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아침이 밝아오는 것을 알리는 소리였다. 기름 냄새와 쇠 냄새가 가볍게 나는 방 안, 책상 위 벽면에는 조이고, 풀고, 두드리고, 잘라낼 수 있는 다양한 모습의 공구들이 한가득 걸려있었고, 그 밑 책상의 위로는 둥근 안경과 파란 도면, 그리고 잡다한 물건들이 어질러져 있었다.
책상을 조금 벗어나, 방의 구석 한 부분을 차지한 나무로 만든 책장에는 겉표지가 닳아있는 오래된 책들과 비교적 새 것으로 보이는 책들이 섞여서 꽂혀 있었다. 그 외에도 방 곳곳에 서랍장, 옷걸이, 아기자기한 장식품,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퀴 달린 의자가 빈 곳을 채워나갔다.
방 옆면에 자리한 창문을 통해, 아침의 햇빛이 조금씩 내부를 채워나갔다. 방 안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하더니,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침대의 이불보를 덮어갔다.
“... 으음…”
겉보기에도 푹신해 보이는 커다란 이불 안에서 무언가가 들썩거렸다. 방금까지 꿈속을 여행 중이던 한 여성이 눈을 떴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두 눈을 비볐다. 잠을 깨려는 듯, 잠깐의 행동이 끝나고는 반쯤 혼미한 상태로 자신의 위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감겨있던 두 눈이 바라본 것은 나무로 된 천장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다행히도, 처음 보는 천장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항상 봐오던 천장 또한 아니었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조심스럽게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하얀 와이셔츠와 이불이 스스슥 거리며 쓸리는 소리를 냈다. 반쯤 풀린 셔츠의 끝 단추를 한 손으로 잡으며, 그녀는 다른 한 손으로는 터져 나오는 하품에 입을 손으로 가볍게 가렸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그런 그녀의 금색 같은 노란색의 머리칼 밝게 비췄다.
“으으, 추워.”
새벽을 지나고, 시간은 아침과 한 가운데 서서 어정쩡한 자리에 있었다. 그녀는 창밖을 한 번 보고는 간단하게 시간을 추측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옆에서 자고있던 또 다른 존재를 바라봤다. 아직 그녀의 기상을 알지 못하는 흑발의 여자는 옆에서 일어나는 변화로 인해,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에 몸을 뒤척였다.
금발의 그녀는 조심히 이불을 벗어났다. 그 조금의 충격으로도 잠이 깨지 않을까, 그녀의 집중된 신경은 행동에 묻어 나왔다. 다행히, 침대 속의 존재는 여전히 꿈속을 여행 중인 듯했다. 그녀는 삐걱이는 나무 바닥의 소리를 조심하며, 옷걸이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이에게서 잠시 빌려 입었던 셔츠의 단추를 풀어내고는, 옷걸이에 걸려있던 자신의 연초록의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그 옷은 조금의 여유가 남았다. 평소에 입었던 옷과는 다른 감각, 자신의 수치를 측정해 만들어 왔던 옷들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느낌을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아했다. 벗었던 셔츠를 옷걸이에 걸어두고, 등 뒤에 달려있던 지퍼를 끝까지 올려 환복을 마친 그녀는 밑에 있던 자신의 구두를 챙기고는 조심히 방을 빠져나왔다.
조심한 걸음으로 방을 나오자 보이는 것은 나무로 되어, 생긴 건 단순하고도 투박했지만 따뜻함이 느껴지는 식탁이었다. 어젯밤, 모두 함께 단란한 식사와 티타임을 가졌던 자리였다. 지금은 그저 깨끗이 정리되어, 조용히 아침식사를 위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식탁을 넘어, 그 뒤에 자리한 욕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간단한 세면대와 그 위로 거울이 보였다. 그녀는 그 곳으로 걸었다. 그리고 거울을 봤다. 엉망으로 어질러진 머리와, 막 잠에서 깨어남을 나타내듯, 붉은 눈이 더 붉게 비춰보였다.
세면대의 물을 틀어, 가볍게 머리를 정리하고는 세수를 했다. 속으로는 따뜻한 욕조나 샤워기로 몸을 씻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러면 두 사람이 깨어날 것을 알았기에, 간단한 세면으로만 만족했다. 가볍게 정돈이 끝나고 그녀는 밖으로 나왔다. 방을 벗어나, 사무실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를 앞에 두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자신이 잠을 청했던 방 옆에 자리한 또 하나의 방을 바라봤다.
