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볕이 따스한 어느 날, 대대로 내려온 저택 마루에 앉아 아버지와 나누었던 이야기. 저 멀리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는 숲 속의 풀 내음이 드리웠고, 그 어느 때보다 푸르던 하늘에는 검푸른 빛의 맹금류가 땅에 그림자를 그리며 빠르게 날아갔다.
“자세가 많이 좋아졌더구나. 그래, 내가 네 나이였을 때보다도 더 말이다.”
그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린 시절이었다. 오직 낮에는 검을 휘두르고, 밤에는 서적을 읽으며 보냈던 그때. 어린애답지 않다며 혼나기는 했어도, 그 뒤에 따라오는 칭찬에 마음이 설레어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던 그런 한때.
“... 아버지, 아버지는 삶 속에서 두려웠던 적이 있으셨나요?”
“너에게 두려움을 떨쳐내라 누누이 말했지만, 나 또한 그것에 휩싸인 적이 수없이 많단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을 뽑으라면... ”
“강력한 장수가 앞길을 막았을 때입니까? 아니면 빠져나오지 못할 함정에 몰렸을 때? 무엇이 아버지를 제일로 두렵게 만들었던 것입니까!?”
“... 두려움을 논하면서도, 너의 그 두 눈은 밤하늘의 별빛보다도 빛나는구나. 그래, 되새겨볼까. 그때는 바로…”
아아, 아버지. 저는 지금 너무나도 두렵습니다. 목검을 열심히 휘둘렀던 근성도, 아버지가 무사하길 빌었던 바램도. 당신을 따라, 아니. 당신이 자랑스럽게 여길 호위무사가 되겠다고 쏟아부었던 열정도. 지금은 그 어느 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내가 아직 무사로서 수련을 쌓아가던 적, 참여했던 전장에 한 여자 검객이 있었지. 날카로운 눈빛을, 가느다란 손끝을. 마치 꽃잎이 흩날리는 듯 흔들리는 분홍빛 머리칼을 가진 한 존재.”
“... 아버지를 두렵게 만들었다는 존재가. 그저, 여자 검객 한 명이란 말입니까…?”
“... 나도 처음에는 너처럼 무시했단다. 전쟁터에 갑옷은커녕, 팔보호구 같은 방어구를 하나도 걸치지 않은 처녀가 검 한 자루만을 들고서는 전투에 임하겠다고 나섰으니 말이다. 누구보다도 빠르게, 제일 먼저 쓰러지거나, 줄행랑을 칠 줄로만 알았지.”
“... 하지만 그녀는 달랐어. 그 무엇보다… 그래, 그녀의 걸음은 화살보다 빨랐고, 그녀의 칼놀림은 그때까지 지켜보았던 그 어떤 검술보다 매서웠지. 그러면서도 부드러웠어.”
“아버지의 말씀대로라면, 그것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존재가 아닙니까? 마치 귀신과도 같은 존재에게서... 그런 존재에게서 어떻게 살아남으신 겁니까…?”
“그녀와 내가 같은 편이었으니까. 그녀는 너의 할아버지이자, 나의 아버지가 부른 용병이었어.”
“... 예…? 할아버님이 말입니까…?”
“그래, 나에게는 한 톨의 언급도 없이 부르셨지. 그렇기에 나는 속으로 낙심했단다. 그때의 나는, 아버지께서 나를 믿지 못했기에 그녀를 고용하신 줄로만 생각했었지. 또, 그렇게 행동했고.”
그때, 저는 언뜻 아버지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했습니다. 인정받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쏟았고, 보답하기 위해, 수만 가지의 상상을 속으로 그려온 나날을. 그 모든 것이 마치, 한순간에 부정당하는 듯한 그런 느낌을.
“... 나는 욱하는 마음에 영주에게 별동대를 편성해 적진의 옆을 칠 것을 제안했고, 적들에게 전쟁의 판세가 몰려가는 것을 지켜보던 영주는 그것을 허락했지. 아버지가 나에게 그토록 성을 내신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어.”
“그럼, 그 별동대에 그 여자 검객도 같이 편성된 것입니까?”
“그래, 나와 그녀를 제외하고도 몇몇의 믿을 수 있는 이들이 자진해서 나왔지. 분명 무모하고, 무지한 작전이었지만. 그들은 나의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고 온 것이었단다. 지금은 그들과 웃으며 추억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그들의 믿음을 배신한 것과 마찬가지였지.”
