복싱 스탭으로 원투 2세트."
초에게 1세트는 천번을 의미했다. 모든 격투기의 시작은 발끝에서 비롯된다. 바닥이 움직인다는 착각이 들만큼 정확하고 완벽한 초의 스탭. 원투를 계속하는 동안 땀이 흘러나오지만 숨소리는 격해지지 않았다. 수술 자체가 체력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행위, 그런 고난에 익숙한 초에게 있어 무술은 결코 괴롭고 힘든 게 아니었다. "앞차기와 돌려차기 천번씩." 복싱 스탠스에서 태권도의 자세를 취하는 초의 몸놀림은 실로 유연하고 정확했다.
언제나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온몸이 피어 절 때까지 배를 가르고 톱질을 하며 매스를 대는 결과가 죽음으로 고착될 때, 14세 소년의 영혼엔 균열과도 같은 상흔이 새겨졌다. 그런 초에게 수련은 구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스는 초에게 무술을 전수하는 와중 단 한번도 칭찬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초가 처음으로 무규칙 대련에서 라스를 이긴 건 13살 때였다. 모든 무술 동작을 배우자 마자 그대로 재현하는 초에겐 반성과 절망을 거울삼아 발전하는 것 따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곧 피와 비명 소리로 얼룩질 조악한 병원 건물에서, 인체 파괴의 방정식인 무술 동작이 반복되는 것은 웃을 수 없는 농담같은 것일까.
고담시에서 손꼽히는 부호인 웨인가로 시선을 넓힌다. 현 가문의 당주인 토마스 웨인은 한 손으로 들기 버거운 가방에 온갖 수술도구와 의약품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그 옆에 서 있던 노신사 역시 외출할 채비를 갖춘다. 젊은 시절 용병으로 수없이 전쟁터를 오갔던 집사 알프레드. 어깨가 딱 벌어진 탄탄한 근육질의 체격은 60을 넘은 나이를 무색하게 했다. 방을 나서려던 토마스 웨인은 책상에 놓인 사진 중 하나를 잠깐 주시했다. 사별한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는 건 아주 짧은 순간. 코트를 여미며 알프레드와 함께 밖으로 나선다.
토마스가 오늘 찾아간 곳은 초의 병원이 있는 동양인 거주 지역이었다. 사비를 들여 고담 시민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온 이 부호는 직접 어려운 상황을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맥 풀린 눈으로 골목에 앉아 있던 동양인 청년. 이가 빠져있고 피부는 푸석했지만 아직 젊은 나이였다. 토마스는 주저하지 않고 청년에게 다가갔다. 청년은 저항하지 않고 자신의 상태를 살피는 토마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영양 주사를 한대 놓아준 토마스는 명함을 건내 준다. 깨끗한 종이에는 웨인 그룹 산하의 생산직 공장 주소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알프레드는에게서 당장 요기할 수 있는 칼로리 바를 받은 청년은 한입 베어물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기운을 차리면 명함에 적힌 곳으로 가도록 하세요."
그런 식으로 부랑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토마스 웨인. 짙게 젖어있는 어둠 사이로 등불을 띄우듯, 희망을 잃은 이들을 향한 이 부호의 선행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거리를 지날 수록 심신에 잔혹함이 깃든 이들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을까. 낯선 이방인에 대한 경계와 돈 몇푼이라도 뜯어내려는 불량배들이 보인다. 과연 알프레드와 동행하는 건 현명한 판단이었다. 누더기로 온몸에 새겨진 상처를 가리고 있던 한 아이에게 토마스가 붕대를 묶어 줄 때, 칼을 가진 두 명의 괴한이 다가온다. 백인남자를 찌르고 가방을 빼앗아 달아날 계획. 그 생각이 현실로 옮겨 지려는 순간 알프레드가 움직였다.
복부에 주먹이 꽂아 넣어진 괴한은 아무런 통증조차 느끼지 못했다. 일순간에 일어난 충격에 의식이 날아가 버려 실신했을 뿐. 남은 괴한이 반응할 틈도 없이 옷깃을 잡아 유도 기술로 던져버리자 실 끊어진 연처럼 정신을 잃는 것이었다. 어린아이 다루는 것보다 쉽게 괴한들을 쓰러뜨린 알프레드는 기절한 그들을 들어 길 한켠에 눕혀 놓았다. 토마스는 그 모습으 보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젊은이들이 점점 희망을 잃어가는군."
알프레드는 주인의 혼잣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가방을 고쳐 잡았을 뿐. 그 모습에서 짙은 위안을 느끼는 건 어째서일까. 토마스는 새로이 마음을 다지고 걸음을 시작했다. 헛된 꿈을 품고 이역만리 타국에서 절망의 요람에 안긴 동양인들. 세상을 잘 알고 있는 웨인가의 당주는 그들을 대하는 지금을 멈추지 않았다.
한 가정에 들어가 병상에 누운 노인의 맥을 짚어볼 때였다. 그 집의 딸이 팔에 꿰멘 자국이 있는 걸 확인한다. 동양인들이 마땅히 갈 병원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토마스는 그 상처에 대해 물어보았다.
"저 골목을 지나서 3층에 가면 병원이 있어요."
소녀의 대답은 토마스와 알프레드에게 약간의 고양감으로 전해진다. 넓은 지역에 퍼져있는 빈민가를 비정기적으로 오가기 때문에 거리의 속사정을 자세히 알기엔 무리가 있었으니까. 일단 우호적인 반응의 동양인 가정을 들른 후 마지막으로 초의 병원으로 향하는 두 사람이었다.
대기실에는 초와 라스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불어터진 중국식 국수에 기운을 내기 위함인지 제법 양이 되는 계란과 고기가 눈에 띄었다. 초를 보자마자 토마스의 입이 살짝 벌어진다. 아까 듣기로는 소년이 수술을 다 해준다고 들은 바 있었다. 이렇게 어린 아이가 병원 일을 돕고 있는 건가. "일단 먹고 있어라."초에게 당부한 후 라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차가운 눈빛과 두 발로 걷는 짐승을 연상시키는 외견에 알프레드가 한발짝 다가선다. 토마스는 그런 모습에 반기를 들듯 라스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처음 뵙습니다. 토마스 웨인이라 합니다."
"웨인 그룹의 총수께서 이런 곳엔 무슨 일로."
라스의 말투엔 빈정대는 느낌이나 적의가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초로의 세월이 얹어져 얼굴에 약간씩 주름살이 잡혀 있었는데 오히려 강인한 인상을 준다. 스승이 낯선 이와 대면하는 것에 신경쓰지 않고 그저 음식을 입에 가져가는 데에만 열중하는 초였다. 식사를 즐기기 보다는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 한다, 그런 개념 같았다.
"이곳에서 사람들을 치료해 준다고 듣고 찾아왔습니다. 전해들은 바로는 저 소년이 직접 치료를 한다고..당신을 보조하는 역할인가요?"
"저 아이가 거의 대부분 치료를 합니다. 내가 돕기도 하지만 이 곳에서 의사라고 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가 초죠."
"놀랍군요..."
토마스는 진정으로 감탄한 듯했다. 아까 소녀의 수술자국을 보고 무척이나 수준높은 기술이라는 알았으니까. 그 사이 식사를 마친 초는 "전 다 먹었습니다."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토마스 앞에 섰다. 흡사 라스가 식사를 해야하니 당신 상대는 내가 하겠다고 하듯이. 라스는 그 의도를 알고 자리에 앉았다. 가까이에서 본 초는 정말로 어린아이였다. 토마스는 한결 온화한 말투로 인사했다.
"처음 보는구나. 반갑다. 난 토마스 웨인이라고 한다."
"초라고 합니다."
토마스를 올려다 보는 검은 눈동자.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을 도려낸 듯한 허무함이 싸늘하게 어려 있다. '여긴 아이가 있을 곳이 아니야. 혹시 저 라스라는 사내가 이 아이를 학대하고 있는 건 아닐까,'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이었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여자가 어린 사내 아이와 들어온다. 여자를 부축하고 있던 아이는 기운을 모두 써 버린 듯 쓰러졌고, 복부가 온통 피로 젖은 여자가 헤엄을 치듯 손을 내저었다.
"사..살려줘요..남편이 나한테..총을 쐈어.."
본능적으로 여인에게 다가서려는 토마스였다. 하지만 초가 여자의 어깨를 부축해 수술실로 옮기는 행동은 더 빨랐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가운데 초는 바로 옷을 갈아입고 마스크를 쓴다. 쓰러진 아이를 봐주던 라스는 "잘 됐군. 초가 수술하는 걸 확인해도 좋소."툭 하고 내뱉었다. 토마스는 수술복을 빌려 입고는 초의 뒤를 따랐다. 초가 매스를 드는 순간까지 토마스는 이 어린 소년이 제대로 된 의술을 행한다는 사실을 의심했다. 아무 주저없이, 오랜 훈련과 공부. 실전 경험으로 단련된 중견 의사가 연상되는 모습을 확인하자 의식이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나무랄 데라고는 전혀 없는 수술이 끝났을 때, 많은 일을 겪어온 토마스의 눈동자에서 이슬 한 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서둘러 눈물을 감춘 토마스는 일단 초의 모습을 뒤로 한다. 한 사람의 목숨을 살렸다는 보람이나 기쁨 따위 전혀 보이지 않는 소년을 배려하듯. 그날 토마스는 자택으로 돌아온 후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아내 마사 웨인이 살아있을 때 찍은 사진을 바라보는 눈에 짙은 고뇌와 어떤 희망이 어려있었다. 주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는 알프레드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초라는 소년에게 깊은 인상을 받으신 것 같군요."
대답은 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의자에서 일어나 아내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바라본다. 마사는 남편 못지 않게 심지가 굳은 여인이었다. 대부호면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애쓰는 토마스를 내조하며 특히 부모 잃은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곤 했다. '우리의 아이는 숲과 같은 푸르고 맑은 마음을 가진 이로 키우고 싶어요.' 임신을 했을 때 흡사 기도라도 하듯 몇번이나 했던 말. 사랑하는 아내가 출산 도중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났던 날 토마스는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 하지만 슬픔을 이겨내고 일상에 복귀하기 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내가 잠든 묘비 앞에 서서 고담 시의 평화를 굳게 약속했던 각오는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진을 내려놓은 토마스는 초의 싸늘한 얼굴을 떠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이미 많은 아이를 살리고,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바라본 게 틀림없어."
"의술이란 생사와 대면하는 일이니까요. 어린 나이에 달관하게 된 것만 같은 눈을 하고 있더군요. 스승이라는 이에게 학대당하거나 하진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의 말에서 거짓은 보이지 않았고요. 다만 가혹한 삶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주변 동양인들은 제대로 된 복지의 사각에 놓여 있으니, 그곳 병원이 차지하는 역할이 아주 클 거야."
주인이 무언가를 굳게 결심했음이 느껴진다. 알프레드는 자신의 예감이 정확하다는 현실을 조금이라도 늦추듯 얼음이 든 잔에 위스키 한잔을 따랐다. "고맙네." 집사가 건낸 위스키로 목을 축이는 대부호 토마스 웨인. 사실 초에게 해줄 것은 이미 얼마든지 있었다. 웨인 재단이 운영하는 고아원이나 기숙사가 딸린 학교가 있었으니까. 그런 걸 거부 한다면 무료 병원에서 지금보다 안정된 환경에서 일하게 하는 증등 그 소년에게 무언가를 해 줄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었다.
잔을 내려 놓은 토마스는 두 손을 깍지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동양인 특유의 무표정한 인상과 허무한 두 눈동자를 떠올리는 이 중년 사내에겐 오히려 활력이 감돌고 있었다. 눈으로 한번 더 아내의 사진을 바라본 후 결연히 입을 연다.
"그 아이를 내 양자로 받아들이고 싶어. 앞으로 웨인 재단을 이끌 아들로서."
알프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 역시 초를 보았을 때 더 큰 역할을 할 아이라는 것을 짐작한 바 있었으니까. 수술복을 입은 초가 차에 치인 환자를 치료하면서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순간, 고담 최고 부호는 그 가혹한 삶을 희망으로 이끌고자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일단 웨인 가에서 라스의 병원으로 편지를 보냈다. 토마스의 인상만큼이나 정중하고 예의 바른 필체로 적혀있는 제안. 내용을 다 읽은 라스는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는 초를 향해 가벼이 편지를 던졌다. 시선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떨어진 편지. 정확한 자세로 몸을 일으키던 초는 오른 팔을 굽히면서 왼손을 뻗어 편지를 주웠다. 원 핸드 푸쉬업 동작으로 전환하는 와중 밸런스는 전혀 무너지지 않았다. 운동을 멈추지 않고 편지를 다 읽은 초는 정해진 횟수를 채우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웨인 가의 양자로 들어가면 여러가지로 편리할 거다."
정중함과 단호함이 불명확하게 섞여 있는 라스의 말투는 그의 생각을 알아내기 힘들게 했다. 바로 공수도의 자세를 잡고 정권지르기를 시작하는 초에게 가장 중요한 건 체력과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 수련을 하는 것. 라스는 초가 전혀 흥미 없어한다는 걸 눈치챘다. 사실 초는 이 동양인 거주 구역을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고아로 자랐지만 어른들의 고단함을 이해하고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을 긍정하는 초만의 방법이었다. 어느덧 익숙해진 의사로서의 가혹한 삶. 이 부근의 동양인들에게 초가 없어진다는 건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하나의 구심점이 사라짐을 의미했다. 수면을 연상시키는 잔잔한 눈빛으로 제자를 주시하던 라스가 바로 펜을 준비하며 말한다.
"그럼 거절 의사를 밝히는 편지를 써 보내도록 하지."
"부탁드리겠습니다."
바로 수술복을 입는 초. 이후 이어지는 수술을 일상으로 보내는 소년에게 이번 제안은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며칠 후 다시 토마스와 알프레드가 찾아왔을 때도 소년의 차가운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두 사람이 왔을 때는 수술이 한참이었고, 초는 밖에 누가 왔는지 신경쓰지도 않는다. 다섯 시간을 기다림으로 보낸 토마스는 전혀 실망하거나 화내는 기색 없이 초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구나, 초. 맛있는 커피를 가져왔으니 잠깐 숨을 돌리거라."
알프레드는 솜씨 좋게 드립 커피를 준비했다. 커다랗고 단련된 손으로 커피를 내리는 노년의 집사에겐 예절이 몸에 베어 있었다. 젊은 시절 숱하게 잔인한 광경을 보아왔던 것에 대한 반증일까. 어학교사를 연상케 하는 완벽한 영어 발음과 그윽한 커피 향기. 정확히 예절을 지켜 커피 잔을 건내는 모습은 초의 차가운 태도조차 감싸안는 듯했다.
"감사합니다."
온도까지 세심헤 조절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초. 생각해보니 지금껏 커피를 즐기는 기쁨을 느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라스는 늘 영양가 있고 좋은 음식을 주었지만 병원 생활은 일차적인 생존을 명제로 하는 게 일상이었으니까. 찢겨진 가죽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초는 작은 체격 탓인지 조금 쓸쓸해 보였지만 초라한 모습은 아니었다.
"초는 이곳 마을을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 겁니다. 나 혼자서 모든 환자를 감당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라스가 분명한 어투로 설명했다. 토마스는 실망하는 기색없이 "그게 네 생각이니, 초?"하고 상냥하게 질문했다. 반쯤 마신 커피 잔을 내려다 보고 있던 초는 잠깐 눈을 맞춘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다."
잠시 마음을 정리하듯, 혹은 초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것처럼 토마스는 잠깐 침묵했다. 커피의 향기는 조용한 분위기를 감싸안는 와중 심신을 안정시키는 클래식 음악처럼 잔영을 남긴다. 초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고 벽에 기대 서 있던 라스는 시계를 바라보는 것으로 토마스에게 떠나달라고 말하는 것을 대신했다. 그 의도를 안 토마스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후 진지하게 동양인 소년을 설득하고자 노력한다.
