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초 몇 개 배합한 걸로 저만한 효과를 지닌 진통제를 만들 수 있다니.
당혹스러움과 놀라움으로 가득하던 시녀 장은 이내 자신의 본분을 자각한 뒤 표정을 굳히곤 다시 시녀들을 인솔했다.
“아르실! 이번엔 14번 치료소로!”
“으으, 벌써 몇 시간 째 뛰어다니는 거야, 더는 못 뛰겠어.”
“너 아니면 해줄 사람이 없어, 부탁할게.”
“흐, 흐흥,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지.”
내성을 뛰어다니는 시에나와 아르실, 뛰어다니는 게 익숙하지 않은 아르실은 몇 번이고 그만두려는 기색을 보였지만, 그때마다 기운을 돋우게 하는 시에나의 응원 덕에 여지껏 포기하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치료소에 들어간 아르실은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자신이 만든 약초를 먹였다.
“자 먹어.”
“으, 으아아악! 살려줘! 몸이 찢어질 듯이 아파! 그아아아악!”
“아 좀 다물고 먹으라고! 아 다물면 못 먹지 이것만 먹고 다물어.”
“크으윽, 뭐야 이건? 이 건방진 꼬마가 지금 뭘 먹인 거……으으으으.”
몸을 비틀며 발작하던 환자는 아르실이 만든 약초를 먹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얌전해졌다.
옆에서 이 광경을 본 시녀들과 시종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봐, 봤어? 우리가 아무리 진정시키려 해도 발작이 멈추지 않은 환자였는데 저렇게 바로 진정시키다니.”
“덕분에 상처를 치료 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인데 저 약초 괜찮은 거 맞지?”
“환자의 맥박이랑 호흡은 정상이야, 어지간히 효과 좋은 진통제인가보네.”
“대단하네, 저 꼬마, 약초도 자기가 혼자 만들어 온 거라며? 어디 유명한 의사 집안의 딸인가?”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들을 아르실은 하나도 빠짐없이 듣곤 만족스러워했다.
“흐흐, 이제야 다들 내 진가를 알아보네!”
“아르실 다른 환자들도.”
시에나의 말에 따라 아르실은 다른 환자들에게 능숙한 손길로 약을 먹였다.
발작하는 환자들의 수가 하나 둘씩 줄어들고 그럴수록 아르실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놀라움과 경외감이 깃들었다.
어느새 가지고 있던 약이 바닥나자 아르실은 서슴지 않고 누군가를 불렀다.
“야 쓰레기 빨리 가져와.”
아르실의 손짓에 렘 브란트가 소리 없이 다가와 약을 건네주었다.
“여, 여기 있습니다.”
“흠? 뒤에 호칭 안 붙여?”
“아, 아아, 여기 있습니다, 아르실 님.”
“그래, 넌 내가 부를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
이젠 정말 하인처럼 부리는 아르실과 묵묵히 그에 따르는 렘 브란트, 시에나가 잠시 동정의 시선을 보냈지만, 그녀 또한 다른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바빴다.
그렇게 또 다른 치료소를 들락날락거리기를 몇 번, 시에나도 슬슬 지쳤는지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끄응, 다시 한 번 치료소를 돌아야 하는 데.”
시에나는 떨려오는 눈꺼풀을 억지로 고정시킨 채 아르실을 찾았다.
아르실은 이젠 시키지도 않고 알아서 치료소로 들어가 환자들에게 약초를 먹이는 중이었다.
“자, 아아 해.”
“어린애 취급 하냐? 의원들은 뭐하는 거야? 이런 꼬맹이가 막 들어오게 그냥 두고!”
“아 그 입 닥……입 다물고 먹어.”
“음음! 으으으.”
일단 입에만 넣기만 하면 바로 죽은 듯이 잠드는 아르실의 약초, 주위 사람들은 감탄하고 아르실은 주위의 감탄을 들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시에나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귀여운 아이야.”
처음 봤을 땐 손가락 하나로 사람을 손쉽게 죽이는 걸 보고 겁을 먹었지만, 이렇게 보니 남을 돕는 데 헌신적인 착한 소녀였다.
위험한 힘을 가졌지만, 조금 성격이 이상할 뿐 착한 아이라는 게 아르실에 대한 시에나의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몇 번을 봐도 신기하긴 하네, 약초 몇 개 제조 한 걸로 저만한 진통제를 만들 수 있을 줄이야.”
“진통제가 아닙니다, 줄곧 능력으로 사람을 잠재우고 있는 겁니다.”
“어멋?”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시에나는 옆에서 들린 렘 브란트의 힘빠진 목소리에 작게나마 놀랐다.
하루 종일 아르실 옆에서 시중을 드느냐 지칠 대로 지친 렘 브란트는 놀란 시에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어 말했다.
“이미 보시지 않았나요, 저 꼬마, 아니 아르실님의 능력을요.”
“손가락 하나 까딱하니 목이 꺾이는 그 능력이요? 무섭긴 하지만, 그거랑 무슨 상관이죠?”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는 능력으로 환자들을 잠재우고 있는 겁니다, 약초는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겉 치례고요.”
“약초 때문이 아니었다고요?”
렘 브란트의 말에 시에나는 문득 아르실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불량아들로부터 다친 아이의 아버지를 치료했을 때 아르실은 이런 말을 했었다.
