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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일 커플이 깨진 기분을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면 내가 절벽 앞에 서 있는 기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열 번 찍어 뽑히지 않는 돌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틀린 말이다.
천 번을 찍어야 모습을 드러내는 돌도 있었으니까.
처음의 고백은 지금도 기억할 수 있다.
마을을 찾아온 검은 마법사.
검은 로브를 입고, 검은 지팡이를 든 그녀.
나는 그녀에게 매혹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이야기.
아무것도 없는 농부 청년이, 모든 것을 담아 진심을 내지른 고백.
뻔한 결말이었다.
홀로 여행하는 노련한 마법사.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농부.
포기할 수 없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을 불사를 수 있는 감정.
그녀가 마을을 떠나던 날, 나 또한 마을을 떠났다.
한 손에 도끼를 쥐고, 그녀를 쫓아.
이어지는 천 번의 고백.
어찌 기억하냐고 물어본다면 간단한 이야기다.
그녀를 치장하려면 천번으로 모자랐기에.
마음을 표현하려면 천번으로 모자랐기에.
일천에 달하는 상황을 준비하였다.
천 번의 고백.
천 번의 진심.
천 번의 무대.
마지막 고백.
그것은 내 모든 것을 건 행동.
도끼가 아닌 검을 쥐고 그녀에게 치장되지 않은 본심을 털어놓았다.
너 없이 살아갈 수 없노라고. 너를 위해 이렇게 되었다고.
사랑을 위해 도끼를 들고 마을을 나온 청년은.
검을 든 전사가 되었다. 오로지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실패하면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단련된 몸도. 기나긴 여행도.
그녀가 없다면 가치가 없으니까.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미는 손, 들뜬 목소리, 가까워진 거리.
무뚝뚝한 그녀에게는 그것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었으리라.
이어지는 천일의 행복.
모든 제물을 처분하여 반지를 샀다.
검은 그녀에게 어울리는 흰 반지를.
흰 반지가 지금 내 손안에 있다.
반지를 절벽 끝에 내려놓고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그녀가 없는 삶은 가치가 없기에.
녹슨 검이 보였다.
나처럼 버림받은 검이.
최후를 장식해줄 검이.
모든 것을 잃은 남자의 목에 어울리는 검이.
검을 뽑았다.
나는 그녀를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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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남자였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나에게.
단 한 번도 같은 행동도 보이지 않은 그.
한낱 촌부였던 남자는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
촌부처럼 얼빠지게.
전사처럼 강인하게.
시인처럼 능글맞게.
광대처럼 익살맞게.
권태로 권좌를 떠난 나에게 그는 좋은 상대였다.
마음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행동하는 것이니.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른다.
내장과 살점 사이에서 태어나, 분노와 원망으로 자란 나는.
어떻게 타인을 믿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가 곁을 떠나는 것은 싫었기에.
그를 받아들였다.
짧은 시간이 이어졌다.
나에게는 정말 티끌 같은 시간.
권태를 해결하기에는 좋은 시간이었다.
그는 날 즐겁게 해주었으니까.
어느 날, 그가 나에게 흰 반지를 내밀었다.
함께해달라며.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꿈은 깨어졌다.
나는 행복할 수 없다.
나는 인간의 적이니.
그의 눈앞에서 공간을 넘었다.
권태는 해소되었다.
권좌에 앉았다.
주어진 일을 해나간다.
세상을 침공하기 위한 일.
새로운 전쟁을 준비한다.
신을 멸하고 마족의 원한을 풀 수 있을 거라 믿으며.
그렇지만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남자에게 내어준 마음이 울부짖는다.
마음을 봉인하고 해야 할 일을 해나간다.
꿈에서 그를 보았다.
빛나는 검을 쥐고 나를 바라보는 그.
잠에서 깨었다.
눈물이 흘렀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는 내 안에서 이리 커져 있었다는 것을.
권좌에서 내려와 그를 찾았다.
함께해온 길을 역으로 걸었다.
어디에서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함께 걸은 여행길.
함께 묵었던 여인숙.
고백을 승낙한 공터.
여행길의 마지막.
그의 고향에서 찾은 실마리.
그가 자살했다는 이야기.
절벽 위에 섰다.
절벽 끝에 걸려있는 흰 반지.
흙에 파묻힌 그것을 손에 끼웠다.
딱 맞는 크기였다.
딱 맞는. 흰 반지.
그리움은 분노가 되었다.
나는 힘을 흩뿌렸다.
땅을 뒤엎었다.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공간을 가르고 명계를 넘었다.
영혼은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얼어붙는다.
그와 있었던 잠깐의 따스함.
이제는 알 수 있다.
그것이 행복이며 사랑임을.
이제는 그것이 사라졌기에.
나는 마왕이 되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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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용사와 마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