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가 주먹을 휘두르며 나아갔다. 전과는 너무나도 다른, 그건 평범한 인간의 주먹이라고 부르기에는 그 범주를 꽤나 벗어난 속도였다. 그의 새로운 주먹의 힘인 것일까, 그 검은 주먹에 그것들은 쉽사리 박살이 났다. 그 붉은 팔뚝이 그려가는 붉은 궤적은 꺾이고, 휘는 것을 반복했다.
“... 스, 보스!! 정신 차려!! 괜찮은 거야!?”
제네의 다급한 외침에 푸른 로봇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 긴박하고도,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서 푸른 로봇이 정신을 놓고 있었던 이유는 어떤 남자의 화려한 연무 같은 싸움 때문은 아니었다.
“... 어, 어어. 이거 위험한데, 지금 긴급 상태로 들어선 건가?”
“맞아, 보스가 미리 설정해 놓은 거!! 충전 잔량이 얼마 안 남았어. 거기에 이 밑은 신호도 잘 안 닿는다고!! 이 이상 낭비했다가는 기체를 포기하고 돌아가야 한다고!!”
긴급 상태, 푸른 로봇을 만든 카일이 여러 상황에 대비해 만들어 놓았던 설정 중 하나였다. 그것은 곧, 기체에 남은 수정의 힘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푸른 로봇을 움직이는 전력은 기체 내부에 저장되어 있던 수정의 힘을 변환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문을 열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여신의 힘 그 자체가 필요했고, 지금 푸른 로봇의 안에 남아있는 그 힘은 바닥을 보이려고 하는 상황이었다.
“... 오랜만이네, 처음 탐색을 나선 이후로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저 녀석들이 쓰는 방망이에서 흐르는 힘은 그냥 전기는 아닌 거 같아. 마치 힘을 빼앗기는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그건 나도 궁금하긴 한데, 기체를 버린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알지? 보스는 돌아가도 나는 못 돌아간다고!!”
“하하, 걱정 마. 어디 바다에 빠지지 않는 이상은 꼭 찾으러 올 생각이니까 말이야. 그것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작동할 수 있을까?”
“... 조금 전처럼 치고 박으면, 2시간도 못 버텨. 그것도 저놈들의 공격을 다 피한다는 전제야. 그리고 일반적인 상호작용 범위 내라면… 7시간 정도…?”
“그럼 싸움은 최대한 피해야 하는 거네. 제네, 일단 주위에 박살 난 기체 중에서 최대한 멀쩡해 보이는 거 하나만 탐색해줘. 이렇게 고생했는데, 하나 들고가서 뜯어는 봐야 직성이 풀리겠어.”
“... 알았어. 일단은 최대한 노력해볼게. 하지만 이 이상 무리하면 안 돼!! 보스가 신체를 두고 올 정도의 위험천만인 곳을 누나가 순순히 보낼 리가 없잖아! 잘 알지!?”
“진짜야. 걱정 하지마. 최대한 조심할게.”
제네의 목소리가 끊기고, 푸른 로봇은 자리에 서서 제이를 지켜보았다. 그 무엇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그의 상태가 위태위태해 보였다. 지금의 힘과 속도는 본래 그의 것이 아닐 것이라고 로봇은 확신했다.
‘... 저 팔, 분명 제이 씨에게 무언가 영향을 주는 건 맞는 거 같은데… 그를 둘러싼 힘, 처음 보지만 어디선가 익숙하기도 한 거 같은… 어쩌면...’
제이는 계속해서 싸워나갔다. 부수고, 부수고, 박살 내고, 박살 내기를 반복했다. 또 하나의 궤적을 그리며, 그것 하나의 몸통을 관통시켜 땅바닥에 처박고는, 곧이어 주먹을 빼내어 다음으로 향하였다. 흩날리는 것이 그의 땀인지, 아니면 그것의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해 보였다.
자신을 공격하는 그것의 공격을 뒤로 물러나 피한 그는, 자세를 빠르게 다잡고 그것의 몸 한가운데로 주먹을 날렸다. 그 한 번의 주먹은 전과는 다른 강력한 파동을 일으켰다. 그의 붉은 팔뚝이 네 갈래로 나뉘어 열기를 뿜어내었다. 그리고 몇 바퀴를 돌더니,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한 남자의 함성과 금속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남자는 지치고, 고된 숨을 토해냈지만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그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의지이자, 한 존재에게 받은 도움에 대한 보답이었다. 어쩌면, 그저 한때의 고집이었을 지도 몰랐다.
“으아아아아아!!”
그는 외쳤다. 자신의 엉망진창인 몸 상태를 잊기 위해서, 흔들려가는 시야를 다잡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에게 향하는 공격을 피했다. 종이 한 장 정도의 간격으로 빗겨가는 그것의 팔이 그의 얼굴을 지나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가 내지른 주먹이 또 하나의 그것을 박살 내었다. 그의 사투로 수많은 그것이 작동을 멈췄지만, 아직도 도시의 한편에서는 계속해서 쏟아져 걸어왔다. 그것들의 잔재로 쌓인 언덕을 위로, 수많은 그것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제이가 고된 숨을 내쉬는 그 잠깐 사이에도 그것들의 공격이 그를 향했다. 그것을 미처 피하지 못한 그는 날아오는 공격을 오른팔로 막고는 조금 멀리 굴러갔다. 그는 그 고통에 아픔을 호소하는 것마저 꾹 짓누르고는 빠르게 일어서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두 무릎은 또 한 번의 한계를 토해냈다.