아버지를 향한 할아버지의 행동은 분명 당신을 걱정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겠죠. 그건, 당신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던 당신의 얼굴은 너무나도 슬퍼 보였으니깐...
“그저,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에, 나는 사리를 분별하지 못했다. 그저, 적장의 목을 베어 보이면, 아버지가 나를 인정해주실 거라는 생각만이 머리를 가득 채웠지. 호통치시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별동대와 함께, 적진 옆에 자리한 숲으로 숨어들었단다.”
“이제야 기억이 나는군요. 예전에 하인들에게 들었던 아버지의 무용담 중 하나였는데… 분명, 적진 한가운데까지 파고들어 적장의 목을 베어 전쟁의 판도를 바꾸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전략은 성공한 것이로군요.”
“... 그래, 결과적으로는 성공이었지. 하지만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야. 바로 그 여자 검객이지. 나는 그저 그녀의 뒤꽁무니를 쫓으며 잡졸 몇을 벤 게 전부였단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모든 이들이 아버지의 업적이라 노래 부르는 것입니까?”
“...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허구가 아니란다. 그렇다고 진짜라는 확신 또한 없지만 말이다. 판단은 너에게 맡기마. 들어보거라, 우리 별동대는 숲에 숨어 적진 옆으로 파고들었단다. 적들과 부딪혀 칼을 휘둘렀고, 적의 창을 피해 우리 병사들은 한데 뒤엉켜 바닥을 굴렀단다. 그 찰나의 사이에 나는 보았지. 그녀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그녀가 한 번 내젓는 칼날에 셋의 적을 베어내고는 그 무엇보다 빠르게 안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그때의 저는 그것이 그저 아버지가 지어낸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저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그저 거짓이라는 자극을 조금 섞은 경험담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달려갔다. 아니, 내가 그녀를 열심히 쫓아가는 것이었지. 나와 그녀가 별동대 무리와 멀리 떨어졌다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계속해서 말이다. 그리고 도착했지. 적 영주의 코앞까지 말이다. 잡졸들이 영주와 우리 사이에 방패로 벽을 만들었고, 적 장수 하나가 그 방패와 우리 사이에서 자리를 지켰지.”
“그 벽을 어떻게 뚫으신 겁니까? 숨겨둔 비책이라도 있으셨던 겁니까?”
“... 아니, 그녀는 그저, 한 번의 칼질을 했을 뿐이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람에 실려 가는 나뭇잎 같은 칼질 한 번.”
“... 예…?”
“믿기지 않겠지. 나도 믿지 못했으니. 하지만 일어났다. 마치, 기적과도 같은 현상이. 적들의 깃발도, 장수도, 잡졸들과 방패와 창도, 심지어 적 영주의 목까지. 그 모든 것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렇게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우두머리를 잃은 적들은 그저, 파도에 휩쓸려가는 모래처럼. 스르륵 무너져갔지.”
“... 그게 끝인 것 입니까? 아니, 그렇지만. 그건 불가능 한 일이지 않습니까? 검과 검이 맞닿은 것도, 숨어서 독화살을 쏜 것도 아닌… 그저 칼질 한 번이라니…”
“그래, 그 한 번에 적들은 그저 쓰러져갔지. 하나. 특별한 게 있었다면… 적들은 벤 그녀의 검 또한 반으로 부서졌다는 것 하나 정도일까. 그걸 본 그녀는 그저 ‘아직 미숙하네.’라며 짧게 혼잣말을 하더구나.”
“... 하지만, 분명 아버지가 해내신 일이라고…”
“그거야, 그녀가 그 업을 다 내게 넘겼으니 그런 것이지. 별동대의 다른 이들이 도착했을 때 그 자리에 서 있던 존재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적 영주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는 나 하나 뿐이였다고 하더군.”
“그녀는 사라진 것입니까…? 귀신처럼…?”
“사라진 것은 맞았지만, 떠난 것은 아니었단다. 그녀는 분명 그 별동대와 함께 나타났으니 말이다. 그들의 뒤에서 나타나, 자신은 마치 겁먹어 도망쳤다 돌아온 것 처럼 행동하더구나. 나는 순간 방금까지의 경험이 허상은 아닐까 의심했지만, 그 결과들은 모두 현실이더군.”