“... 분명, 또 뭐라 한소리 하겠지.”
짧은 혼잣말이 끝나고, 그녀는 조용히 앞만을 바라보며 걸었다. 조금을 걸어 도착한 곳은 아직은 어두컴컴한 사무실이었다. 아침의 햇살을 받으며, 하얀 먼지가 공중을 둥둥 떠다니는 것이 보이는 책상들을 향해 그녀는 걸었다.
아직은 쌀쌀하면서도 적적함만이 흐르는 사무실에는 그녀 혼자만이 있는 것을 알리듯, 구두 소리만이 또각거렸다. 곧이어 그녀는 두 개의 책상 중, 어질러진 책상 쪽으로 향해 위에서부터 서랍을 하나씩 뒤적거렸다.
둥근 손잡이가 달린 서랍을 하나씩 열어가며, 하나가 끝나면 그다음 서랍을 뒤적였다. 무언가를 열심히 찾아가는 그녀에게,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관찰하고 있던 또다른 무언가가 말을 걸어왔다.
“... 뭐하시는 거죠?”
“히익!!”
짧은 외침, 전날 저녁 시간에도 냈던 외침과 같은 소리가 그녀의 입 속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는 소리가 났던 방향으로 시선을 재빠르게 돌렸다. 책상 옆에 자리한 벽 너머에서 머리만을 빼꼼히 내밀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존재를 봤다. 자신을 이세계의 방문자라고 표현했던 로봇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그녀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지금의 상황을 설명했다.
“카, 카일 씨로군요. 혹시, 시끄러워서 깨셨나요?”
“... 아니요,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이 몸은 기계라 수면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으신 거죠?”
“계획 이라뇨. 단지, 찾는 게 있어서 그래요. 잠시, 빌려가는 거죠.”
로젤리아는 어색하게 대답을 하고는 다시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시선을 밑으로 향하며, 구석구석을 뒤지던 그녀가 그다음 서랍으로 넘어갈 때쯤, 로봇은 어느 궁금증을 가진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무엇을 예상한 듯, 로봇에게 말을 걸어왔다.
“혹시, 어제에 대한 일이 신경 쓰이시나요?”
“... 안 그렇다면, 거짓말이죠. 제가 말했지만, 쉽게 믿을 이야기가 아니란 거는 제일 잘 안답니다. 그저, 어떤 반응을 했을까 궁금하긴 한답니다. 돌아와 보니, 다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대해주셔서 말이죠.”
“후후. 그거라면,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말을 끝내고, 잠시 나가셨을 때, 다들 이야기를 나눴죠. 그리고는 짧은 결론에 도달했답니다.”
“... 어떤…”
“뭐, 다른 분들 반응을 보면 예상하셨을지도 모르지만, 어제 저희들에게 해주셨던 이야기에 대해선, 이해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로 의견이 모였죠. 하지만, 은인님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아니었답니다.”
“이해하기보다, 그저 받아들였다는 건가요…?”
“어머, 잘 아시는군요. 예,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그저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답니다. 누군가는 은인으로, 누군가는 손님으로… 이해할 수 없다면, 이해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지 않을까요.”
“... 그런가요… 그렇게라도 받아들여 주셨다면, 다행이네요.”
“아, 찾았다. 여기 넣어놨구나.”
로젤리아는 로봇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한 채, 자신이 찾던 것을 서랍의 마지막 칸에서 찾아내었다. 조심히 그것을 꺼내, 책상 위에 가볍게 올려놓았다. 손바닥보다는 조금 크고, 별다른 장식은 되어있지 않은 그저 평범해 보이는 나무 상자였다. 그녀는 그것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다시 닫았다. 그리고는 상자를 옆구리에 끼우고서는 로봇에게 작별인사를 남겼다.
“자, 제가 여기서 할 일은 다 마쳤군요. 그렇다면, 마지막 인사를 나눌까요. 우연치 않은 만남이었다고 하셨지만, 덕분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적어도 집으로 돌아가시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어제 약속하셨죠. 위험한 일은 안되십니다.”