‘좋아, 이제는 다리도 말을 안 듣네. 일어서라. 일어서라. 일어서라. 제발!! 제바알!!’
“제압 대상에게 전한다. 행동을 멈춰라. 저항 의사를 거둬들여라. 우리는 더 나은 가능성을 제안한다. 지금 투항하면 무력행사 또한 즉각 중지된다.”
“푸하-. 그럼 어쩌게? 죽이라도 떠먹여 주면서 간호라도 해주게?”
“부정. 우리는 도시의 치안 유지하는 기체들이다. 치료가 필요하다면 가까운 의료원의 방문을 추천한다.”
“그래? 그래도 다 죽어가는 도시에 의사 선생님은 있나 보네?”
“부정. 현 도시의 인구는 1등급 0명. 2등급 0명. 3등급 0명. 그리고 4등급이자 제압대상자들을 포함해 총합 2명이다. 각 자원을 알맞은 곳에 배치하면 부상자의 치료 및 간호가 가능하다.”
“하하. 그거 설마 나랑 로제 얘기하는 건 아니지? 저 바보는 붕대 감는 것도 서툰데 말이야.”
제이는 그것에게 시답지 않은 말을 걸었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이라면 통하지 않을 내용으로도 그것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끄는 것이 지금의 자신에게 가능한 유일한 일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 하나만 묻자, 저 기둥에 있는 승강기 말이야. 꼭대기에서 내려오려면 얼마나 걸리지?”
“긍정. 실린 인원과 물자의 무게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55여 분의 시간이 걸린다.”
“좋아, 그리고 우리 일행이 도시에 들어서고 나서 계속해서 지켜봤다고 했는데 말이야. 너희가 기둥 주위에 있는 우리를 막으러 온 지는 얼마나 지났지?”
“긍정. 약 50분의 시간이 지났다.”
“좋아. 그럼 곧 도착이라는 거네? 고마워, 덕분에 도움이 많이 됐어. 하나만 말할게. 이건 너희도 맘에 들 거야.”
제이는 지친 무릎을 조심히 세우며 일어섰고, 말하는 것에 조금 뜸을 들였다. 가볍게 발끝을 땅에 툭툭 치며 자신의 상태를 대강 확인했다. 그런 그의 행동을 그것들은 지켜보았다.
“... 너희가 이겼어. 진짜 대단하네. 얼마나 더 쏟아져 나와야 끝이 보이는 걸까. 조상님들도 대단해. 이런 기술력은 왜 꽁꽁 숨겨놓은 건지.”
“의문. 그 대화에 대한 의사를 명확한 표현을 요구한다. 투항 의사에 대한 표현을 받아들이는 것에 동의하는가?”
“어디 보자, 맞아. 손발 다 들었어. 자, 봐봐. 아, 로봇 입장에서는 정확하게 표현해야 하나? 다리도 들면 넘어지니까 손만 들게.”
제이는 가볍게 두 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런 그를 계속해서 지켜보던 그것들은 그것을 항복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뭉쳐졌던 팔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 본 행동을 대상의 투항 의사로 받아들임. 축하합니다. 이제부터 귀하는 제압대상에서 벗어났음을 안내합니다.”
“... 뭐야? 진짜 끝이야? 처음부터 이럴 걸 그랬네. 그럼, 이렇게까지 개고생할 필요도 없었는데 말이야… 아,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손님!! 잠시만 와봐!!”
제이는 푸른 로봇을 향해 외쳤다.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그를 향해, 푸른 로봇이 뛰어왔고 그런 그에게 질문을 던져왔다.
“어떻게 된 일이죠? 갑자기 싸움이 멈추더니, 이제는 저들을 눈앞에 두고는 절 부르시는군요. 화해했다고 생각하면 거짓말이겠죠?”
“아, 그게 말이지…”
제이는 푸른 로봇의 머리에 입을 갖다 대고는 손으로 가리며 작게 속삭였다. 귀가 없는 푸른 로봇이었지만, 그가 하고자 하는 모든 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혼란스러워했다. 푸른 로봇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 나오듯 흔들렸다.
“... 정말인가요…?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그런 건…”
“한 번 만 믿어봐. 그냥 말이야. 어차피 별 큰 수도 없잖아?”
“... 그건 맞습니다만… 알겠습니다. 가장 강력한 마지막 수라는 거군요.”
“좋아, 그럼 받아들인 걸로 할게.”
그들의 대화를 기다리던 그것 하나가, 두 존재의 대화 사이를 끼어들었다. 그런 그것을 향해, 제이는 살짝 미소지었다.
“비등록 기체에 관한 것이라면, 담당 부서에 신청하면 등록할 수 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원활한 업무 처리를 위해 길 안내를 요청할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아, 배려 고맙네. 그래도 일단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말이야.”
제이는 가볍게 푸른 로봇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깨동무하듯, 그는 그 자세로 푸른 로봇을 그것에게 소개했다.
“자아, 여러분. 이쪽은 카일이라고 하는 분이야. 다른 세계에서 온 여행자이자, 이 금속 몸에 정신을 담았다고 주장하는 이상한 분이지. 그리고 아까 봐서 알겠지만 말이야…”
제이는 말을 멈추고 로젤리아가 있는 방향을 잠시 바라봤다. 한숨을 고르고, 그는 외쳤다.
“... 달리는 게 엄청 빨라.”
그 순간이었다. 제이는 빠르게 푸른 로봇의 등에 업혔다. 그리고 푸른 로봇은 곧바로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땅바닥을 굴러다니던, 조금의 자갈과 모래가 허공에 흩날렸다. 제이는 그것들을 향해 작별인사를 던졌다.