"초. 네가 이곳에 있음으로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있는지는 나도 알고 있단다. 하지만..너는 눈 앞의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 이상으로 큰 일을 해내야 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의술을 더 깊이 있게 공부할 필요가 있어. 정 원하지 않는다면 내 양자가 되라고 강요하진 않으마. 하지만 지금의 환경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이 마을엔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장 제가 스승님 곁을 떠나면 그들에겐 생명의 위협이 닥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스승님은 의학을 마스터 하신 분이십니다. 지금껏 배우고 앞으로 배울 것들이면 제겐 충분합니다. 당신이 보기에 제 생활이 비참의 극치일지는 모르겠지만..저에게도 저를 도와주는 이가 있고, 제가 돕고 싶은 이들이 있습니다. 당신이 좋은 의도로 하신 말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한번 더 말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라스는 적잖게 놀랐다. 지금껏 함께 살아온 세월이 있지만 초가 타인에게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초의 말을 들은 토마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 앞의 이 소년은 고행이라 할 수 있는 삶을 사는 와중 자신의 뜻을 확고히 했다는 걸 분명히 알아 들었다. 이 상태로는 대화가 무의미하다. 알프레드는 가지고 온 물건들을 깨끗히 정리했고 토마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몰려올 환자들을 맞기 위해 수술복을 준비하는 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문을 나선다.
이후 토마스는 몇 번 더 초를 찾아왔다. 어린 아이를 대하듯 선물을 준비하거나 달콤한 말로 회유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초가 더 나아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간절하게 설득했을 뿐. 초는 언제나 차갑고 거리감있는 말투로 거절했다. 하지만 이 소년은 결코 철로 만든 심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생판 남인 동양인 소년에게 더 좋은 환경을 주려는 어른을 어찌 냉담하게만 볼 수 있을까. 라스 역시 그런 변화를 알아차린 듯 싶었다. 냉정하게 보이는 초지만 그 내면은 애정에 굶주린 아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토마스의 계속되는 간청에 그 마음이 조금씩 열려가는 것 또한.
시선을 옮겨 토마스 웨인이 소속된 바이러스 연구소를 주시한다. 우수한 의사, 과학자들이 모여 세균에 대한 실험과 백신 개발에 힘쓰는 곳. 토마스 역시 5년 전부터 이곳에서 광범위한 효과를 가진 새로운 백신 연구에 몸담은 바 있었다.
그 중 특별히 유능하다 평가받는 과학자 라이트 스미스가 오랜만에 만난 동료에게 인사를 했다. 이곳 연구소의 회원들 중에선 특이하게 20세 때부터 본격적인 과학을 접한 바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천재성을 보이는 라이트는 병원균의 효과를 분석하는 데 특히 재능을 보였다.
"오랜만이군, 토마스 웨인."
"그래. 반갑네. 라이트 스미스."
토마스는 바로 새로운 백신 샘플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여덟 시간 동안 바이러스와 씨름하던 라이트는 잠깐 자리에 앉아 짧은 휴식을 취한다.
"요즘도 의료 봉사를 계속하고 있는 건가?"
"미미한 수준이지만,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은 계속하고 있네."
토마스는 알지 못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라이트의 눈동자에 분명히 새겨져 있는 경멸을. 토마스 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재산가인 라이트는 자선이라는 행위를 부정하고 있었다. 빈민가에서 태어나 자신의 힘만으로 지금의 지위를 얻게 된 그에게 부의 재분배나 평동한 사외, 인간의 권리같은 건 달콤한 환상에 다름 아니었다. 이 연구소에 들어온 것 역시 돈을 쫓으며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 뿐. 새로운 백신이 완성된 후 자신에게 주어질 보수를 기대할 뿐이었다.
그날 토마스와 라이트를 제외한 모든 연구원이 자리를 비웠을 때 였다. 바이러스 샘플을 확인하던 라이트는 실험하고 있던 병원균을 모르모트에게 주입시켰다. 이유는 혼합된 병원균의 번식 속도를 확인하는 것. 균이 들어간 모르모트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모르모트는 극도로 흥분을 느끼는 듯 빠르게 유리 상자 구석과 구석을 오가기를 반복한다. 머리가 깨질 만큼 유리벽에 온 몸을 내던지며 발악하던 모르모트는 곧 피를 토하며 숨이 끊어져 버렸다.
'이건..'
라이트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킨다. 예상했던 결과가 아니었던 것도 있고, 다른 성질을 가진 여러 병원균을 혼합한 것이 이렇게 극단적인 효과를 발휘한 것에 대한 놀라움이 컷다.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균의 패턴을 디지털화 하여 정밀 검사를 시작하는 라이트. 자의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신체의 자기보호 능력을 잃어버려 무리한 신체활동으로 자살하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 건조한 문체로 나열된다.
'이 바이러스를 살포한다면..치료법은 없어.'
라이트는 물욕이 많았지만 특별히 잔인한 성격은 아니었다. 지금의 실험도 잘 정리하여 동료들에게 가르쳐 줘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 토마스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반사적으로 적의를 느낀 건 본인조차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이미 펼쳐져 있는 해석 표식을 확인하는 토마스.
"이럴 수가..이 정도로 치명적인 바이러스라니..대체 어떻게 된 건가. 라이트?"
"균을 혼합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거야."
"실험용 균이라고 하기엔 지나치리 만큼 위험해. 어서 다른 이들에게 알려야.."
"그만 둬."
토마스는 동료의 목소리가 무서울 만큼 굳어 있음을 직감했다. 라이트의 태도에서 강한 적의를 느끼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앞으로 나선다. 자신을 바라보는 라이트는 웃고 있었다. 기쁨의 표현을 넘어선 어떠한 희열감에 찬 불길한 미소가 그곳에 보인다.
"무슨 생각이야, 라이트. 그 바이러스는 너무 위험해. 지금 당장.."
"그렇게 생각하지 마. 토마스. 이건 우리가 만들어낸 모든 것들 중 가장 완벽하다 할 수 있어."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이 웃고 있는 라이트의 얼굴은 바라보기 두려울 정도였다. 토마스는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한손에는 바이러스 샘플, 다른 쪽 손으로 권총을 들고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라이트에게 대항할 수단이 없었다. 미세하게 옆으로 움직이며 애써 침착하게 동료를 설득하는 토마스는 처절하리 만큼 신중했다.
"라이트. 난 자네를 알고 있어. 자네는 재산을 모으는 걸 세상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지. 그 바이러스를 암시장에서 거래하려는 생각인가 본데..이곳 동료들의 허가를 받고 정식으로 이용해 실험을 계속하면 더 큰 보수를 얻게 될 거야. 한 순간의 충동에 사로잡히지 마. 자네는 우수한 과학자 잖아."
토마스의 간절한 말투는 오히려 라이트의 의식을 태우는 휘발유처럼 작용했다. 이미 자신의 생각에 지배당한 라이트는 소리내어 웃었다. 수전노처럼 살아온 지난 인생을 증명하듯, 혹은 그간 쌓여온 열등감과 자의식의 틈 사이로 감춰놓았던 광기의 자물쇠가 풀린다는 걸 확인하는 것처럼.
"돈..좋지. 아주 좋아. 내가 그동안 이 연구소에서 아둔하기 짝이 없는 것들과 동료 소리를 들으며 해온 게 모두 돈을 위해서 였으니까. 하지만 이 바이러스를 발견한 건 그런 헛짓거리를 해온 것에 대한 보상이야. 이것만 있으면 바꿀 수 있어. 이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고담시를. 썩을 대로 썩은 이 도시를 새로운 빛으로 인도할 거야."
자아도취 상태의 라이트가 총을 쥔 손을 살짝 밑으로 내릴 때, 토마스는 실험대에 놓여있는 화학약품 비커를 집어 라이트의 얼굴에 대고 던졌다. 뜯어져 나가는 듯한 비명 소리. 얼굴을 파고드는 격통에 휩싸인 라이트가 몸을 굽힌다. 토마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라이트를 제압하려 했지만 충동적으로 발사된 탄환은 토마스의 복부에 명중했다.
"커..억.."
화학 작용으로 탈색된 듯 하얗게 된 얼굴 피부를 드러내며, 라이트는 토마스의 이마에 총을 겨누었다. 토마스는 의식을 쥐어 짜 권총을 쥐었다. 힘이 들어가진 않았지만 최후의 저항은 멈추지 않는다. 라이트는 고통과 희열의 어지러운 나선에 넋을 잃은 듯 눈빛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 총을 휙 던진 채 충혈된 눈으로 이전 동료를 바라보며, 지금 자신이 총으로 쏜 희생자를 향해 말한다.
"자네가 새로운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게 아쉬워."
라이트가 바이러스 샘플을 가지고 실험실을 빠져 나간 후 토마스는 겨우 정신을 집중해 알프레드에게 연락을 취했다. 알프레드는 빠른 속도로 달려왔지만 총을 맞은 자리를 보자 치명적인 부상이라는 걸 직감했다. 누가 한 짓이냐고 묻기 전 최대한 응급처치를 하는 와중 점차 약해져가는 토마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토마스는 힘겹게 입을 여러 자신을 부축하는 알프레드에게 부탁했다.
"초..초에게로..그 아이에게로 가 주게.."
"이 상황에서 말입니까? 그 아이가 의술이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어서 웨인 재단의 병원으로 가야합니다!"
"이미 틀렸어..마지막으로..단 한번만 더 부탁하고 싶어.."
생명의 불꽃이 꺼져갈 듯 가느다란 목소리였지만 삶을 향한 필사적인 저항이 느껴진다. 알프레드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주인을 동양인 거주 지역까지 데려갔다. 초를 만날 때까지 조금만 더 살아있어 달라 기도하면서. 막 한 차례 환자들을 받은 초 앞에 나타난 웨인 가문의 수장. 초는 그의 총상을 보고 바로 수술대에 눕히라 말했다.
"초 군. 저의 주인님께서 군에게 할 말이 있으십니다. 치료해 달라 온 게 아닙니다."
"어서 눕하세요. 전 의사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환자를 앞에 두고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에요."
"그래..알프레드. 괜찮으니 날 수술대로.."
토마스는 힘겹게 웃음을 지었다. 바로 상처를 살피는 초. 훌륭한 응급처치였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탄환은 주요 장기를 꿰뚫고 나간 상태였다. 어쩌다가 이런 총상을 얻었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고 수술을 시작한다. 지금까지 수없이 수술을 해 왔지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의술에 있어 라스보다 한 층 높은 경지에 도달한 초. 어떤 방법을 써도 토마스를 살릴 수 없는 현실이 벽처럼 의식을 가로 막는다. 공포. 절망이라는 이름의 단두대. 필사적으로 의식을 붙잡은 토마스는 현실이라는 폭군에게 항거하는 동양인 소년의 손을 감싸 쥐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뒤덮였지만 가족이라는 따스한 느낌이 생각나는 그런 접촉이었다.
"초..오늘을 기억해라. 절망 앞에서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지금을..나의 죽음을 방관하지 않았기에 지금 내가 너에게 유언을 남길 수 있다는 걸.."
"토마스 씨."
토마스는 힘겨운 웃음을 지었다. 아내를 사랑했던 그에게 죽음은 하나의 여행이나 마찬가지. 그간 현실의 가혹함에 항거해온 삶이 마침내 휴식을 맞이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는 매스를 쥐었던 소년의 손에 입을 맞추며 정말로 전하고 싶었던 말을 이었다.
"네 이름에..풀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걸 들었다..내 아들에게 주고 싶었던 이름은..브루스 였어...숲이라는 어원을..가지고 있단다..초..이름없는 풀로서 최선을 다하는 건 숭고한 일이지..하지만 넌 더 크고 넓은..그런..숲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나는 믿고 있다..이기적인 어른이어서 미안하다..마지막으로 부탁하마..내 양자가 되어 다오..나와 내 아내가 사랑했던 이 도시..고담을..지켜다오.."
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토마스의 의식이 사라져 가는 걸 느끼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나직하게 입을 연다. 지금껏 단 한번도 해본 적 없는 호칭으로.
"편히 잠드십시오. 아버지."
잠시 세계가 멈춘 것만 같았다. 힘겹게 이어지던 호흡이 가라앉고, 죽음의 그림자가 이 작은 병원에 있는 사람들 사이로 드리어진다. 알프레드는 숨을 거둔 주인의 얼굴에 천을 덮어 주었다. 극히 편안하고 안심한 듯 웃음이 내려앉은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눈을 돌려 초를, 자신의 새로운 주인에게 시선을 두었다. 초는 눈을 감았다가 뜬 후 정중하게 알프레드에게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알프레드 씨."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초 군."
"제 이름은 이제 브루스 웨인입니다."
"물론입니다. 브루스 주인님."
소년이 새로운 이름을 받아들일 때, 라이트는 자신의 실험실에 있었다. 토마스가 내던진 화학 약품을 맞은 자리엔 고통이 느껴졌지만 무시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바이러스 샘플을 현미경으로 바라보며 황홀경에 빠져 있는 과학자. 하얗게 된 얼굴에서 입술이 유난히 붉은 빛을 띄고 눈동자는 광인의 그것이었다. 입이 귀 밑까지 찢어질 듯 웃음짓던 라이트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가족 하나 없는 커다란 방 안에서 흰 얼굴을 한 채 컥컥거리며 웃는 모습은 기괴함의 영역. 머리가 조금 긴 편이어서 아까까지만 해도 단정히 빗은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렇게나 풀어 헤쳐져 있었다.
'새로운 세상을 완성하려면 치밀한 계획이 필요해..'
라이트는 고담에서 범죄 조직이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를 생각했다. 경찰, 변호사들도 제대로 건드리지 못하는 그 힘. 라이트의 재력이라면 돈을 풀어 중간 정도의 조직을 만드는 데 무리가 없었다. '조금씩 천천히 조직의 힘을 키우면 돼.' 흡사 기분 좋은 깜짝 파티를 준비하듯 라이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구상을 계속한다. 노트북을 펼치고 범죄의 시나리오를 짜는 그 모습은 광대를 연상케 했다.
어린 시절, 라이트는 피에로를 동경했다. 내면이야 어쨌든 웃음이 새겨진 분장을 하고 묘기를 부리는 모습. 마지막엔 푹 힘이 빠져 쓰러져 버리는 것을 몇번이나 반복해서 보았다. 아크로바틱한 몸짓으로 무대를 오가는 광경은 어린아이에겐 하나의 이상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어렸을 때를 떠올리는 와중 서랍에서 트럼프 카드를 꺼낸다. 위태위태한 트럼프 타워를 만드는데는 일분도 걸리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조커 카드를 맨 위에 올렸다.
트럼프 게임에서 전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조커. 라이트가 푹 빠져있는 피에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어떤 숙명처럼 느껴진다. 온갖 약품으로 가득한 실험실에서 붉은 염료를 찾아냈다. 양손의 검지와 중지를 모아 염료를 묻힌 후 얼굴로 가져가는 동작에선 섬뜩함이 느껴진다. 하얗게 된 얼굴에 기괴한 색체를 더하는 입가의 붉은 미소. 거울을 마주했을 때, 라이트는 세상은 오로지 돈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이 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입고 있던 실험복을 내던졌다. 춤을 추며 의상실로 들어가 옷들을 마구 흩으려 놓는 와중 노래가 끊이지 않았다. 학생 시절 사두었던 보라색 양복을 보자 갓난아기를 받히듯 두 손으로 집어 들었다.
하얀 살결, 붉은 입술. 풀어헤쳐진 머리는 가위로 대충 잘라 쥐가 파먹은 듯한 모양새였다. 현실의 모든 규재를 넘어선 눈빛은 거울에 비치는 자신과 현미경을 번갈아 보며 기괴한 안광을 흘린다. 트럼프 타워를 손으로 툭 건드려 무너트리고, 흩어진 카드에서 조커 카드를 집어 들었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오로지 웃음만이 허락된 분장을 지금의 자신과 동일하게 정의하는 라이트. 그는 눈 앞에 보이는 자신의 신분증과 모든 서류를 모아 알코올 램프의 불로 태워 버렸다. 매캐한 연기 사이로 양 손을 넓게 벌린 채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감촉을 즐기는 라이트. 아니, 이미 그는 자신의 새로운 이름을 정했다.
"조커..난 이 세상을 바꿀 백금의 광대..조커야.."
몇 달 후, 브루스는 웨인 가문의 총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임원들 사이에선 불만이 있었지만 전 총수 토마스가 미리 작성해 놓은 유언장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양자 브루스에게 물려 준다고 적혀 있었다. 처음 임원 회의가 있던 날 브루스는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임원들을 주시하며 회장 자리에 앉았다. 옆에 서 있는 이는 토마스의 아이디어 뱅크라고 불렸던 고위 임원 루시우스. 회의가 시작되자 보통의 어린 아이라면 답하기 힘든 안건들이 오갔다. 브루스는 처음엔 말을 아끼듯 서류를 주시하고 발언하는 임원들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제 판단은.."