“... 후후, 조심해 보도록 하죠. 아, 제이와 언니 두 사람은 아직 침대 속이랍니다. 혹시라도 두 사람이 절 찾는다면, 그냥 몰래 사라졌다고만 해주세요. 아직, 확인해야 하는 것이 남아있어서 그렇답니다. 일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갈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 예. 로젤리아 씨도 조심… 아니지, 이거 하나 받아가시죠.”
로봇은 로젤리아 쪽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는 한 손에 쥐고 있던 것을 그녀에게 건넸다. 로봇의 손바닥 위에는 금색의 뱃지가 하나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유심히 바라봤다. 갑자기 자신에게 건네주는 선물에 그녀는 그것을 조심히 받아 들고는 손가락으로 잡아 올려다봤다. 그녀가 살아생전 본 적 없는 문양이 찍혀있었다.
“... 이건… 장식품인가요…?”
“송수신기라고 부르는 물건입니다만… 간단하게 말하면, 신호를 주고받는 것입니다.”
“이걸 저에게 어째서…?”
“소파를 양보해 주신 선물입니다. 혹시라도 제가 찾는 물건이나 소문이 들리거나, 위험에 빠지신다면 그걸 사용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 그런 건가요… 감사합니다. 다른 두 사람에게도 주는 건가요?”
“... 예. 뭐, 원래 여분을 들고 다니는 성격은 아닌데, 이번엔 혹시나 싶어 여러 개 챙겨 왔는데 운이 좋군요.”
“후후, 운보다는 운명일지도 모르죠. 그럼 가보겠습니다. 다른 두 사람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조심히 가시죠.”
로젤리아는 치마 끝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인사를 마쳤다. 그리고는 로봇이 준 뱃지를 드레스 상단에 달고서는 사무소를 조용히 나섰다. 이번에는 사무실내에 로봇이 홀로 남았다. 로봇은 다시 소파로 돌아와 누웠다.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로봇의 내부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운명이라…”
“... 당돌한 아가씨네. 전에 그 붉은 머리 아가씨처럼 말이야. 신경 쓰여?”
“안 된다면, 거짓말이지. 어제 보니, 도시의 치안은 괜찮은 것 같지만, 혼자 노숙을 하고 돌아다니기에는 많이 위험하잖아.”
“그렇게 신경 쓰이면, 며칠 더 있다 가도 되잖아. 나비도 누나가 챙겨줄 거고, 혹시라도 나비에게 전해 줄 재밌는 이야기가 더 생길지도 모르잖아?”
“... 그렇긴 한데… 에너지도 아낄 수도 있고, 분명 재밌는 이야기가 생기면 아트가 화내는 일도 늘어날 것 같고…”
“뭐, 판단은 보스가 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수학적 계산뿐이라서 말이야.”
“... 그럼, 일단 천천히 생각해보자. 두 사람에게도 인사는 하고 가야 하니까 말이야.”
소파에 드러누운 로봇은 그대로 천장을 바라봤다. 갈색의 나무 천장이 보였다.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로봇의 몸체를 밝혀갔다. 햇살이 닿는 부위가 조금씩 따뜻해져 갔다. 하지만 로봇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어째서일까, 로젤리아의 머리칼이 그녀를 닮아서일까, 앤의 말이 그녀와 비슷해서 일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제이의 활발함도 그녀에게서 보였던 것 같았다.
“... 누구랑도 웃으며 지냈지…”
“... 집에 간 거… 설마, 또 노숙이라도…”
“... 설마, 적당히 하다… 들어가겠지.”
말소리가 들려왔다. 사무실이나 밖이 아닌, 안쪽이었다. 아마도 두 사람이 깨어났다는 것으로 로봇은 생각했다. 로젤리아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그들을, 로봇은 조용히 기다렸다. 괜히 지금 나서서 얘기했다가는 로젤리아를 뒤쫓아 가게 만드는 일이 될 거 같았다. 말소리가 수그러들더니, 이번에는 걸음 소리가 커져갔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로봇의 위로 제이의 파란 두 눈이 빛났다.
“좋은 아침 이군요.”
“아아, 손님도 좋은 아침이야. 혹시 로제 봤어?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말이야…”
“로젤리아 씨 라면 조금 전에 나가셨습니다. 확인할 게 있다고만 하시더군요.”
“... 그래? 뭐, 그럼 적당히 알아서 하겠지. 자기 앞 가름은 할 나이니까 말이야.”