“잘 있어!! 다음에 올 때는 선물 들고 올게!!”
기둥을 향해 빠르게 달리기 시작한 푸른 로봇과 제이를 본 그것들은 그들을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푸른 로봇의 등에 업혀 그 모습을 뒤돌아보던 제이가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와 빠르게 움직이며 일어나는 바람 소리가 섞여 그의 말을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푸른 로봇은 간단하게 그 뜻을 예측하고, 이해했다.
“손님!! 조금만 더 빨리!! 이러다 잡혀!!”
“죄송하지만, 아직 승강기 문이 열리지도 않았습니다만!! 제네, 일단 빠르게 돌아와!!”
“... 어? 어어!! 알았어!!”
푸른 로봇이 달렸다. 그리고 그 뒤를 그것들이 땅을 달려 쫓았고, 하늘에서는 구체가 그들의 뒤를 쫓았다. 제이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땀이 바람을 맞아, 물방울이 되어 흩날렸다. 마치 재앙을 이끌고 오는듯한 그 모든 모습을 한눈에 담고 있던 로젤리아는 갑자기 뒤바뀐 상황을 쫓아가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한 채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그 순간이었다. ‘띠링’ 소리와 함께, 로젤리아의 뒤통수로 드르륵거리며 무언가가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제이가 푸른 로봇의 어깨에 손을 짚고 상체를 일으키며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로제!! 들어가!! 빨리!!”
한 남자의 외침, 그 외침에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드디어, 그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승강기의 문이 열렸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짐가방을 들고는 빠르게 승강기의 안으로 발을 내던졌다. 그리고 뒤돌아 소리쳤다.
“제이!! 카일 씨!!”
“으아아아아아아!!”
두 존재의 외침, 그들을 빠르게 쫓는 그것들을 피해 그들은 승강기의 안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승강기의 내부로 들어서자, 승강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것들의 움직임이 하나, 둘 달라졌다. 재빠르게 그것들을 바라본 그들은 그 모습에 의아함을 느꼈다.
“... 뭐야? 쟤들, 지금 가만히 서있는거야?”
“설마… 승강기 내부로는 못 들어오는 건가…?”
푸른 로봇이 제이를 승강기 바닥에 내려놓았다. 승강기 한쪽 벽면에 등을 기댄 그는 조금 전부터 미동도 하지 않는 그것들을 보고는 어리둥절하였다. 그런 그에게 네모난 로봇이 말을 이어갔다.
“긍정. 보안 기체들은 탑에 대한 접촉 권한이 존재하지 않음.”
“... 어이, 깡통… 아니, 토토 양반? 왜 그걸 먼저 말 하지 않은 거야?”
“긍정. 질문하지 않음. 질문받지 않은 사항에 대한 대답할 의무는 본 기체에게는 존재하지 않음.”
“... 하아-.”
제이는 풀어진 긴장감에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토해냈다. 그는 온몸의 힘이 풀려 기진맥진했고, 곧이어. 말을 멈추고 그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그, 그럼 저희는 이제 올라갈 수 있는 건가요?”
“긍정. 그저 요청 한 번이면 승강기는 다시 상층부를 위해 작동할 것임.”
“... 그럼, 토토 씨 부탁드… 아, 저희랑 가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부정. 본 기체는 도시에서의 역할이 지정되어 있음. 이 역할은 상급자의 변동 없이는 변경 불가능.”
“... 그런가요… “
네모난 로봇의 대답에 로젤리아는 잠시 아쉬움을 표현했다. 하지만 곧 그것은 또 다른 감정이 되어, 네모난 로봇을 향해 나아갔다.
“... 그럼, 다음에 저희가 다시 방문할 때도 꼭 저희를 반겨주세요!”
네모난 로봇은 그 모습을 관찰하고, 조금의 시간이 지나서야 질문에 대한 답을 던졌다.
“긍정. 본 기체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음.”
로젤리아는 그 짧은 대답에 짧은 미소로 답했다.
“... 자, 여러분. 놓고 온 물건은 없으신가요? 언제 돌아올 지 모르니 확실하게 확인해주세요.”
“하하, 저는 괜찮습니다. 제이 씨?”
“아아, 됐어. 갑자기 화가 나네. 다음에 저 깡통 다시 만나면, 반드시 반으로 접어버릴거야.”
“불만사항은 있어도, 분실물은 없는 거 같군요. 로젤리아 씨. 출발하도록 하죠.”
“예, 그럼 토토 씨. 승강기를 다시 상층부로 보내주시겠나요?”
“긍정. 방문자들의 다음 방문을 기대함.”
네모난 로봇이 또 한 번 기둥의 벽면에 손을 댔다. 그러자 승강기의 문이 닫히기 시작했고, 그들이 조금 전 까지 보았던, 그것들과 네모난 로봇은 문이 닫히며 모습을 감추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우웅 거리는 소리와 함께 승강기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젤리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하하, 정말 끝난 거네요.”
“끝나기는 무슨,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온몸이 아픈 것보다, 누나한테 맞아 죽을게 더 겁나네. 하아, 어떻게 설명해야 용서해주려나…”
“저희가 문을 지나, 절벽에서 떨어지고 나서, 약… 6시간 정도가 흘렀군요. 이 승강기는 얼마나 걸리는 걸까요? 1시간 정도 저희가 버틴 거 같습니다만…”
“아까 검은 거 하나가 그 정도 걸린대. 집을 벗어난 지,7시간… 돌아가면 진짜 박살 나겠네. 옷은 엉망이지. 팔 하나는 부숴 먹었지. 몸 상태는 최악이지... 하아…”
“좋게 생각하자, 지하 도시에 대해 말하면 분명 아버님도 더 큰 지원을 해 주실 거야. 그럼, 언니도 용서해 주지 않을까?”