초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시절, 브루스는 스승 라스에게 의술과 무술만 배운 게 아니었다. 내력을 알 수 없는 라스는 이 세상 전부라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모든 것을 초에게 전수했다. 돈과 정보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브루스에게 낯선 것이었지만 이 천재 소년의 지력에 어수룩함 따위는 범접할 수 없는 것. 루시우스는 자신의 존재가 브루스를 보조함으로서 다른 임원들의 불만을 조금이나마 무마하기 위해서 라고 생각했다. 몇달 사이 배운 회사 운영 방법을 완벽하게 파악한 브루스의 한마디 한마디에 임원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모두가 웨인 재단의 자금과 운영 현황을 정확히 파악한 훌륭한 판단이었으니까. 일단의 안건이 해결되자 브루는 가벼이 테이블을 톡톡 두들겼다.
"그럼, 삼십분 정도 휴식을 가지고 다음 안건을 논해 보죠."
그날 네 시간에 걸쳐 진행된 회의가 끝나고 브루스는 서재로 향했다. 루시우스와의 수업은 하루 두 시간으로, 재벌 총수라는 위치에 필요한 여러 지식과 교양을 배웠다. 루시우스는 새로운 총수의 현명함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높은 경지로 이끌기 위해 엄격히 수업을 이끈다. 하지만 첫 임원 회의에서 보인 완벽한 태도에 대한 감탄은 숨길 수 없는 듯했다.
"오늘 회의는 정말 훌륭했습니다. 브루스."
"다른 임원분들의 의견 제시가 완벽했기 때문이겠죠. 제가 한 것이라곤 임원분들이 설명한 사항을 종합해서 판단한 것 뿐입니다."
"그게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브루스는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동양인 거주 지역을 떠나온 날부터 하루 5시간을 자면서 모든 분야라는 무색하지 않을 만큼 공부를 계속해온 소년. "레슨을 시작하죠." 수업 태도는 진지했다. 속눈썹에 칼끝이 들어가도 모를 만큼의 집중력. 의사로서 쌓아온 여러 경험은 합리적이고 탄탄한 성향을 주었다. 단순한 암기에서 그치지 않고 주관이 들어간 문제 해결 능력은 무척이나 유연하고 정확하다. 토마스의 갑작스런 죽음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루시우스였지만 새로운 총수의 태도는 혼란을 느낄 겨를도 주지 않았다. 이 수정과 같은 소년의 성장에 힘을 쏟게 할 뿐.
3년이 채 안되어 웨인 재단이 미국 굴지의 대규모 공장을 소유하게 된건 우연이 아니었다. 본래 대재벌이었던 웨인 재단은 국가 차원의 막강한 재력을 얻게 된 것. 임원들은 브루스 웨인의 의견에 반대하기는 커녕 자신들의 일을 하기에도 벅찼다. 열 여덟살의 브루스는 웨인 가를 이어받은 시점부터 조금씩 해오던 빈민 구제 계획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서류를 검토하며 신중히 생각을 거듭하는 브루스에게 집사 알프레드가 다과상을 들고 다가왔다.
"주인님. 차를 드실 시간입니다."
"고마워요."
얼 그레이 홍차를 한 모금 머금는 브루스. 양 옆으로 길게 찢어져 큰 눈과 약간 작은 듯한 입술, 귀여운 느낌의 인상에는 섬세함이 느껴진다. 그간 브루스의 격투 트레이닝 상대를 해온 알프레드에게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외견일 뿐이었지만. 젊은 시절 용병으로 세계를 누볐던 알프레드는 모든 무술을 마스터한 라스 이상의 달인이었다. 브루스는 알프레드와의 무규칙 대련을 수없이 반복하는 사이 한층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한 상태. 재벌 총수로서 바쁜 일상을 보내는 중에도 하루 세시간은 훈련에 투자하고 있었다.
"생산직 공장에선 안정적으로 직원들을 채용하고 있는 것 같군요."
브루스는 보고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전 토마스가 했던 것처럼 빈민 지역의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사업. 근무시간과 강도에 맞는 적절한 급료가 지급되고 있음을 확인한다. 술과 마약, 도박 같은 도락에 빠지지 않도록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데도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병원과 학교, 고아원 같은 복지시설을 설립하는 데도 가속도를 더하는 젊은 총수. 서류를 다시 정리해주는 알프레드의 간단한 동작에도 주인에 대해 깊은 신뢰를 느끼고 있음이 보인다.
"동양인 거주 지역 외에도 블랙 할렘과 빈민가에도 구제 사업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주인님의 계획에는 정말 빈틈이 없군요."
"우수한 임원분들이 계시니까요. 알프레드와 루시우스의 서포트가 없었다면 지금의 웨인 재단도 없을 겁니다."
"주인님께서는 지나치게 겸손하신게 단점입니다."
브루스는 훗, 하고 웃으며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초콜렛 하나를 집어 입 안으로 가져갔다. 브루스의 생활에는 오락거리라고 할 만한 게 거의 없었다. 아직 혈기가 안정되지 않은 열 여덟의 소년임에도 흡사 수도승과 같이 절제된 생활을 이어간다. "슬슬 훈련 시간이군요.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사무 업무를 마친 브루스는 일본 무도가가 연상되는 반듯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알프레드 역시 "알겠습니다."공손히 답례 했다. 지하에 마련된 트레이닝 룸. 보디빌딩에 쓰이는 웨이트 머신과 동양 무술의 훈련 기구가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
브루스가 가장 열정적으로 임하는 건 서킷 트레이닝이었다. 유산소 운동과 근육 훈련을 쉬지 않고 한 시간 동안 사이클을 돌듯 계속하면 말 그대로 온 몸이 땀으로 젖었다. 전문 운동 선수조차 녹초가 되어버리는 강도를 매일 같이 소화해내는 브루스에겐 칭찬조차 사치에 불과했다.
동양 무술의 정교하고 심오한 원리에 서양의 웨이트 트레이닝이 더해져 브루스의 무술은 하나의 완전체에 가까웠다. 오랜 의사 생활로 단련된 정신력과 집중력, 뛰어난 감각 역시 큰 무기가 된다. 알프레드는 숱한 실전 경험으로 갈고 닦은 실전형 살인 격투기의 소유자였지만 젊은 주인과의 무규칙 대련 중 한번도 마음을 놓은 적이 없었다. 찰나의 방심이라도 한다면 정말로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으니까.
범접할 수 없는 재력을 쌓고 자선 사업을 이어가는 와중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진 않았다. 그것은 고담을 암암리에 손에 쥐고 있는 범죄 조직의 영향이었다. 병원과 학교를 짓는 공사 현장. 그곳에 직접 총을 든 조직원들을 이끌고 습격했다는 보고까지 들려온다. "지금 당장 가 봐야 겠어요."업무 중이던 브루스는 바로 현장으로 향했다. 이미 괴한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겁먹은 것이 역력한 인부들의 모습만이 남아있을 뿐. 브루스는 책임자와 대면했다. 늘 자긍심을 가지고 일했던 책임자는 얼굴에 검푸른 멍이 들었지만 낯빛에 흥분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씀해 주세요."
"죄송합니다. 회장님. 깡패들이 와서 위협을 했는데..다들 총을 들고 있어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다친 이들은 없나요? 얼굴에 멍자국이 남았군요."
"이 병원 설립에 회장님이 얼마나 열의를 기울이시는지 알고 있어서..제가 주제도 모르고 덤벼들었더니 이 모양이 되었군요. 부끄럽습니다."
"총을 들고 있었다고 했는데, 무모한 짓을 하시면 안 됩니다. 그외에 특이 사항은 없었나요?"
"저를 비웃으면서 들은 말이 있긴 한데..병원같은게 세워지면 마약성 진통제나 무면허 의사들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어 자신들의 수입이 줄어든다..그런 식으로 떠들어 대었습니다. 범죄나 저지르는 놈들이 할만 한 생각이죠."
"그래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cctv는 작동하고 있었겠죠. 바로 조치에 들어갈테니..다들 놀라셨을테니 오늘 일은 여기서 마무리 하도록 하세요."
"그..그럴 수는 없습니다. 회장님. 이게 저희들의 직업인 걸요. 회장님께서 직접 와주신 것만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작업을 재개하게 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무리하진 마세요."
브루스는 바로 통제실에 들어가 cctv를 확인했다. 깡패들이 총을 든 모습, 책임자를 폭행하는 모습까지 확실하게 찍혀 있었다. '증거는 있어.' 회사로 돌아와 변호사를 통해 법적 절차를 밟도록 지시하는 브루스. 심리적 피로감을 무시하고 회장실 의자에 앉아 알프레드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전했다. 조용히 경청하던 집사는 두손을 모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들에게 법적 책임을 묻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브루스의 얼굴엔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눈동자엔 떨림이 일었다. 그간 웨인 재단을 이끌면서 이런 일은 간접적으로 몇차례 겪어왔다. 부패한 권력층에 의해 수뇌부 측에서 뇌물을 건내 왔던 것도. 브루스는 현실주의자였지만 결코 회의적이지 않았다.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건 해보겠습니다."증거 자료를 경찰 측에 전한 후 며칠 있다가 돌아온 것은 시덥지 않은 변명과 약간의 돈봉투였다. 막대한 갑부인 브루스를 조롱하는 의미. 브루스는 아주 오랜만에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 이 정도인데 힘없는 서민들은 어느 정도의 부조리함을 견뎌야 할까. 실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바로 루시우스에게 지시를 내리는 젊은 총수.
"고담시 범죄 조직들의 현황에 대해 정리해 주세요."
알프레드. 루시우스. 그리고 브루스 세 사람만이 자리한 가운데 브리핑이 이루어 졌다. 3개의 큰 조직 아래 피라미드 식으로 작은 조직들이 짜여져 있는 구조. 마약 밀매와 권력층에 대한 로비 활동. 돈 세탁 같은 범죄 현황까지 일목 요연하게 정리 되어 스크린에 떠오르고 있었다. 브루스의 차가운 지성은 모든 정보를 파악한다. 주인이 머릿속으로 생각과 판단을 반복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알프레드. 루시우스 역시 총수의 명석한 두뇌가 무언가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걸 느꼈다.
"루시우스. 응용과학 부서에 특수 부대에 납품할 장비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었겠죠."
"물론입니다. 회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모든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무기, 장비들이 있습니다. 시제품만 만들라고 하셨기에 아직 양산화 단계는 아니지만.."
"그 정도면 좋아요. 응용과학 부서는 표면적으로 폐쇄하도록 하세요. 명분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고 해요. 현재 완성되어 있는 모든 장비는 우리 셋만이 갈 수 있는 지하 시설로 옮기고, 회사에 공개되어 있는 모든 자료를 처분해 줘요. 내일 이 시간까지."
갑작스러운 명령. 루시우스롸 알프레드는 브루스의 행동력을 알고 있어 군말은 붙이지 않았다. 다음 날 바로 지하 시설로 들어선 브루스. 회색으로 칠해진 비밀 공간에는 완성되어 있는 각종 장비들이 부자연스러울 만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브루스가 제일 먼저 확인한 건 전신 수트 였다. 검은 색으로 칠해져 몸에 딱 붙는 스타일이었는데 견고해 보이는 외견과 대조적으로 거의 모든 움직임에 제약을 주지 않았다.
"잠입용으로 특화된 스텔스 수트입니다. 발소리가 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자유로운 신체 활동이 가능합니다. 방탄, 날붙이에 대한 방어력도 우수하죠."
"한번 입어보겠어요."
"닌자 놀이라도 하시려는 건가요? 아직 그런 쪽에 흥미가 있을 나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저에겐 논다는 개념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한 걸 알잖아요."
한계까지 연마된 소년의 육체를 감싸는 수트. 브루스는 동작이 큰 발차기와 섬세한 손놀림을 시험해 보았다. 과연 움직임에 불편한 점이 조금도 없다.
"디자인을 조금 바꾸고 싶군요."
브루스는 수트를 벗으며 말했다. 오랜 단련을 거쳐온 소년의 몸은 그 자체만으로도 강인함을 드러내었다. 그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은 루시우스. 곧 의식을 되찾고 짐짓 장난스럽게 말한다.
"회장님 정도라면 장난감의 모습을 고르는 건 문제가 없겠죠."
"장난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두 분께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전 제가 할 수 있는 걸 해 보려고 해요."
진지한 목소리. 루시우스는 입을 다물었고 알프레드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회장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겠슴니다." 두 사람의 눈에 의문과 장난기가 사라지자 브루스는 조용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꺼내었다.
"브루스 웨인으로는 이 도시를 장악한 범죄 조직들과 맞서 싸울 수 없어요. 저는 박쥐가 되고자 합니다. 들짐승과 날짐승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며 어둠 속에서 날갯짓하는 존재. 지금까지 단련해온 무술과 이 장비들이라면 할 수 있어요. 뭐라고 하셔도 좋습니다. 그저 상사의 명령이라 생각하시고 따라 주세요."
일주일 정도 장비를 몸에 익히는 과정을 거친 브루스는 깊은 밤 도시에 나서 있었다. 활공을 위한 형상기억 망토와 박쥐를 모티브로 디자인된 스텔스 수트. 어둠이 손끝을 대어 조용히 허공을 나는 이 밤의 사자를 감싸준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브루스는 한 빌딩 옥상에 내려 앉는다. 범죄 조직이 소유한 건물로 대량의 마약 거래가 이루어지는 정보를 입수한 상태. 창가에서 보이지 않는 사각에 메달려 집음기를 꺼낸다.
"뭐야 이건..기분 나쁘잖아. 너무 심하게 검사하는 거 아냐?"
"미안. 우리 일이 워낙 험한 거라서 말야. 두둑한 현찰을 만지려면 자잘한 건 신경쓰지 말라구."
"경찰, 변호사 놈들도 꼼짝 못한다고 들었는데. 과장이었나 보군."
"자자. 불평은 그 정도로 해줘. 그보다 물건은 확실하겠지?"
"물론!"
가방을 여는 소리가 둔탁하게 집음기로 들어온다. 브루스는 한번 숨을 내쉰 후 환풍기 틈을 이용해 내부로 진입했다. 소나 기술로 건물의 구조를 완벽히 파악하며 대담하게 나서는 밤의 사자. 총을 든 경비원들이 있었지만 그리 위험한 수준은 아니었다. 계속 접선실로 접근하던 중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에 이른다. 두 명을 제압해야 하는 상황. 이상할 만큼 공포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두 개의 수리검을 던졌다. 어깨와 허벅지. 두 명이 주춤하는 사이 순식간에 달려 나가 한 손으로 턱을 잡아 지면에 내리 꽂아 실신시키고, 다른 이는 목을 졸라 경동맥을 암박해 의식을 빼았는다. 비명은 커녕 최소한의 신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소나를 한번 더 키자 접선실 내부의 상황이 파악되었다. 다섯 명.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이는 세명이었다. "이 약이 풀어지면 이제 또 이 도시의 마약 중독자들이 몇천명 늘어 나겠군." 집음기에 파고드는 비열한 웃음으로 의식을 조율하며 천천히 접근한다. 과연 스텔스 수트의 성능은 완벽해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건물에 들어서면서 부터 해킹을 이용해 감시 카메라를 무력시킨 상태. 곧 혼란이 시작될 노릇이었다. 주저 없이 문을 열어 젖힌다.
마약 거래상들은 당활할 겨를도 없없다. 난데없이 찾아온 괴한은 문을 열자마자 그들의 발밑으로 연막 수류탄을 던졌으니까. 매태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일차적으로 총을 든 이들을 제압하는 브루스. 군대식 근접전투 기술로 순식간에 팔 관절을 뽑아 버리고 목 뒤를 후려치는 동작은 물이 흐르는 듯 자연스럽다. 거래상 중 가장 전투 경험이 있는 두목이 바닥을 뒹구는 와중 품안에서 권총을 꺼내었다.
"죽어라!"
