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 으으씨 그렇게 거침없이 말하면 내가 더 미안해지잖아, 으으으!”
나름 마음고생을 했는지 아르실의 눈에서 눈물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가온은 천천히 아르실에게 다가가 그녀를 살포시 안아주자 아르실은 참지 않고 대차게 울었다.
“흐, 흐윽, 난 진짜로 가온 네가 날 떠나는 줄 알고……흐, 흐윽.”
“미안, 진짜 미안, 다시는 그런 말 안 할게.”
“히끅, 나도 미안해, 골목에 널 두고 가버려서 진짜 미안해.”
“이제 괜찮아.”
가온은 울먹이는 아르실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쉽게 화내고 토라지고 울고 그리고 사과까지 정말 어린아이다운 모습이었다.
아르실은 펑펑 울다가 화들짝 놀라곤 황급히 가온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눈이 퉁퉁 부은 아르실은 자신이 울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으으, 울었어, 울었다고, 가온 앞에서도, 저 쓰레기 앞에서도, 으으으 못 볼꼴을 보였어.”
“좀 울면 어때, 나도 울었는걸.”
“가온 너도? 헤헤, 진짠가 보네 눈이 부어 있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배시시 웃다가 이내 웃음을 그쳤다.
마냥 웃으며 좋아하기엔 지금의 말튼 성의 상황은 좋지가 않았다.
아르실은 표정을 굳힌 채 진지하게 물었다.
“사과까지 한 걸 보면 나한테 부탁할 게 있는 거지?”
“맞아, 하지만 사과는 진심이었어, 부족하면 또 할게.”
“으휴, 가온 너 오늘 나한테 부탁만 몇 번 한지 알고는 있는 거지? 이래라 저래라 아주 날 하인처럼 부려먹고 말이야.”
입을 삐쭉 내밀며 투덜거리는 아르실이지만, 이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여기가 조금은 마음은 들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내가 마음씨 좋은 여자여서 다행인 줄 알아, 나에게 부탁을 이렇게 여러 번 할 수 있는 사람은 핸슨 말고 없다고? 그래서 할 부탁이 뭐야?”
“그러니깐…….”
가온과 아르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머지 세 사람은 눈치껏 뒤로 빠져주었다.
감독관 시에나 렘 브란트, 하룬가의 감독관이고 말튼 성의 시녀 그리고 자유 해방단원.
각기 다른 소속의 신분으로서 살아온 이들로서는 만날 접점 따윈 없었지만, 가온으로 인해 만나게 된 이들이다.
어색한 분위기 속 말없이 기다리기는 뭐하니 감독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다들 저 두 아이와 관계가 있는 거 맞죠? 전 가온과 랠리 숲으로 가는 토벌대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네 그런 셈이죠, 전 가온이랑 시장에서 처음 만났어요.”
“전 숙소에서……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시에나는 밝게 웃으며 답하고 렘 브란트는 죽을병이라도 걸린 양 사색이 된 채 안절부절 못 했다.
시에나는 멀리서 대화하는 가온과 아르실을 보다가 한참 주위에서 뛰어다니는 시녀들을 번갈아보더니 걱정했다.
“그런데 가온은 어떻게 여기 안으로 들어온 거죠? 지금 내성 안으로의 출입은 엄격하게 금하고 있는데.”
“자유 해방단 단장님과 함께 들어왔습니다, 저도 같이 따라왔고요.”
“네? 그런 높은 사람이랑 가온이 함께요? 왜요?”
“그야 가온이 성을 구할 유일한 희망이니깐요.”
감독관의 서슴없는 대답에 시에나의 붉은 입술이 오그라들며 피식 웃었다.
“어머 농담도 할 줄 아시는 분이었네요, 성을 구할 유일한 희망이라니요, 농담도 참.”
“농담이 아닙니다, 적의 군대를 한번 물러가게 한 것이 가온이 한 일입니다.”
“네?”
진지한 감독관의 표정을 바라보던 시에나는 진심으로 놀랐는지 손을 떨며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 그게 정말 인가요! 시녀장님한테 듣기로는 자유 해방단 단장님이 활약하고 수비군이 잘 막아내서 적들이 잠시 물러갔다고 했는데.”
“해방단 단장님이 활약한 건 사실이지만, 수비군은 거의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습니다, 가온이 적들을 물러가게 해주지 않았더라면 말튼 성은 그대로 함락 당했을 겁니다.”
“맙소사, 저런 어린 노예가 혼자서 적들을? 아, 아앗, 말실수 방금은 못 들은 걸로 하세요.”
“가온이 노예인건 저도 알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다만 주위 사람들이 들으면 곤란할 수도 있으니 주의하죠.”
시에나의 말실수를 감독관은 따스하게 웃으며 위로했다.
렘 브란트는 시에나와 감독관의 대화에는 끼어들지 않은 채 멀찍이 떨어져서는 한껏 투덜거렸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야, 다 죽게 생겼는데!”
저 배 나온 중년의 남성은 그렇다 치고 사리판단 잘 할 것 같이 생긴 저 미인도 가온이라는 놈 하나 때문에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렘 브란트는 이를 아득바득 갈며 속으로 가온을 욕했다.