“그 여자 검객은… 어쩌면 전설 속에 나오는 요물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럴지도 모르지. 전쟁이 끝나고 벌어진 잔치에 나는 우연히 그녀를 만났어. 그리고 추궁했지. 하지만 돌아온 것은 다짜고짜 날아온 대련 신청이었단다. 이기면 모든 것을 말해주겠다는 조건을 붙인.”
“이기셨습니까…?”
“아니, 참패였지. 그것도 대참패였단다. 수년간 쌓아온 검술이었지만, 그 날. 그 밤에는. 그녀의 머리카락 한 톨에도 닿지 못했지. 대련에서 이긴 그녀는 그저 웃으며 사라졌어. 그 이후, 나는 아버지와 병사들 사이를 수소문하며 그녀에 관해 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대답 뿐이었지. 그녀는... 그래, 하룻밤의 꿈처럼 조용히 다가와, 그저 뺨 한 대를 후린 듯 큰 충격만을 남기고 사라졌지.”
“... 분하셨습니까? 그저 한 명의 검객에게 아무것도 못 했다는 것이…?”
“처음에는 그랬지. 하지만 이읃곳 그것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나는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단다. 젊음의 혈기를 억누르지 못해 마음대로 날뛰었고, 가능성이 없는 전장에 병사들을 내몬 자신을 되돌아볼 기회가 생긴 거였지.”
“감정에 휘둘리지 마라. 아버지께서 누누이 말씀하셨던 말이 거기서 배우신 것이로군요.”
“그래, 마음속의 감정에 사람은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지. 마음속 깊이 잠재되어있던 힘을 끌어내기도 하며,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을 해낼 의지를 일깨우기도 하지. 하지만 그런 감정에 휩싸여 그저 본능대로만 움직인다면, 그것은 짐승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란다.”
‘
‘
‘
“그렇기에, 자신을 더욱더 갈고 닦거라. 너 또한 앞으로 수많은 전장을 누빌지도 모르겠지만. 크고, 작음을 떠나 그 모든 곳에서 만약, 부러진 검을 쥔 무사가 있다면… 한 번쯤 검을 맞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분명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니 말이다.”
‘
‘
‘
“변화의 바람이 부는구나. 어쩌면 전쟁의 근본을 뒤흔들 그런 바람. 그렇기에 너는 좀 더 어릴 적을 소중히 여기거라. 나중에 어른이 되면 깨달을 것이다. 추억은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은 앞으로를 살아가기 위한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때로는 회상하고, 때로는 사랑하고, 때로는 이불 속에 파묻혀 방바닥을 뒹굴 거리며 말이다. 알겠느냐?”
‘
‘
‘
“나는 너를 믿는단다. 너는 나보다 더 나은 재능을 가졌으니 말이다. 가문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싶지 않다면, 자유롭게 세상을 여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잊지는 말아라. 노란색 꽃문양을 가문의 표시로 삼은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은 대대로 남을 지키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는 것을 말이다.”
‘
‘
‘
그것이 마지막. 드문드문 기억나는 행복했던 회상의 끝. 그 뒤가 자세하게 떠오르지 않는 것은 오래되어 바랬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걸 잊을 정도로 내가 닳고 닳은 것 때문일까. 곧 아버지를 만나러 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따라 당신의 윤기를 잃은 털이, 무뎌진 손톱이 너무나도 그립습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버지를 뵙는 게 너무나도 두렵기도 합니다. 지금의 저를 보면… 당신이 크게 실망할지도 모르기에…
“어이 거기 형씨랑 아가씨. 우리한테 잠시 시간 좀 내주는 게 어때?”
“뭐야? 반쪽짜리랑... 괭이 하나네. 이런 시국에 사랑의 도피라도 하는 건가? ”
“형님, 어떻게 처리할까요? 여자 쪽은 꽤 상등품인 거 같습니다만.”
숲 속 사이에 트인 길 한가운데. 주위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나무랑 수풀뿐인 언덕에, 강도무리로 보이는 남자 넷이 두 명의 일행을 둘러싸고 있었다.
강도들은 키도 서로 달랐고, 생긴 것도 달랐지만, 그들의 행색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며칠을 씻지 않아 때가 낀 듯 꾀죄죄한 얼굴과 몸. 그 위에 걸친 옷은 이미 흙을 뒤집어 쓴 듯 엉망이었다.