그는 말없이 방아쇠를 당겨야 했다. 외침 소리에 바로 반응한 괴한이 눈 깜짝할 사이 다가와 권총을 빼았았으니까. 철컥하는 불길한 마찰음과 함께 분해한 파편을 내던진다. 다른 이들은 이미 실신했고 두목만이 힘겹게 의식을 붙잡고 있었다. 괴한의 발목을 붙잡으며 욕설을 질겅이듯 말을 꺼내는 그에겐 두려움과 분노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런 짓을 하고 무사할 것 같아..? 도대체 뭐야..넌..?"
"나는 배트맨이다."
입고 있는 박쥐 형상의 의상과 딱 맞아떨어지는 모습. 마약으로 가득한 가방을 들고 빌딩 창문으로 뛰어내린다. 마약상 두목이 "미친놈..!"하며 창가로 기어갔을 때, 사층 높이였기에 배트맨이 망토를 펼쳐 낙하 충격을 무마하며 자동차에 타는 걸 볼 수 있었다. 모습을 확인할 틈새조차 주지 않은 체 자동차는 순식간에 출발했다. 마침내 마약상이 실신한 순간 범죄와 심판의 경계 사이에는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
웨인 재단 지하로 연결된 비밀 루트로 귀환한 배트맨은 적재칸에 실었던 마약을 꺼내었다. 주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던 알프레드는 예상보다 마약의 양이 많은 것에는 동요하지 않았다. 배트맨의 장갑을 유심히 살펴볼 뿐. 마스크를 벗자 브루스의 얼굴이 드러나고, 이마에 적지 않은 땀이 맺혀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주인님께서도 긴장하셨나 보군요."
"이런 종류의 암습은 오랜만이었으니까요."
"대련이 아닌 상황에서 싸워본 적도 없지 않나요?"
"네살 때부터 거리에서 싸우는 건 일상이었습니다. 몰래 건물에 숨어드는 것도 많이 해 보았구요. 라스에게 거두어지기 전까진 말 그대로 잡초였습니다."
알프레드는 수트를 벗는 걸 도와주었다. 분명 한계까지 단련된 육체였지만 거기에 담겨진 영혼은 열여덟살 소년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일까. 알프레드의 눈에는 부모와 같은 염려가 담겨 있었다. 옷을 갈아입은 브루스는 침착하게 지시를 내렸다.
"오늘 가져온 마약을 전부 처분해 줘요. 그리고 다른 암거래상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앞으로 이런 일을 계속하실 생각입니까?"
"그래요. 알프레드와 루시우스가 뭐라고 생각하든 나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배트맨이라는 폭력으로서 이 도시의 어둠을 걷어내고야 말겁니다."
말이 없는 알프레드. 브루스의 확고한 태도에서 더 이상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마약을 들어 올렸을 때, 어린애 장난으로 한 일이라기엔 범죄 조직에 큰 타격을 입혔다는 걸 직감했다.
이후로도 배트맨은 밤마다 고담 시에 나타났다. 마약 거래와 액수가 큰 강도 사건등을 주로 덮쳤는데 겪어본 범죄자들은 보이지 않는 박쥐라 부르며 공포를 호소하곤 했다. 브루스가 알아낼 수 있는 정보망은 엄청났다. 도청기와 집음기를 이용하고 인터넷 해킹도 적극 활용, 예상되는 범죄 현장을 알아내는 건 그의 무술 실력 이상으로 분명한 현실이었다.
고담의 경찰서에서 야간 근무를 맡은 한 경찰. 밤을 새야 하는 그는 커피와 곁들여 도넛을 먹으며 도시의 상황을 비추는 컴퓨터 앞에서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졸음이 올 법도 했지만 책임감이 강해 열성적으로 모니터를 주시한다. 그 모습을 확인하는 상관. 범죄자들 위세에 눌린 고담의 경찰 중에서도 눈에 띄게 자신의 임무를 중시하는 고든 경감이었다.
"상태는 괜찮은가?"
"아, 경감님. 현재로선 문제가 없습니다."
"수고가 많군. 경계를 늦추지 말게."
"오늘 밤에도...그 자가 나타날까요?"
"박쥐라 불리는 무법자 말인가?"
고든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아직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지만 범죄자들 사이에서 배트맨은 상당히 알려져 있는 상태. 팔다리를 부러뜨리는 건 기본이고 반항하는 것 이상의 폭력을 행한다는 악명이 높았다. 사람을 죽인 적은 없지만 그것 뿐으로, 불구가 된 범죄자들도 꽤 된다는 소문이었다. 부하 경찰이 건내는 도넛을 한입 베어 물며 답한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분이 안되는 자야. 윗층에선 체포 명령이 내려져 있지만 단서가 조금이라도 남아야 조치를 취할 수 있겠지. 그는 전투와 잠입의 프로야."
"가지고 있는 장비도 놀라운 수준이라는 소문이 있죠. 깡패들이 잠깐 본 정도지만..투척 나이프나 몇몇 흔적을 조사해 볼 때, 군 특수부대에 비교해도 부족함 없는 정도라고 추측되고 있습니다."
"자, 우리의 역할은 고담의 질서를 지키는 거야. 계속 수고하게."
"그런데..고든 경감님. 집에는 들어가시는 건가요? 벌써 며칠째 경찰서에서 먹고자고 하시는 것 같은데.."
"집사람과 아이들과는 하루에 한번 화상통화를 하고 있어. 난 괜찮아."
얼굴에 내려앉은 주름 위로 옅은 미소가 떠오른다. 부하 경찰은 그 모습에서 문득 감동을 느꼈다. 한 조각 남은 도넛을 입에 집어 넣고는 한층 결연해진 얼굴로 도시 상황에 집중한다. 한 시간 정도 후, 빈민가 지역에서 방화가 발생했다는 신호가 날아들었다. 고든 경감이 모니터를 바라볼 때 부하 경찰은 현장에 나가있는 이들과 연락하여 모든 상태를 파악한 상태였다.
"범죄 조직의 운반책들이 일으킨 화제입니다. 민가의 사람들을 인질로 중요 물품을 이동시키려는 속셈일 거예요."
"순찰 중인 경찰들을 모두 투입시키게. 소방서엔 연락했겠지?"
"범죄자들이 민간의 사람들을 인질로 삼아 농성 중입니다. 소방대원들이 나서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군요."
"계속 상황을 주시하게. 나도 충돌하겠어."
"걱정 마십시오. 빈민들이 빠져나갈 루트를 찾아보겠습니다. 범죄자들의 동선도 알아보죠."
"부탁하네."
고든은 몇 대의 경찰차와 함께 바로 현장으로 출동했다. 불에 타고 있는 건물 창가엔 인질들이 울부짖으며 도움을 요청하고, 그들에게 총을 겨누며 경찰과 대치하는 조직원들이 있었다. 매캐한 연기가 잠식한 곳엔 사로잡힌 이들의 절규가 의식을 할퀴며, 경찰과 소대원들을 절망시킨다. 고든은 괴로움에 목이 죄이면서도 구출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 주변을 살펴 보았다. 창가에 보이는 범죄자들은 네 명. 경찰 저격수들을 동원할 수 없을까. 하다못해 불이라도 끌 수 있어야 할텐데. 최대한 냉정하게 사태를 관망하던 그의 시선에 검은 색 물체가 잠깐 잡혔다가 사라졌다. 인질들이 보이는 창가로 잦아드는 그 모습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다.
"배트맨..!"
범죄자들의 모습이 일순간 사라졌다. 눈 한번 깜빡일 틈도 없이 무기를 든 이들을 제압하는 배트맨은 말그대로 검은 섬광이었다. 인질은 화염의 일렁임 사이로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온 이를 보았다. 흡사 맹인이 처음 햇살을 마주할 때와 같은 얼굴로. 배트맨은 팔목의 단말기를 작동시켜 경찰들의 무전기에 음성을 내보냈다.
"범죄자 네명을 모두 제압했다. 어서 화재를 진압하라."
무전기를 들고 있던 고든은 소방대원들에게 행동을 개시하라 일렀다. 그 사이 들려오는 배트맨의 무전에 의식을 기울인다.
"현재 범죄자들이 화재가 난 건물 사이를 오가며 금괴와 현금을 옮기고 있다. 내가 그들을 제압할테니 경찰들과 소방대원들이 바로 뒤따르도록 하라."
"당신 혼자서는 무리일 거요. 경찰들의 도움을.."
"기다릴 시간이 없다."
배트맨의 무전은 거기서 끊겼다. 소방 호수가 물을 분사하는 가운데 인질들이 건물에서 나오자, 고든은 권총을 빼어 들며 현장으로 달려갔다. "경감님, 위험합니다!" 동료들의 외침을 뒤로 한 채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경찰. 범죄자들에게 밀려 힘을 잃은 공권력이었지만 고든의 행동은 충분히 경탄할만 했다. 일차적으로 불이 꺼진 건물에는 배트맨이 말한 대로 네명이 쓰러져 있었다. 관절이 뽑힌 팔과 다리가 늘어져 있는 건 기괴할 정도였고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총기를 보니 소름이 끼친다. 도대체 그 무법자의 정체가 뭐길레 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의문에 휩싸이는 와중에도 고든은 안쪽으로 이동했다. 주거 지역의 끄트머리 골목에는 큰 상자를 든 범죄자들이 급하게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저게 그가 말한 귀중품들이군.'
고든은 경찰 중에서도 사격술에 특히 능한 명사수였다. 가지고 있는 45 구경 권총과 전투 조끼 안에 탄환은 충분히 있다. '모든 걸 무법자에게 맡길 수는 없어.' 벽을 엄폐물 삼아 총을 겨누는 순간, 배트맨이 낙하 하며 한 범죄자를 덮쳤다. 힘이 실린 발차기는 일순간 의식을 빼았아 버린다. 영춘권의 간결하며 정확한 타격으로 짐을 들고 있는 범죄자들을 가격하자 맥을 못추고 쓰러져 간다. 흡사 도미노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하지만 범죄자들의 수도 만만치 않았다. 경계를 맡고 있던 무장한 이들이 달려와 배트맨을 포위한다. 그 수는 다섯 명에 달했고, 고든은 본인의 목이 섬뜩해짐을 느꼈다.
공포는 숨조차 내쉬지 못했다. 배트맨이 몸을 낮추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한 명에게로 달려들었다. 방아쇠를 당겨야 할지 판단하는 것조차 사치. 근접하는 순간 관절을 제압하고 몸을 움직이면 여지없이 범죄자들은 실 풀린 꼭두각시 마냥 무너져 버렸다. 연속적인 테이크 다운 공격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두려움이 들 정도. 고든이 정신을 차린 건 이미 배트맨이 귀중품을 옮기던 범죄자들 마저 전부 제압한 후 였다.
"경감님, 무사하십니까!"
"난 괜찮아. 그보다 어서 범죄자들을 연행해. 나는..."
"경감님?"
"그자와 만나봐야 겠어."
뒤늦게 달려온 부하 경찰들에게 상황을 맡긴 후 고든은 배트맨의 뒤를 쫓았다. 발자국 소리가 안들리는 데다가 이 밤에 검은 옷을 입고 있어 따라잡기는 힘겨울 거란 걸 알면서도, 중년에 접어든 경찰은 필사적으로 달렸다. 건물 바깥 쪽 비상계단까지 다다랐을 때였다, 커다란 화물 트럭 두대가 이미 적재한 화물을 싣고 출발하려는 참. 반사적으로 무전기를 들었을 때, "연락하기엔 늦었어." 머리 위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배트맨은 거꾸로 매달린 채 어둠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고든은 눈을 찌푸리며 시선을 집중하고서야 배트맨의 검은 색 마스크를 볼 수 있었다. 당신의 정체가 뭐지?라는 물음 밤공기에 사라져 버렸다. 단지 눈 앞의 현장에 조치를 취해야 함을 직감할 뿐. 막 시동을 걸고 있는 화물차는 초인적인 격투 실력 만으로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고든은 자신도 모르게 배트맨을 진정시키는 제스쳐를 취한다.
"당신이 얼마나 강한지는 알겠소.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경찰의 지시에 따라 주시오."
"내게 필요한 건 당신의 말을 듣는 게 아니야. 균형을 맞추는 거지."
검은 망토로 뒤덮인 밤의 사자는 그대로 밑으로 떨어져 버렸다. 6층 높이에서. 덜컥 두려움을 느낀 고든은 반사적으로 밑을 바라봤다. 일차적으로 보이는 건 어둠. 시커먼 자동차 같은 것에서 엔진음이 짐승같은 울림으로 세어나오고 있었다. 약간 전투기의 라인을 닮아 날렵해 보이는 차체에 곤충의 다리 같은 형태로 중형 캐터필터 여섯개가 장착된 모습. 뒷골목의 가로등불이 내뱉는 희미한 밝기에 비춘 그 모습은 어딘지 위험하면서 완강해 보였다.
조종석에 앉은 배트맨은 변형 시스템 중 파괴 형태로 변하는 스위치를 눌렀다. 캐터필터 사이로 튀어나온 지지대가 단단히 차체를 고정시킨다. 뒷부분의 장갑이 벗겨지더니 60밀리는 족히 될 듯한 체인건이 어둠 사이로 위협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완전히 탱크로군..!'
위협 사격 없이 배트맨은 방아쇠를 당겼다. 한번 맞으면 '대형 트럭이 전속력으로 부딪히는 듯한' 이란 표현이 과장이 아닌 화력. 잇달아 발사된 대구경 탄환은 트럭 두대 따위, 단숨에 고철 덩이로 만들어 버린다. 쇠조각 파편을 맞아 부상을 입거나 압력에 밀려 실신해 범죄자들은 완전히 전의를 잃어 버렸다. 믿을 수 없는 광경 앞에서 고든은 냉정을 붙잡고 급히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잠깐만 기다려요!"
지금껏 배트맨과 대화를 나눈 이는 없었다. 아까처럼 무전기로 지시를 받았을 때를 기억하며 고든은 자동차, 배트 모빌을 향해 달렸다. 위압감을 느낄 법도 했지만 고든에게 겁먹거나 주저하는 기색은 없다. 잠시 후 배트 모빌의 조종석이 열리며 배트맨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든은 자세히 보니 체격이 상당히 왜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고든을 주시하는 배트맨. 고든은 일단 가지고 있던 총을 지면에 내려 놓았다. 두 손을 들어 무기가 없다는 걸 밝히며 한 걸음 발을 내딛는 모습은 아주 신중해 보였다.
"난 고든 경감이라 해요. 당신에 대해선..조금 알고 있소. 본명을 밝히진 않겠지, 배트맨이라 부르면 되겠소?"
배트맨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이어질 거란 기대치가 낮아서인지 고든은 그 정도로도 안도감을 느꼈다. "무기는 없어요. 해칠 생각도 없고..물론 이건 내가 당신에게 들어야 하는 말이겠지만."주의 깊은 모습이 마음에 든 것일까. 배트맨이 모빌에서 벗어나 고든에게 조금 다가갔다. "잠깐 기다려요. 줄 게 있어요." 고든은 늘 가지고 다니는 수첩에 뭔가를 빠르게 적었다. 자신의 개인 전화 번호와 경찰 정보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코드 등. 경찰인 자신과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수단 전부가 빈 노트 위에 문신처럼 새겨졌다.
"이미 당신이 수준 높은 정보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예측이 있지만 이것도 도움이 될 거요."
노트 페이지를 찢어 내미는 고든. 두려움이 없진 않아 손가락이 조금 떨리고 있었지만 그런 모습이 오히려 배트맨의 경계를 누그러뜨렸다. 배트맨은 반듯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고든의 호의를 받아 들인다. 자신이 내민 쪽지에 검은 장갑으로 감싸인 손이 쥐어지자, 고든은 종족이 다른 생명이 첫만남을 가지는 영화 속 한 장면을 떠올렸다. '이 자도 결국엔 인간이다.'고든은 한 걸음 물러나 경찰식 경례를 했다.
"오늘 당신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을 구할 수 없었을 거요. 범인들을 검거하는 것도 불가능 했을 테고. 이 도시를 지키는 입장으로서 진정으로 고맙다고 하고 싶소. 배트맨."
"..또 만나지."
배트맨은 배트 모빌에 탑승했다. 흡사 어둠의 세계로 귀환하려는 듯 순식간에 사라져 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든은 사내로서의 고양감을 느꼈다. 뒤늦게 달려온 부하 경찰들과 함께 쓰러진 범죄자들을 체포할 때까지.