조금의 안정을 취한 로젤리아가 뒤돌아, 낙심하고 있는 제이를 내려다보며 격려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들이 아직 밑에 있었던 조금 전, 한 가지 일을 계기로 그녀의 얼굴에서 걱정과 고민이 사라졌다는 것을 제이는 깨달았다.
“... 그건 좋네. 이제 저녁으로 항상 외식할 수 있게 되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전에, 손가락 하나도 꼼짝하지를 않네. 손님, 미안한데 이 팔 좀 때줄래? 로제가 다루기에는 많이 위험해서 말이야.”
“아아, 알겠습니다.”
제이의 옆으로 푸른 로봇이 다가왔다. 로젤리아는 한 발자국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고, 푸른 로봇은 가볍게 무릎을 꿇고는 제이의 팔에 두 손을 얹었다. 푸른 로봇의 빛나는 눈에, 그 금속 팔이 한가득 비쳤다.
“그냥 잡아당기면 되는데, 너무 쎄게는 말고. 손님 기준으로 쎄게면 어디 날아가서 벽에 박힐지도 모르니깐 말이야. 히히.”
“...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히…”
가볍게 미소를 보이며 웃는 제이를 표정을 본 푸른 로봇은,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붉은 팔이 스윽하고 뽑혀 나왔다. 팔과 팔꿈치를 연결하던 힘이 사라지고, 검은 손가락은 그저 땅바닥을 향해 추욱 늘어졌다.
“좋아, 깔끔하게 해냈네. 그거 잠시만 들고 있어줘. 그상태로는 열때문에 가방이 녹을지도 몰라서 말이야. 아니지, 먼저 불이 나려나?”
푸른 로봇은 자신의 두 손에 들려있는 금속 팔을 내려다 보았다. 각 세계마다 과학기술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 의수는 조금 남달랐다. 별다른 동력원이라 보일만한 것은 없었으며, 꽤나 정교하고, 말끔한 외형을 하고 있었다. 기술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지상의 도시의 모습과는 동떨어져 보였다.
“... 흥미롭군요. 동력원은 뭐죠? 아까 보았던 충격파도 그렇고, 한 번 분해해서 내부를 확인해보고 싶긴 하군요… 잠시만, 이건 설마… 이 팔, 제이 씨가 말씀하셨던 유물이로군요…?”
“정답~. 몇 년 전에 도시에 있던 유적이라고 불러야 할까. 거기서 발견됐다고 그러더라고. 원래는 창고에 박혀서 먼지만 먹고 있었는데. 루베리아 아저씨가 관련 사업을 지원하면서 다시 빛을 봤지. 내가 평상시에 쓰던 팔은 그거에 양산을 위한 시제품. 나는 그 두 개를 다 사용해 보고 주기적으로 보고서를 작성해서 지원금을 타 먹고 있지.”
“... 하지만 그리 오랜 시간을 쓴 것도 아닌데, 이 정도 발열이라니. 사용에 큰 부담이 되지는 않나요?”
“물론, 너무 오래 쓰면 통구이가 되겠지. 그래도 너무나도 유용해. 힘과 속도, 그리고 진통 효과 라고 해야 하나? 사용하는 순간에는 고통이 거의 없다시피 멎어. ”
“... 신경계까지 영향을 미친 다라… 발열 말고 단점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이게 가장 중요한 거지. 오래 쓰면 쓸수록 죽을 정도로 아프고, 피곤해. 아마 무리한 힘을 이끌어 쓰는 것에 대한 반동인 거 같은데. 조금 전에 10분 남짓 쓴 정도로도 아마, 3일은… 아니다. 이미 엉망인 상태로 썼으니, 5일은 죽은 듯이 살아야겠네.”
앞으로 있을 고난을 자랑하듯 말하는 제이를 향해, 로젤리아는 한숨을 토해내며 질책했다.
“... 그래서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결국, 우리가 뒤에 빠져있어도 해결 될 문제였는데 말이야.”
“... 아뇨, 제이 씨의 도움이 없었다면 위험했을지도 모릅니다.”
“봐봐. 손님도 저렇게 말하잖아. 내가 이겼지… 잠시만, 손님 허리에 그거…”
제이는 푸른 로봇의 허리춤에 대롱대롱 달려있는 무언가에 시선이 갔다. 무척이나 익숙해 보이는 그것은, 조금 전까지 그들이 싸웠던 그것 중 하나의 팔이었다. 그는 조금 당황한 얼굴을 지었고, 제이의 금속 팔에 신경이 집중되어있던 푸른 로봇은 그의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알아차렸다.
“이거 말씀이신가요? 이것도 흥미로워서 하나 가져왔습니다. 그것들의 공격은 뭐랄까… 제 몸에서 전력을 훔쳐간다고 해야 할까요.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에 그런 게 가능한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걱정은 마십쇼. 별다른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을 겁니다.”
“으엨. 대단도 해라. 하긴, 누나도 저 모습을 봤으면 뭐 하나라도 들고오려고 했을 거 같긴 해. 에구구, 나 죽네. 난 잠시 눈 좀 붙일래. 도착하면 깨워줘.”
“그래, 열심히 싸운다고 많이 힘들었을 텐데. 눈 좀 붙여.”