마치 어디선가 도망쳐 나온 듯한 모습을 하고서, 전부 허리춤에 검을 한 자루씩 차고 있었다. 그런 엉망인 모습을 한 무리가,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이를 향해 건들건들 걸어오고 있었다.
“... 남자는 베어버려라. 검과 여자는 가지고 간다.”
“예입-!”
그들의 뒤에서 우두머리로 보이는 큰 덩치의 남성이 내리는 명령을 들은 다른 세 명의 부하는 그 말에 즉각 대답하고서는 허리춤에 있던 검집에서 빠르게 검을 뽑아들었다. 드문드문 이가 나간 것들뿐이었지만, 누군가를 위협하기에는 충분한 물건이었다.
“... 옴마야. 요새 사람들은 매섭구먼. 쏘아내는 말뽄새를 봐서는, 쉽게 보내주지는 않을 거 같은디. 우짤낀데? 아직도 낑낑거리나?”
강도들에게 위협을 받고있는 상황임에도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태연한 여자. 그리고 그 뒤에서 강도들을 노려보며 생각에 빠진 남자. 두 사람은 그 위험 속에도 침착하게, 또 냉정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 내가 해보겠다냐. 이번에는 진짜로 말이다옹.”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앞으로 조금 걸어 나왔다. 그들의 전방에 셋, 뒤에 하나. 적이 총 네 명인 것을 확인한 남자는 자신의 허리춤에 자리한 두 자루의 검 중 밑에 것에 손을 얹었다. 남은 손으로 검집을 잡고, 무언가를 결심하듯 그저 두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뭐,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포기해도 되는 기고. 괜히 무리하다 실수하지 말고, 알겠제?”
“... 생각해보겠다옹.”
남자는 검자루를 힘껏 잡아끌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햇빛이, 겁집에서 빠져나오는 회색빛의 검신을 찬찬히 흝으며 사라져 갔고, 매끈하게 검을 빼어낸 남자는 검집을 잡던 손 또한 칼자루를 감싸 쥐었다. 남자의 두 손으로 쥔 검의 끝은 강도들을 향하였고, 이를 본 졸개들이 남자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얼씨구, 꼴에 자존심은 있나 보지? 얌전히 꼬리 내리고 도망갔으면 목숨은 건졌을 텐데 말이야.”
“하하, 여자 앞이라고 객기 부리다가는 진짜 골로 가는 수가 있는데 말이야?”
졸개들은 남자를 향해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여덟 걸음 이상이었던 거리가, 순식간에 반이나 줄어들었고, 남자는 그 모든 순간순간에 집중하며 경계했다. 하지만 그 상황 속에서도 그의 정신이 향하는 것이 오직 적들만은 아니었다. 그는 적들만이 아니라, 자신이 검을 들고 있는 두 손 또한 경계하고 있었다.
“이야아아-!”
졸개 하나가 머리 위로 검을 들고서는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의 거리는 눈 깜짝할 새에 코앞까지 줄어들어 있었다. 자신을 향해 휘두르려는 적의 검을 보고, 남자는 생각했다. 너무나도 허술하다고, 빈틈투성이에, 동작과 동작 사이를 연결하는 간격 또한 컸다. 검을 쥐고는 있지만, 그는 검술을 단련한 이는 아니었다. 그 짧은 순간의 눈대중으로 남자는 그렇게 판단했다.
상대를 겁주기 위해 외친 함성도, 압박하기 위해 다져온 강압적인 위세도. 그 남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것은 오직 적의 자세, 날아오는 검의 방향과 속도. 그리고 그것을 행하는 두 손뿐이었다. 마치 한 수 앞을 내다보듯. 그는 옆으로 움직여 강도가 휘두른 검을 부드럽게 피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을, 이미 성공한 듯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강도를 향해 휘둘렀다. 승부는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강도가 휘두른 검은 남자를 빗나갔고, 남자의 칼날은 강도의 면전까지 다가섰다.
하지만 조금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강도의 얼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멀쩡했다. 머리카락 한 톨 정도의 거리를 두고, 남자는 검을 끌어치는 자신의 손목을 멈추었기 때문이었다.