배트맨이 저지한 돈은 범죄 조직들이 세탁을 위해 외국의 은행으로 보내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조직 한 둘의 전체 자본이 될 정도로 큰 액수였기에 그 파장은 무척이나 잔혹했다. 조직 간부 몇명이 살해 되었고 일부는 팔 한짝, 다리 같은 신체가 절단된 채 버림 받았다. 이미 배트맨의 존재는 범죄자들에게 알려져 있다. 비밀리에 한 자리에 모인 조직 보스들. 그 중 잔인하기로 악명 높은 깡패 두목이 시가를 깨물며 테이블을 내려쳤다.
"도대체 뭐하는 놈이야! 경찰도 못 건드리는 우리를 위협하는 그 놈은!"
"박쥐 분장을 한 미치광이지."
"트럭에 대고 아무렇지도 않게 체인건을 갈겨 댔다는 군. 상대가 죽건말건 신경도 안 쓰는 놈이야."
"총을 든 놈들은 격투로 제압했다면서."
"맞아, 그 미치광이의 기술은 완벽해. 아직까지 의식불명인 놈들 투성이야."
보스들은 반은 증오를, 반은 놀라움을 담아 배트맨의 무용담을 떠들어 대었다. 자신들에게 큰 손해를 입힌 건 사실이었지만, 몇몇 부하들이 떠들어댄 그 막강함은 범죄조직 보스들에겐 하나의 가십 거리가 되는 듯 했다. 약간 왜소한 체격의 한 보스가 안경을 고쳐 쓰며 가느다란 목소리를 흘린다.
"감탄하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오늘 모인 이유를 잊지 않아야 겠죠. 그 박쥐를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에 대해서.."
상황을 집중시킨 그 보스는 냉철한 판단력과 집요한 계락으로 유명한 이였다. 이 밀실의 공기에 매스를 대어 침묵이라는 생채기를 내는 모습은 선정적이란 표현마저 가능케 한다. 잠깐 말소리가 멎고, 보스들은 서로의 표정을 살폈다. 마지막 보스가 천천히 밀실로 걸어들어 올 때까지.
"다들 모였군."
하얀 살결에 귀 밑까지 닿을 듯 칠해진 웃응의 화장. 보라색 양복을 입은 조커는 녹색이 칠해진 눈동자로 보스들을 훑어 보며 테이블까지 다가왔다. 가라앉은 분위기 사이로 나타난 광대 분장의 사내는 흡사 선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회의를 소집한 이유. 배트맨에게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조커.."
"역시 너도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군."
몇몇 보스들은 이마에 미세히 맺힌 땀을 닦거나 살짝 떨리는 손끝을 가렸다. 몇년 전. 공격적으로 범죄 세계에 뛰어든 조커는 금세 악명을 얻었다. 살인에 대해 죄책감이 없어 대립하는 이라면 가차없이 제거한 후 그 사실을 자랑스레 공개할 정도였다. 과학자로 살아오면서 쌓아온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이용, '악마마저 놀랄 정도'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만큼 범죄를 저질러 왔다. 이 자리에 모인 보스들 대부분이 압박감을 느낄 만큼. 조커는 긴 직사각형의 테이블 중 상석 자리에 서서 가벼이 팔을 벌렸다.
"경찰..변호사..지난 몇년 간 우리를 방해하는 것들은 없었는데..박쥐 한 마리가 돌맹이를 던진 것 같아."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어."
"물론이야."
조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웃고 있는 분장이지만 입술의 모양으로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보스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조커가 안쪽 상의에서 카드 한장을 꺼내는 걸 지켜본다.
"내가 내미는 카드는...박쥐 덕분에 기세가 오르고 있는 경찰들을 좀 손봐주면 어떨까..하는데. 그래. 그 동안 우리가 주는 뇌물을 잘 받아먹었지. 그런데 박쥐가 조금 우리를 귀찮게 하자 요즘 들어 태도를 바꾼 것 같아서 말이야..앞뒤 꽉 막힌 몇몇 간부들에게 경고도 할 겸..크게, 아주 크게 파티를 벌이는 게 어떨까 해서."
"요즘 밑에 것들이 겁먹은 것 같아. 마구잡이로 날뛰는 건 무리일 텐데."
"아아..걱정 하지마. 총을 들고 경찰서에 돌격하자는 그런 건 아니니까."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지?"
"우리가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조금 가르쳐 줄까 해."
조커가 꺼낸 카드에는 어릿광대가 그려져 있었다. 사실적으로 그려진 얼굴 묘사에 소름이 끼친다. "내가 준비한 카드는.."조커의 목소리는 약간 쉰 듯한 음색이었다. 날카롭게 조각난 쇠 파편을 모아 긁어대는 듯이. 이어서 조커가 꺼내는 말을 들은 보스들의 얼굴에는 조금 놀란 듯 했지만 이내 잔혹한 웃음으로 화했다. 타인을 해치는 것으로 자신들의 삶을 유지하는 범죄자 특유의 그것으로.
그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 웨인 저택에선 알프레드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두유와 호밀 빵. 샐러드에 곁들인 치즈를 쟁반에 얹고 브루스의 방문을 두드린다.
"주인님. 아침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들어와도 좋아요."
문을 열고 들어선 알프레드를 맞이한 건 침대 옆에서 물구나무를 선 채 푸쉬업을 하고 있는 브루스의 모습이었다. 아주 천천히 팔을 굽혀다 펴기를 반복할 때, 살짝 흔들리는 하체와 더불어 이상적으로 발달한 복근이 드러난다. 알프레드는 웃음 지으며 말했다.
"밤마다 박쥐 옷을 입고 활약하시는 것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상쾌한 아침이군요."
"지금껏 살아온 내력이 있으니까요. 배트맨을 한다고 해서 회사 일을 소홀히 할 생각은 없어요."
"아주 훌륭하시군요."
웜업을 마친 브루스는 쟁반에 놓인 빵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 각기 다른 신문사에서 나온 3개의 신문을 천천히 읽어 보는 브루스. 비중에는 차이가 있지만 배트맨의 활약에 대한 기사가 모두 실려 있다. 잔에 홍차를 따르며 그런 주인을 바라보는 알프레드. 짐짓 장난스러운 표정이 지어졌다.
"이걸로 주인님은 낮에도 밤에도 슈퍼 스타군요. 미 연방 굴지의 대재벌. 어둠의 무법자."
"전 인기를 얻을 생각은 없어요. 그저 저에게 허락된 만큼 살고 싶을 뿐이에요."
"그 누구도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초에서 브루스가 된 이후, 알프레드는 더없이 훌륭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완벽한 예의범절을 익혔지만 장난기와 유머를 잃지 않는 60대 노인. 브루스가 배트맨이라는 역할을 수행할 때도 장비와 전투 기술에 대해 이상적인 백업을 해왔다. 그럼에도 이따금 브루스의 내면을 찌르는 말을 하는 건 연장자로서 당연한 일일까.
"배트맨은 이미 고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지요. 그간 범죄자들의 등살에 밀려있던 경찰들에게도 하나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주인님. 아직 고담에서 범죄자들의 영향력은 큽니다. 주인님이라면 양지의 방법으로도 범죄와 싸울 수 있을 거예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배트맨이 있는 겁니다."
"그걸 누가 판단한 거죠? 결국 주인님이 판단하고 주인님께서 행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 지금껏 제가 내린 생각을 믿으며 살아왔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제 전력을 다할 뿐이에요. 성공이나 실패 같은 건 중요치 않아요. 이 순간을 살아갈 뿐."
"용병 생활을 했을 때 그런 이들을 많이 봐왔습니다. 죽음 앞에서 후회하지 않는 사람들을."
"미안해요. 알프레드."
"두 시간 후 중역 임원들과 회의가 있습니다. 회장님. 십분 전에 알려드리지요."
알프레드가 방을 나선 후, 브루스는 두 손을 얼굴을 쓸어 내렸다. 책장 뒤에 설치된 비밀 입구로 들어가 장비실, 배트 케이브로 행한다. 배트 모빌을 비롯해 배트 수트. 각종 다양한 장비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고성능 지휘통제 컴퓨터 앞에 앉아 상황을 체크한다. 고든 경감이 전한 루트로 얻은 정보에서 경찰의 활동 범위를 알 수 있었다. 총기로 무장한 범죄 조직과 싸우기 위해 새로운 장비를 지원받은 사실과 수뇌부를 비롯한 내부 인사들의 변경 또한 눈에 띄었다.
'배트맨의 존재가 무기력한 경찰들에게 자극이 된 것 같아.'
브루스는 수트 앞에 섰다. 날짐승도, 들짐승도 될 수 없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박쥐. 부모도 모르는 동양인 고아에서 대재벌 총수가 된 브루스의 삶과도 비슷하게 느껴진다. 짧게 숨을 몰아 쉰 브루스는 배트 케이브를 뒤로 했다. 오늘도 몇 시간에 걸친 마라톤 회의를 해야 한다. 그 사실을 직시하며 브루스 웨인의 역할을 수행할 뿐.
심신 모두를 혹사시키는 업무가 끝난 후 브루스는 사무실에 앉아 진한 에스프레소를 한잔 마셨다. 자산이 늘어난 만큼 신경 쓸 일이많았고, 다양한 투자 사업과 생산업 관리에 자선 사업까지 병행하자니 몸이 열개라도 모자란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었다. 브루스는 강한 사나이였다. 바로 배트 케이브로 가 한 시간 동안의 휴식없는 서킷 트레이닝을 한 후 알프레드와의 무규칙 대련을 소화할 만큼. 상의를 벗은 채 차가운 물을 마시며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루시우스가 다가왔다.
"일전에 개발 중이던 배트 윙의 시작형 기체가 완성되었습니다."
브루스는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해리어 전투기를 베이스로 더 빠르고 가벼운 비행이 가능할 것을 요구했다. 겹겹이 벽으로 가려진 구조의 배트 케이브. 한쪽 벽면이 위로 접히는가 싶더니 슬림한 라인이 인상적인 비행기, 배트 윙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부분의 공대공 미사일을 장비할 수 있고 12.7 밀리의 개틀링포 두 정이 주요 무장이었다. 루시우스는 설계도면을 펼쳐 꼼꼼하게 브리핑 했다.
"해리어 기에 비해 약간 더 빠른 비행이 가능합니다. 레이더 탐지 범위는 월등하죠. 공대공 전투보다는 공대지에 더 적합하게 설계했습니다. 많은 상황에서 임무 수행이 가능하도록 다양한 커스텀이 가능합니다."
"아주 좋아요."
브루스는 배트 윙의 겉면을 자세히 살피고 콕피트에 앉아 보았다. 모든 분야에 빠르게 적응하는 브루스는 배트 모빌의 운전에도 안정적인 실력을 보였고, 전투기 조종 역시 빠르게 원리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시우스는 통제 컴퓨터에 정보가 들어온 것을 보고 그 쪽으로 향했다.
"회장님. 아무래도 오늘 밤에 배트 윙의 첫 비행을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무슨 말이죠?"
"외국 마피아가 운영하는 은행에 다른 조직이 침입한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이전에 가져오신 경찰 정보망에도 확인되었고요."
배트맨의 정보망은 해킹과 cctv, 도청기로 얻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브루스는 모니터를 한참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냉철한 눈빛으로 지시했다.
"배트 윙은 자동조종이 가능하겠죠?"
"그렇습니다."
"제가 잠입하여 상황을 알아볼 테니 배트 윙은 바로 출격할 수 있도록 준비해 줘요. 이번 정보는 약간 작위적인 느낌이 들어서요. 경찰 측에도 정보가 흘러들어갔다는 것도 이상해요."
"알겠습니다. 확실히 이 정도의 계획이 확실히 알려져 있다는 것도 부자연스러우니까요."
은행 업무가 끝난 오후 여섯시 이후에 적대 조직이 돌입한다는 정보에 따라 배트맨은 은행 내부로 잠입했다. 높은 곳으로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는 배트 클로를 이용해 시야의 사각으로 이동하는 모습은 말 그대로 그림자였다. 벽면에 조그맣게 돌출된 곳에 매달려 상황을 지켜보는 배트맨. 무장한 경찰 열명이 내부를 순찰하고 있었다. 범죄자들끼리의 싸움에 끼여드는 것은 이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 배트맨의 활약은 확실히 경찰들에게 새로운 마음가짐을 심어준 듯했다.
'이 정도의 정보가 경찰에까지 전해진 건 분명 함정일 거야. 단순한 도발이라 하기엔 위험부담이 있을텐데.'
환풍기나 지하 통로, 그외 경계가 소홀해질 수 있는 부분을 완벽히 파악한 배트맨이었다. "적이 돌입한다."경찰들은 무선 내용을 확인하자 바로 잠복에 들어갔다. 배트맨이 확인한 범죄자들은 고작 세명이었다. 손가방 만한 철제 케이스를 들고 있었는데, 모두가 방독면을 쓴 모습이었다.
'함정이다...!'
배트맨이 벽면에서 떨어져 나와 강하 하는 순간 테러범들은 케이스를 작동시키고 달아났다. 잠복하고 있던 경찰들이 움직임을 개시하려는 때 케이스에서 가스가 흘러나온다. 배트맨은 허리에 찬 장비 중 방독 기능이 있는 마스크를 입가에 장착했다. '경찰들만이라도 구해야 해.' 지면으로 내려앉기 까지 대략 5초. 녹색 가스가 은행을 가득 메웠고 경찰들은 무방비로 숨을 들이 마쉬었다.
가스를 마신 경찰들의 눈이 충혈 되었다. 손발이 미세히 경련하는 가운데 그들의 얼굴에 새겨지는 건 분명한 웃음. 해독 키트를 가지고 있는 배트맨은 가까운 경찰 한명을 제압하며 키트를 입가에 대었다.
'통하지 않는다..?"
만능은 아니었지만 어지간한 생화학 무기에 효과가 있는 키트였다. 분명히 떠오르는 적색 반응에 배트맨은 클로를 이용해 천정쪽으로 날아올랐다. 경찰들은 모두 총을 들고 있었고, 무작위로 서로를 향해 쏘아대기 시작했다. 탄환이 흘리는 둔탁한 절규는 인간의 죽음이라는 허무함에 장막을 드리웠다. 경찰들은 소리내어 웃는 가운데 총을 마구 쏘아 대고, 탄환이 떨어지자 맨 손으로 서로를 죽이기 시작했다. 단순한 가스가 아니다. 배트맨은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파악했다. 은행 건물을 가득 메운 가스를 소량 채취한 후 창밖으로 뛰어 내린다.
가스 테러를 자행한 이들의 도주 경로를 확인한 후 바로 배트 모빌을 부르는 배트맨. 여섯개의 캐터필터를 가진 배트 모빌은 흡사 충직한 개가 연상되는 모습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배트 모빌에 탑승한 후 테러범들의 뒤를 쫓는다. 고속 이동 모드를 작동시키자 캐터필터 뒤쪽으로 추진 장치가 드러나고, 전방을 방어하듯 펼쳐져 있던 철판들이 날렵한 선으로 형태를 달리 했다.
배트 모빌은 도주하고 있는 범죄자들의 뒤를 쫓았다. 배트맨은 앞서 가는 차량을 압박하며 인적이 드문 곳으로 경로를 잡았다. 범죄자들은 기관 단총을 꺼내 배트 모빌에 갈겨대었지만 방탄 차체에 부딪힌 탄환은 흡사 비웃듯이 불꽃으로 튀어오른다. 탄창이 빌 때까지 방아쇠를 당겼던 범죄자는 짜증과 혼란에 휘말려 기관단총을 내동댕이 쳤다.
"빌어먹을 박쥐놈!"
"멍청히 있지 말고 큰 걸로 하나 갈겨!"
운전을 맡은 범죄자는 상당한 실력자였다. 불법으로 튜닝되어 굉장한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를 몰면서도 동료들이 총을 쏠 수 있을만큼 적은 흔들림을 유지할만큼. "그거 좋지..!" 사격을 맡은 이는 바주카포를 어깨에 짊어졌다. 탄환을 채우는 둔탁한 소리에 파괴욕구가 잔혹하게 이빨을 드러낸다. 배트 모빌은 빠른 속로로 뒤를 쫓고 있었지만 바주카포를 견딜 정도의 내구성을 없는 형태였다. 배트맨은 육안으로 범죄자들이 중화기를 겨누는 모습을 보았다.