하얀 셔츠 차림의 제이가 하품을 하며 자리를 떠나려던 사이, 이번에는 커다란 소리가 들리며 사무소의 문이 열렸다. 젊은 남성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딸랑거리는 종소리보다 크게 제이를 찾았다.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그를 제이와 로봇이 놀라 바라봤다.
“제이!! 있는 거 다 알아. 당장 튀어나와!”
“여어, 오르베도 형이잖아. 아침 일찍부터 웬일이야?”
“너 이 자식, 아가씨 어디 있어!?”
“로제라면 이미 도망갔어. 눈치가 빠른 건지… 즉슨 여기엔 이미 없다는 말이지.”
“어어? 오르베도 씨? 여긴 어떻게?”
제이와 방문객의 대화가 오가는 동안, 앤이 잠옷 차림으로 의자를 끌고 사무실로 나왔다. 그리고는 방문객과 눈이 마주쳤다. 회색 머리를 뒤로 넘겨 깔끔하게 정리하고 잿빛의 조끼를 입은 그의 얼굴은 이미 땀 투성이었다. 먼 곳에서 열심히 뛰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푸른 목 보호대를 차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 하아, 앤 양도 반갑습니다. 이런 이른 시간에 실례하고 있습니다만, 제이 너 말이야. 아가씨가 여기 있다는 말을 저택 내부인에게 말하면 되지, 우편함에 꽂아 둘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이야!?”
“아니, 바로 말했다간 확정적으로 사무소로 직행일 거면서 말이야. 로제도 생각을 정리하면 들어갈 줄 알았지. 나도 계획이 있었는데...”
“뭐야. 제이, 루베리아 씨네 이미 말해둔 거였어?”
“예, 쪽지를 우편함 깊숙이 넣어놔서 아침이 돼서야 겨우 확인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아가씨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아?”
“글쎄, 나도 모르지. 어쩌면 집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 아닐까? 엇갈렸을 수도 있지.”
“... 아뇨, 집으로 바로 가신다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만…”
대화를 나누던 세 사람 사이로, 로봇이 끼어들었다. 갑자기 들어오는 목소리에서 어딘가 익숙함을 느낀 오르베도는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거친 숨을 내쉬던 그가 본 것은, 자신이 목에 차고 있는 보호대를 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그 원인 또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손님 나와도 되겠어? 형 저렇게 만든 게 손님이잖아.”
“예, 뭐 그렇죠. 그래서 적어도 사과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냥 숨어있어도 되는데, 오르베도 씨도 모르고 넘어갔을 수도 있는데 말이야…”
“두 사람 다… 당신, 아가씨를 도왔던 사람 이잖아…?”
“예, 그... 오르베도 씨였나요. 죄송합니다. 로젤리아 씨의 꾀에 둘 다 놀아난 거 같군요. 어제 있던 무력행사, 정말 사과드립니다.”
로봇은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대한 충격일까, 아니면 그저 허탈함을 느끼는 것일까, 그런 로봇을 보고는 오르베도는 한 숨을 쉬며, 손님용 테이블로 걸어가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반짝이는 안경을 고쳐 쓰며, 로봇에게 말했다.
“... 그건, 나도 이해하죠. 그 상황을 외부인이 봤을 땐, 저 같아도 오해했을 게 뻔하니깐요… 그래서, 아가씨가 어디로 가셨는지는 아시나요?”
“... 아뇨, 저도 모릅니다. 그저, 제이 씨의 책상에서 나무 상자 하나를 들고 가셨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나무 상자…? 제이 책상에서? 제이, 너 뭐 챙겨 놓은 게 있었어?”
“응? 갑자기 거기서 내 책상이? 뭐지… 뭐 좋은 거 넣어둔 기억은 없는데…”
제이는 자신의 어질러진 책상으로 향했다. 위에 쌓여있는 잡동사니들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그는 서랍의 가장 밑 칸을 열었다. 자신이 그곳에 상자를 넣어뒀다는 것을 제이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그러니까, 여기서 가져간 상자 안에는…”
“안에는...?”
“... 기억이 안 나. 내가 뭘 넣어 놨었지? 광장 쪽 디저트 식당 할인쿠폰이었나?”
“... 하아, 너 같은 바보한테 뭘 바란 내가 바보지. 앤 양도 상자에 대한 건 모르는 건가요?”