“... 뭐,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먼저 달려든 동료를 뒤에서 지켜보던 또 다른 졸개 하나가 눈앞에 벌어진 결과에 놀라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것을 본 남자는 마치 화를 내며 소리쳤다.
“아, 몰라! 다음이다냐! 다음에는 꼭 한다냐!”
남자는 강도의 얼굴에서 빠르게 검을 내리고는 그것을 쥐고 있던 왼쪽 손을 뒤로 젖히며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방금까지 자신의 눈앞에 멈춰 섰던 칼날이 있던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강도의 면상을 향해 강하게 날렸다. 남자의 주먹을 맞은 강도는 얼이 빠진 얼굴로 하늘에 침을 튀기며 뒤로 나자빠지더니, 뒤에서 달려오던 다른 졸개와 함께 부딪혀 같이 땅바닥을 굴렀다.
“... 결국, 아직은 샌님인기라... 내기에서는 내가 이긴기다. 알겠제~?”
“쳇, 알겠다냐. 하지만 일단...”
여자를 향해 혀를 차던 남자는 들고 있던 검을 도로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그 바로 위에 있는 두 번째 검, 오래되어 보이는 목검을 뽑아내어 손목을 한 바퀴 돌리며 가볍게 휘저었다.
별다른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 평범한 목검이었다. 특별한 문양도, 세련된 장식도 없이. 그저 매끄럽게 깎은 나무로 만들어진 그런 목검. 자칫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보면 그저 나무 몽둥이로 보일 그런 목검을 손에 쥔 남자는 그것을 두 손으로 쥐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지금 장난하는 줄 아나!!”
“으아아-!!”
남자의 앞에서 땅바닥을 넘어져 있던 졸개 두 명이 다시 일어나 달렸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적들을 확인한 남자는 다시 한 번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는 두 개의 검이 동시에 남자를 향해 나아갔다.
“쿠헉-!”
“푸흡-!”
뭉툭한 것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세 번 빠르게 울려 퍼졌다. 허공을 향해 누군가의 침이 대량으로 튀었고, 이번에는 확실한 결과가 났다. 남자를 향해 달려들던 졸개들의 무릎이 땅바닥에 닿았다. 그리고는 그들의 상체가 옆으로 스르륵 쓰러져갔다.
승자는 목검을 휘두르던 남자였다. 졸개들은 그저 기절한 듯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고는 그 어떤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 뭐, 뭐, 뭐야…?”
남자의 뒤에, 여자의 뒤에 있던 남은 졸개 하나가 그 모습을 보고는 말을 더듬었다. 목검을 든 남자를 상대로 자신의 동료 두 명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상대가 무슨 요술을 부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당장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는 알았다. 그는 달렸다. 그리고 붙잡았다.
“가만히 있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이 여자 목숨은 없는 줄 알아!!”
서투르게 또 급박하게 자신을 협박하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남자는 그곳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뒤에 있던 일행인 여자의 목에 강도의 칼날이 드리워져 있는 모습을 본 남자가 처음 행한 행동은.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하아… 적당히 하라냐.”
“뭐? 이게 미쳤나? 헛소리 그만하고 당장…”
그 졸개는 순식간에 말을 잃었다. 방금까지 자신의 앞에서, 쉽게 헤쳐나오지 못할 정도로 강하게 부여잡고 있었던 존재가, 지금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그는 연기 같은 허공에다 이 빠진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 아재요. 이리도 가녀린 처자를 그리 험악하게 당기싸면, 툭 하고 부러진다 아인교?”
그의 뒤쪽에서 살며시 속삭이는 귓속말에, 졸개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그 목소리에서 배어 나오는 억압감. 마치, 짐승이 이빨을 가는 듯한 불쾌감. 자신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듯한 공포감. 분위기에 억압당한 졸개는 온몸에 못이 박힌 듯, 그 자세 그대로 멈추어 그 어떤 발악도 하지 못했다.
“... 뭐, 이, 이게 무슨…”
“여자를 품을 때는 말이요. 요렇게 뒤에서 부드럽게 감싸는 거라요... 천천히, 그리고 살그머니-.”
졸개는 두려움에 떨었다. 자신의 목을 감싸는 두 손이, 마치 인간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날카로운 발톱과 함께 뿜어져 나오는 듯한 차가운 기운을. 강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감싸지는 그 손이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의 머리통과 몸을 따로 분리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그는 속으로 느꼈다. 아니, 본능이 깨달았다.