반사적으로 변형 스위치를 누른다. 캐터필터 뒤에서 불을 뿜던 추진 장치가 회수되고. 측면으로 바짝 붙어있던 철판이 방패처럼 겹겹이 전방을 덮었다. 배트 모빌의 모습이 변함과 동시에 발사된 바주카포는 정확히 명중했다. 불꽃과 연기 사이로 일순간 시야를 가린다.
"좋아! 정확히 맞았어!"
범죄자는 환희에 차 괴성을 지르며 혀를 비죽 내밀었다. 흡사 승리감의 겉면을 핥듯이.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중장갑 형태의 배트 모빌이 연기를 뚫으며 다가왔으니까. 직격으로 명중한 바주카포를 견디는 가공할 내구성. 운전을 맡고 있던 범죄자마저 공포와 놀라움에 휩싸여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바라볼 정도였다.
"도대체 저건 뭐야..!"
그들의 패닉 상태는 오래 가지 않았다. 잠깐 속도가 늦춰진 틈을 타 배트맨은 기관총을 쏘았고, 범죄자들의 자동차 타이어에 명중했다. 주변은 사람들의 왕래가 끊긴 지역이었다. 실신하거나 몸을 크게 다친 동료들 사이로 운전을 맡았던 범죄자는 힘겹게 신음소리를 흘린다. 다리 쪽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몸부림치려 할 때 배트맨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사..살려줘.."
배트맨은 범죄자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어둠 속에서 그의 박쥐같은 모습은 지옥의 악마, 그 이상으로 섬칫했다. 범죄자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나..난 아무 것도 몰라.."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은 그게 아냐. 누가 지시한 건지 말해."
한손으로 멱살을 잡은 상태에서 반대쪽 손으로 복부를 가격한다. 의식을 남긴 상태에서 최악의 고통을 주는 보디 블로우. 범죄자는 실신조차 못한 채 배가 오그라붙는 듯한 통증에 몸을 떨었다. 배트맨은 바닥에 범죄자를 내팽개치며 다시 한번 묻는다.
"누가 지시했지."
"몰라..정말 몰라..! 돈과 장비만 주고 우리를 고용한 것 뿐이었어!"
"입을 열게 할 방법이 있지."
배트맨은 범죄자를 질질 끌었다. 공포에 몸부림치던 범죄자는 자신이 검은 색 탱크, 배트 모빌 쪽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걸 알자 하복부가 사라진 듯한 감촉을 느꼈다. 캐터필터 앞쪽에 범죄자의 머리를 들이밀고 무선조종으로 시동을 걸자, 악마의 목울림을 연상케하는 엔진음이 범죄자의 의식을 갈아내었다. 더 이상은 한계였다. 범죄자는 귀 바로 옆에 있는, 마찰음을 토해내는 캐터필터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에 휩싸여 필사적으로 삶을 구걸했다.
"마..말할게! 전부 말할게! 죽이지 마..!"
"그래, 좋은 생각이야."
"조커야. 조커. 조커가 지시했어. 가스도 조커가 만들었고.."
"가스의 성분은 뭐지?"
"그건 조커가..가르쳐 주지 않았어..정말이야! 그냥..살인 독가스라고만 말했다구..!"
배트맨은 한번 더 시동을 걸었고, 의식을 덮치는 엔진음에 범죄자는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몰라..난 진짜 모른단 말야..! 살려줘! 제발 살려줘!"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군.'
배트맨은 범죄자의 목 뒤를 내려쳐 기절시켰다. 단말기를 켜 루시우스에게 통신을 연결한다.
"루시우스. 역시 범죄자들의 함정이었어요. 가스를 이용해 경찰들을 죽였어요. 가스 샘플은 채취했고, 범죄 조직의 리더인 조커에 대해 알아봐 줘요."
"조커라면 3년 전부터 주목을 끌고 있는 범죄자입니다. 전혀 모르시는 건 아닐텐데요."
"이번 테러에 사용된 가스를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무슨 의도인지는 알겠습니다. 바로 확인하죠."
통신을 종료한 배트맨은 배트 모빌의 적재칸에 범죄자들을 집어 넣었다. 테러가 있던 현장까지 되돌아와 현장을 정리하고 있는 경찰들이 곧 발견할 수 있는 장소에 내려 놓는다. 그리고 고든 경감의 무전기로"잠깐 할 말이 있어."짧게 말했다. 고든이 부하들에게 따라오지 말 것을 명령하고 건물 옥상까지 올라가자 거기엔 배트맨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든은 격앙된 목소리로 한 걸음 나아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경찰이 열명이나 죽었소. 당신이 나서지 않았던 거요?"
"나도 이 정도로 대담하게 나올진 생각하지 못했어. 현장의 경찰들에게 응급조치를 하려 했지만 통하지 않더군."
배트맨의 침착한 태도에 고든은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까 cctv로 배트맨이 독가스에 중독된 이에게 조치를 취하는 장면을 본 것도 기억이 났고, 도망친 범죄자들을 잡아 온 것도 방금 확인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동료의 죽음을 본 심리적 충격은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배트맨의 목소리는 아주 낮고 거칠었지만 본인도 다소 낙담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범죄자들의 의도를 미리 알아내지 못한게 오늘 참사의 원인이야. 저 자들에게 들은 바로는 이번 테러를 계획한 건 조커라고 하더군."
"조커? 그는 범죄자들 사이에서 꽤나 입김이 통하는 자요. 하얀 얼굴에 광대 분장을 하고 있다더군요. 강력 범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걸로 알고 있소."
"난 그에 대해 좀더 알아보겠어. 뒤에 다시 이야기하지."
고든이 고개를 끄덕이며 잠깐 숨을 몰아쉬었을 때, 이미 배트맨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정말이지 신출귀몰하곤.'그렇게 생각한 후 주의를 범죄현장으로 돌리는 고든. 열명의 동료가 죽었다는 사실을 짊어진 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그는 무척이나 큰 일을 짊어진 듯 했지만 그 이상의 강인함 또한 느껴졌다.
배트 케이브에 돌아온 브루스는 가면을 벗을 겨를도 없이 바로 채취한 가스를 분석했다. 조커가 되기 이전의 라이트 스미스가 알아낸 대로 인간의 자의식에 관여하는 작용을 하는 물질. 브루스는 토마스가 남긴 여러 백신과 바이러스 데이터를 확인한다. 현재로선 조커의 독가스를 치료할 수 있는 백신이 존재치 않았다. 경찰 열명이 희생된 사실을 되새기며 몇번이고 바이러스를 세밀하게 관찰하는 브루스. 알프레드가 바로 뒤에 올 때까지 그 집중력은 흔들리지 않았다.
"일단 수트를 벗고 작업을 계속하시는게 어떨까요, 주인님."
"제가 조금만 더 유연한 판단을 했다면 경찰들이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진 않았을 거예요."
브루스는 고개도 돌아보지 않았다. 알프레드는 짧게 한숨을 쉰 후 브루스의 가면을 벗겨 주었다. 열 아홉살 소년의 얼굴엔 짙은 피로감과 패배감. 분노가 엿보였다.
"주인님이 돌아오셨다는 것, 이렇게 할 일을 가지고 오신 것만해도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하신 겁니다. 죄책감 같은 건 손가락에 찔린 작은 가시 같은 것이죠. 그저 뽑아내고 상처를 치료한 뒤 할 일을 하면 되는 겁니다."
"희생된 경찰들의 가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브루스의 대답에 알프레드의 한숨은 더욱 깊게 몰아 쉬어졌다. 한발 물러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시우스는 쓴 웃음을 지었다. 바주카포의 일격을 견뎌낸 배트 모빌의 장갑을 새로 수리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두 사람을 향해 나아간다.
"회장님. 바이러스에 대한 건 제가 알아 보겠습니다. 내일도 할 업무가 있지 않습니까. 휴식은 필요합니다."
"...웨인 연구소의 모든 자료를 사용해서라도 백신을 알아보도록 하세요. 부탁해요. 알프레드. 루시우스."
그제서야 브루스는 수트를 벗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가 샤워기 앞에 선다. 뜨거운 물줄기가 몸에 닿자 빈민가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아득하게 피어올랐다. 그때와 비교하면 단순히 천국이라는 표현으론 부족한 현재 상황. 미국에서 손꼽히는 재벌이 된 것만으로도 충분한 업적이지만 범죄와 싸우기 위해 무법자의 길을 걷고 있다. 자신이 심문했던 범죄자의 겁에 질린 얼굴이 떠오른다. 내게 그들을 심판할 권리가 있는가. 가스에 중독되어 일그러진 얼굴로 죽어버린 경찰들. 내가 아니었다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다음 날. 신문을 확인한 브루스에게 그런 생각은 더욱 가혹한 압박삼으로 다가왔다. 조커 측에서 선전포고를 하듯 시청의 벽면에 붉은 페인트로 메시지를 남긴 것이었다. '배트맨의 존재가 계속된다면 어젯밤 이뤄진 심판은 몇번이고 일어날 것이다.' 이런 문구를 남길 수 있다는 건 공권력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셈이었다. 브루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에겐 웨인 재단의 총수로서 오늘 할 일이 있다. 일단 그것에만 집중하자. 배트맨의 역할은 잠시 미뤄야 해.'
몇 시간에 걸친 업무를 끝낸 시점에서도 피로감은 쉽사리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바로 배트 케이브로 향하는 브루스. 루시우스가 조사한 조커의 프로필을 확인한다. 사진에선 광대 분장을 심하게 하고 있어 제대로 인상을 살펴볼 수 없었지만 본명은 이미 조사가 된 상태였다. 라이트 스미스. 토마스가 소속되어 있던 바이러스 연구소의 과학자였다.
"흰 피부는 화학 약품에 의해 얻게 된 것이죠. 조현병도 있는 듯합니다. 비정상적으로 격투에 강한 면은 뇌내 도파민 과다 분비에 의한 각성 작용같아요."
"아버지의 옛 동료..란 거군요."
"선대 주인님께서 정확하게 가르쳐 주시진 않았지만, 그는 주인님의 원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뒤이어 찾아온 알프레드가 선언하듯 말했다. 모니터에 떠 있는 두 장의 사진에 손을 댈 듯 가까이 다가서는 브루스. 말쑥하고 단정한 중년 사내, 흰 피부에 분장을 한 범죄자의 광기 어린 눈빛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듯 브루스는 한참이나 전혀 다른 모습의 동일 인물을 주시했다.
"이 자가 저지르는 범죄의 목표나 이유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있나요?"
"전형적인 과대망상 성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메시아라 인식하고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악행을 행한다...그런 식으로 자신을 합리화 시키고 있죠. 스스로는 혁명가나 구세주라 자처하지만 흔하디 흔한 사이코 패스죠.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일 뿐입니다."
"토마스 웨인..아버지는 마지막까지 고담의 안위를 걱정하셨어요. 목숨이 끊어지려는 순간까지 저에게 양자가 되어달라 부탁하신 분인데..그런 훌륭한 분이 고작 이런 정신병자 때문에.."
루시우스는 브루스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온갖 인생의 마이너스 성향을 겪어온 초. 그 어린 영혼은 브루스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다. 토마스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느낄 수 없을 거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 세월 웨인 재단을 발전시킨 것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것이었다. 미 연방에서도 외면하는 고담시를 지키는 것. 그것은 아버지와의 분명한 약속이었으니까. 한참이나 조커의 사진을 바라보던 브루스는 고개를 돌렸다.
"트레이닝을 해야겠어요. 알프레드.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주인님."
언제나 그렇듯 알프레드는 브루스의 지시에 따랐다. 그날 밤 배트맨이 되어 거리로 나가려고 할 때가 되어서야, 많은 세월을 겪어온 집사로서 주인에게 말했다.
"어떤 일이 있으셔도 주인님께선 할 일을 하시는 군요. 그 꾸준함은 분명 주인님의 무기입니다. 아주 날이 잘 드는 검이라 표현할 수 있겠죠."
"모든 대업은 단순 작업의 꾸준한 축적에서 오는 거니까요."
"잊지 마세요. 그 검은 양날검이라는 걸. 주인님을 파멸시킬지도 모릅니다."
"이해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저는 주인님이 무슨 일을 하든 이해할 겁니다. 그것이 토마스 선대 주인님의 뜻을 지키는 길일 테니까요. 전 그저 주인님께서 밤의 무법자가 되는 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는 게 슬플 뿐입니다. 주인님의 명령을 지켜야 하는 제 입장이 원망스럽고요."
"알프레드."
"배트맨일 때는 제 이름을 부르지 말아 주십시오. 주인님이 어두운 면에 있을 때까지 저의 존재를 의식한다는 건 제겐 비극입니다. 차라리 돈을 무기로 범죄자들을 압박하면 안 되겠습니까? 정치에 나서서 범죄와 싸우는 것은요? 배트맨은 강하고 직접적인 프로파간다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주인님은 아직 어린 소년일 뿐이라고요. 매일 밤 주인님의 죽음을 예상하는 이 늙은이를 이해해 주실 수 없습니까? 언제까지 혼자서 전쟁을 치루시려는 거죠?"
"난 혼자가 아니에요. 루시우스와 알프레드. 당신이 있으니까요. 배트맨을 부정하셔도 저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의 제 가족에게 걱정을 끼치는 것에 대해선..그저 미안할 뿐이에요."
배트맨으로서 밤거리에 나서는 소년. 알프레드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한 방울 눈물을 떨구었다. 고담의 어두운 공기 사이를 가로지르는 배트맨은 빌딩 옥상의 가고일 석상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은행에서의 가스 테러가 있은 뒤 경찰들의 기세가 누그러들 거라 예측했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오늘 밤 벌어지는 범죄 현장에 대한 정보를 확인한다. 왼쪽 손목에 있는 단말기를 켰을 때, 출처를 알 수 없는 통신이 연결을 시도하고 있음이 감지 되었다. 배트맨은 약간의 의구심을 접은 채 버튼을 누르고, 처음 보는 소녀의 모습이 화상에 떠올랐다.
"이제야 당신과 접촉했군요. 반가워요, 배트맨."
"넌 누구지?"
"오라클이라 불러 줘요."
"오라클, 어떻게 내게 연결을 할 수 있었는지 물어 봐도 될까."
"저는 컴퓨터를 다루는 것과 통신 계열에 자신이 있는 편이에요. 당신이 광범위한 정보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알고 있죠. 거기서 역추적 방식으로 알아낼 수 있었어요. 소개를 이 정도로 하죠. 배트맨. 우리는 당신을 돕고 싶어요."
"우리라고?"
"그래요. 저는 고담 시에 새로 결성된 자경단 나이트 윙의 일원이에요. 우리도 당신처럼 고담 시를 지키는게 목적이에요.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중반의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죠."
"이건 놀이가 아니야. 무모한 짓은 그만 둬."
"당신이 할 말 같지는 않군요. 우리도 어린애 장난이 아니에요. 더 이상 고담이 타락해 가는 걸 방관할 수 없어요. 오늘 제 2부두에 불법 무기가 반입된다는 정보가 있어요. 당신도 알아 주었음 해요. 와줄 거라 믿을게요."
통신은 거기에서 끊겼다. 배트맨은 짧게 한숨을 쉰 후, 날카로운 눈으로 오라클이 지정한 장소를 확인했다. 항구에서도 가장 외진 구역인 2부두. 과연 삼엄한 무장을 한 범죄자들이 보초를 서는 가운데 불법 무기가 담긴 박스가 옮겨지고 있었다. 저들을 어떻게 제압할지 빠르게 전략을 세우는 사이 다시 통신이 들어온다.
"와 줬군요. 그럴 줄 알았어요. 고마워요."
"무기를 든 범죄자들은 내가 맡을 테니 당신의 동료들에게 먼저 행동하지 말라고 전해."
"그러죠."
배트맨은 건물 사이를 오갈 때 사용하는 클로를 꺼내들었다. 보초들 중 약간 고립된 위치에 있는 이를 타깃으로 잡고, 투척 무기인 배타랑을 던졌다. 침묵을 가로지르며 날아간 배타랑은 보초의 목젖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약 5초. 순식간에 클로를 이용해 접근한 배트맨은 보초의 목을 압박해 기절시킨다. 지체하지 않고 바로 클로를 발사해 시야 중 가장 높은 곳으로 향하는 배트맨. 잠시 후 범죄자들 중 한 명이 동료가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
"박쥐야! 그 미친 박쥐가 이곳에 왔어!"