대화가 끝나자, 제이의 머리가 한쪽 구석을 향해 스르륵 쓰러졌다. 로젤리아 또한 한 쪽 벽면에 가방을 눕히고는 그 위에 살포시 앉았다. 그리고 먼지와 흙으로 엉망이 된 드레스와 구두를 살며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 로젤리아 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가 미처 해내지 못한 일도 해내시고, 큰 도움이 되셨습니다.”
“아, 아뇨. 제가 한 거라곤, 그저 벌벌 떨다. 한 번 뛰어간 게 다인걸요.”
“아닙니다. 조금 전 같은 상황은… 제이 씨처럼 반응하는 게 드문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런 용기를 내신 게 더 대단하다고 전 생각합니다.”
“후후. 감사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뭐랄까… 무척 무서웠답니다. 그런 것들에게 둘러싸인 것도 처음이었지만, 그런 격렬한 싸움을 본 것도 처음이라서 말이죠. 근데, 토토 씨에게 상담을 듣고 용기가 났습니다. 그리고...”
로젤리아는 끝말을 흐리며 말을 멈췄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푸른 로봇이 그녀의 말에 이어서 말을 걸어왔다.
“... 그 길 안내 로봇이 말입니까? 그것도 흥미롭군요. 올라가는 동안, 나눌 이야기로는 안성맞춤인 거 같군요. 아, 혹시 잠시 주무실 생각이셨나요?”
“아, 아뇨. 어째선지 지금 잠들면 이 모든 게 다 꿈처럼 느껴질 거 같아서요. 그저…”
“그저…?”
“밑에서 한 경험 중에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어서 그렇답니다. 그게, 너무나도 신기하고 이질적인 느낌이라고 할까요…”
“... 말씀해보시죠. 제게 있는 거라곤, 시간뿐이라서 말입니다.”
“... 신비로운 목소리를 들었답니다. 투박하고도, 묵직하게 느껴지는 그런 목소리를 말이죠…”
“그건… 조금 신기하군요. 길 안내 로봇이 내는 소리는 아니었나요?”
로봇의 질문에 로젤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되짚으며, 푸른 로봇을 향해 계속해서 설명해 나갔다.
“아뇨, 그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토토 씨와는 다른, 살아있는 이의 생기가 느껴지는 목소리 같았다랄까요. 특별한 게 있었다면, 그 목소리는 귀가 아닌 마음을 관통해 전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것 정도랍니다.”
푸른 로봇은 생각했다. 기둥과 수정, 그리고 미지의 존재의 목소리. 자신이 알고있는 설화와 유사한 점이 한가득인 것을 푸른 로봇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의심은 심증만이 한가득이었다. 물증이 없는 이상 확신보다는 가설로만 남겨 놓는 것이 정답이라 생각했다.
“그 존재는 로젤리아 씨에게 뭐라고 얘기했죠? 기억나시나요?”
“아… ‘오이! 니 친구가 힘들어하잖아!! 빨리 안 뛰어가냐!?’ 랍니다…”
“그건… 참, 조언적이군요.”
“하, 하지만. 어째선지 그 말을 듣고나서는 용기가 생겨났다고 할까요? 자신감이 생겼답니다!!”
“그런가요… 제가 드릴 말은 없을 거 같습니다. 어쩌면, 지하도시에 남아있던 귀신이었을지도 모르죠.”
“... 예…?”
푸른 로봇이 장난으로 던진 대답에, 로젤리아는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는 구석에 몸을 기대고는 바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 그, 그런 가능성이 있었네요. 하하하. 서, 설마 귀신 같은 게 있을까 봐요. 분명 토토 씨의 또 다른 목소리 일거에요!!”
갑자기 혼잣말을 시작한 로젤리아는 이상한 구호를 읇기 시작했다. 푸른 로봇은 그것이 이 세계의 주문 같은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두려움에 빠진 로젤리아를 내려다보고 있던 푸른 로봇을 향해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기, 보스? 나한테는 안부를 안 묻네? 이건 좀 상처받는데?”
“하하, 어차피 본체는 내 몸에 같이 있는데 뭐 어때. 고생 많았어. 돌아가면 나비한테 해줄 이야깃거리가 한가득 생겼네. 분명 좋아하겠지.”
“우우. 뭐, 그 꼬마 아가씨는 좋아해도, 누나는 분명 화낼 거라고. 이제 난 몰라~ 보스가 알아서 열심히 해결해. 난 보스 명령만 따랐으니 말이야~.”
구체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목소리가 끝나자, 푸른 로봇은 가볍게 자신의 몸을 돌아봤다. 그가 이전에 해왔던 다른 탐색과는 크게 차이 날 정도로 그의 신체는 엉망이었다. 거기에 저장된 전력의 양은 바닥을 향했다. 자신의 안전을 우선시하면서, 자신에게 설교하는 게 일상인 누군가에게는 그만큼 좋은 핑곗거리가 없었다.
“읔, 하긴, 확실하게 아트한테 한소리 듣겠네. 저번 탐색에서도 엉망으로 돌아왔었는데 말이야… 이번에는 그것보다 더한 상태니 말이야...”
“... 저, 저기 카일 씨? 저희, 시, 시간도 때울 겸, 이야기라도 나눌까요!?”
구석에서 부들부들 떨던 로젤리아가 푸른 로봇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의 정신상태는 이미 끝까지 몰린 듯 보였다.
“예? 제가 말인가요? 제가 말주변은 없어서, 재미나게는 말씀 못 드리는데 말입니다만…”
“아, 아뇨, 그냥 해주세요. 아, 아무거나… 아니지. 그 엉망으로 오셨다던 저번 탐색에 대해서 부탁하죠. 가능하면 다른 걸 다 잊을 수 있게 화끈하게 말이죠!!”