“사, 사, 살려주세요. 다신 안 할게요. 다,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졸개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다리뿐만이 아니었다. 손도, 몸도, 머리통마저. 그 어떤 신체 부위 한 곳도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모든 구멍이란 구멍에선 한가득 물이 새어 나왔다. 눈도, 입도, 코에서도. 이마에선 땀이 비 오듯 흘렀고, 하반신에서 흘러나오는 미적지근한 액체가 졸개의 바지를 빠르게 적셔나갔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엔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티끌만큼도 남아있지 않았다.
여자는 펼친 두 손의 소지를 접었다. 마치, 포식자에게 붙잡힌 피식자처럼. 그는 자신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듯한 죽음을 가까이에 두고, 그저 여자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내가 아재를 우째믿는교? 이미, 내한테 칼을 들이밀었뿌면서.”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사, 살려만 주시면 뭐든 다 하겠습니다. 제발.”
강도의 입에서 여자가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그녀는 양손의 약지를 접었다. 한 발짝, 남자는 자신의 행한 행동의 결과에 다가갔다.
“말 잘합시데이. 내는 말이죠. 질기고, 퍽퍽한 고기보단, 연하고 윤기가 잘잘 흐르는 고기를 윽수로 좋아하는디....”
또 한 번. 이번에는 중지가 접혀 들어갔다.
“금수도 그렇지만, 사람도 똑같더라요. 겁이 많으면, 고기가 부드럽고...”
검지가 접혔다.
“노력을 안하믄, 곱씹을 때마다 기름이 줄줄 배어나오지예…”
여자는 마지막 엄지 두 개를 천천히 접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반쯤 접혔을 때쯤. 그것들을 지켜보던 남자가 여자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야히리! 그쯤에서 멈춰라냐!!”
“... 칫, 참말로 이런 데에서는 재미없는 남자인 기라. 아재요. 대답은 우째 됬는겨?”
침을 꼴깍 삼키며, 자신의 목이 아직 붙어있는 것을 확인한 졸개는 굳어있던 입을 빠르게 움직였다.
“... 다, 다시는 강도질을 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무고한 이들을 향해 칼을 빼어들지 않겠습니다.”
남자의 속사포 같은 대답을 들은 여자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그럼, 내랑 약속 하나 합시데이. 만약, 아재가 한 번만 더 선량한 사람들 상대로 나쁜 짓 하믄, 내가 찾아갈 끼요.”
“예, 예, 예.”
“그리고는 홀딱 베끼가, 솥에 넣어 삶아가꼬는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씹아무뿔거라요. 깨작깨작도. 야금야금도 아니라, 게걸스럽게 한입씩 베어가, 탈 나지 않게 꼭꼭 씹어 무글 끄라요. 그 말인 거 우째 이해했는교?”
“예, 예, 예.”
“후후, 그럼. 우리, 다시는 볼 일 없게 단디 삽시데이.”
강도의 목을 조르던 여자는 자신의 두 손을 재빠르게 풀어 졸개의 어깨를 팍하고 가볍게 내리쳤다. ‘촥’하고 살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졸개는 입에서 한가득 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보던 남자는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뭐, 자업자득인거다냐.”
방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짓는 태연한 미소와 가볍게 흔들리는 손바닥을 본 남자는 남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지금까지 졸개 세 명에게 일어난 일을 지켜보고 있던 강도단의 우두머리와 남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래, 이제 너만 남았다냐…”
“...”
우두머리는 남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큰 덩치를 앞세워 남자 앞에 멈춰 섰다. 우두머리는 남자를 내려다봤고, 남자는 우두머리를 올려다봤다. 약간의 정적 후, 먼저 움직인 것은 강도단의 우두머리 쪽이었다.
“... 선생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번에는 한 번만 용서해주십쇼.”
순식간이었다. 그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무릎을 꿇고, 땅에 머리를 조아리는 데 걸린 시간은 참새가 눈앞을 지나가는 것보다 빨랐다.
“앞으로 착하게 살겠습니다. 선생님, 아니 형님이라 부르겠습니다. 관용을 베풀어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주시지 말입니다.”