“예, 저희도 서로의 사생활에 관한 건 선을 갈라놓고 있어서…”
“그럼, 기다리는 것 밖에 안 남았네? 형도 차나 한 잔 먹고 쉬이 들어가. 혹시 몰라? 로제가 이미 집에 있을지도 모르잖아.”
“... 아니, 아무래도 그것 보단, 네 정신머리를 고치는 게 우선인 것 같군. 특훈이다. 당장 공터로 출발하지. 요새 훈련을 조금 빠졌다고 해이해진 것 같아.”
“응? 갑자기? 내가 잘못 들었나? 특훈이라니?”
“아아, 해이해진 머릿속을 정리하는 데는 온몸의 땀을 쏙 빼는 게 좋지. 주먹을 내지르다 보면, 네가 까먹은 상자의 내용물이 떠오르지 않을까?”
“... 나 사실 아침 약속이 있어서 말이야. 그럼, 여러분. 모두들 안녕히 계시…”
제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르베도는 제이의 뒷목을 잡았다. 하얀 셔츠의 주름이 한 곳으로 몰리며, 제이는 죄인이 밧줄에 걸리듯 대롱대롱거렸다. 곧이어 제이가 발버둥 쳤지만, 아르베도 에게는 어림도 없어 보였다. 그저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생떼를 부리는 것 같았다.
“싫어! 싫어요!! 꺄악! 누가 도와줘!! 나쁜 아저씨가 가녀린 남자를 잡아가요!”
“시끄럽다!! 앤 양, 이 녀석은 잠시 빌려가죠. 마을에 전단지 부착 건은 끝났나요?”
“어제부로 끝내 놨죠. 일단 로제가 돌아가면 다시 수거할게요.”
“감사합니다. 점심 전에는 끝내도록 하죠… 그쪽에 계신 분도, 혹시 무술 같은 거에 관심 없으신가요?”
“... 예? 저 말인가요? 갑자기?”
“그렇습니다. 어제 모습을 보니, 대충 힘이나 속도는 수준급인 거 같습니다만, 기술이 부족하다고 할까요… 또 하나 신경 쓰이는 점이 있지만… 혹시 싫으시다면 괜찮습니다. 제가 보기엔, 지금도 충분히 강하신 것 같으시니깐요.”
“... 로젤리아 양의 소식도 궁금하고 하니… 좋습니다. 한 수 가르침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바로 가도록 하시죠. 여기서 조금을 걸으면 괜찮은 공터가 있습니다. 여기 좋은 샌드백도 있으니, 확실하게 배워가실 수 있을 겁니다.”
말을 마친 오르베도는 이미 끝을 예견한 듯 조용히 죽어있는 제이를 들고 사무실의 출입구 앞에 멈춰 섰다. 로봇이 그 뒤를 따르려던 중, 앤이 로봇에게 말을 걸었다. 두 사람은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 기껏 하실 거면, 제이는 좀 세게 때려주세요. 제 몫까지 말이에요… 그리고 며칠 더 있다 가셔도 되고요. 소파는 항상 비어있거든요.”
“누나, 나 다 듣고 있거든!! 젠장, 형, 이거 빨리 풀어줘! 한동안 조용해서 좋았는데 이게 뭐야!!”
“... 아무래도, 로젤리아 씨를 보낸 게 신경 쓰이는군요… 두 번이나 집에 돌아갈 기회를 제가 방해했으니 말입니다. 그럼, 잠시 갔다 오도록 하겠습니다.”
“조심하시고요. 뭐, 제이가 더 걱정이긴 하지만요.”
두 사람이 대화가 끝나고 로봇은 사무실을 나섰다.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내부에는 앤 혼자만이 남았다. 그녀는 손으로 하품이 새어 나오는 입을 가리고는, 조용히 바퀴 굴리며 안쪽으로 사라졌다.
“... 저 보고, 지금 제이 씨랑 싸우라는 말인가요…?”
“싸움이라기보단, 대련입니다. 그쪽이 어느 정도인지는 확실히 알아야 기준을 삼지 않겠습니까?”
공터보단, 작은 공원이라고 하는 표현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일반적인 공원이랑 다른 게 있다면 관리가 안된다는 것 정도 일 것이다. 바닥 곳곳에 드문드문 잡초가 푸르게 자라 올랐고, 노란색의 꽃 또한 보였다.