"정신 똑바로 차려! 이번 거래가 잘못되면 정말로 조커가 우릴 죽일거야!"
"제기랄..눈에 보이기만 해봐. 그 박쥐놈 가만 두지 않겠어..!"
흥분 상태가 된 보초들과 서둘러 짐을 옮기는 이들을 파악하는 배트맨. 바로 단말기로 오라클에게 통신을 보냈다. "무기를 든 이들을 한쪽으로 유인할테니 당신의 동료들에게 물품을 옮기는 자들을 제압하라고 해줘." "물론이죠." 고작 통신으로 잠깐 접촉한 게 다였지만 배트맨은 그들에게 역할을 주었다. 골목을 이루고 있는 컨테이너 틈 사이로 숨어든 후 원격조종 배타랑을 던진다. 마찰음을 잇달아 일으켜 보초들의 주의를 끌고, 총을 들고 달려드는 그들을 외곽으로 고립시켰다.
"나와! 박쥐놈! 네놈 때문에 우리 동료가 몇이나 병신이 되었어! 두목이 임무에 실패했다고 죽인 놈도 한두 명이 아니야!"
가장 호전적이고 거친 총잡이가 허공에 기관단총을 난사하며 소리를 질렀다. 배트맨은 그 외침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고, 탄환이 떨어지기를 기다린 후 나아가 순식간에 제압했다. 총기를 빼았으면서 균형을 무너뜨리는 군대식 근접전투 기술. 한치의 낭비도 없는 간결한 몸동작과 정확한 힘의 배분에 총을 든 보초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실신했다.
스스로를 나이트 윙이라 말한 소위 자경단은 그때서야 움직임을 개시했다. 배트맨이 무기를 운반하는 현장에 갔을 때, 스턴건과 삼단 봉 등을 가지고 범죄자들과 싸우는 자경단을 볼 수 있었다. 무기는 일반인이 구입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의 것을 갖춘 듯했다. 총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점이 의외로 보인다. 다들 어느 정도 훈련을 해왔는지 몸놀림은 나쁘지 않은 모습이었다. 스무 명 이상되는 나이트 윙 맴버들은 모든 범죄자들을 결박하여 한 곳에 모아 두었다. 배트맨이 모습을 드러내자 나이트 윙 중 대장격으로 보이는 이가 다가왔다. 상당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얼굴을 보니 이십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처음 만나는 군요. 배트맨."
"언제부터 이런 활동을 해온 거지?"
"당신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데요. 조커가 당신을 협박하는 메시지를 남긴 날 결성되었어요."
"어째서."
"당신 혼자서는 고담의 어둠에 맞서기 힘들 거란 생각이 들어서요."
배트맨은 차가운 눈으로 자경단을 바라 보았다. 대장격의 청년과 마찬가지로 20대로 보이는 이들도 섞여 있다. 소년은 동료들을 지키듯 한발 다가서며 다시 한번 말했다.
"이름을 말하지 않았군요. 전 로빈이라고 해요."
"앞으로도 이런 일을 할 생각인가?"
"그래요. 당신 혼자서만 고담을 지킬 거라 생각하지 말아요. 경찰들도 용기를 내기 시작했고 우리 나이트 윙에 동조하는 이들도 이미 늘어나고 있어요."
"상관하진 않겠어. 하지만 나와 당신들의 뜻이 부합되는 시점이 되면 협조는 하지. 오늘처럼."
"고마워요. 배트맨."
그 후, 나이트 윙은 도시의 어둠을 걷어내는 배트맨과 행동을 같이 했다. 그들은 브루스가 차후에 확인한 대로 탄탄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도 늘어났다.
그 소식이 곱게 들리기에 무리가 있는 이. 조커는 한쪽 손으로 턱을 밭힌 채 뉴스 채널을 바라보고 있었다. 토마스 웨인을 죽이고 빼돌렸던 바이러스는 잘 보존된 상태. 이전 경찰 열명을 죽였던 사건 이래로 배트맨과 경찰들의 위세가 줄었을 거라 생각했건만 현실은 오히려 반대였다. 그 동안 납작 엎드려 있던 언론에서까지 고담시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다며 범죄자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기사를 쓰고 있었다. 권총을 손가락에 걸쳐 이리저리 기울이며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를 바라보는 모습에선 표정을 살피기 힘들었다. 광대 분장이 보여주는 것은 일그러지지 않는 웃음.
'배트맨. 네가 무슨 생각을 하건 새로운 세상을 시작할 나에게는 영향을 주지 못해. 마지막에 웃는 건 내가 될거다.'
"보스. 다른 조직의 간부들이 찾아왔습니다."
부하 중 하나가 조커에게 보고 했다. "알았어."티브이 버튼을 누르는 조커. 조커가 있는 방 바깥에 있는 사무실의 부하들은 권총을 정비하거나 나이프를 가다듬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광대 복면은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두운 감정의 그늘에 덮인 범죄자들과 닮아있는 붉은 미소를.
조커를 찾아온 타 조직의 간부. 거대한 목을 가지고 있어 척 봐도 단단하고 완강한 인상의 거한은 목을 부러뜨리듯 문고리를 세게 돌리며 소리 질렀다.
"광대 어딨어? 당장 나오라고 해!"
"그렇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들려."
조커는 여유있는 걸음걸이로 나섰다. 사람 죽이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미친 광대. 이미 범죄자들 사이에선 그렇게 소문이 난 상태였다. 타 조직 간부는 부하 세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조커를 보자마자 권총을 꺼내 겨누었다. 조커의 부하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 일제히 사격 태세를 갖추는 그들의 모습은 예상한 대로였다. 조커는 자신을 향한 3개의 총구를 조롱하듯 어깨를 으쓱했다.
"인사가 매우 정석적이군. 아주 클래식해."
"네놈에겐 이런 식으로 해야 말이 통할 테니까. 쓸데없는 말을 한다면 당장 쏴버리겠어."
"그럼 너희들도 살아 돌아가진 못할 텐데."
"상관없어. 네놈이 나대는 걸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우리측 보스의 명령이 있었다. 우린 목숨을 걸고 온 거야. 미친 광대 놈."
"훌륭해. 범죄자들에게도 질서와 규율이 있다는 걸 몸소 보여주는 군."
"총들 치워."조커는 침을 뱉듯 내뱉었다. 조커의 부하들은 이미 보스의 기행에 익숙해져 있는, 본인들 역시 정상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지 못한 이들이었다. 군말 없이 명령에 따른다. 타 조직 간부는 협박이 통하지 않으면 코트 안쪽에 숨겨져 있는 폭탄을 드러낼 생각이었기에 약간 의외였다. '조금만 겁을 주면 이렇게 고분고분해 지는 걸 가지고. 난 다른 조직의 멍청이들과는 다르지.'
"좋아. 우리도 예의는 지키겠어."
간부의 지시에 부하들 역시 조커를 향했던 총을 거두었다. 조커는 가벼이 박수를 쳤다. "다들 하던 일들은 다시 하면서 들어라. 조직에 관련된 일이니 모두가 알고 있어야지." 간부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연기를 뱉으며 우선권을 잡으려는 듯 완강한 어투로 말을 꺼낸다.
"우리 보스께서 무척 화가 나 계셔. 네가 경찰들을 손봐 준 이후에도 박쥐의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았으니까. 경찰들도 오히려 더 나대려고 하고. 게다가 언론에서까지 우릴 우습게 보더군."
"그 원인이 나에게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은데."
"네가 지난 번 회의 때 사태를 전환시키겠다고 말했잖아."
"우리 조직 외의 다른 조직에선 은행 테러 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는걸. 무기 밀매가 어긋나서 얻은 손해를 나에게 넘겨주지 않았으면 좋겠군."
"어쨌든 배트맨과 경찰들을 어떻게 하겠다고 한 건 너야. 최소한의 예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어?"
"좋아."
조커는 가벼이 한쪽 손을 들었다. 부하 중 한명이 기다렸다는 돈 가방을 가져왔다. 타 조직 간부 앞에서 가방 가득한 지폐를 보이자 탐욕스런 웃음이 완연히 드러난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우리도 섭섭하지 않게 답할테니 기분 나빠하지 마. 내가 보스에게 잘 맗겠어." 그는 부하 중 한명에게 가방을 들으라 지시했다. 가까이 다가온 조커가 악수를 청했을 때, 그는 흔쾌히 손을 마주 잡았다. 통증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가느다란 이질감이 파고드는 걸 느끼면서. 간부는 손을 거두었다. 표정을 알 수 없는 조커를 바라보며 약간 미간을 찌푸리면서.
"뭐야, 이건?"
"멋없는 장난이지."
악수를 한 조커의 손엔 머리카락이 연상되는 바늘이 달려 있었다. 아픔이 크지 않았기에 간부는 개의치 않고 몸을 돌렸다. 한 발짝 내딛으려는 때,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뇌수 사이로 찔러들어 온다.
'이 돈을 전부 내가 가져도 되지 않을까?'
조커는 예상과는 달리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우리 측 보스를 두려워 해서 그런 걸까? 아니지, 내가 와서 당당하게 할 말을 했기 때문이야. 난 몸에 달고온 폭탄을 터뜨릴 각오까지 하고 이곳에 왔어. 부하들도 죽음을 전제로 임무를 수행한 거고. 하지만 지금 난 살아 있는 걸. 이건 내 당연한 권리야. 이 돈을 우리측 보스에게 전달하고 나면 나에게 남는 건 뭐지? 시시한 칭찬이나 몇 푼 안되는 푼돈이나 떨어질 뿐. 그런 건 인정할 수 없어. 나는 용감하고 굳은 뜻을 가지고 있지. 나야말로 가장 완벽한 인간이야.
제자리에 서서 주절주절 중얼거리고 있는 간부. 말하는 속도가 아주 빨라서 뭔 말인지 알아 들을 순 없었다. 그의 부하들은 이상한 기색을 느끼면서도 무사히 돈을 받았다는 사실에 안도했고, 큰 생각없이 간부에게 말했다.
"지금 뭐 하세요? 어서 가죠. 더 이상 여기에 머무를 필요 없잖아요."
"내 거야.."
"네? 무슨 말이죠?"
"괜찮으세요?"
"모두 내 거야!"
부하들은 뭐라 반응할 틈도 없었다. 간부가 권총 두 자루를 꺼내 부하들의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으니까. 총성과 더불어 벽면에 뿌려지는 피. 그 모습을 바라보는 조커의 눈은 어떤 기쁨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미 시체가 된 부하들의 몸에 대고 탄창이 빌 때까지 총질을 해대는 간부를 보며 조커의 수하들은 잔인한 웃음을 흘린다. 조커는 천천히 걸어가 간부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흡사 사랑하는 연인에게 하듯이.
"그래. 모두 네거야. 이 세상 모든 게 너를 위한 거야. 그만 가봐. 하늘을 날아서..더 기분 좋게 말이지."
간부의 머릿속은 오직 자신에 대한 생각 밖에 없었다. 나는 올바르다. 나는 강하다. 나는 이 세상의 전부이다. 겹겹이 쌓여 가는 생각에 짓눌린 채 한발 한발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전능해. 하늘을 나는 건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런 목소리에 코가 꿰인 채 마침내 창문에서 뛰어내렸을 땐 더 이상 아무런 삶의 은총을 받을 수 없게 된 상태였다. 조커는 팔다리가 부러진 채 기괴한 형상으로 널브러진 그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결국 이 정도가 네 전부였던 거야."
"시체 치워." 조커는 부하들에게 짤막히 명령하곤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갔다. 바늘이 돋아난 장갑을 휙 벗어던진다. 방금 사용했던 바이러스의 샘플을 바라보며 짙은 미소를 짖는 건 분장으로도 가릴 수 없었다. 자기애에 반응하여 사람을 죽음으로 이끄는 이 바이러스가 흡사 미래를 향한 불꽃처럼 여겨진다. 특히나 그 생각에 쐐기를 박는 사실은 따로 있었다. 바로 20세 미만의 인간에게는 작용하지 않는 다는 것. 자신을 순교자와 동일시하는 조커에게 어린 아이를 죽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흡사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열쇠로 여겨진다.
연구실에서 나온 조커가 맞이한던 배트맨을 다루는 뉴스였다. 범죄에 대한 무관심으로 일관되어 있던 고담 시민들을 일깨운 어둠의 사도. 조커는 혀를 씹기라도 할 것처럼 입을 씰룩거렸다. 광대 마스크를 가지고 있는 부하들을 둘러보며 큭큭 소리내어 웃는다. 이미 조커에게 매료된 부하들에게 그런 모습은 하나의 계시. "너의 최후를 기쁘게 장식하겠어. 박쥐." 조커의 입에서 새어나온 목소리는 바로 앞으로 다가올 순간을 이끄는 타전과도 같았다.
브루스는 하루 일정을 앞두고 보고를 받고 있었다. 고담시에 새로 새워진 큰 규모의 웨인 재단 자선 병원. 그곳에서 열릴 개회식에 참석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알프레드가 추출해준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에 비우며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는다.
"주인님의 계획 중 하나가 또 완성되었군요."
"그래요."
"박쥐라 불리는 것보다 훨씬 더 건전하고 실용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뭐라고 하시건 간에 저는 배트맨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브루스는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알프레드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만들었다. 며칠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배트맨의 활약과 그에 따른 시민들의 이끌림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병원 개회식이 예정되어 있는 날. 격식에 맞게 고가의 정장을 입은 브루스는 동양인 특유의 날카로운 분위기가 별로 드러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고담시 정치의 요인 중 많은 이들이 참석한 자리. 브루스가 모습을 드러내자 사회자가 큰 소리로 그 사실을 알렸다.
"모두 주목해 주십시오. 우리 고담 시의 희망. 브루스 웨인 씨입니다."
가볍게 손을 흔드는 제스쳐를 취하는 브루스. 모두가 박수로 이 젊은 백만장자를 환영했다. 선대 총수 토마스 웨인의 갑작스런 죽음과 동시에 등장한 동양인 소년. 익히 알다시피 소년이 보여준 놀라운 능력은 재단 내에서의 불만을 무마시켰고 대외적으로도 웨인 재단의 막강함을 충분히 알린 바 있었다. 지금 역시 각종 매체의 기자들이 플레시를 터뜨리며 한 마디라도 코멘트를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접근한다. "기자 회견은 잠시 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경호원들의 보좌를 받으며 찾아온 유명인사들과 악수하는 브루스. 대부분이 젊은 검사, 변호사. 그리고 정치 의원들. 각 분야의 귄위자들이었다. 고담시에 불어오는 새로운 바람에 비유할 수 있는 이들.
"이번 자선 병원의 설립에는 총수님께서 큰 결단을 내리셨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연방 굴지의 생산지대를 소유하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런 대대적인 사회 환원을 하신 것에 외신도 주목하고 있는데요."
"향후 웨인 재단의 동향에 대해 조금이라도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요."
"범죄 조직의 위협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하시는 것에 사회적인 시선이 몰리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쏟아지는 질문. 열 아홉 살 소년 브루스는 미리 생각해 놓은 대로 젊은 재벌 총수가 할 법한 느낌의 답변을 이어갔다. 행사는 소프트 드링크와 간단한 다과가 제공되는 식으로, 삼십분 정도 행사에 함께 한 후 브루스는 조용히 창 밖으로 나갔다. 늦은 시각 고담의 야경은 수많은 불빛들이 빛나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미 연방에서도 희망을 버렸던 도시가 브루스 웨인의 수년에 걸친 노력과 범죄를 처단하는 배트맨의 활약으로 새로운 탄생을 꿈꾼다. 주빈이 너무 자리를 비우면 안되겠지. 밤공기에 의탁했던 의식을 거두고 행사장으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배트맨이 사용하는 통신 단말기와 기능을 공유하는 커스텀 스마트폰이 벨 소리를 울린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지만 스마트폰을 꺼내는 간단한 동작에도 주변을 살피는 신중함이 드러났다.
"배트맨. 나이트 윙의 오라클이에요. 들려요?"
"무슨 일이지."
"오늘 웨인 재단에서 새로 설립한 자선 병원 기념 행사가 있는 건 알고 있죠?"
"물론."
"조커를 비롯한 몇몇 조직들이 연합하여 행사 현장을 습격할 거라는 정보가 들어왔어요. 그곳엔 현 고담시의 주요 요인들이 모여 있어서 전부터 표적이 되었던 걸로 추정되요."