‘가온이라는 놈 때문이야 이 모든 일이 전부! 이럴 줄 알았으면 영주든 누구든 아무에게나 말했어야 했어, 저 노예 놈이 말튼 성을 배신하려 했다고!’
성벽 위에서 렘 브란트는 두 눈과 귀로 보고 들었다.
가온이 아르실에게 말튼 성의 병사들을 제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을.
가온이 바로 했던 말을 철회했다한들 렘 브란트는 이걸 그냥 넘길 만큼 마음 편한 사람이 아니었다.
‘믿을 놈 따윈 없어, 저기 있는 두 사람도 노예 놈도 그리고 날 버린 단장도!’
죽일 듯이 가온을 노려보며 저주하던 렘 브란트는 이내 그 시선을 바로 옆에 있는 아르실에게로 옮겼다.
‘노예 놈도 문제지만, 아르실 저 정신 나간 계집으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야 해.’
지하창고에서 아르실이 자신의 동료들을 끔찍하게 죽이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렘 브란트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복수심은커녕 증오어린 감정조차 없었다.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성 바깥에서 득실거리는 적의 군대보다 눈앞에 있는 저 어린 소녀가 렘 브란트에게 있어 가장 큰 공포였고 두려움이었다.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렘 브란트는 두 눈으로 보았다.
가온과 대화하기 전 렘 브란트에게 시선을 살며시 흘리며 뻥긋거린 아르실의 입술을.
아르실은 소리 없이 렘 브란트에게 경고했다.
-도망가면 죽일 거라고.
렘 브란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제길.’
전쟁이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기든 지든 탈출할 기회가 한 번은 생긴다는 것.
그때가 오면 반드시 도망가리라 렘 브란트는 속으로 다짐했다.
“안 돼.”
하운드를 조종할 수 있냐는 가온의 말에 아르실이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한 말이다.
하운드를 잡으면 끝나는 전쟁, 그렇기에 상대를 조종하는 능력을 가진 아르실이 하운드를 조종할 수만 있다면 끝난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르실은 안된다고 했다.
아르실은 턱 끝에 손가락을 짚은 채 하운드의 모습을 봤을 때를 묘사하며 설명했다.
“새하얀 갈기를 가진 거대한 늑대의 모습을 한 놈이 이방인 하운드 맞지? 가온 너랑 성벽 위에서 놈을 처음 봤을 때, 조종하기도 전에 대충 느낌이 왔어 이놈은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녀석이라고.”
“짐승이라서 하지 못 한 거야?”
“아니, 평범한 짐승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을 비틀게 할 수 있었어, 하지만 가온 네 말대로 하운드는 여타 이방인들과는 뭔가 달랐지, 으음, 뭐라 표현해야하나 불꽃같았어, 오로지 한 가지 감정에 모든 걸 맡기고 태우려는 불꽃 말이야.”
“불꽃?”
가온의 물음에 아르실은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어보였다.
마치 자기가 하운드의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처럼 여운이 가득 찬 표정의 그녀는 뒷짐을 쥔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잔잔한 어조로 말했다.
“놈은 복수와 증오로 똘똘 뭉친 채 퍼져나가는 거대한 화마 그 자체야, 저토록 강렬한 감정에 휩싸인 채 날뛰는 놈은 내가 쉽게 조종하기 힘들어.”
“조종하기 힘들다는 거지 못 한다는 건 아니네?”
가온의 예리한 지적에 아르실은 고개를 작게 고개를 끄덕이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로 이어 말했다.
“그저 미쳐 날뛰는 이방인이었다면 그랬겠지, 최강의 이방인인 루 아르케에게도 내 힘이 닿긴 했으니깐, 그런데 하운드 그 놈에겐 뭔가가 더 있어.”
아르실은 그 말을 하고선 내성 너머 성벽 바깥에 포진한 적들의 군세를 가리켰다.
말튼 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여전히 말튼 성 전역을 에워싼 거대한 적들의 군세 속 수많은 짐승들과 병사들은 각자 자리에 잡은 채 말튼 성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르실은 반짝이는 눈으로 적들의 군세를 응시한 채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하운드는 분명 미쳐있지만 그런 거 치곤 되게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있어, 무작정 군대를 이끌고 공격한 게 아니라 차분하게 말튼 성의 지원세력부터 차단하고 포위망을 좁혀왔지, 감정에 휩쓸리기만 했다면 절대로 못 할 일이야.”
“…….”
“미쳐 날뛰어야 할 놈의 의식은 뭔가에 의해 보호받고 있어, 그 덕에 녀석은 이성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 내가 녀석의 의식에 간섭할 수도 없는 거 같아, 이상한 일이지 녀석의 능력 같지는 않은 데 대체 뭘까, 다른 이방인의 힘인 걸까.”
이방인이라는 단어에 가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르실은 가온의 표정을 보고 있지 않았기에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여하튼 하운드가 그냥 미쳐 날뛰는 거라면 어느 정도 조종하는 게 가능하겠지만, 놈의 의식을 보호하는 무언가 때문에 조종은 힘들어, 미안 가온, 모처럼 너의 부탁을 들어주려했는데, 힘들게 되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