“아, 저, 그럼… 처음은 밤하늘이 예쁜 어느 황무지였습니다…”
승강기는 작은 소음을 이루며 지상을 향해 올라갔다. 그 안에서는 코를 골며 잠이 든 남자와 자신의 모험담을 읊는 로봇, 그리고 그저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선 여자가 하나 있었다.
“푸하-! 이게 진짜 공기지!! 이제야 좀 살겠네!!”
제이가 가슴으로 한가득 머금은 공기를 토해냈다. 새벽의 찬 공기가 그의 폐를 지나 다시 나왔다. 벌레 울음소리와 부엉거리는 새소리가 어둠으로 가득 찬 숲 속에 울려 퍼졌고, 그들은 나뭇가지와 진창을 피해 그들은 조심히 앞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이야, 미안하네. 길도 밝혀주고, 나도 엎어주고 말이야. 손님 덕분에 편하게 돌아가네.”
“하하, 괜찮습니다. 어차피 남은 전력으로는 문을 한 번 정도밖에 여는 게 고작이라서 말이죠. 이렇게라도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온몸이 혹사당해 걷기도 힘든 제이는, 또 한 번 푸른 로봇의 등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그 뒤를 숲 속에 어둠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로젤리아가 뒤따랐다. 그런 그녀의 옆에 무언가 벌레 한 마리가 휙 지나갔다.
“... 그, 그렇죠. 카일 씨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니… 히익!! 제이, 방금 커다란 나방 봤지!? 어, 엄청나게 컸어!!”
“아, 미안한데 못봤어. 한 번만 더 놀라봐. 그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제이는 귀찮은 듯, 대충 답했다. 푸른 로봇을 뒤따라 오고 있던 로젤리아는 간격을 바싹 줄이며 붙었다.
“싫어!! 제발, 벌레가 한가득인 곳은 싫단 말이야. 가도까지 얼마나 걸어가야 하는 거야!?”
“그걸 알면 벌써 도시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겠지. 조용히 해, 잠이 깬 들짐승들한테 습격당하고 싶어?”
“히잉, 빨리 나가자. 여기 너무 싫어-!!”
푸른 로봇이 조금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로젤리아 또한 걸음걸이의 속도를 붙였다. 어두운 숲 속에서 그들의 앞을 밝히는 것은, 푸른 로봇의 가슴 부분에서부터 시작되는 전등불과 달과 별이 내는 빛뿐이었다. 그리고 그 불빛에 반응하듯, 숲 속의 벌레들이 하나, 둘 그들의 주위를 날아다녔다. 그런 그들의 상공을 날고 있던 구체가 말을 걸어왔다.
“... 보스, 어두워서 잘은 모르겠는데… 거기서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가도로 보이는 게 나오는 거 같은데?”
“그래? 다행이네, 적어도 길을 찾아내면 이정표로 삼을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여러분, 조금만 힘내주시죠. 곧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아, 기껏 찾은 유적 입구를 잃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
“드디어!! 어디든 좋아, 빨리 나가자! 최소한 사방이 뚫린 곳에서 걷고 싶어!!”
푸른 로봇이 자신의 앞을 가리고 있던 큰 나뭇가지 하나를 손으로 부러뜨렸다. 훗날 남은 이들을 위한 이정표를 남기고자 그런 것도 있지만, 그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자, 그들의 눈앞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살았다아~. 벌레하고는 작별이야. 이제야 좀 살 거 같네요.”
“제네가 말한 가도로군요. 여러분, 여기가 과연 어딜까요?”
“... 여긴… 아, 거기네. 나랑 로제가 잘 아는 곳이야. 왼쪽으로 쭉 가면 도시가 보일 거야. 걸어가면 아마, 40분쯤?”
“그런가요? 도시와는 조금 먼 곳이었군요. 생각해보니, 저희가 그 강가에서 도시를 지나는 데에만 2시간이 안 되게 소모했군요.”
그때였다. 푸른 로봇의 몸에서 또 한 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구체는 가도를 빠르게 달려, 푸른 로봇이 있는 곳을 향해 달리고 있는 무언가를 경고했다.
“잠시만, 저게 뭐지…? 보스, 미안한데 길을 따라 무언가가 빠르게 접근하고 있어.”
“뭐, 뭐죠!? 설마, 지하에 있던 로봇들이 저희를 쫓아온 걸까요!?”
“흠… 아니, 아마도… 마중 나온 거 같은데.”
그들에게 곧 들이닥칠 존재에 대해, 제이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반응했다. 푸른 로봇과 로젤리아는 그런 제이의 행동에 의아함만을 느꼈다.
“뭔가 알고 계신 가요? 마치 예상이라도 한 거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뭐, 대충 짐작은 가는 게 하나 있지. 조금만 기다려봐. 손해 볼 게 없는 기다림일 거야.”
그들은 제이의 말을 듣고는, 이질적인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것의 전면부에 쏟아지는 빛은 밤의 어둠을 꿰뚫었고, 그것의 몸통에서 내는 소음은 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의 시야에 그 요란함의 원인이 등장했다.
빠르게 바퀴를 굴리며 그들을 향해 다가오던 그것은 네모난 수레였다. 평범한 수레와 다른 점이라면, 수레의 겉이 검은 칠이 된 금속으로 되었으며, 수레의 전면부에는 그것을 끌고 다닐만한 존재가 없다는 것 정도였다.
그 수레가 푸른 로봇의 일행을 발견했는지, 그들의 주위에 들어서는 조금씩 속도를 줄여갔다. 그리고 그들의 멈춰 섰다. 바퀴가 멈추고, 그들의 시선은 온통 그 수레로 갔다.