-이 아르실님의 치료는 다른 사람들의 치료법과는 다르거든, 간단히 말해주자면 환자의 정신력만 강하면 웬만한 건 다 치료할 수 있어.
정신력을 강조하는 이상한 아르실의 치료법에 대한 의문이 조금은 풀렸다.
“그러고 보니 성문 앞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을 한 번에 흩어지게 했던 걸 보면 정말로 조종하는 능력이었던 거야?”
놀란 표정을 보이는 시에나를 보며 렘 브란트는 경고했다.
“너무 가까이 하지는 마세요, 정말 위험한 인물입니다, 지금이야 선행을 베풀고 있지만, 돌변하면 모두를 죽일지도 모릅니다.”
“충고는 고맙지만, 어찌되었건 저희를 돕고 있는 건 사실이잖아요? 그것만으로 충분해요.”
“……후회 할 겁니다.”
“후회는 그쪽이 해야 할 거 같은데요.”
“네?”
시에나의 말에 렘 브란트는 그제야 뒤에서 찔러대는 날카로운 시선을 느꼈다.
당연하게도 아르실이었다.
렘 브란트는 혼이 빠질 정도로 놀라며 다급히 엎드렸다.
“허, 허허헉! 어, 언제 오셨습니까?”
아르실은 살기등등한 눈으로 렘 브란트를 노려보며 물었다.
“야 쓰레기, 지금 네가 잘못한 걸 읊어봐.”
“네?”
“손가락 마디마디를 꺾어줄까?”
“히, 히익.”
남들이 듣기에는 그저 소녀의 짜증섞인 투덜거림으로 들리지만, 렘 브란트는 알고 있었다.
아르실이 눈썹만 찌푸려도 자신은 목이 꺾여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렘 브란트는 거짓말이나 변명을 할 재간도 없이 있는 대로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나가 그만 아, 아르실 님의 험담을.”
“응? 내 뒷담을 깠어?”
“네? 그걸 말하는 게 아니었나요?”
“내가 부르면 바로 뛰어와서 약초를 달라했잖아, 불러도 안 와서 온 건데.”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침묵이 오갔다.
렘 브란트는 졸지에 자기 죄를 더해버린 셈이었다.
침묵이 오갈수록 아르실의 눈썹은 더욱 꿈틀거리고 렘 브란트는 사색이 된 채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이를 킥킥거리며 즐거워하는 시에나까지.
이런 분위기 속 차갑고도 날카로운 소년의 목소리가 세 사람의 단박에 시선을 끌었다.
“뭐하나 했더니 여기 있었네.”
세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시에나는 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고 떨고 있는 렘 브란트와 화난 아르실도 바로 돌렸다.
세 사람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가온과 그 뒤를 따라온 감독관이 있었다.
시에나는 가온을 보곤 격하게 기뻐했다.
“가온!”
“이름이 시에나 맞지? 그땐 고마웠어.”
“하하, 한참 지난 일인데 뭘, 그나저나 날 기억해줄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다행이야, 랠리 숲에서 돌아왔을 땐 진짜 걱정 많이 했다고.”
“응? 그걸 어떻게 알아?”
반가워하며 다가온 시에나의 말에 가온은 의아해했다.
가온이 기억하는 시에나와의 기억은 시장거리에서 일뿐이었다.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르실이랑 함께 다녔거든.”
“아르실이랑?”
“응, 아르실 거기서 뭐해? 네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 가온이라고.”
시에나의 부름에 가만히 있던 아르실과 가온의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 다 생각만큼 반가워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두 사람의 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시에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야, 두 사람 싸웠어?”
“……!”
“…….”
시에나의 말은 정곡이었다.
하운드의 권속이 되겠다는 가온을 아르실은 격하게 반대하며 매몰차게 버리고 갔던 적이 있었다.
아르실은 고개를 홱 돌린 채 가온에게 쌀쌀맞게 대했다.
“흥, 배신할거면서 여긴 왜 온 거야?”
“……미안.”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가온 넌 사과도 안 하고 맨날 자기 고집만 부려……응? 미안하다고?”
“응, 진짜 미안해.”
가온의 짤막한 사과에 아르실은 적잖이 당황한 듯 얼굴을 뻘겋게 물들인 채 어찌 할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아, 아니 갑자기 사과를 하면……그, 그래도 마음에 안 들어 여길 배신할 생각은 여전하잖아!”
“아니, 그 생각도 바꿨어, 권속 따윈 되지 않을 거야, 괜한 말로 널 괴롭혀서 미안해 날 믿어줄 수 있겠어?”
“으, 으으씨 그렇게 거침없이 말하면 내가 더 미안해지잖아, 으으으!”
나름 마음고생을 했는지 아르실의 눈에서 눈물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가온은 천천히 아르실에게 다가가 그녀를 살포시 안아주자 아르실은 참지 않고 대차게 울었다.
“흐, 흐윽, 난 진짜로 가온 네가 날 떠나는 줄 알고……흐, 흐윽.”
“미안, 진짜 미안, 다시는 그런 말 안 할게.”
“히끅, 나도 미안해, 골목에 널 두고 가버려서 진짜 미안해.”
“이제 괜찮아.”
가온은 울먹이는 아르실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쉽게 화내고 토라지고 울고 그리고 사과까지 정말 어린아이다운 모습이었다.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