공손히 두 손 모아 조아리며 빠르게 용서를 비는 그의 행태에, 남자는 허탈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그의 뒤를 여자가 천천히 걸어와 옆에 섰다.
“이거 보래이. 덩치도 제일 크더니만, 꼬리 내리는 것도 제일 빠르네. 우짤낀데?”
“어쩌긴 뭘 어쩌냐옹. 거기 너, 고개를 들어보라냐.”
남자는 무릎을 접어 앉아, 시선을 드는 강도 우두머리와 시선을 맞혔다. 그리고 천천히 우두머리의 모습을 관찰했다. 처음과는 다르게 분석하듯 생김새, 복장을. 그리고 방금까지 그가 해왔던 행동을.
“... 패잔병은 아닐 거고… 탈영병 쪽인거냥…?”
“마,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냐. 혹시 이 근방에서 목 뒤로 연푸른색 갈기를 가진 수인을 본 적 있냐옹?”
“푸른색 갈기 말이옵니까… 자, 잘 모르겠습니다만, 가까운 곳에 이 근방치고는 꽤 규모가 되는 촌락이 하나 있으니 거기로 가보시는 것이…”
“마을 말이냥? 어느 쪽으로 가면 되는 거냐옹?”
남자의 질문에, 강도 우두머리는 자신의 뒤에 보이는 몇 개의 산봉우리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 제 뒤쪽에 보이는 길로 가시면 됩니다. 저기 보이시는 산봉우리를 가진 산 바로 아래에 있으니, 주위에 도달하면 마을의 모습이 바로 보이실 겁니다.”
“그렇다면, 필요한 건 다 얻었으니, 이건 ‘사랑의 매’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착하게 살아라옹. 한 번 더 눈에 띄면, 그때는 국물도 없다옹.”
“예…?”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목검을 빠르게 들어 강도단 우두머리의 머리통에 강하게 내리쳤다. ‘빡’하고 우렁찬 소리가 터져 나오며, 덩치 큰 사내는 또한 졸개들을 따라 쓰러져갔다.
“... 저쪽 수풀에 하나 남은 거 같은디, 우째, 처리할 끼가?”
“하나 더 있었냐… 역시 아직 멀었다옹...”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다른 무언가를 관찰하듯, 그의 눈은 여자가 말한 한 존재를 찾으러 눈동자를 굴렸다. 그리고 그는 발견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는 또 하나의 시선을.
“가려진 게 하나… 그리고 나머지는 하나는…”
남자는 잠시 지켜보았다. 수풀 속에 가려져 겉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그 존재의 내부를 꿰뚫어보았다. 환하게 불타오르는듯한 푸른색의 불꽃을. 그리고서는 꿇었던 무릎을 펼쳤다.
“... 치울 꺼면 후딱 처리해 삐고, 갑자기 일어서뿌면 깜짝 놀래삔다이....”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목검을 다시 허리춤에 있던 띠에 집어넣은 남자는 무언가에 홀린 듯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말을 걸던 여자를 내버려두고, 자신이 보았던 푸른 불꽃을 향해. 그리고 그 불꽃이 보이던 수풀을 향해 소리 내며 달려들었다.
“미야-오옹!!”
“으아아악!! 죄송합니다아-!!”
남자는 자신의 밑에 깔려있는 존재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푸른 갑옷을 걸친듯한 존재.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코에는 풀냄새와 함께, 이질적인 금속과 기름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그리고 그사이에 섞인 또 하나의 냄새. 처음 맡아보는 짐승 냄새를 말이다.
밑에 깔린 존재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수풀을 헤치며 달려와, 머리맡에 풀 때기가 살포시 얹어져 있는. 그리고 그 위로 보이는 세모난 두 개의 귀. 연한 갈색 같기도, 짙은 노란색 같기도 한 털이 뒤덮인 얼굴을. 그리고 황금색에 둘러싸여 세로로 긴 동공을.
남자의 꼬리가 요리조리 움직였다. 흥분한 듯한 남자가 깔고 앉은 존재에게 소리쳤다.
“너, 검술 배워볼 생각 없냐옹!?”
“... 예…?”
하나의 흥분, 하나의 당혹감. 그리고 그것들을 지켜보는 하나의 미소. 조금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에, 그들은 평범함이 따라갈 수 없는 특별한 인사를. 어쩌면 그들에게 큰 변환점이 될 강렬한 만남을 나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