누군가는 반가워했으며, 누군가는 신기해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걱정에 휩싸였다.
달빛을 받아, 빛나는 금속 문을 열고는, 수레의 옆부분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머리를 뒤로 정리하고, 안경을 쓴 그 얼굴은 방금까지 고난을 겪고, 먼 길을 걸어가야 하는 그들에게 있어 매우 반가운 얼굴이었다.
“... 서, 설마… 오르베도 씨…?”
“역시, 아가씨도 같이 계시군요. 아, 일단은… 여러분이 먼저 만나야 할 분이 계십니다.”
익숙한 얼굴의 그는 재회의 인사보다 먼저 수레의 옆을 걸어, 뒤쪽 옆면에 있던 문의 손잡이를 살며시 잡아당겼다. 또 하나의 금속 문이 열리고, 수레 안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보였다. 그림자에 드리워 전체적인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존재는 차 안에서 지팡이 하나를 밖으로 내밀었다. 땅을 짚은 지팡이를 딛고, 그는 조심히 차 안에서 나왔다.
오르베도가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그에게 예의를 차렸다. 수레에서 조심히 발을 떼며 벗어난 그 존재는 중년의 남성이었다. 깔끔한 회색빛 코트. 보라색 목도리를 가볍게 두른 그는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흰머리가 힐끗 보이는 갈색빛의 머리칼을 뒤쪽으로 깔끔하게 정리한 나이 든 신사였다.
“아, 오르베도. 고맙구만. 늦은 시간에 미안했네.”
무거운 짐 때문일까, 아니면 그 남자에게서 흘러나오는 압박감 때문일까, 로젤리아는 호흡은 약간 거칠어졌다. 그런 그녀를 흘끗 보고는, 오른발에 보조 기계를 장착한 그 신사는 제이와 그를 업고 있는 푸른 로봇을 살펴보았다.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로젤리아는 그 신사에게 말을 걸었다.
“... 아, 아버님! 여긴 어떻게…”
“조용. 너는 빠져있거라. 나는 저 두 사람과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그가 던진 날카로운 말에 로젤리아는 그저,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어두운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졌고, 무거워진 분위기에 푸른 로봇은 거부감을 느꼈다.
“그래… 제이, 그리고 그쪽이 앤이 말한 조력자로군? 그래, 우리 문제아가 큰 도움을 받았네.”
“... 아니요. 앤 덕분에 큰 발견을 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아마 사장님도 큰 흥미를 느낄 정도로 말이죠.”
제이는 로젤리아와는 달리 그 신사에 대해 거북함이나, 압박감 등의 감정을 느끼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의 생기 넘치는 열변에, 그 신사는 그를 향해 조금 미소를 보였다. 조금 전과는 달리, 푸른 로봇은 그의 미소에서 부드러움을 느꼈다.
“후후. 그런가? 제이, 자네가 그렇게 확신을 가지며 말하다니… 얼마나 큰 발견일지 기대되는구만.”
“기대하셔도 돼요. 아, 이쪽은 카일이라고, 저희 사무소에 용무가 있어 손님으로 오셨는데 오히려 저희에게 큰 도움을 주신 분이셔요. 손님, 저분은 루베리아 사장님, 내 자본주이시자, 로제 아버지 되시는 분.”
푸른 로봇이 로젤리아의 발언으로 예상한 예감이, 제이의 소개로 확실시되었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노신사가 사무소에서 그렇게 들었던 존재라는 것을 푸른 로봇은 깨달았다. 그의 얼굴을 보자, 다른 이들이 그 신사에 대해 했던 말들을 이해했다. 그의 표정과 말투. 그에 대한 푸른 로봇의 생각은 조금씩 바뀌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카일 이라고 합니다. 그냥 지나가던 여행자입니다.”
“아, 내 소개가 늦었군. 루베리아 오스왈드. 그냥 평범한 사업가일세. 우리 딸아이가 민폐를 끼쳤구만, 그래.”
그 노신사는 자신을 소개와 자신의 딸이 도움을 받은 것에 감사를 표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있어, 푸른 로봇은 일반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가 차리는 예의에 푸른 로봇은 호감과 당혹감을 느꼈다.
“아, 아닙니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로젤리아양의 행동은 전부 도움이 됬습니다.”
“호오, 그래? 어떤 점이 말인가?”
“저, 그게…”
푸른 로봇은 섣불리 답하지 못했다. 그녀에게서 받은 도움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없는 것 보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삼켜졌기 때문이었다. 마치, 자신을 꿰뚫어 보는듯한 그 신사의 눈빛은 날카롭고도, 인자해 보였다.
“... 스튜가… 맛있었습니다.”
“푸흡-.”
푸른 로봇이 생각해 낸 대답에, 제이가 폭소를 터트렸다. 신사 뒤에 있던 오르베도 또한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하는 입을 꽉 깨물며 참았다. 그 대답에 웃지 않는 이는 냉정한 표정으로 담담히 서 있는 신사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참는 한 아가씨뿐이었다.
“... 그래, 그건 죽은 자기 어미를 똑 닮았구만. 하지만 결국 그 정도라는 거구만. 오르베도, 상태를 확인했으니 돌아가도록 하지. ”
푸른 로봇의 대답에 짧은 감상을 남긴 신사는 자신의 목적을 다 이뤘다는 듯이 조용히 뒤돌았다. 그런 그를 붙잡듯 로젤리아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저, 아버님이 말씀하셨던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습니다!!”