"무장한 경찰들이 경호를 맡은 걸로 알고 있는데."
"당신답지 않은 말이군요. 기세가 다소 누그러 들었다고 하지만 아직 범죄 조직의 힘은 강해요. 긴말 하지 않을게요. 우리 나이트 윙은 이미 움직임을 시작했어요. 다들 행사장 주변에 잠복하고 있죠."
"좋아. 나도 협조하지."
브루스는 침착했다. 이미 이곳에 범죄조직의 테러가 있을 거란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행사장으로 돌아온 브루스는 바로 준비된 단상에 섰다. 자선 병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로비 모여있는 인원들. 마이크를 앞에 두고 브루스가 말한 것은 무척 침착한 어조로 이어졌다.
"여러분. 저는 아버지 토마스 웨인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브루스에게 집중되었다. 생전 토마스에게 은혜를 입은 이들이 많아서 였을까. 스무 살도 안된 동양인 소년의 잔잔한 눈빛만으로도 감동을 느끼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얼마나 이 도시 고담을 걱정하셨는지, 어떤 마음으로 선행을 계속하셨는가를 끊임없이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저는 미 연방에서도 손꼽히는 재벌이자 주지사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어요.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은 모두 아버지 토마스 웨인의 뜻을 잇고자 했던 결과물이었을 뿐이라는 것을요. 여러분이 지금 보고 계신 브루스 웨인. 진실되게 살아가고자 하는 이 동양인 소년의 말을 믿어 주십시오. 지금 당장 경찰들의 인도를 따라 퇴실해 주십시오. 질서있게 행동하셔야 됩니다. 이 곳으로 범죄자들의 테러 행윈가 예견되어 있으니까요."
보통의 목소리였지만 그 내면에 느껴지는 어떤 위압감. 사람들은 당황하기에 앞서 그 차분한 어조에서 신뢰감을 얻었다. 브루스는 한번 더 "이것은 농담이나 장난이 아닙니다. 어서 움직여 주셔야 해요."권고했다. 패닉이 일어나지 않고 신중하게 질서를 지켜 로비 바깥으로 빠져 나가는 사람들. 기본적으로 배치 되어 있던 경찰들이 피난을 주도했다. 실탄이 장전된 총을 들고 사람들의 움직임을 돕는 사이, 배트맨의 연락을 받은 고든 경감이 경찰 특공대와 함께 현장에 등장했다. 이 행사에 초대된 이들 중에는 몸이 불편한 이들도 적지 않게 있어 한층 경찰들의 역할이 필요한 상황.
"서둘러 사람들을 준비된 차량으로 인도하도록. 지금 당장이라도 테러가 개시될 수도 있으니 특공대는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해. 다들 서두르게."
고든은 본인도 권총을 장비한 채 빠르고 안전하게 이어지는 대피 현장을 지켰다. 거진 모든 사람들이 빠져나갔을 무렵 브루스는 지하의 배트 케이브에서 슈트를 입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박쥐 마스크를 쓰려고 했을 때, 행사가 이어지는 동안 사람들에게 음료를 제공했던 알프레드가 브루스의 뒤에 와 섰다.
"대피는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행사를 취소시키거나 피난을 권고하신 게 조금이라도 늦거나 빨랐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었겠죠. 훌륭한 판단이셨습니니다. 주인님."
"배트맨일 때에는 브루스를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었나요."
"아직 가면은 쓰지 않으셨으니까요."
알프레드에겐 어떤 위트도 느껴지지 않았다. 순진한 기분에서 법을 어기고 죄를 저지른 촉법 소년을 대할 때 필요한 듯한 목소리. 법적으로 책임이 없다해도 모든 것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은 진리였다. 브루스가 가면을 쓰는 순간, 알프레드는 벽면을 차지한 수많은 모니터를 바라보아 배트맨을 책망하려는 마음을 접었다.
조커의 주도하에 몇개의 조직이 연합하여 병원을 습격하는 것이 범죄자들의 계획이었다. 총으로 무장한 그들은 대나무를 가르듯 단숨에 사격을 가할 준비를 했다. 쳐들어간 병원 내부에 아무런 사람이 없다는 것에 당황했고, 이어지는 경찰의 연막탄 세례에 무방비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고든은 배트맨이 권유한 대로 자신을 비롯해 모든 경찰대원들에게 방독면을 쓰게 한 상태였다. 지난 번 은행 가스 테러에서 희생된 이들에 대한 슬픔과 복수심은 아직 건재하다. 하지만 고든은 원한을 품지 않고 최대한 냉정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연막탄으로 일차적인 진압을 개시한 경찰들은 테이저 건을 사용해 진형이 무너진 범죄자들을 확실히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상황을 확인한 배트맨은 병원 내부는 경찰들에게 맡겨도 괜찮을 거라 확신했다. 정보망으로 확인한 바로는 조커가 경찰들에게 소위 '심판'을 내린다며 마음먹고 계획한 습격이었다. 일단 병원 내부에 일반인은 아무도 없다. 병원 건물 꼭대기에 서서 센서를 켜는 배트맨. 차량 십여대가 빠른 속도로 다가옴을 확인한다. 생각하기 전 판단한다. 바로 건물 밑으로 뛰어내리는 배트맨을 맞이하듯 배트 모빌이 나타났다. 중화기를 들고 있는 범죄자들이 차량에서 내리는 것과 배트 모빌이 전투 모드로 변신하는 건 거의 동시에 이뤄진다.
조커는 무장한 부하들에 둘러싸인 모습으로 차량 위에 서 있었다. 흡사 친구에게 인사하듯 배트맨을 향해 예를 표하는 몸짓을 한다. 자신이 설정한 분위기에 취해 상황을 즐기는 모습은 기괴함의 영역. 그런 기행에 영향 받지 않고 배트 모빌은 체인 건을 발사했다. 가장 가까이 있던 차량이 그대로 폭파되고, 범죄자들의 손에 들린 기관총들은 일제히 불을 뿜었다. 배트 모빌이 단순한 방탄 재질이었다면 이미 파괴되었을 만큼 압도적인 공격. 하지만 웨인 재단 과학기술의 정수가 모아진 배트 모빌은 군용 장갑차에도 뒤지지 않는다. 배트맨은 유도 미사일 발사 버튼을 눌렀다. 허공을 날아 지정된 목표에 정확하게 명중하자 대부분의 범죄자 측 차량은 무력화 되었다.
"멋진 환대에 감사하지. 배트맨."
걸레짝이 되어 불이 붙은 차량 사이를 조용히 걸어서 지나치는 조커. 기름과 화약 냄새는 그에게 정령의 생명수와도 같았다. 부상당해 바닥을 뒹구는 부하들 중 한명이 가지고 있는 기관단총을 집어 든다. 흡사 마리오네트는 인형을 조작하는 듯한 간결한 동작으로 방아쇠를 당기자, 배트 모빌의 조종석 유리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배트맨은 조커의 사격 공세에 바로 배트 모빌에서 뛰어 올랐다. 분장으로 감춰진 얼굴. 가면에 덮인 얼굴. 자신의 원래 모습에 대해 반대되는 감정을 품고 있는 두 영혼이 서로를 바라본다.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배트맨은 빠르게 달렸고 조커의 손에는 이십 센티 길이의 칼이 들렸다. 조커는 찌르기 공격을 구사하고, 배트맨의 팔에 달린 날붙이 부분이 민첩한 동작으로 방어했다. 배트맨의 정확한 무술 동작과 예측할 수 없는 조커의 몸짓은 장르가 다른 춤을 연상하게 했다. 확실한 차이가 있다면 조커는 직접적으로 상대의 목숨을 빼앗고자 한다는 것. 격투에 비정상적으로 강한 조커였지만 모든 무술을 익힌 배트맨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칼을 든 손을 꺾으며 정확하게 조커의 턱에 일격을 꽂아 넣는다. 조커는 안 주머니에 있는 송곳형 칼로 배트맨의 목을 노릴 생각을 했지만, 급소에 제대로 들어온 충격은 의식을 남긴 상태에서 줄 끊어진 인형처럼 지면에 쓰러질 뿐이었다.
"이제 끝났어."
배트맨은 조커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대화를 차단하듯, 어쩌면 대화를 시작하려는 의도인지도 모른다. 바로 주먹으로 조커를 두들겨 팬다. 안면을 들이 받아 입과 코에서 피가 줄줄 날 때까지. 무자비하게 얻어 맞는 와중 조커는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뇌에서 끊임없이 각성제가 분비되는 것처럼. 조커의 하얀 살결이 피투성이로 물들고 나서야 배트맨은 동작을 멈췄다. 배트 모빌의 화력 아래 난장판이 된 부하들의 생사 따윈 관심이 없다. 죽을 정도로 자신을 때린 배트맨에게 무언의 항의라도 하듯 두 팔을 벌렸을 뿐.
"아아, 너무 아파. 정말 정말 아파 죽겠어. 어서 날 죽여..."
"네 녀석이 고통을 줄 때도, 받을 때도 쾌감을 느끼는 정신병자라는 건 알고 있어."
"이런. 들켰네. 그럼 날 죽이지 않고 뭐하는지 모르겠는걸. "
"난 널 죽이지 않아. 죗값을 치루게 할 뿐이지."
"경찰 같은 말을 하는 군. 네 녀석이 지금껏 병신으로 만든 녀석들이 한 둘이 아닌 데 말야. 잘 찾아보면 죽인 인간도 적지 않을 걸."
"나 역시 정의가 아니니까."
"어쩌면 넌 나와 정반대일지도 몰라. 나에겐...이런 게 있으니까 말이야!"
조커는 주머니에 있던 가스 주입기를 꺼내 배트맨의 입에 갖다 대었다. 그 동작은 오직 광인에게만 허락된 빠른 움직임. 조커의 구두 앞굽에 돋아난 날붙이가 배트맨의 복부에 찔러 들어갔다. 배트맨은 잇달은 공격에도 조커를 붙잡고 있었다. 오히려 목을 움켜잡은 손엔 한층 더 무서운 힘이 깃든다. 조커는 숨조차 내쉬기 힘들어 이마의 실핏줄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지만, 분장으로 덮인 표정엔 오히려 더욱 큰 환희의 웃음이 지어졌다.
"너에게 주입한 가스를 도시 곳곳에 준비해 놓았어. 너도 제법 하는 녀석이니 지난 번 은행에서 가스에 대해 조사했겠지. 이건 단순간 독가스가 아니야. 스무 살 이하의 아이들에게는 반응하지 않거든. 이 타락한 고담시를 정화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 초석이지."
헐떡거리는 와중에도 거만하게 말을 늘어놓은 조커는 크게 웃어 젖혔다. 배트맨에게서 조금 힘이 빠지는 틈을 타 몸부림을 치며 강한 팔에서 벗어난다. 입술 사이로 바람을 내뱉으며 구토하는 듯 불쾌한 숨소리를 내뱉는 모습엔 승리감이 깃들어 있었다.
"죽기 전에..어디 박쥐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나 봐야겠어."
조커는 무릎을 꿇은 배트맨에게로 다가가 잔혹한 몸짓으로 가면을 벗겼다. 이제 열 아홉살이 된 동양인 청년의 얼굴. 이미 고담시에선 유명인사이자 범죄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브루스 웨인이 그곳에 있었다. 조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뒷걸음질을 쳤다. 아직 앳된얼굴에 들어난 결연함과 당당함은 한 겨울에 내리쬐는 태양과도 같았다. 배트맨, 브루스는 몸을 일으켰다.
"브루스..웨인. 토마스의 후계자..네가 배트맨이었다고?"
"그래. 그리고 네가 만든 바이러스가 통하지 않는 나이이기도 하지. 네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도 알고 있어."
"하하..하..토마스가..난 결국 토마스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군..그를 총으로 쐈을 때 모든 게 내 생각대로 될 거라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어. 마지막 순간까지 내게 고담을 지켜달라고 하셨지. 조커..아니, 라이트 스미스. 네 패배다."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조커는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이미 도시 곳곳에 가스를 준비시킨 사실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브루스는 경찰에게 조커를 연행하라 연락한 후 바로 클로를 발사해 가까운 건물 맨 윗층으로 올라갔다. 가면을 다시 쓰면서, 단말기를 열어 루시우스에게 연락을 취한다.
"루시우스. 조커는 도시 전체에 바이러스를 심어 놓았어요. 백신은 준비되었나요?"
"예. 충분한 양을 배트 윙에 탑재해 놓았습니다. 바로 보내지요."
배트맨은 주변을 바라 보았다. 달의 하얀 시선 아래에 펼쳐진 야경. 곧 배트 윙이 가까이 왔다는 신호를 받고, 건물 아래를 향해 뛰어 내린다. 다음 순간, 밤 하늘을 해치고 도시의 가장 높은 곳으로 솟아오르는 검은 비행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전투를 마치고 범죄자들을 구속한 나이트 윙과 경찰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모인다. 경찰들에게 끌려 가는 조커는 흡사 시체처럼 축 늘어진 채 모든 의욕을 상실한 듯했다. 배트 케이브의 루시우스는 바이러스가 있는 위치를 실시간으로 전송하고, 알프레드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배트 윙은 백신을 분사하는 형태로 도시를 향해 뿌렸다. 바이러스가 퍼지기 전 정확히 포인트를 맞추어 살포했기에 사람들에게 감염될 틈도 없었다. 도시 전체를 가로지른 배트 윙은 배트 케이브로 귀환했다. 수트를 입고 있었지만 조커의 칼에 찔린 복부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알프레드는 바로 응급조치를 했고, 가면을 벗은 브루스는 지친 와중에도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조커가 준비했던 모든 바이러스가 사멸되었습니다."
루시우스의 조용한 말투. 주인에 대한 신뢰와 감명이 담긴 그 목소리는 브루스의 마음을 한층 편안하게 했다. 두 명의 노인이 보호하는 가운데, 오늘 밤 많은 일을 한 열 아홉 소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깜빡 잠이 들었다.
몇일 후, 고담 정치계에 새롭게 취임한 하비 덴트의 연설이 있었다. 브루스 웨인도 참가한 자리였고 고든 경감도 자리에 함께 했다.
"우리 고담은 오랜 시간 어둠에 덮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을 기점으로 새로운 도약을 이루자고 모든 분들에게 부탁하는 바입니다. 더 이상 범죄의 손길이 시민들을 위협하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정의를 되찾고, 정직한 삶을 사는 모두가 정직한 일상을 누릴 권리를 되찾을 것을, 저는 여러분들 앞에 선언하겠습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박수 소리. 브루스는 정의감에 넘치는 하비 덴트를 주시하다가 조용히 자리를 빠져 나왔다. 그때였다. 고든 경감이 브루스에게 말을 걸어온 건. 브루스는 가벼이 미소를 지었고 고든 경감은 경례를 붙였다. 고담시에서 높은 평판을 받고 있는 브루스. 경찰로서 경의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고든 경감님."
"반갑습니다. 웨인 회장님. 잠깐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무슨 일이시죠?"
"나이트 윙 자경단에 장비를 제공하셨다는 소문을 들어서 말입니다."
"고담을 위해 뭔가를 해 보려는 젊은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은 생각에 한 일입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런 말씀을..다만 감사하고 싶을 뿐입니다. 고담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시지 않는 회장님께..경찰로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브루스는 가벼운 제스쳐를 취한 후 대화를 끝마쳤다. 별 반응을 보이진 않았지만 고든 경감의 인사는 소년의 마음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배트 케이브로 향한 브루스는 배트맨 수트 앞에 서서 한참을 있었다. 이 도시에서 용기와 정의를 믿고 있는 이들에게 하나의 상징이 된 어둠의 기사. 모니터에서 새로운 범죄 현장을 캐치한 루시우스의 보고에 브루스는 수트를 입었다. 알프레드는 또다시 밤을 향해 나아가려는 배트맨을 향해 조용히, 하지만 충분히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다녀오십시오. 주인님."
배트맨은 잠깐 멈칫하며 알프레드를 뒤돌아 보았다. 체념이 아닌 믿음이 어려있는 노인의 눈과 가면 아래 보이는 정의감에 찬 소년의 눈이 마주친다.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배트맨이 사라지고 난 후, 알프레드는 수많은 전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짧게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부디 어둠을 가로지르는 주인의 앞날에 빛이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