벤치와 분수 같은 것도 보였지만, 부서지고, 녹슬어 보이는 것이 이 곳이 관리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 한 눈에도 확실하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것들은 그저 조용히 그 자리에 있었다.
“흐읏, 하, 손님이 싫다면 안 해도 상관없기는 한데.”
“제이 말대로 하셔도 되기는 합니다만,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죠. 싸움에 관해, 당신이 내심 느끼고 있는 것 말입니다.”
그 장소에는 세 명이 있었다. 제이는 열심히 몸을 풀기 위한 준비운동을 하였고, 오르베도는 팔짱을 낀 채, 로봇에게 지금의 상황을 설명했다. 로봇은 스스로 느끼는 얼떨떨한 느낌을 없앨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오르베도의 동기부여가 통했는지, 제이와의 대련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 좋습니다. 한 번 해보도록 하죠.”
“좋은 정신입니다. 원래라면 제가 나서서 주먹을 맞대 봐야 하는 거지만, 보다시피 제 상태가 엉망인지라 제이가 대신하는 걸로 알고 계시면 됩니다. 튼튼한 놈이니… ‘전력’을 다 쏟아내시죠.”
“형을 제압했다는 실력, 한 번 경험해 볼까.”
조금의 간격을 벌렸다. 준비가 끝난 제이가 먼저 자세를 잡았다. 왼발을 앞으로 오른발을 뒤로 놓았다. 상체를 조금 오른쪽으로 튼 채, 왼팔은 손을 곧게 펼쳐 전방을 향해 가볍게 들고, 오른팔은 허리춤 밑으로 가볍게 두었다. 로봇 또한 다리의 간격을 펴고는 두 팔을 얼굴 앞에 두었다. 제이가 심호흡을 한 번 쉬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 제이, 오른팔은 쓰지 마라.”
“... 봐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그 조금의 바람은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을 스쳐 지나갔다. 제이가 쥔 오른 주먹의 장갑에서는 뽀드득 소리가 나며 힘이 잔뜩 들어갔다. 둘의 상태를 확인 한 오르베도는 대련을 시작시켰다. 시작은 제이였다. 로봇을 향해 빠르게 날아들었다.
날아온 것은 다리, 로봇의 머리를 향해 빠르게 발차기가 들어왔다. 제이의 왼다리와 로봇의 팔이 부딪치며, 금속이 울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로봇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정신을 집중하지 못했다.
하지만 상대는 달랐다. 곧바로 다음 공격이 로봇에게 들어왔다. 일방적인 폭력행사 같았다. 그 혼란 속에서도 로봇은 스스로의 방어에 온 정신을 전념했고, 제이는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갔다. 평소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그는 재빠르고, 날카로웠다.
“정신 안 차리면, 못 이겨. 손님.”
로봇을 농락하듯, 제이는 공격 사이사이에 말을 걸어왔다. 곧바로 뒤돌아 뛰어오른 제이의 오른쪽 다리가 로봇의 정중앙을 가격했다. 로봇은 두 팔로 막아섰다. 다행히 그 신체는 제이의 공격을 버텨내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로봇의 두 다리가 땅을 조금 밀어, 뒤로 밀려났다. 쓸린 흙을 박차고 나아가 이번에는 로봇이 공격에 나섰다.
“... 그럼…”
로봇은 붉은 눈을 휘날리며 제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무언가의 변화를 느낀 제이는 자세를 처음과 같이 다잡았다. 살포시 내민 왼손은 먹잇감을 노리는 사냥꾼 같이, 그저 침착하고 냉정히 로봇을 기다렸다. 그리고 장전된 총을 발사하듯, 제이를 향해 로봇은 오른 주먹을 당기고 내질렀다. 그 순간이었다. 약간의 암전, 로봇의 시야는 제이가 아닌 하늘을 향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로봇은 급격한 상황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멍하니 하늘의 구름을 보기에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로봇은 자신의 등이 이미 땅바닥에 닿게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가볍게 흩날리는 흙먼지 사이의 그런 로봇을 오르베도와 제이가 내려다보았다.
“어이, 손님. 고장 난 건 아니지? 수리비는 못 내준다고-”
“꽤 거창한 소리가 났던 거 같은데, 안에 별 문제없으려나?”