신사는 움직이려던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로젤리아를 향해 물었다. 그 물음은 마치 그녀를 시험하듯 로젤리아를 휘감아갔다. 그녀에 대한 사정을 모르던 제이와 푸른 로봇 마저도 그것을 깨달을만큼 말이다.
“... 그럼, 각오는 된 것이냐? 잘 생각하거라.”
“예, 제 몸에서 흐르는 피가, 아버님과 같다면 틀림 없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준비를 해야겠군. 오르베도, 부탁하겠네.”
“예, 알겠습니다.”
신사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저, 수레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오르베도 또한 그들을 향해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그가 나왔던 곳으로 다시 들어가, 수레를 운전했다. 바퀴가 또 한 번 굴러갔고, 소음을 일으키며 그들은 저멀리 사라져갔다. 그리고 그 상황을 넋놓고 쳐다보고 있던 제이가 소리쳤다.
“... 잠시만, 우리 걸어가야 하는 거야? 진짜로 그냥 간 거야!?”
“하하, 결국 뭐였던 걸까요. 아, 하늘의 끝이 조금씩 파랗게 변해가는군요.”
“... 빨리 돌아가도록 할까요. 제이, 어서 앤 언니에게 혼나러 가자.”
“... 어? 그게 무슨 말이야?”
“가면 알게 될 거야. 네가 혼날 때, 나도 같이 혼날 테니. 내가 혼날 때, 너도 같이 혼나는 거다?”
말을 끝낸 로젤리아는 내려놓았던 제이의 가방을 들고는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벙찐듯 쳐다보고 있던 제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뭐, 일단은 걸을까요.”
조금씩 파래져 가는 하늘 아래,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앞장서 걷는 로젤리아의 당당한 걸음에는 한가득 안고 있던 후회를 내던지고, 하나의 결심만을 안은 듯 보였다.
“이렇게 한가득 챙겨주실 필요는 없으신데 말이죠.”
푸른 로봇은 무언가가 한가득 담긴 종이봉투 몇 개를 두 팔 한가득 들고는 제이와 대련했던 공터 위에 서 있었다. 그런 그를 로젤리아와 앤, 그리고 휠체어에 탄 제이가 반겨주었다.
“아아, 괜찮아. 어차피 우리 돈이 아니라, 로제랑 사장님 지갑에서 나오는거거든.”
“후후, 그런 거랍니다. 제 마음이자, 아버님의 감사 표시이기도 하니, 부담 갖지 말고 그저 이번 일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하시면 된답니다. 하지만 괜찮으시겠나요? 그 고생을 하시고는 요구하시는 게 고작 식자재랑 요리 서적, 그리고 백과사전이라니…”
“아뇨, 이거면 충분합니다. 저보다는 로젤리아 씨가 걱정이군요. 집에서 쫓겨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푸른 로봇의 말에 로젤리아는 표정은 잠시 굳어졌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딱딱함은 풀리고 그녀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 그것도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랍니다. 한동안은 사무소에 신세를 져야겠지만 말이죠.”
“우리야 지원금을 더 준다는데 싫을 리가 있나. 누나, 우리 이참에 사무소 집어치우고, 여관이나 해볼까? 내가 손님을 맞고, 로제가 요리를 하는 거지. 누나는 장부를 정리하는 거야!”
“제이, 너 그러다가 한 대 맞는 수가 있어. 나 아직 화 안 풀렸거든?”
제이의 장난스러운 발언에, 앤은 두 눈에 불꽃을 튀었다. 어쩌면 이제 그것이 평상시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은 푸른 로봇은 가볍게 웃으며 그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하하, 상태를 보니 세 분 다 별로 개의치 않으시는 거 같군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제가 드린 뱃지에 대한 거라면 로젤리아 씨에게 물어보시면 되실 겁니다.”
“... 이거 말인가요? 흠, 이게 그 세계라는 걸 넘나는 들 정도로 신호가 강한 물건인건가... “
앤은 푸른 로봇에게 받은 금색의 뱃지 하나를 보았다. 손바닥 위에 그것에 대해 이미 간단한 설명을 들었지만, 그런데도 그녀의 머릿속은 그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재밌는 일이 많이 일어난답니다. 그저, 장신구 중 하나로 받아들이셔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제 도움이 필요할 때가 된다면, 적어도 희망을 가지고 믿어보시죠. 그럼, 여러분 작별입니다.”
“손님도, 다음에는 그 나비라는 애도 데려와, 로제한테 스튜 만들라고 할 테니깐 말이야.”
“조심히 가세요. 푸른빛의 은인님. 정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들 사이에 가벼운 눈빛이 오고 갔다. 그리고 푸른 로봇의 옆을 돌던 작은 구체가 힘을 방출해내기 시작했다.
“여러분~. 다음에 봐요-.”
곧 힘의 원 안으로 구체가 사라지고, 그 뒤를 푸른 로봇이 걸어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허공만이 남은 곳에 조금의 정적이 흐르고, 제이가 큰 숨을 토해냈다.
“하아-. 손님도 갔네. 그럼 이제 집에 돌아가자.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아. 보고서는 나중에 작성할래.”
“그래, 돌아가자. 한동안 일은 쉬어야겠네. 로제, 너는 돌아가는 즉시, 네 얼굴이 박힌 전단지 회수해 와.”
“읔, 아, 알겠습니다. 언니.”
앤이 자신의 의자에 바퀴를 끌어 돌아 나갔다. 로젤리아는 제이의 의자 손잡이를 잡고 밀어나갔다. 바람이 적당히 불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거리였다. 누군가에게는 그리운 집이자,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거처를 향해 그들은 바쁘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