“신경 안 써도 돼. 손님은 그런 걸로 튼튼하대. 아마도 말이야.”
“...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제이가 당신을 땅을 엎어뜨렸죠. 그리고 거… 아니, 경쾌한 소리.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괜찮으신가요? 머리가 어지럽거나, 시야가 흔들리거나 그런 거 없으신가요?”
로봇은 조심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두 사람이 자신의 뒤에 있고, 조금 전까지 제이의 뒤로 보이던 배경이 자신의 앞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로봇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일반인의 수준이 아닌 로봇의 몸을 가지고 일반인에게 패배했다는 것을, 그것도 한쪽 손을 쓰지 않는다는 페널티를 가지고 있는 상대에게 말이다.
“제가… 진 거군요.”
“지기는 무슨, 진짜 지는 건 팔다리 중에 한 군데가 부러졌을 때지. 보다시피 손님 사지는 멀쩡하잖아? 비긴 걸로 하자. 나도 순간 쫄았으니깐 말이야.”
“뭐, 검증은 이걸로 충분한 거 같군요. 상황이 진정이 되면, 간단하게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일단은…”
“저,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저 한 번 밖에 주먹을 내지르지 못했습니다만…”
“... 아뇨. 그 한 번으로 충분합니다. 알고 싶은 건 충분하게 알았으니까요.”
“... 가르쳐주시겠나요. 지금 당장 듣고 싶습니다.”
“일단은 진정을 하는 게…”
“말해줘, 형. 알고 싶다잖아.”
“... 좋습니다.”
오르베도는 로봇에게 말했다. 로봇이 대련 중에 딱 한 번 내지른 주먹을 보고 말이다. 더도 덜도 아니었다. 그가 바란 것은 그것 하나였다. 자신이 전 날 맞은 것이 아닌, 로봇이 진정으로 내지르는 주먹을 말이다. 오르베도는 조금을 걸어 로봇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와 로봇은 서로를 마주 봤다.
“일단은 이름을 알아야겠군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카일… 입니다.”
“카일 씨. 혹시, 상대에게 힘을 행사하는 걸 두려워하고 있군요. 방금의 그 한 번이 그 모든 것을 보여줬습니다.”
“보는 것 만으로 말씀이신가요…?”
“그것만이라고 하면 거짓말이죠. 무엇보다 전, 당신에게 맞아본 산 증인이니까요. 조금 전의 상황에서 당신은 아주 잠시지만, 진심을 냈습니다. 그 주먹을 올곧았고, 당신의 마음은 모든 것을 쏟아부을 다짐을 했습니다. 그렇죠?”
“...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확실하게 맞추셨습니다. 저의 이 몸에서 나오는 힘은 제 것이 아닙니다. 이 상태로 생활하는 것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감각은 적응하기 힘들더군요. 사람을 상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데, 사람을 상대로 휘둘러야 하는 경우는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 사정이 있다면, 지금부터 천천히 듣겠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너무나도 여리군요. 어쩌면, 그 힘 그 자체가 당신의 짐이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유가 있어서 계속 나아가야 한다면,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힘은,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위해 쓰느냐가 중요한 법. 카일 씨라면, 그 힘이 이상한 곳을 향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것도, 방금의 모습을 보고 예상하시는 건가요…?”
“... 아뇨, 그냥 감입니다.”
“하하… 이 곳에서 만난 사람들도, 모두 신기한 분들 이군요.”
“우리 입장에선 손님이 제일 신기한 거 알지?”
“둘이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휴식은 여기까지. 바로 수업으로 들어가죠, 기초부터 시작하는 걸로. 제이, 오늘은 너도 포함이다.”
“어어!? 내가 왜? 그냥 대련 상대로 데려온 거 아니었어? 나 돌아갈래!!”
“말했지만, 네 썩어빠진 정신상태를 고치러 온 거다. 후배가 생겼으니, 선배로서 모범을 보이도록.”
도망가려는 제이를 오르베도가 또다시 뒷목을 잡았다. 제이의 발버둥으로 난장판이 일어났다. 그런 두 사람을 로봇이 바라봤다. 조용히 앉아서 말이다. 조용히 불어오는 또 한 번의 바람이 푸르게 빛나는 잡초와 꽃을 흔들었다.